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정남향이다. 그러니 요즘 같은 날 그 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신줄을 거의 놓고 산다. 휴가 가면서 꼭 챙긴다고 의식하고 지퍼백에 싸두었던 핸드폰 충전기와 이어폰은 제 발로 어디로 걸어간 것이며, 무언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꼭 딴짓만 잔뜩 하다 끝난다. 어제는 옆지기가 아끼는 이어폰을 구태여 들고 나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잃어버렸다고 자학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딴 곳에 두었다고 고백. 가까스로 '살았다' 줄창 더위사냥만 물고 있다. 신혼 때 에어콘 없이 견뎠던 1년이 아득하다. 그 땐 더우면 서로 회사에 가서 있으라고 ㅋㅋ 독려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 서재에서 칭찬이 자자한 책. 쉽게 읽히고 참으로 상큼했다. 계속 '맞아, 맞아'하면서 읽게 되는 책.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참조할 곳이 있다. 아집이나 독선, 지나온 궤적에 대한 합리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더없는 고견이다. 저자 박웅현이 고창 선운산의 절에서 맞닥뜨리게 된 '보왕삼매론' 더위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청량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시극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보왕삼매론> 박웅현의 <여덟 단어> 중 인용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긍하는 과정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뜻대로'가 가장 최선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살아가는 것의 묘미다. 무엇인가 더 커다란 지도 안에서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다는 느낌은 반드시 체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더 큰 의미, 더 빛나는 별로 향하는 여정일 수도 있다는 앎. 뻔할 수도 있지만 잊고 지냈던 이야기들을 간명하게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저자의 이야기가 땀을 식힌다.

 

 

 

 

 

 

 

 

 

 

 

 

 

 

이 책은 아이 셋을 키우는 미국의 유대인 엄마의 지극히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척'하지 않는 담백한 글. 언뜻 보면 블로그의 단상들로 이루어진 가벼운 글인 것 같지만 군데 군데 자기 방어도, 가식도 떨어 내고 한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은 예비엄마들이나 아이를 다 키운 엄마들에게도 강한 공감과 자기 위안을 준다. 한 마디로 아주 재미있는 책.  '육아'란 의의로 참 지난하고 때로 강한 고통과 예기치 않은 기쁨과 의외성을 가득 품은 고독한 여정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조금은 냉정한 유럽식 육아보다 오히려 미국 엄마들과 정서적으로 접점 지대가 더 많은 것 같다. 저자가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외식을 나갔다 우연히 만난 80대 할머니가 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벽에 써 붙이고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지나가 버릴 거고, 당신은 남은 평생 그 시간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테니까."

-질 스모클러 <왜 엄마는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했을까?> 중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우아한 사만다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더럽히며 엉망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 할머니의 시선과는 달랐지만 분명 공감가는 구석이 있었다. 저렇게 더럽게, 저렇게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라니. 적나라한 현실의 부스러기는 꿈꾸는 구석과는 다르지만 그 여정이기도 하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서 저자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피천득이 유학간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노년에도 쓰다듬고 머리 빗기며 그리워하는 풍경은 주책이 아니라 그리움에 대한 가장 농도 짙은 표현과 다름 아니다. 지금 놓치고 가는 것들이 나중에는 반드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돌아온다, 는 사실.

 

나는 이 더위를 2주 동안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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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8-0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덟 단어>생일선물로 받아놓고 여직...ㅠ
아이 셋이 자라서 벌써 엄마품을 벗어났고, 남편도 멀리가서 혼자 사는 여자에요.
남들이 말하길,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고...^^
2주를 견뎌야 하는 더위도 겁내지 말고 맞짱 떠요, 우리!

blanca 2013-08-09 10:1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빨랑 빨랑 읽어보셔요. 요새 그쪽도 무지하게 덥지요. 그런데 한편 순오기님의 자유가 부러워진다는 것. 아직도 저는 갈 길이 머네요. 예! 자꾸 덥다, 덥다 불평만 하지 말고 즐겁게 더위 이겨 나갈게요.

transient-guest 2013-08-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입추답게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Sunny California라는 말 답게 태양은 뜨겁지만요.ㅎ global warming때문에 북극의 얼음이 바닷물로 녹아서 전체적으로 steam이 꺼져서 추워졌다고들 하네요.ㅎ 좋은 글은 소리내어 읽으면 마음에 감응이 오는게 참 신기합니다. 저 위에 쓰신 보왕삼매론 인용구를 읽으니까 심장이 고요하게 편해지네요, 마치 기도문을 정성들여 외울때처럼 말이에요.ㅎ

blanca 2013-08-09 10:17   좋아요 0 | URL
아, 어젯밤도 열대야로 허덕이며 괴로워했던 저로서는 참 부러운 상황이네요^^ 그쪽은 더워도 습기가 적어 쾌적하다면서요. 그죠! 이 인용문구 읽으니 참 좋더라고요.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좋은 체념'과도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13-08-1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왕삼매론 인용글귀가 쓰되 좋은 약이 되는 것 같아요. 되뇌어봅니다. 다음주까지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는데 분홍공주랑 건강하게 나시길요.^^

blanca 2013-08-21 17: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둘째를 낳고 나오니 벌써 낮에 가을 바람이 스며드네요. 이렇게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세실 2013-08-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마라......그래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배가 조금만 아파도 무기력해지는데......ㅎ
박웅현책 참 좋지요.
더워도 너무 더운 요즘, 다행히 도서관은 시원합니다.

blanca 2013-08-21 17:35   좋아요 0 | URL
저도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어 그 고통을 알지요. 그냥 세상만사 다 싫어지더라고요. 시원한 도서관, 상상만 해도 너무 가고 싶어지네요.

비로그인 2013-08-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나라한 현실의 부스러기는 꿈꾸는 구석과는 다르지만 그 여정이기도 하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서 저자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피천득이 유학간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노년에도 쓰다듬고 머리 빗기며 그리워하는 풍경은 주책이 아니라 그리움에 대한 가장 농도 짙은 표현과 다름 아니다. 지금 놓치고 가는 것들이 나중에는 반드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돌아온다, 는 사실




이 말씀 너무 좋아요... blaca님,,, 기억하고 싶어요 ...

blanca 2013-08-21 17:37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님, 좋으시다니 저도 씨익^^ 제가 아이를 낳으니 피천득의 노년의 행동이 주책이 아니라는 것에 절절한 동감이 가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배워갑니다. 그 자리에 가면서 그렇게 하나 하나 이해하고 배워가다 보면 점점 성숙해질까요. 나이 드는 것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