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분명 현대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도발에 가깝다. 의사들에게 아예 메스를 들이대는 태세다. 그들의 입장에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또는 항변하고 싶은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반면 30년을 한 병으로 고생하며 수많은 의사를 만난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수긍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인 것이다. 그만큼 논란거리가 많은 내용을 담고있음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몇십년전의 미국이라는 상황과 현재 우리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책의 내용이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대부분의 예방접종이나 신체검사 등이 실제 꼭 필요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나 정부 등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상황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행동이 정말로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관련단체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는지는 꼭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되새겨보자.변호사는 괜찮지만 ......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건지, 아니면 괸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의사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려다 보니 죽음의 의식을 치루는 현대의학교의 교주가 되고자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첫 마디를 잊곤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론 서양의학은 대증요법에 그치고 있어 생활습관이라는 병자의 인생과 관련된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과 자연치유에 대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개인적으로 의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정직성에 있어서도 문제점은 드러난다. 현재 서양의학이 고쳐낼 수 있는 병이 30%도 되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왜 의사들은 모르겠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 와 같은 말을 하지않는가? 못 고치는 병입니다. 얼마후 죽을 수 있습니다. 와 같이 병세를 자신하는가? 제발 다른 기회를 환자에게 주라. 그것은 정직함에서 나온다. 아는 것을 안다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논어의 구절을 떠올려야 할 때다.병이 났으니 약을 먹으라는 구호를 벗어나 병이 났으니 생활습관을 바꾸라는 구호가 인정되는 사회가 오기를 바라며 제발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믿고 그것을 키우려는 의지로 가득찬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아마 이 책의 저자도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외와 그 근본적인 힘을 믿고서 이 책을 써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왜 사니? 모르겠다. 월급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하루하루를 버둥대고 있다. 돈이 가져다주는 편안함. 그러나 그 돈을 벌기위한 고통. 난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행복으로 가는 레일은 웃음이라는 간이역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간이역에 정차하지 못하고 자꾸 탈선을 하려한다. 길이 갈라진 곳에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난 종착역을 비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택의 순간 항상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이 레일이 행복으로 가는지를.때론 나의 기차는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차 탈선을 일으킨다. 그것을 붙잡아 주는 것은 인내와 관용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비심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레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자비와 폭력이 훈련의 문제라는 세비유 선언(인간이 공격적으로 변할 잠재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본성이 공격적이지는 않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즉 종착지가 보이지 않는 레일을 처음부터 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행복의 종착역으로 가는 연료는 자비다. 이 자비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생겨난다. 편견을 벗어난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때 극단으로부터 피할 수 있으며 이때 자신의 고통 또는 타인의 고통을 대할때 자비심은 스스로 우러난다. 변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절실한 마음으로 배우고 확신을 가지며 결단하고 행동하려 노력했을 때만이 기차는 행복의 종착역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갈 것이다. 때론 이 기차가 다른 곳으로 빠져버리지 않을까 두렵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과 불안은 진실하고 순수한 동기를 지녔을 때 사라진다. 정직함이 바탕이 되는 자부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떳떳하게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 자 이제 우리는 터널을 벗어날 순수한 동기를 지니고 있고, 탈선으로 부터 벗어날 자비심으로 충만해 질 것이며, 선택의 순간 행복의 종착역을 떠올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족의 길을 따라 힘차게 레일을 달리자. 왜 사냐고?난 오늘도 달릴 것이다. 그리고 잠시 멈출 것이다. 웃음의 간이역에서. 그리고 또 힘차게 달릴 것이다. 행복의 종착역을 향해.
인간교차점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여러감정들을 하나 둘씩 들춰낸다. 사랑과 미움, 믿음과 배신, 희망과 절망 등등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감정의 단편들이 얽혀져 감동을 자아내는 지극히 휴머니즘적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중 눈물샘을 톡톡 건드리며 가슴에 가장 깊게 새겨진 것은 2권의 5번째 에피소드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동아들이 형사가 된 사연이 너무나도 절절하다.(지금 글을 쓰는 이순간에도 소름이 쫙 돋는다)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도 달려가지 않고 잠복근무에만 열중하는 형사는 감정이 메말라 있는듯하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전 죄에 무거움도 가벼움도 없다고 믿습니다. 범죄는 항상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법입니다. (P157)범인이 살인죄를 저지른 흉악범이 아니라 단순한 절도범이라도 그가 살인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일일지도 모르는 것임을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통해 알려준다. 아버지가 죽고나서 혼자 키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언제나 일에 바빠 아들과 같이 외출한번 하지 못했지만 어느날 아들을 위해 올림픽 개막식 티켓을 구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강 저편 다리를 건너 아들과 즐겁게 외출을 나선다. 그러나 그 표는 암표상이 복제한 가짜표였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에게 등을 보이고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에 두고도 아들이 올때까지 굳건히 버틴다. 그리고 아들에게 올림픽때 일 미안하다며 숨을 거둔다. 아들은 괜찮다는 말을 마음속으로만 묻어두고 눈물만 흘린다.세상엔 그렇게 누군가에겐 그다지 큰 일도,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며 행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못할 한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냥 무심코 던진 돌맹이 하나가 개구리에겐 생명의 위협이 되듯이 우리가 무심코 행한 일이 누군가에겐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아픈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보다 무서울 수 있는 세상. 애시당초 우린 도둑이 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야하는 피곤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마 그 피곤함은 인간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와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리라 믿는다.
운종가(雲從街), 종로의 옛 이름이란다. 구름을 쫓아가는 거리. 청계천이 흐름으로써 발생하는 안개구름을 따라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낭만적이다. 그 길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별들을 헤아렸겠는가? 지금의 서울. 도로로 뒤덮여 하수구가 되버린 청계천에선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고 우리는 알게모르게 그 독가스를 마시며 걸었다. 아니 걸을 수 없었다. 그것은 걸음이 아니라 그저 목적지로의 이동일 뿐이었다. 낭만이 사라진 곳에서는 건강 또한 사라져 있었다. 맑은 공기가 사라진 곳에서 어느 누가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었겠는가? 현재 우리의 아이들이 아토피와 같은 현대병에 아파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천 지 인의 삼간 즉 시간 공간 인간의 관계나 패러다임의 변화 문명과 문화에 대한 차이 등은 솔직히 지적 유희로 느껴질 정도로 나는 청계천이 얼른 서울 시내 한복판을 흘렀으면 한다. 그저 그 길을 걷고 싶을 뿐이다. 건강한 물이 흐르고 건강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건강한 몸 또한 자연히 이룰 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이런 건강한 환경 속에서 누가 서로를 헐뜯고 다치게 하려 주먹을 휘두르겠는가? 이 길을 걸을땐 우린 어깨동무를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을지도 모른다. 살만한 도시, 바로 그런 도시로의 첫 발을 우린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선 분명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도올이 이 책에서 주장하듯 우리가 시민사회의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유대신 자율을 바탕으로 한 협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엔 인내와 관용이 필요하다. 도시가 변하기 위해선 그곳에서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변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그런 의미인가 보다. 도올이 삼간을 말하는 것이. 현재의 이 시간 속에서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 즉 문화적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인지 우리는 청계천 복원을 통해 새삼 인간의 길을 깨우쳐 나갈 지도 모를 일이다.
슬로 푸드는 채식에 관한 책이 아니다. 또한 <육식의 종말>과 같은 가축사육의 폐해를 밝히는 책도 아니다. 그래서 책을 전반부 읽다보면 혼돈스럽다. 각국의 거리 음식을 소개하기도 하고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음식이 나오기도 하는데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단풍도 땅을 찾아가는 늦가을이긴 하지만 이 가을동안 사과를 적어도 한번쯤은 먹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사과를 사든 모두 비슷한 종류라는 것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 사과는 무려 그 종류가 700종을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만도 10종이 넘는 사과를 심어왔었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사과의 맛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먹었던 사과는 후지나 쓰가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재래종이던 능금마저도 그 맛이 어땠는지 아련하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고 저장방법이 첨단화 되면서 음식은 세계를 종횡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음식이 결정되어져 버린다. 지역성과 계절이 사라짐으로써 다양한 토착음식들은 입에 들어오기 힘들어지고 오직 몇가지 대량생산된 식품들만이 식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런 단일 품종은 그러나 맛의 빈곤과 함께 병해나 해충에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슬로푸드 운동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각 지역의 토착적인 음식들을 살려내 맛의 다양화를 가져오자는 것이다. 속도에 휩쓸려 단순히 에너지를 얻는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생명 종을 보존하고 삶 또한 다양성을 지켜가자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빠져 우리의 종을 멸종시키는 우둔한 걸음을 멈춰서야 할 것이다. 우리네 강을 블루길이나 배스가 지배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