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세에서부터 60,70.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조숙' 중 

 

 

 

 

이렇게 노골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의 집을 다녀왔다. 비가 긋던 오전. 촉촉하게 젖은 고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까페로 활용되는 이곳에서 달짝지근한 모과차와 쫄깃한 인절미를 먹으니 이런 곳에서 글을 썼다면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살았다는 이곳. 그가 붙인 '수연산방'이라는 당호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에 이 집을 지은 과정이 나와 있다기에 급하게 읽어보았는데 그의 수필 전편이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수연산방' 이야기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또 아무래도 걸러지지 않은 당시의 표현과 한자어 등이 접근을 쉽게 하지 않아 제대로 완독했다고 하기 어렵다. 그저 오렌지 빛깔의 손바닥 만한 아취 있는 수필집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덥지 않은 집. 건넌방 앞의 툇마루에서 난간에 기대어 본 아담한 마당의 풍경은 보면서도 절로 그립고 아쉬웠다. 하룻밤 자고 갔으면 싶은 집. 왠지 내가 아이가 되어 팔짝 팔짝 뛰면 할머니가 내다보고 손수 만든 식혜와 인절미로 나를 부를 것만 같은 집. 나는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가고 있는 것인가. 익는 과정에서 놓치고 가는 것들이 한없이 아린 날이다. 나도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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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8-03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와 우와아~~!!! 멋져요. 찜해놨다가 꼭 챙겨서 가봐야겠어요. 이런 멋진 집을 두고 월북을.. 음.. 아니 어쩜 훨씬 더 빨리 월북했을텐데, 이런 멋진 집 때문에 월북이 늦어진 것일지도.. 어찌됐든, 월북하셨어도 이 집은 많이 그리워하셨것 같아요. 저도.. 한 오백년 살고싶어요. ^^;;;

blanca 2013-08-04 07:28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여기 참 고즈넉하니 좋더라고요. 이런 데에서 한달 정도만 살아보고 싶어요. 새도 지저귀고. 꽃도 피고. 손수 건축에 관여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참 아까워요. 그래도 이렇게 남아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순오기 2013-08-0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서울에 있는가 봐요?
다음에 서울가면 가보고 싶네요.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마워요!!

blanca 2013-08-04 13:29   좋아요 0 | URL
예, 순오기님, 성북동에 있어요. 가을에 가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약을 해야 할 정도라네요. 화장실 뒤켠도 너무 좋고. 구석 구석 구경하고 기웃대도 민망하지 않은 분위기로 참 일종의 전통찻집이에요.

프레이야 2013-08-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집이라면 정말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것 같아요. 무서록을 한번 펼쳐보게 하는 페이퍼,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드네요.^^

blanca 2013-08-06 17:36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여긴 진짜 너무 너무 더워요.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끈적. 고문이 따로 없네요. 저런 집에 한달 만 요양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8-0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심속에 아직도 이렇게 고즈넉한 장소가 남아있다니요. 관리가 좀 힘들겠지만, 하루 종일 사색하고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은 집 같습니다.

blanca 2013-08-09 10:14   좋아요 0 | URL
여기 너무 너무 탐났어요. 이런 데에서 글쓰고 책 읽으며 산 작가가 참 부러웠고요. 우선 더위도 콘크리트 건물보다 덜해서 선풍기를 안 틀어도 바람이 살랑살랑. 작은 마당은 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고즈넉해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