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고 찰스 램의 <굴뚝 청소부 예찬>을 읽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둘은 닮아 있었다. 마루야마 겐지야 같은 직장에서 폐를 많이 끼쳤던 여직원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고 소설을 쓰는 일에 전력을 투구하였고 찰스 램은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33년간 근속하며 틈틈이 에세이를 쓰며 정신병이 있는 누이를 부양한 독신남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삶에 대한 자세 등이 개별적인 경험에 의하여 굴절되긴 했지만 이 동서양의 조금은 괴팍한 남자들은 만나면 대뜸 너무 공통점이 많아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울 것 같다. 흥미로웠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달에 울다>를 접해 봤다. 문장 하나 하나가 어찌나 농밀하고 치열한지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사 계절을 담은 병풍의 그림과 '나'의 삶의 격랑이 서로 주고 받는 것들이 하나의 그림, 소리를 이루어 흘러 넘쳤다. 소설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 작품을 토해 낸 작가의 결의와 삶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소망, 관계에 대한 욕망을 희생한 것이었다. 모름지기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도모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문단에 대한 거침없는 비난과 비아냥거림,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 등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이 책의 미덕은 다름 아닌 이 소설가의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투철한 소명 의식때문일 것이다. 그가 쓰는 한 우리는 아무렇게나 이러나 저러나 한 글을 주워섬기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슬픈 고백.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산기슭에 살면서 개나 기르고, 소설 따위나 쓰고,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있다니, 이렇게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중
그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상과 스스로를 절연시킨다. 일본의 북알프스 산맥 한 자락의 조그만 마을에서 개를 기르며 아내와 산다. 문학상 수상도 문학상 심사위원직도 거부한다. 세상에 대하여 쓴다는 것이 세상과 이별하여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삶의 자잘한 고충들 대신 굵직 굵직한 서사와 깊은 사색, 치밀한 묘사, 함축적인 문장 등으로 잊혀진다. 저런 이야기가 있으면 이러한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나이들어 객사할 각오까지 하고 그 어떤 다른 생계를 도모하는 일도 저어한 채 오로지 쓰는 일. 미루야마 겐지 스스로의 삶은 슬프다. 그럼에도 그는 또 온에너지를 쏟아 쓰고 산을 오르내리고 또 다음 작품을 쓸 수 있는 기간 동안 먹고 마시며 버틸 돈을 계산한다. 그의 삶이 작가의 전범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쓰고 세상에 말하는 일들에 대하여 너무나 쉽고 편해져 버린 세태는 그가 쓰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비단 쓰는 일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일에도 우리는 어떤 치열함을 잊어버리고 덤비게 되는 것 같다.
찰스 램의 에세이 <퇴직자>는 1825년의 풍경을 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만든다. 그 누구도 이 에세이를 읽고 웃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울 수도 있다. 찰스 램이 거의 40년간 근속했다 퇴직하는 날, 그의 소회는 바스티유 감옥의 수인이 갑자기 석방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스스로 스스로를 떠맡을 힘이 없다. 오십이 되어도 밤새도록 잠 속에서 근무하며 회계 업무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꿈에 아연 놀라 깨어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직장의 노역은 영혼까지 스며들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갑자기 광대하게 주어진 시간에 그는 아찔하다. 그렇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거짓말하지는 않는다. 금요일 저녁의 해방감은 이제 만성화되어 강도가 약해지겠지만 노역에 대한 부담 및 시간에 대한 제약에서 풀려나온 해방감은 잔잔하게 언제까지나 그를 감쌀 것이다. 오죽하면 그에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씽투두'로 짓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얘기할까. ㅋㅋ 글을 쓰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찰스 램의 글에는 수많은 자잘한 세상사와 일상사들이 때로는 따뜻한 시선 아래, 비틀린 시선 아래 나열되고 묘사되고 해석된다. 이 지점은 마루야마 겐지와 조금 다른 부분이다. 독신자들을 대하는 기혼녀들의 배려 없는 행동에 분노하는 글은 문단의 허위에 치를 떠는 마루야마 겐지의 끓어오르는 화와 만난다. 마루야마 겐지처럼 글을 쓰는 일에 자신의 삶 전체를 저당잡히지도 않고 사람들과의 교제에서도 멀어지지 않고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감싸안고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조금 더 친밀하다. 그래서 이런 대목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녹색의 대지와, 도시와 시골의 풍경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농촌의 호젓함과, 길거리에서 느끼는 달콤한 안온함 따위를 사랑한다. 나는 바로 이 지상에 거처를 짓고 싶다. 나는 내가 도달한 이 나이에 가만히 멈춰 있고 싶다. 나와 내 친구들이 더 젊어지거나 더 부유해지거나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찰스 램 <섣달 그믐날 저녁> 중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어쨌든 1821년을 살아서 맞이한다며 안심했던 그는 2012년 이제 없다. 2012년 나는 내가 도달한 이 나이에 가만히 멈춰 있고 싶지만 이 나이 후에도 이백 년은 가차 없이 흘러 어딘가에 닿아 있을 것이고 그 때 나는 이 지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았다는 것, 읽었다는 것, 끼적인 것들의 흔적도 가차 없이 스러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사는 일은, 지금 내가 숨쉬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지나가고 막간의 휴식 같은 것들이 삶을 연결하는 한 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몇 갑절은 좋다. 찰스 램을 읽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