살인자와 교도관의 '사형수 구하기'
[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 <13계단> 책표지
ⓒ2006 황금가지
사형수 이름 사카키바라 료. 언제 저승사자가 올지 몰라 숨을 죽인다. 두 명을 살해한 죄로 붙잡힌 그에게 죽음은 일말의 재고도 없어 보인다. 사형, 그것이 그의 인생에 기정사실처럼 정해졌다. 그는 죽기 싫어서 다시 한번 재판을 해보려 한다. 더욱이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사건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기억 상실'에 걸린 그로서는 자신의 죄가 원죄(억울한 죄)라고 생각하기에 어떻게든지 사형을 취소하게 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확고부동하다. 차라리 잘못했다고 빌면 무기징역이라도 될지 모르겠지만 료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니 괘씸죄가 적용되는 비운이 생긴 것이다. 사형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아침을 눈을 뜨고 초조한 하루를 보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뿐이다. 그러다 문득, 사형수는 장면을 기억해낸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계단에 오르던 자신의 모습을.

료와 달리 미카미 준이치는 가석방이 되어 사회로 나간다. 상해 치사 전과자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몇 달 전에 사회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가석방이 된 준이치는 설레는 기분으로 사회 공기를 들이마시지만 그 기쁨도 잠시다. 고의는 아닐지라도 자신과의 싸움 때문에 죽은 피해자에게 물어줘야 하는 엄청난 금액에 가족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과자로 낙인찍힌 자신을 사회에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것을 오래지 않아 깨닫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준이치. 그때 교도관이었던 난고가 나타난다.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자신의 일을 도와보라는 것이었다. 일이라는 것은 바로 료의 무죄를 증명하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료가 기억해낸 장면의 계단을 찾아야 했다. 준이치는 사정을 듣고 의아해 한다. 많은 이들을 놔두고 이제 갓 가석방한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난고는 갱생 차원이라고 한다. 더욱이 성공 보수도 든든하니 좋은 일 해보는 셈치고 하자고 말하고 돈 욕심 때문에라도 준이치는 거절하지 않는다.

사형수의 무죄를 증명한다는 <13계단>의 겉모습은 세계 3대 소설 중 하나로 뽑히는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빼닮았다. 우연한 계기로 주인공들이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형수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사건에 투입된다는 것이나 그것과 별도로 작품 중간 중간 사형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다가가는 죽음의 시계를 묘사해 독자들을 초조하게 한다는 것이 그렇다. 때문에 겉모습은 새롭지 않다. 친숙하다고 할 정도로 외모가 낯익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하는 건 실례다. <13계단>의 겉모습은 익숙해 보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면 낯선 장면들이 이어진다. 먼저 사건에 참여한 주인공의 신분이 그렇다. 살인자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 가석방 죄수와 범죄자들을 갱생시켜야 하는 의무와 함께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교도관이 등장한 건 심상치 않다.

추리소설에서 추리하는 이들이 신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일임을 상기해본다면 살인자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이 <13계단>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제껏 추리소설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아무리 포장을 바꾼다 한들 결국에는 악한 범인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자 진리였다. 때문에 살인자가 사형을 받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졌고 그것이 해피엔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형수와 교도관이 주인공으로 나선 <13계단>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곁들어 그 같은 생각을 비틀어버린다. 해피엔드로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숙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깊숙한 것 중 하나를 꺼내보자. 준이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징역이 2년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쁜 놈'이라고 말할 그런 살인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사회에 나오면 딱지 하나로 죄인이 된다. 사회는 갱생을 운운하지만 동시에 대놓고 죄인 취급을 한다. 이럴 때 준이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이 다시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이분의 일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을 그들만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13계단>은 추상적인 '사형 찬반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범죄자를 양산해내는 것이 사회라고도 탓하지 않는다. <13계단>은 중립이다. 그렇기에 기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법 진행 과정 등 현실적인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울하게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나는 이들이 없도록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13계단>, 계속되는 반전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추리소설로서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반가운 것은 이 작품이 가슴을 넘어 머리까지 뜨겁게 만든다는 것이다. "너나 나나 종신형이다. 가석방 따윈 없어"라는 말로 추리소설의 핵심들을 비틀어버린 <13계단>, 법에 대한 생각까지 비틀어버리는, 정말 심상치 않은 추리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의 느낌을 존중하세요?
[오마이뉴스 이인미 기자]
 
▲ <다정한 손길> 책표지
ⓒ2006 내인생의책
아이들은 명백히 다정하지 않은 손길에 대해서는 잘 거부한다. 때리기, 쥐어박기, 물어뜯기, 밀치기, 찌르기, 걷어차기, 꼬집기 등의 행위를 당하면 울거나 짜증내거나 똑같은 행위로 보복(!)을 하기도 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즐기는 아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부드럽게 아이 몸을 쓰다듬고 간질이다가 불쑥 아이의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면 그 아이는 즉시 "안돼요!"라고 거부할 수 있을까? 동네 아저씨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아이 손을 잡아끌어 아저씨의 성기를 만져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금방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정한 손길>은 어린이 성폭력을 다룬 동화책이다. 책표지에는 '엄마가 소리 내어 함께 읽는 어린이 성폭력 예방을 돕는 이야기'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심각하고 재미없는 동화책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 매 장마다 펼쳐지는 조디 버그스마의 부드럽고 앙증맞은 그림은 성폭력이라는 심각한 주제에 불편함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정한 손길>의 원제목은 'The Right Touch'다. 이 책은 '세심하게 교육한다면' 어린이들이 올바른 접촉과 올바르지 않은 접촉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책에 등장하는 지미의 엄마는 지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많은 아이들이 안전하지 않을 때는 조심하라는 위험신호를 느낀단다. 위험신호가 올 때는 불안하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해. …(중략)…. 간지럽고 따끔따끔한 느낌일 수도 있고."(23쪽)

다시 말해 자기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얘기다. 상대방이 아무리 어른이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더라도 자기의 느낌이 그 순간 '이건 아니다'라면 저 어른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미의 엄마가 설명해주는 위험신호는 저 멀리 신호등에 불이 켜지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딴 어른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위험신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느낌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느낌을 잘 모르면 위험신호를 못 알아볼 수도 있게 된다. 그러자 지미는 말한다.

"난 뽀뽀도, 안아주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싫어요! 안돼요!'하고 말하면 날 만지지 마세요."(32쪽)

사랑하는 마음으로 뽀뽀하고 안아주는 것, 성적 쾌락의 도구로 뽀뽀하거나 안아주려 하는 것을 아이가 구분 못하면 어떡하냐고? 설령 그랬더라도 그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지미의 엄마는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도 엄마에게 꼭 말해야 해. 아무리 비밀이라고 했어도 엄마에게 말하렴. 그건 절대 지미 네 잘못이 아니란다"라고 당부한다.

어린 소녀가 잘못하여 임신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자기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면서도 절대로 자기 엄마한테는 얘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를 가끔 보곤 한다. 엄마가 자기를 창피해할 것 같다면서…. 또, 자기를 야단칠 것 같다면서….

그래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접촉(다정한 손길)과 올바르지 않은 접촉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기 전에 먼저 엄마들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아이의 말을 믿으세요? 아이의 느낌을 존중하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강머리 앤에 도전하는 `외톨이 탈출법`


캐나다의 아동문학가 루시 M.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1942)의 소설 <빨강머리 앤>은 1908년 쓰여졌지만 현재도 만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돼 작품의 명성을 잇고 있다. `긍정의 힘`을 믿는 대표적 캐릭터 앤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데 명수다.

“비쩍 마른 말라깽이에 참 얼굴도 못생겼네. 게다가 주근깨까지. 머리는 빨간게 꼭 홍당무 같군요. 이런 애는 처음이에요”라고 면전에서 흉을 보는 뚱뚱보 아주머니에게 사랑을 얻어내는 연기를 펼치는가 하면, 누구나 오가는 평범한 길을 ‘기쁨의 하얀길’이라고 이름 지어 행복을 마음껏 누린다.

고아인 자신이 초록색 지붕집에 살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 감사함을 느끼는 앤은 슬픈 일을 겪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도 상상의 힘만으로 이겨낸다. 앤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는 친구는 다이아나.

“해와 달이 있는 한 내 마음의 친구 다이아나 베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두 아이가 친구가 되는 장면, 손을 맞잡고 이처럼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는 꽃밭 장면 등은 빨강머리 앤 팬들에게 명장면으로 꼽힌다. 오갈 데 없는 고아인 자신과 아무 편견 없이 친구가 돼 준 다이아나를 생각하면 앤은 늘 행복해진다.

<외톨이여 안녕>(동산사. 2006)의 주인공 14살 소녀 데비는 빨강머리 앤처럼 영원한 친구 패티를 얻는 행운아다. 3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모린을 다른 친구에게 뺏기고 외톨이가 된 데비에게 다가온 패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다이아나처럼 ‘영원한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가 자신을 떠났다면 14세의 소녀가 겪어야 할 상처는 매우 크다. 다이아나처럼 소중한 친구 패티는 그런 상처를 치유해 준다.

<외톨이여 안녕>은 10대의 성장통에 자연스레 말을 걸고 어깨를 빌려 주는 배려 깊은 책이다.

보통의 아동도서처럼 화려한 컬러를 사용하지 않고 흑백삽화를 쓴 것은 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친구와 우정에 대해 생각할 공간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침착하게 쫓는 책의 시선은 읽는 이에게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방황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만든다.

주인공 데비의 주변 어른들은 흔한 충고로 나서지 않는다.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아이가 해결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끔 만든다. 책은 질책과 추궁으로 내몰 때 10대 아이들의 여린 감성은 쉽게 다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책의 진심이 봄날 떨어졌다 사라지는 햇살만큼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묻지 마세요!"
[오마이뉴스 김현자 기자]
 
▲ 에로스와 타나토스
ⓒ2006 살림
죽음의 공포와 에로스를 멍에처럼 짊어진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 뭉크는 현대인의 불안과 갈등, 애정, 공포 등의 감정을 왜곡된 선과 격렬한 색깔로 표현한 새로운 미술운동, 즉 표현주의의 선구자다. 뭉크의 이런 작품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전시회 도중 퇴장당하는 일도 있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책장을 펼치면 자연스레 주인공 뭉크를 만나게 된다. 책 속에서 만나는 뭉크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불안하고 황홀해야 할 사랑 언저리에 어두운 그 무엇이 불안하게 도사리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죽음과 입 맞추고(죽음과 소녀), 한 여자는 영영 빠져나오지 못 할 만큼 죽음에 스며들고 있다(입맞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다. 무엇이 뭉크로 하여금 사랑과 죽음을 혼동하게 하는 걸까?

뭉크는 81세라는 짧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사랑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5세 때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고, 병약한 자신을 보살피던 2살 아래 누이마저 같은 병으로 잃었다. 누이는 소녀의 나이인 15세 때 세상을 떠났다. 뭉크에게 삶은 곧 죽음 그 자체였다. '죽음과 소녀' '입맞춤'이란 그림에는 '삶=죽음'이란 그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안정된 연애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 뭉크의 첫 사랑은 강한 자유연애주의자였다. 연상의 유부녀 하이베르크는 풋사랑 뭉크를 철저히 농락하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첫사랑에 실패한 뭉크는 실신하였다가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생명을 짓이기는 메두사'라고 여자를 정의하고야 만다.

이런 뭉크에게 다시 찾아든 사랑, '다그니 유을'은 유년 시절의 친구였다. 뭉크는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들뜨고 설레었다. 그러나 사랑을 고백하려는 즈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두 번째 여인마저 빼앗기고 만다.

다그니 유을을 표현한 '마돈나'는 뭉크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데, 사악한 메두사로 표현된 사랑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인다. 쳐다보지 말아야 할 수많은 뱀이 달린 메두사의 머리였다. 실연의 좌절은 계속됐다. 이후 관능적이고 매력 있는 한 여인이 사랑을 고백하지만 뭉크에게 이제 사랑은 쳐다보는 순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팜므파탈', 메두사에 불과했다.

뭉크에게 삶과 죽음은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전혀 없는, 같은 존재다. 죽는 날까지 사랑과 죽음의 멍에로 불운하였던 그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진정한 탄생, 즉 '죽음'이라는 존재가 나를 기다린다"고 고백했다. 비단 뭉크뿐이랴. 책 속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사랑은 죽음과 애증으로 치명적이며 끈끈하다.

사랑의 유형 '남녀간 사랑' '자기애' '팜므파탈' '동성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Thanatos)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공존하는 에로토스는 어떤 모습일까? 사랑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저자는 죽음을 각오한 사랑, 즉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사랑을 4가지로 제시하는데, '남녀간의 사랑'과 '자기애', '팜므파탈'과 '동성애'다. 뭉크의 이야기는 세 번째 주제 '팜므파탈' 편에 등장한다.

솔깃했던 주제는 마지막 장인 '동성애'였다. 저자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조('이단아'로 불렸던 초기 바로크 화가) 등 몇몇 유명한 화가들의 동성애를 들려주는데 유명한 화가들 이야기라 더 눈길이 갔다. 요즘 동성애에 대한 관심과 함께 관련 영화가 심심찮게 제작되고, 매스미디어 등에서 제법 활발하게 이야기되지만, 편견은 여전한 듯 보인다.

모든 주제가 비극적인 느낌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유형인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의 영원'과 '사랑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연애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늘 관여하고 있지만 '사랑과 죽음'이란 주제는 어려웠다. 특히 그림을 보는데 불쑥 등장하는 시(詩)편은, 가슴에 느닷없이 날아드는 사랑의 무법자처럼 대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지 않고 읽었다. 우리들이 일생 동안 본능처럼 지녀야 할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사랑의 유통기한이 짧게는 3개월, 길어 보았자 1년 6개월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랑이 흔하고 쉽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나,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묻지 마세요!"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한 책 속 주인공들이라면 이 말에 적극 동조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59)의 장편소설 '애완동물 공동묘지'(황금가지·전2권)가 번역돼 출간됐다.

작품의 무대는 옛 인디언들의 마을터가 있는 한적한 도로변. 가난한 의사 루이스는 아내와 아들, 딸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날 딸의 고양이가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벌어지고 이어서 루이스의 아들 게이지마저 트럭에 치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루이스의 행복은 붕괴하기 직전 상황이다.

루이스는 예전에 인디언 묘지에 묻어놓았던 죽은 고양이가 이내 되살아난 점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일념으로 이웃 노인 저드의 경고도 무시한 채 아들을 인디언 묘지에 파묻는다.

그러나 되살아난 아들 게이지는 예전의 아들이 아니라 무서운 살인마였다. 그는 끝내 저드 노인과 자기 엄마까지도 잔인하게 살해하고 만다.

루이스는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다시 죽이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또다시 죽은 아내를 살려내면 행복했던 가정이 돌아오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스티븐은 소설을 통해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임에도 비이성적 수단에 호소해서라도 가족의 행복을 지키려는, '가족애'의 이면에 숨은 두려움을 짚어내고 있다.

'샤이닝', '미저리', '캐리'와 더불어 스티븐 킹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83년 발표 당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이다. '황금가지'가 내고 있는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 33-34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