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디스 워턴은 미국 상류층 가문 출신의 여류작가다.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위노나 라이더의 한창 때의 아름다운 눈망울을 볼 수 있는 영화 <순수의 시대>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의 성에 갇혀 있던 그녀는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이혼을 통하여 일탈을 감행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난민 보호와 자선사업에 투신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그녀의 일탈이 단순히 가진 자의 개인적 치기로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 같은 작품들은 그녀가 몸담았던 상류층 사교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니 만큼 그 작품이 가지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더라도 그녀니까 그녀만이 쓸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물론 이 두 소설은 너무나 아름답고 단연코 지루하지 않지만 제인 오스틴이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바깥을 나가려는 시도도 나갈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그 어떤 경계의 철책을 뛰어넘지 않는 용의주도함이 느껴져 아쉽기도 하다.

 

 

 

 

 

 

 

 

 

 

 

 

 

 

 

 

 

물론 <순수의 시대>도 <기쁨의 집>도 예쁘기만 한 작품들은 아니다. <기쁨의 집>에서의 여주인공의 슬픈 최후는 우리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물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 허구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실제 이디스 워턴은 이러한 세계를 "사람들과 이상을 천박하게 만드는 경박한 사회"로 명명한다. 누렸으니 불평할 수 있다,는 생래적 한계로 그녀의 시선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어떤 정당성을 부여받은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다층적인 내면을 포박하는 예리한 시선, 레이스 결 같은 묘사들, 마치 살아 움직이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은 등장 인물들의 힘일까?

 

 

 

 

 

 

 

 

 

 

 

 

 

 

 

 

이디스 워턴에게는 이러한 작품들도 있었다. 대조되는 계절로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은 이 소설들의 주제는 다 같이 '좌절된 사랑'이다. 꿈꾸는 사랑 앞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의 벽을 이렇게도 사실적으로 비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신분의 차, 사회의 편견, 인습, 전통 앞에서 <여름>의 소녀 채리티도 <겨울>속 초로의 사내 이선 프롬도 우리 앞에 마치 삶의 은유처럼 고독하게 서 있다.

 

광기가 자신을 어떠한 행동으로 이끌었는지를 갑자기 깨닫자 그 광기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가운데 남아 있을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 이디스 워턴 <겨울> 중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가 사랑 앞에서 버리고 놓고 떠날 수 없었던 것들보다 더 눅진하고 끈기 있는 것들이 가난한 농부 이선 프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을 바라보며 그가 돌아선 곳에는 그럼에도 사랑을 떠나 보낼 용기마저 없었다. 그는 자살을 감행하고 실패한 자살은 더 곤궁하고 비참한  앞으로 그를 돌려 놓는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우리는 이선 프롬의 슬프고 비참한 삶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여름>의 산에서 내려온 소녀 채리티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약혼녀가 있는 부잣집 도련님과 사랑과 빠진다. 그녀를 산에서 데려온 후견인이자 보호자인 로열 변호사를 끔찍히도 증오하며 그녀가 벌인 사랑의 행각들의 종점은 힘빠지기도 하고 괴이쩍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 체념이 쉬울까. 현실의 삶으로 그렇게도 잘들 돌아오는 걸까. 이디스 워턴은 삶이 죽음 다음으로 슬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별을 보고 그 별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슬픈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예정된 수순처럼 작용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가 어리고 가난했던 태오를 선택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디스 워턴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가 포기하고 현실에 양보했던 것들의 은유들로 반짝인다. 그것은 언제나 힘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가장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고 잊었던 것들을 찰나라도 추억할 수 있는 순간들을 선물받는 일이기도 하다. 이디스 워턴은 곱게 늙은 충분히 제대로 늙은 고고한 할머니처럼 우리를 무릎에 앉혀 놓는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 너무 아파 차마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 하지만 달달한 향내를 품은 그 사연들은 손주들에게 안겨 주는 사탕 같은 것들. 언젠가는 충치 때문에 반드시 끊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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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때문일까요??? 내용도 밝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뭔가 배신감이 드네요, ㅎㅎㅎㅎ
하지만 소개하신 이디스의 약력(?)을 보자니 그녀의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블랑카님은 여전히 고전(?)탐독 중이신가 봐요???^^
암튼, 제 서재에 달아주신 댓글도 마음을 따듯하게 해줬어요. 고마워요.
분홍 공주님은 잘 지내지요???^^

blanca 2012-08-19 07:58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렇게 어두운 결말일 지는 모르고 시작했어요. 이 작가를 좋아해서 자서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있어 아쉬워요. 나비님 같은 실력이면 원서로 도전해 볼 터인데 자서전은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여져요. 분홍 공주는 요새 말대꾸 연습 중이랍니다.ㅋㅋ

라로 2012-08-19 22:48   좋아요 0 | URL
자서전도 있군요!! 저도 실력이 별로라~~~~^^;;
그나저나 저희 해든이 말대꾸를 넘어 이제는 소리를 막 지르면서 호령하는 단계,,ㅠㅠ

댈러웨이 2012-08-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마 다음 달 정도엔 제가 <순수의 시대>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상 탱투나, 댓글은 못 달았지만, 이디스 워튼=blanca님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래 김연수 작가 코끼리 그림이 보이는군요. 교보 광화문도 눈에 확 들어오구요. 교보는 제게는 정든 곳이에요.

블랑카님께 저는 좀 많이 고맙습니다. 자주 올께요. ^^

blanca 2012-08-20 23:05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순수의 시대>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너무 예쁜 원서들이 많이 나와 있어 저는 이미 번역본으로 읽어버린 게 좀 아쉽더라고요.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어도 작가가 쓴 글을 날것으로 접하는 감동은 못 따라갈 것 같아요. 들러 주셔서 고마워요.

Jeanne_Hebuterne 2012-08-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만난지 백 년은 된 것 같군. 또 다시 만나려면 또다른 백 년이 지나야 할지도 모르지.
남자가 그렇게 말했어요. 선행하여(앞서간다는 말 대신 선행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살아가는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

blanca 2012-08-20 23:07   좋아요 0 | URL
음, 이 댓글은 조금 어려워요. ^^;; 음. 어떤 느낌일까요? 어떤 거리감의 표현일까요? 어긋남의 얘기일까요?

Jeanne_Hebuterne 2012-08-22 19:1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너무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말했군요! 습기에 글쓰기 능력도 변질되었나 봅니다.

순수의 시대 원작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엘렌 카민스키였던가요?) 했던 말이었어요. 마차 안에서 겨우 만나서. 실제로 써먹지는 못할지언정 전 종종 이런 말들을 잘 기억하곤 해요.

마틴 스콜시지의 영화를 보고서는 친구들끼리 메이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다'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다'라고 열심히 각자의 의견을 토로했던(주로 그러니까 뒷담화죠) 기억이 납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중절모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도요.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전 이 영화의 영화음악까지도 기억해요. 후훗

blanca 2012-08-23 13:09   좋아요 0 | URL
아,<순수의 시대> 다시 찾아 볼게요!

아이리시스 2012-08-2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해피엔딩처럼 생겼는데 이디스 워튼이 그런 게 아니군요. 이선 프롬이 농부라니, 장바구니에서 확 빼고 (일단 농부는 나중에..) [여름], [겨울] 저건 꼭 세트로 읽는 게 좋을지 궁금해요, 블랑카님. <달콤한 나의 도시> 저도 많이 좋아했었어요^^

blanca 2012-08-23 13:12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여름>, <겨울> 세트로 안 읽으셔도 돼요. 예전의 에쿠니 가오리라, 츠치 히토나리의 <좌안>, <우안> 같이 시점이 교차하는 작품도 아니고 <겨울>은 사실 제목이 이선 프롬인데 겨울로 번역되어 나온 거더라고요.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겨울>이 더 좋았어요. 저는 <달콤한 나의 도시> 드라마에 흠뻑 빠져서 정말 열심히 봤어요. 드라마도 책도 너무 좋았어요. 딱 그 시절, 그런 친구들과만 경험할 수 있는...

2012-08-21 2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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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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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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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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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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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7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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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2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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