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오후 세 시 둘째를 낳았다.

생각보다 짧고 강한 진통 끝에. 첫째는 아이의 탄생 그 자체가 경이로웠다면 둘째는 짧은 시간 동안 몸 전체가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며 생명을 밀어내는 그 자연적인 매커니즘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유난히도 기록적인 폭염을 만삭으로 버텨내는 것부터 엄마가 각오해야 하는 것들을 연습해야 했던 지라 막상 출산 그 자체는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졌지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이를 낳아 젖을 먹일 때마다 경험한, 젖꼭지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병, 끊임없는 불안, 양육, 못된 성격(그녀는 딸기밭에서 어린 마쉬아가 저지른 장난을 생각해해냈다), 교육, 라틴어, 이거고 저거고 모두 조금도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들뿐이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

 

톨스토이는 정말 여자들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남자임에 틀림없다. 내가 읽은 책 중에 이렇게 여자들의 마음 속에서 오고가는 생각들을 정확하게 묘파해낸 남자는 단 하나, 레프 톨스토이뿐이다. 생명을 낳는 일은 아무리 포장되어도 또다른 커다란 불안과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밤에 가끔 오싹한다. 어느새 내 옆과 발 밑에는 두 아이가 자고 있다. 아이 앞에 일어날 수많은 일들, 경험으로 이미 일어나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침잠하다 보면 그 어느것도 자신있게 감당하지 못할 것같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때로 스산하다.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톨스토이의 여인들이 느껴야 했던 부담감을 공유한다. 이거고 저거고 조금도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들뿐. 상당부분을 시간이 주도하겠지만 결국 그 시간도 나를 타고 흐르니 내가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나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 어느날 밤, 나는 갑자기 커피 한잔의 여유가 너무 고팠다. 그 밤에 막 뛰어나가 서머싯 몸의 <면도날>에서 '나'와 래리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다 동이 터버려 함께 한 그 아침의 그 까페오레. 당장 <면도날>을 꺼냈다.

 

우리는 빵집에서 금방 배달된, 바삭한 크루아상과 까페오레를 먹었다.

-서머싯 몸 <면도날> 중 

 

 

 

그리고 그런 김에 내처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지나치게 형이하학적인 것들에 시달리다 보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 그리워진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는 청년 래리의 선택과 궤변들이 그래서 더 청량감있게 들렸다. 면도날의 화자인 중년의 작가는 마치 서머싯 몸 그 자체같다. 이 책 속의 화자는 친절하고 상식적이고 매력적이다. 그가 들려주는 젊은 래리의 구도자 같은 삶은 '그'의 여과기를 지나 읽는이들에게 초록 잔디 위의 스프링쿨러가 내뿜는 물처럼 뻔하지만 역시나 시원하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시작될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사는 일이 정당화된다. 그냥 빌려서 읽었더라면, 처분했더라면, 내가 밤에 당장 뛰어나가 까페오레와 크루아상을 먹을 수 없는 일에 위로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결론은 여전히 나는 책이 좋고 책으로 치유받는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꼬마가 자주어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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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0-2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어째 blanca님 글이 안올라온다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즐겨 읽는 분의 서재가 한동안 비어있으면 전 속으로 막 서운해한답니다. 그런데, 둘째를 나으셨군요. 정말, 많이, 왕창 (이렇게 중복 표현을 마구 써도 오늘은 이해해주세요^^) 축하드려요. 서머싯 몸의 <면도날>중의 저 구절은 저 같은 사람은 늘 자극받는 문장이네요 ^^ 모유수유 하시나요? 전 아기 낳고 한달만에 그냥 커피를 마셔버렸는데... ("따라하지 마시오" ㅋㅋ)

blanca 2013-10-20 21:59   좋아요 0 | URL
hnine님, 감사합니다. 궁금해하셨다니 그래도 제 존재감이 있긴 있구나, 하며^^;; 안심 좀 하고요. 커피 저도 마셔요. 낳고 삼일 있다 라떼 마셨는 걸요 ㅋㅋ 모유수유하고 있긴 하지만 커피는 저의 삶의 낙이라서 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커피 마시는 그 순간의 여유가 너무 소중해요.

노이에자이트 2013-10-2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신세타령하는 사람들이 우굴거리는 세상에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고 쓴 마무리가 기분 좋습니다.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부모를 가진 사람 역시 행복할 것입니다.

blanca 2013-10-20 22:01   좋아요 0 | URL
ㅋㅋ 노자님, 저는 원체 단순한 유형이라 쉽게 행복해지고 쉽게 슬퍼집니다. 먹을 것을 밝히는 지라 맛있는 음식 먹으면 정말 세상 전체가 아름다워보이는 그런 유형이랍니다.

프레이야 2013-10-2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로 행복한 블랑카님, 그동안 이런 대단한 일이 있었군요. 많이많이 축하드려요. 기록적인 폭염에 산후조리하시며 고생 많으셨겠어요. 얼마나 이쁠까요! 전 요새 새삼 아기들 보면 너무너무 사랑스럽더라구요. 그래서 늦둥이도 낳게 되고 그러나봐요. ㅎㅎ 분홍공주에게 동생이 생긴 것도 축하해요. 책에서 우린 위안을 받는다는 사실, 공감하며^^

blanca 2013-10-20 22: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따님들 잘 키워낸 프레이야님이 너무 부러워요. 빨리 커라, 커라 주문 외우는 중입니다. 시간이 가면 내가 늙는건데도 요즘의 시간들은 좀 빨리 가주었으면 합니다. 분홍공주는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요즘 성장통을 혹독히 겪고 있는 중이랍니다.

마녀고양이 2013-10-2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두째 출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어머, 마음이 너무 흐믓해요.

blanca 2013-10-20 22: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안 그래도 며칠전 딸아이한테 핑크 토끼 무릎담요를 꺼내 주며 마녀고양이님 생각을 했더랬어요. 둘째는 뜬금없이 와주어서 ㅋㅋ 첫째랑 여섯 살 차이가 나버렸어요. 그리고 저는 유치원에서 늦둥이를 낳은 엄마처럼 되어 버렸어요. 지금으로선 또 눈앞의 과제들을 일단 해치워버려야 되는 입장이 되어 '나'를 찾는 일은 또 멀리 가버렸어요. 마고님이 차곡차곡 걸어나가는 모습 보면 참 대단해 보이고 부럽기도 하고 그래요. 멀리서 조용히 응원할게요. ^^ 그리고 고마워요.....

heima 2013-10-2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정말 축하드려요 ^^ 더운 날씨에 산후조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얼른 몸 회복잘하시길, 그리고 세상에 내려온 예쁜 아가도 무럭무럭 잘 크길 응원합니다.

blanca 2013-10-20 22: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8월달에 무거운 몸으로 세상을 활보하는 일은 정말이지 인생 최대의 ㅋㅋ 도전이었어요.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차라리 낳고 나니 좀 낫더라고요.

cyrus 2013-10-2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둘째 낳으라 고생했어요. 그나저나 둘째가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ㅎㅎㅎ 두 아가들이 블랑카님 따라 책 읽는 귀여운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되네요. 점점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산후 몸조리 잘 하세요 ^^

blanca 2013-10-20 22:07   좋아요 0 | URL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에요. 누나 책 읽어주며 같이 책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는데 잘 될지는 미지수예요^^;; 눈부신 가을날들을 흘려 보내는 일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참아 봅니다. cyrus님은 가을을 만끽하고 계시죠?

다락방 2013-10-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지난번 만삭이라는 글을 떠올리며 간혹 이제는 돌아오실 때가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이렇게 멋진 페이퍼로 컴백 하셨네요.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

blanca 2013-10-21 12: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리웠습니다.^^ 만삭의 배가 바로 꺼지지는 않더라고요--;;

블루데이지 2013-10-2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blanca님!
예쁜아기와 더 많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희 아이들은 11살 7살 2살인데요.터울이 크다보니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막내아기를 다루는 방법이 나름 달라요.ㅋ
아마 조만간 남매가 펼쳐내는 멋진 남매애를 느끼실수있으실거예요.
다시한번 축복드립니다.

blanca 2013-10-21 12:03   좋아요 0 | URL
우아, 진정 존경스럽습니다,블루데이지님! 저는 빨리 백일이 되라, 돌아 와라! 이러고 있어요.
둘째는 좀더 육아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또다른 어려움들이 있네요.
힘든데 이 시절이 좋은 거라고 그리울 거라고들 하니 또 즐겨 보려고 하지만
일단 졸립고 배가 고프네요^^;;

순오기 2013-10-2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둘째를 낳을 거라는 걸 내가 몰랐던가요?
아래 페이퍼에 달린 댓글에도 출산했다고 적혀 있는데... ㅠ
분홍공주에게 남동생을 안겨주셨네요~ 정말정말 축하합니다.
동생을 본 큰아이 마음이 시앗을 본 조강지처와 같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부디 분홍공주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

2013-10-21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3-10-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꼬마가 자주어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나는 이 순간 최고로 행복하다.


아,,, 슬몃 제 입가에 미소가 돌았어요~
꿀같이 주어지는 짬... ㅎㅎ

테레사 2013-10-2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유가 있었군요..블랑카님은 어디 이민가셨나..했더랬죠..ㅎㅎ 순산 축하드려요.

blanca 2013-10-22 10:30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이야기 들으니 갑자기 여행이 ㅋㅋ 가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저를 궁금해하셨다고 착각하고 기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