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아니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이고 실패는 실패대로 인정하고 힘들면 주저앉고 잘 안 풀리면 접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 P41

조증의 주요 특이점 중에 타인과의 거리를 제대로 재지 못한다.
는 게 있다.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를 마구 무너뜨리고 함부로 침범해버린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내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현재의 황홀경에 홀딱 빠져 있는조증 환자에게 ‘지금‘ ‘여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다. - P45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 명확히 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과거를 반추하는 일은 조울병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병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된다. 조울병의 한복판을 지날 때 보였던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나‘를 재구성해봄으로써 위기에 처했을 때, 감정이 극도로 고양됐을 때 또는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패턴을 발견한다면 그다음 찾아올 조울병의 폭압에 반응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 P78

조울병은 지난 일을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의 기억들 또는 땅 밑으로 꺼질 듯한 암울한 기억으로 극단화시킨다. 조울병을 앓기 이전의 경험이 조울병을 유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조증과 울증 그 어느 시기든나를 사로잡은 감정의 소재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얻어진다.
- P81

 슬픔은 이유가 있다. ‘나‘와 ‘잃어버린 것/사람을 분리할 수 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이 슬픔이 언젠가는 다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오로지 슬픔으로 꽉 차 있는 감정의 공간에 기쁨과 행복이 비집고 들어올것을 믿는다. 슬픔은 위로하는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반면, 우울은 실체 없는 어떤 것이 주변을 채우고 목을 조르는 느낌이다. 의지, 목표, 흥미가 마비된다. 모든 것이 메말라간다. 슬픔이 감정의 습지라면, 우울은 감정의 사막이다. 그것도 사하라 같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라 남극 같은 동토의 사막.
우울은 귀를 막는다.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우울은 셀프 감금이다.
- P123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늘 다르다. 내가 고통의 견적을 정확하게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의 주인은 고통이다.
- P133

어찌 보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듣는 당연한 조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울병에 모든 것을 빼앗긴 느낌을 가져본 환자라면, 아무리 아프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따라 ‘모든 것을 다잃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게 중요하다. 평소 일상에 겹겹이 안전장치를 만들어 피해를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  - P172

우선 내 탓을 하지 않게 됐다. 사회적으로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뒀고, 내가 겪는 심리적 곤경을 다른 사람과의 보편성 차원에서 보게 됐다. 조울병 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인간이란 존재가 모두 취약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고, 그러면서도 방어적 본능, 강인함을 갖고 있어 견딜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힘들 때도 좀 더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다.
- P173

조울병은 불가역적인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다독여야 하는 상대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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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박균호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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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재밌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만 이 책은 진짜 재밌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작품도 좋지만 뒷얘기는 더 흥미로운 것처럼, 책도 정말 좋지만 책에 대한 뒷얘기는 더 재밌다.

알라딘 서재의 블로거 베스트셀러를 자주 체크하는데 언제나 책에 관한 책이 상위권에 몇 권쯤은 반드시 포진해있다.

이른바 책 덕후들이 좋아하는 책이니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거다.

 

시작부터 흥미를 바짝 일으킨다.

난해하기로 유명하여 나같은 사람은 읽어볼 엄두도 내지 않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얽힌 이야기들은 <율리시스>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과는 달리 코메디극같다.

악필로 유명했던 제임스 조이스가 원고에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마침표를 크게 찍어 보냈는데 이 마침표를 인쇄공들이 파리똥으로 착각해 누락함으로써 작가의 분노를 샀다는 이야기, <율리시스>출간 당시에는 '야한'책으로 낙인찍혀 판금이 되자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이야기, 그리고 실제로 책을 받아 읽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하고 황당해했을까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안겨준다.

이렇게 책의 초반에 강력한 한 방을 날려주시고 난 이후에도 책에 대한 비화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문화재가 된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번이 비어있게 된 이유를 찾는 중에 느닷없이 출간되지도 않은 364번 책이 중고장터에 올라오는 희안한 일을 추적하는 것, 최인훈선생이 평생에 걸쳐 <광장>을 개작하는 이야기, 그 유명한 <닐스의 모험>이 사실은 스웨덴의 초등학교 역사, 지리 교과서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는 왜 그렇게 은둔자의 삶을 살았을까 너무 궁금한 가운데 그의 다른 단편을 보려면 앞으로도 40년을 더 기다려야 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영화로 만들려면 6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책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내가 열거한 이 이야기들 모두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테다.

덕후란 원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의 두번째 좋은 점은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의 만듦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같은 책이 여러권 있다면 번역자 이런거 안보고 난 책 표지 디자인과 본문의 활자체를 먼저 보는 사람이다.

가끔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들였던 적도 있다, 아니 꽤 많다.

2005년 민음사에서 나왔다는 <단원풍속도첩>을 나는 왜 몰랐을까?

이 책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절판된 단원풍속도첩에 대한 물욕을 무럭 무럭 키우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은 또 왜 그렇게 표지가 아름답고 책의 만듦새가 단정하지?

열린 책들의 <천일야화>특별판은 완전 내 취향이잖아....

이 책은 구매욕구를 무럭 무럭 키운다는 의미에서 나쁜 책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여기 나온 아름다운 책들은 대부분 절판이어서 그나마 다행이기도 하다.

웃돈을 주고 중고를 사지는 않을 것이기에.....

 

아름다운 책은 지금 나오는 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설같은 책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나는 건 또 새롭고도 즐거운 경험이다.

시인 이상이 장정했다는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의 표지는 그 세련됨이 1930년대라곤 믿을 수 없다.

내가 좀 더 덕후질을 심하게 했다면 이 시집을 찾아서 헤매고 있지 않을까 싶은 만듦새다.

책등의 제목을 무려 수를 놓아 만들었다는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복각본이나, 나쓰메 소세키가 직접 장정한 책까지...

수집가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 초보 덕후인 나로서는 사진으로 이 책들을 영접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진다.

오늘은 밥 안먹어도 배부른 날이다.(물론 밥은 다 먹었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말이야...)

 

그 외에 출판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많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들은 앞의 미적 만족에 이어 실용성까지 충족시켜준다.

많은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는데 각 전집의 1권을 보면 그 전집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얘기는 내가 왜 문학동네 전집을 주로 읽는지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내공이 그리 높지 않은 무난한 독자였던 것이다. ^^

주석 달린 책들이 가지는 의미라든지, 책 제목에 숨겨진 의미 같은 이야기들은 앞으로의 책 선택이나 실제 독서에서 지침이 될만한 내용들이기도 하다.

책에 대한 애정은 때로는 출판사나 편집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작가와는 달리 나는 돌베개 출판사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관심가는 책은 가능하면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고 사서 보는 편인데, 그건 책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이 출판사가 돈도 안되는 테마 한국사 시리즈를 너무 정성스럽게 만들어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역시 책 덕후라면 좋아하는 출판사 하나 정도는 짚을 수 있어야지 말이다.

물론 내공이 더 깊은 덕후라면 각 출판사마다 장단점을 다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이 책의 작가님의 글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그 외에도 원하는 책을 구하기 위한 분투기, 너무 많은 책으로 인해 있는지 모르고 같은 책을 또 사게 되는 이야기,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컬렉터의 본분지키기라고 쓰고 눈치보기라고 이해하는 이야기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 웃음은 공감의 웃음이기도 하다.

이사때마다 이삿짐 센터 일하시는 분들한테 눈치를 봐야하고, 쌓여있는 책들로 인하여 항상 너저분한 집을 감수해야 하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기본이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아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이 사람은 나보다 더하네, 그래 나 정도면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니까 앞으로 좀 더 사도 돼라는 자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아주 강력한 장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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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0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레르몽페랑의 거리도, 장준환의 영화도, 그 레스토랑의 이름도, 그날 내가 먹었던 음식의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 웨이트리스의 표정만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거의 쓸 일은 없지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피클‘이라는뜻의 불어 단어 하나. ‘코르니숑‘
- P20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고, 내가 하는 일도 좋아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건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려고 애쓰며 살기 때문이지, 이곳이 파라다이스는 아니지 않나, 정확히 말하면 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더 나쁜 도시들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도 더 험한 일을 하지 않고 밥벌이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만족하는 것도 뉴스에 등장하는 허다한 파렴치한, 사기꾼, 폭력배, 무뢰한들보다는 그들이 괜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도시, 나의 일, 내 주변 사람들모두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기쁜 일이다. 그러나 비중이 좀 줄었을 뿐, 새로운 무언가를 접하는 일이 기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 여행준비에 있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과 지겨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인가다. - P79

구체적인 여행 계획이 전혀 없는데도 항공권 예약 사이트에서여러 목적지를 입력해가며 혼자 놀기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여긴 직항이 있는지 없는지, 몇 시간이나 걸리는지,
없으면 어디를 경유하는 게 가장 좋은지, 거리에 비해 가격이 높은지 낮은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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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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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늘 작가와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작가가 자신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쓰든, 아니면 페르소나를 창조하든 어디에도 그의 삶과 생각과 마음이 담길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냥 글을 쓴다는 행위가 가지는 태생적 특징일게다.

 

허지웅이라는 작가는 그저 방송에서 본 모습이 다였다.

방송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네. 저렇게 시니컬하게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 저 나이에 저렇게 거침없이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참 쉽지 않은 삶을 살았겠다.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래도 방송을 잘 안보니 자주 보던 인물도 아니었고.....

그의 책이 여러권 나와 있었지만 굳이 찾아보고싶다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는 사실 좀 망설여졌었다.

관심은 가지만 죽음의 고통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는 왠지 함부로 쉽게 읽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통, 가장 깊은 고통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될 듯도 하고,

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내가 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고,

또 그의 고통을 지나치게 공감해버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고,

그래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생각해야 할지 조심스럽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그런 기분.

책 하나를 앞에 두고 이런 잡스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찌나 치졸한지.

그래서 그냥 읽자. 읽고 생각해보자.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살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 밤은 제발 덜 아프기를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빌며,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나는 천장이 끝까지 내려와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기뻤다. 아픈 걸 참지 말고 그냥 입원을 할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병동에서는, 옆자리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사람의 죽음에는 드라마가 없다. 더디고 부잡스럽고 무미건조하다. (13페이지)

 

글은 시작부터 고통스러웠다. 이토록 담담하게 자신의 고통을 얘기하는데서 오히려 얼마나 아팠는지가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늘어놓는 얘기가 아니다.

그랬다면 나는 책을 그냥 덮었을 것이다.

더디고 부잡스럽고 무미건조한 그 죽음의 고통에서 어쩌다 보니 벗어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 행운을 맞았다.

아마도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겪게될 순간일게다.

빠르든 늦든 죽음은 찾아올 것이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영광되게 찬란하게 명예롭게 죽지 못할 것이다.

그냥 아프게 더디게 부잡스럽고 무미건조하게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내 죽음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고통을 오래 받지만 않아도 다행이 아닐까?

죽음의 순간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옆에 있다면 죽음의 순간이 약간은 좀 근사하게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아는 주변의 죽음들은 참 많이 다들 외로워보였다.

어느날 문든 들려오는 부고 소식들 중 아름다운 죽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음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할말 다하고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고 하는 죽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아 그건 그냥 소설이나 영화에만 있구나 싶을 정도로 매 죽음은 그저 고통스러운 외로움이다.

 

투병의 과정에서 작가는 가족을 비롯한 어떤 사람도 면회를 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방송에서 느꼈던 그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거침없는 말 속에서 느꼈던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의 방어막이 이렇게 그를 외롭게 만들었구나.

 

책속에서 간간히 보이는 그의 삶의 편린들은 참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가 그렇게 날을 세우고 방어막을 두르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짦게 스치는 말들속에서 오히려 깊게 와닿았다.

이렇게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하게 되기까지 그가 살아내야 했던 삶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내 옆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감과 위로를 보내 줄 줄 아는 사람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고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은 실망을 준 적은 없었을까?

 

최근에 읽은 <올리브 키터리지>에 실린 단편 중 '여행가방'에는 참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남편의 죽음 직후 장례식에서 남편이 그녀의 사촌과 외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이 그 사촌을 과도로 찔러 죽이고 싶다고 말하자 올리브 키터리지가 말한다. 베개가 더 좋겠다고... 칼은 피가 너무 많이 튀잖아라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올리브에게 반한 대목이다.

위로가 무엇인지 공감이 무엇인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지웅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내 떠올렸던건 <올리브 키터리지>의 저 대목이었다.

내게 올리브 키터리지 같은 사람이 필요했듯, 그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했을 거라고....

어쩌면 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만 그 자신이 두른 방어막이 너무 두터워서 놓쳤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의 고통을 딛고 다시 삶을 얘기하는 작가는 책속에서 누누히 얘기한다.

이제 나는 다른 젊은이들에게 나처럼은 살지 말라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고....

이제껏도 열심히,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왔을 작가는 또 아주 열심히 뭔가를 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전하는 얘기들이 누군가의 올리브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지나온 고통만큼 그의 이야기는 공감의 울림을 가지게 되었다는걸 알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버티기 위해서 여전히 안간힘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는 느낌.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고 자신을 계속 몰아치는 느낌이다.

그가 옆에 있다면 그냥 그냥 살아도 된다고 얘기해주고싶다.

좀 무너지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게으르고 나태해보기도 하고....

삶이란 끝없는 분투만으로는 살아지는게 아니라고, 뒷걸음질 쳐도 그렇게 뒤로 가진 않는다고, 기댄다고 해서 내가 무너지는건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그의 영화와 책이야기들은 따로 얘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아 스타워즈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네, 전체 시리즈를 한 번 찾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재능있는 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나는 그 글을 읽고 즐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가 조금 덜 버텼으면, 조금 덜 부지런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앞으로의 삶에 올리브 키터리지 같은 이가 많아 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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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12-1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개의 이야기 같지만, 요즘 같아서는 참 ‘버틴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갑자기 날씨 추워졌는데, 모래요정님 온갖 감염병으로부터 무사하소서!

바람돌이 2020-12-14 18:43   좋아요 0 | URL
지금 상황은 정말 버틴다는 말 와에는 적당한 말이 없네요. 이번 사태 후 가장 리얼하게 위험을 느낍니다. syo님도 저도 우리 모두 잘 버텨서 내년에는 일상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cott 2020-12-14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바람돌이님, 오늘 올리브 키터리지 가방속에 넣고 지하철 타고 딱 그부분 ‘여행 바구니‘ 펼쳐 읽었는데 ㅋㅋㅋㅋㅋ
[잠시, 둘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다가 말린이 쾌활하게 말을 꺼낸다.
‘케리를 죽여버릴까 생각하던 중이에요,‘ 말린이 무릎에서 한손을 들어 꽃무늬 원피스 위에 놓은 작은 과도를 드러내 보인다.
‘오‘ 올리브가 말한다.
말린이 몸을 숙이더니 자고 있는 캐리의 드러난 목을 만진다.
‘이거 중요한 핏줄 아니에요?‘
말린이 묻더니 케리의 목에 대고 칼을 눕히며 심지어 그곳의 희미한 맥박을 슬며시 찌르기 까지 한다.
‘음, 알겠는데 좀 조심 해야겠어.
올리브가 앉아서 몸을 앞으로 내민다.
잠시후 말린이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나 앉는다
‘알겠어요 여기요.‘ 그리고 과도를 올리브에게 건넨다.
‘베개가 더 나을텐데‘ 올리브가 말한다
‘목을 따면 피가 많이 나오잖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0-12-14 18:46   좋아요 0 | URL
아 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반납해서 글 쓸때는 저 부분늘 인용할 수가 없었는데 scott님덕분에 딱!!!! 오늘의 독서에서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다니 뭔가 설레네요. ㅎㅎ 좋은 책을 같이 읽는 친구들이 많은 알라딘. 이래서 자꾸 여기에 주저앉게되나봐요.

scott 2021-01-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

주말 따스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0^

바람돌이 2021-01-09 21:0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scott님도 남른 주말 편안하세요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공동체를 무너뜨린다.
- P136

하지만 우리가 삶을살아내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작이었다. 용산 참사의 진실과시비를 가리기 위한 첫 단추다.
- P138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도 아니고 영웅도 부자도 아니었다. 정파성이 없으면 회색으로 분류되는 지금시대에 그녀에게는 아무런 색깔이 없었다.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단 한 번도 쉰적이 없었던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보통의 어머니였다. 보통사람 말이다. 그런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었다. 이건 중요한일이다.
최은희 님의 명복을 빕니다.
- P241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숨은 의도가 반드시 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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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2-13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상 깊게 읽은 책이에요. 저는 영화에 대한 얘기도 좋았는데
리뷰 중에 영화 비평 같은 다른 걸로 채웠다고 불만인 분도 있더라고요.
독자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을 듯합니다.

바람돌이 2020-12-14 00:47   좋아요 0 | URL
모든 취향이 그렇듯 책을 읽는 사람의 취향도 각각이니까요. 저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