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동기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 날을 위하여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까만 나비 날개 같은 원피스를 구입하여 입고 평소 같으면 질끈 동여맬 머리를 풀고 귀찮아서 안 하던 귀걸이, 목걸이를 다 동원하였다.

 

우리는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때로 스물세 살 정도였다. 어떤 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 세상이 한없이 친절해 보이고 어떤 날은 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세상처럼 냉혹한 게 없어 보였다. 어떤 날은 세상 모든 이치를 알 것 같았고, 또 어떤 날은 세상에서 아는 게,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학하였다. 시간이 한정없이 있으면 돈이 없었다. 동기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도 같았고 때로 무심코 들은 한 마디에 큰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여 끙끙 앓기도 했다. 그게 바로 청춘이었을까?

 

해 질 녘, 초록색의 황혼 녘, 바닷가에 서면, 눈을 감아야 참으로 보이는 나의 별. 잘 익은 과일. 하루에 한 번 익은 지구가 비로소 내 가슴에 깊이깊이 들어앉는다. 내가 그 별 속에 살고, 그 별이 나의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전을 시작한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 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김화영 <행복의 충격> 중

 

 

 

이젠 중년들의 티가 완연히 났다. 사내 아이들은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이미 초등학생 학부형이 된 녀석은 아이 둘을 쫓아다니느라 대화의 맥이 자꾸 끊겼다. 여기 저기에서 익숙하지만 십여 년을 만나지 않고 나니 대학 시절처럼 무람없이 대할 수 없는 얼굴들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백팩을 매고 마구 그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 깡통매점에서 청량음료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퍼더 앉아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들었던 얘기를 또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어제 같았다고밖에 그런 진부한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는 느낌을 가지고 내 앞에 포박해 들어온 그 아이들의 시간의 무게에 아연해졌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를 둘러싼 녀석들을 보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 시간을 뒤로 밀어내며 왔던 것이다. 내 가슴 속의 별. 그 별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찬연하게 때로는 서럽게 빛나고 있다. 아무리 비하하고 아무리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것만큼 찬란한 별은 없을 것이다. 젊음. 청춘. 지금의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나이는 또 그 만큼의 어리석음과 치기를 들쳐업고 나타날 것이다. 청춘은 그런 것같다.

 

해질 녘이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항상 우주가 보인다는 저자 김화영의 얘기는 그 젊음을 고스란히 집과 학교에 누려야 했던 좁은 공간 출신의 나로서는 더없이 샘이 나게 한다. 사실 나는 문학평론가서로도 유명한 번역가로서도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알게 된 그는 청춘을 우주가 보이는 지중해에서 보내고 그것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조하며 복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세계.

 

그 꿈은 어느 여름 오후를 보낸 쿠르 미라보의 까페, 그늘지고 조용한 구시가의 작은 골목으로의 산책,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서점에서 만난 초록빛 눈의 처녀, 부활절 무렵부터 늦봄까지 피는 코클리코 붉은 야생화, 자동차로 십오 분이면 항상 눈앞에 출렁거리는 지중해, 근교의 푸른 하늘을 물들일 듯한 보랏빛 라벤더의 광활한 고랑들, 언덕배기의 자욱한 텡(타임)의 그윽한 냄새, 토르네 성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양옆의 숲 속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하얀 별장들, 작열하는 태양에 빛이 바랜 붉은 기와, 시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학생들이 이 소도시를 가득히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설렘, (중략)

- 김화영 <행복의 충격> p.37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흔쾌히 그렇다,고 얘기하는 대신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더 행복해하며 그 자체로 충만해하며 젊음을 누리고 싶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가지고 덧붙일 것같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니까. 너무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나를 너무 아프게 했던 일들. 그 자체로 웃어도 되었던 일들을 왠지 망설이며 유보했던 일들. 청춘은 덜 익은 차가운 과일 같다. 싱그럽지만 처음 베어 먹을 때의 그 아릿한 차가움은 피할 수 없다.

 

누군가를 붙자고 이야기해도 그 자체로 용인되던 그 날들 같지는 않았다. 주고받는 안부 인사. 자꾸 끊기는 화제들. 우리는 그렇게 삶의 가장 바쁘고 과업이 많은 시기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충분히 나이들고 나면 그 때는 우리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들 얘기했다. 지금은 아직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모든 것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언제든 느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오관과 살을 가지는 그 순간에 모든 목적은 달성되었다. 날들은 과일과 같다. 우리들의 역할은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 김화영 <행복의 충격> p,80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딘가를 지향하며 직선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나이 드는 일도 또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도 두렵고 때로 이제는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과업들 앞에서 망연해지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게 죽음이라는 게 나이든다는 게 그 자체로 가치롭고 의미를 품고 있다는 가르침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죽을 때까지 가장 찬란하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슬펐던 시간들은 제가끔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 각기 다른 버전으로 다른 가르침으로.

 

공강 시간 결혼식의 신부와 나는 벤치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고민을 껴안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점심 때에 과연 명동까지 가서 틈새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시간과 거리를 가늠해 본다. 가능할 것도 같다. 우리 둘은 일어나서 명동까지 가기로 한다. 젊으니까 젊었으니까 가능한 일들. 그 빨갛고 강렬한 맛을 적절하게 중화시켜 줄 밥알이 탱탱한 김밥은 필수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꼭 껴안았다. 구태여 말하여지지 않아도 신부와 나는 눈을 맞추며 순간 눈물을 재빠르게 숨긴다. 이제 행복해할 일만 남기기로. 우리들의 역할은 잘 반죽된 빵 같은 지구에서 과일 같은 하루 하루를 맛있게 음미하며 먹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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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8-3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blanca님!
나도 '잘 반죽된 빵 같은 지구에서 과일 같은 하루 하루를 맛있게 음미하며 먹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정신없이 분주한 나날들이라 하루 세끼 챙겨먹기도 어려워요, 더구나 책은 몇날 며칠 손놓기 일쑤고요.ㅠ

blanca 2012-08-30 13:0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요즘은 바쁜 것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선가 나를 찾아주고 내가 필요한 일들이 많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세 끼는 꼭 챙겨 드세요. 저는 며칠 점심을 건너뛰곤 했었는데 몸이 지치더라고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프레이야 2012-08-3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잘 익은 나날들,이란 제목이 책제목보다 더 좋아요. 요즘 포도알이 달달해요. 태풍에 과일들이 떨어져 안타까워요. 수확만 기다리고 있던 잘 익은 것들이요. 오늘하루도 맛나게 먹어야겠어요!^^

blanca 2012-08-30 13:0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네요. 행복의 충격보다 이게 낫겠어요! 오늘 또 태풍이 올라온다네요. 창문에 붙인 테이프를 뜯자 마자요. 농민들도 어민들도 피해 안 보고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어제 전복 폐사했다고 막 우는 모습 보니 안타깝더라고요. 저도 요새 거봉이 넘 맛나서 하루 걸러 한 송이씩 해치우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2-08-3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봐도 감각적으로 글 잘 쓰는 블랑카님. 이 책 산다면 거의 전부가 님 글 덕분이지요. 나머지 10퍼센트가 김화영 브랜드 값. 크~

blanca 2012-08-31 18:17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 댓글 읽고 배시시 웃음이^^;; 나요. 좋아서요.

굿바이 2012-08-3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글을 읽으며 잠시 저도 이십대의 어느 날로 불려갔어요~! 좋은데요, 이렇게 추억할 것들이 있어서 말이죠.
그나저나 언제 읽어도 글이 참 따뜻하고 좋아요.

blanca 2012-08-31 18:19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도 그러셨다니 반갑네요. 저는 그런데 너무 옛날 생각을 많이 해서 할머니가 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할머니가 되면 또 지금을 추억할 텐데. 지금도 어떻게든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십 대의 그 풋풋하고 강렬한 싱그러운 추억과는 좀 성질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2-08-3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오고, 블랑카님 글 읽으며 난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잘 살아야겠다....남은 날들은 더 열심히~ 이러고 있어요.^^

blanca 2012-08-31 18:21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잘 지내고 계시죠? 이미 그러고 계신 것 같아요. 현준이 학교 생활 적응기 읽고 참 부러웠어요. 저는 배우는 입장인 걸요. 아이 키우는 일에서도 참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반성도 많이 하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