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가까이 잘 쓰던 오렌지빛 주물 프라이팬에 돼지 목살을 구웠더니 흡사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치솟았다. 군데 군데 코팅이 벗겨져 있고 식재료들이 눌어붙기 시작했다. 때가 된 것이다. 고작 2년이라니. 테플론 코팅과 주물의 차이를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거의 같은 내구 기한을 자랑하는 것같다.

 

건강을 위해서나 환경을 위해서나 스텐 프라이팬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비교적 저렴한 것으로 하나 구비해 두었다. 그런데 역시 쉽지 않다. 지긋이 예열해 주어야 하고 어떤 식재료에 따라서는 그냥 아예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바닥에 엉겨붙는다. 내공이 쌓이면 두부부침(스텐 프라이팬으로 하기에 가장 고난도이라고)도 찰박이게 할 수 있다는데 계란 후라이가 한번 붙는 광경을 목도하고나서는 수분이 많은 야채볶음류 등으로 한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후라이팬은 또 쌓인다.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 스텐팬, 그리고 목하 맛가고 있는 중인 주물 프라이팬. 테플론 코팅팬을 처음 사서 요리를 할 때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부드럽고 탱탱하게 그 팬 위에서 미끄러져 의기충천하게 된다. 다 요리한 것을 뒤집개로 스르륵 밀기만 해도 바로 그릇으로 유연하게 낙하한다. 그런데 이 테플론이란 놈은 세월 앞에서 약하다. 점차 무언가를 떠나 보내지 않으려는 듯 발버둥치기 시작하며 새것을 외친다. 그렇다면 이 코팅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프라이팬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안도. 또한 여자들 대부분이 테플론으로 코팅된 프라이팬에 애증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에쿠니 가오리 <부드러운 양상추> 중

 

 

에쿠니 가오리가 생선 초밥집에서 옆에 앉은 두 여자의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면서 크게 공감했던 경험이다.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하게 되면 결국 이 테플론 코팅 프라이팬과 애증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도 없는 게 어떤 분의 어머니는 이 얄팍하고도 수명이 짧은 팬을 10년간이나 생채기 없이 잘 사용하고 계신단다. 잦은 세척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얘기에 좀 더럽게도 사용해 보고 예열도 열심히 해 보고 해도 나의 경우에는 2년 이상은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다. 고기를 굽다 화재감지기 경보가 울릴 지도 모를 사태까지 가고나서는 다시 또 행사장의 주방용품대를 서성이게 된다. 나에게는 스텐팬이 있는데 테플론 코팅 따위는 멀리 날려 버리려고 이 책을 읽고 결심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 책에 따르면 테플론 코팅팬은 약 200도~300도 사이에서 코팅제가 분해되기 시작하고 팬이 360도 이상으로 가열되면 매우 독성이 강한 기체가 방출된다고 한다. (p.133) 심지어 이러한 조리 환경에 애완용 새가 노출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의 미숙한 요리 솜씨, 조급함 등이 정성과 시간을 요구하는 전통 무쇠팬(듣기만 해도 무거울 것 같다)이나 스텐팬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약간의 불편과 시간을 감수한다면 건강에도 해롭지 않고 제조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는 조리기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사실 이 대목을 읽고 스텐팬을 구입했었다. 예열이 관건이라는 말에 일단 중불로 바닥을 데웠다가 껐다 다시 켜서 기름을 또 가열하여 방사상으로 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식재료를 조리해야 들러붙지 않았다. 모든 요리를 다 이것으로 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도 했지만 테플론 코팅팬은 아닌 주물팬을 발견하고서야 적절하게 타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주물이란 놈도 묘한 것이 과연 코팅이 안 되어 있는데 이렇게 식재료들이 부드럽게 굴러다닐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여하튼 지난 주말 나는 다시 핑크빛 주물 프라이팬을 질렀다. 이로써 도합 또 3개의 후라이팬이 차곡 차곡 쌓이게 됐다. 돼지 목살을 불타게 했던 오렌지빛 주물팬은 처분하게 되었고 언제 산 지도 모르겠는 코팅이 반나마 벗겨진 조그만 프라이팬과 바닥이 거뭇거뭇해 예전의 그 찬란했던 광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 스텐 프라이팬 위에 온 몸으로 신참임을 자랑하며 위무도 당당하게 입성한 나의 핑크 주물 프라이팬은 이렇게 오게 되었던 것이다. 불 위에서 하는 요리들은 다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결핍은 이렇게 새로운 사물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시간과 노련한 요리 솜씨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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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2-07-17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모친은 그리하여 잘 들어서 효율이 높다는 칼, 무겁지만 수분 없는 요리를 가능케 하는 프라이팬과 도구들, 빈틈없는 압력을 가하는 솥으로 주방을 가득 메우셨어요. 환경 호르몬 없음과 효율성, 영양소 파괴 없음의 삼위일체에 이어 장만하신 밀폐용기의 최강자 터퍼웨어는 공기를 완전 차단하여 심지어 식재료가 더욱 싱싱해진다는 진공상태 달나라의 기적까지 보여주시더이다. 하긴 냉장고가 세 개(이건 저도 좀 뜨악), 가스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텃밭을 두고 농산물 시장을 이용하며서 최첨단 조리기구를 구비하고 계절마다 제철 식재료를 바지런히 구비하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한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처음 고개를 내미는 풀을 어디선가 구해와서 최첨단 무공해(과연?) 조리기구로 요리하시는 모친님을 보면 저는 늘 쓰레기로 온몸을 그득그득 채우는 듯한 죄책감마저 들어요. 먹는 것은 인내심과 애정, 노련함과 본능의 이중주에요. 데코레이션으로 깨를 뿌려두고는 '당신을 위해 나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인처럼.


덧-마지막 말은 부친의 생일상을 차리던 모친이 하시던 말. 먹는 것과 요리하는 것의 묘한 역설로 들렸어요.물론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을 곁들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blanca 2012-07-18 09:45   좋아요 0 | URL
쥬드님 어머님의 묘사가 참 실감나네요.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떠올려 보니 미소가 지어져요. 냉장고가 세 개나^^;; 그런데 먹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몸을 대우하고 상대를 대접하는 일이기도 해서 단순한 의미로 그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쥬드님 어머니가 아버님에게 생신상을 차려드리는 일, 그 시간, 땀에는 아버님에 대한 사랑도 담겨 있겠지요. 저는 그래서 맛있는 것을 사 주는 사람과 만들어 주는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무장해제되어버리나 봐요. 아, 그런데 막상 제가 부엌의 주인이 되어 버리니 부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아존중감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아 버렸답니다.

Arch 2012-07-1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는 <이기적 식탁>에서 '남자는 무쇠팬과 다를 게 없다'는 구절이 나와요. 스텐이나 무쇠팬은 정말 요리 고수나 쓸 수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쇠팬 길들이기도 만만치 않고. 요리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프라이팬에 대한 애증은 덜하지만 참 다루기 힘든 조리기구인 것 같아요.

blanca 2012-07-18 09:47   좋아요 0 | URL
아, ㅋㅋ 정말 좋은 표현이네요. 무쇠팬 길들이기^^ 무언가를 길들이기까지가 너무 힘든 것 같아 겁먹어 미리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스텐팬도 길들인답시고 시행착오 다 겪어 놓고 도망가게 되어 버려요. <이기적 식탁> 책 찾아 볼게요, 고마워요, Arch님^^

감은빛 2012-07-1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도 스텐 프라이팬 있는데, 맨날 눌러 붙어서 거의 안쓰고 있어요.
아내는 채식을 해서 프라이 팬을 하나 따로 쓰고 있구요.
저와 아이들을 위해 '계란', '생선', '고기' 등을 굽는 프라이팬이 두개쯤 있어요.

코팅 팬이 나쁘다는 건 잘 아는데, 스텐 프라이팬을 쓰는 건 기술 부족으로 참 어렵네요!

blanca 2012-07-19 11:0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저도 스텐팬은 너무 힘들어요. 생각한 거란 실전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코팅팬에서 조금만 더 양보해서 주물팬으로 타협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