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문학앨범 - 진창 속의 낙원 웅진문학앨범 8
황지우 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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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지배하는 모더니티의 사회가 아니라 파쇼가 지배하는 끔찍한 모더니티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로써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일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고 동일한 기의를 다른 기표로 표현해야만 하는 사회,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하나로 밀어붙여도 모든 것이 용서 아니 묵인되어지는 사회 그 속에서 시인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소통이 비록 메아리에 그칠 수도 있다는 공포심마저도 사람들과 통(通)하는 과정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 통한다는 것은 주관을 떨쳐내고 간주관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는 객관의 확보로 이어진다. 황지우는 비록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더라도 개인적 인상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통정(通情)을 획득함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시를 발표했고 사람들은 그 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시가 비록 몽상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여도 그 역시 잠든 사이 꿈꾸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깨어있음으로 해서 획득하는 몽상이기에 우리의 의지가 살아있는 곳이다. 그 의지를 바탕으로 삶은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며 그 한걸음 한걸음이 뒤에 길을 남긴 것이렸다.
인문학이 쇠퇴하는 시기, 순수문학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발길 닿는 곳에 길이 생기니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쉼없이 따라올 것임을 기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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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과 조지 그리폰 북스 12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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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

판타지 소설을 이제서야 조금씩 접하는 입장에선 그 책의 장점이 무엇인지, 매력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조차 힘에 버겁다. 그저 재미있게 읽어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한편엔 이 소설이 도대체 이 장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보다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조금 차지하고 있다.

<드래곤과 조지>라는 책은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 얼치기 독자인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재미로만 읽히는 책이었다. 정말 가볍게 손에 들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톨킨의 <반지전쟁>이 보여준 공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장르소설이었다.

나에게 있어선 무협지라는 것도 <영웅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즉 <영웅문>을 독파한 이후 <영웅문>의 틀을 벗어난 그 어떤 괜찮은 무협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을 보고나서 SF 소설을 다 읽어버렸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반지전쟁>이 보여준 환상적인 인물들과 모험, 갈등과 그 해결의 방식은 그대로 <드래곤과 조지>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 말은 그만큼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미이지 비난의 뜻은 전혀 없다. 다만 항상 새로움을 구하는 독자의 입장에선 무엇인가 새로운 요소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용과 기사, 말하는 늑대(재패니메에션 원령공주가 생각난다), 신궁에 가까운 궁사 등 그 상상의 매력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실토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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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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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것이 왜 옳고 그른 것이 왜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하여 진정으로 나는 알게 된다. 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음을.

행동하지 않는 앎도 앎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강준만 교수는 진정한 앎을 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많은 오해를 불러 올 것임을 알면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앎이 가져다 주는 용기다. 그러나 진정 알지 못하는 자는 아는 척할뿐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침묵도 대항의 수단임을 자기변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척함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국민의 사기극은 바로 이런 척하며 사는 꾸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준만 교수는 그런 척함으로부터의 결별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론개혁의 성패는 수구신문들의 방해공작보다는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이기심 자제를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49)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팩트마저 자신의 마음대로 왜곡해서 나타나게 되는(책 속의 조선일보 기사, 사설 등등) 일련의 사건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대부분이 갖게 되는 족벌신문들의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한 인식은 사실 그대로의 세상바라보기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행할 자세를 지니고 기꺼이 행할 의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방향이 애시당초 틀어져 있다면 이 또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세상을 바로보는 평면 거울인 셈이다. 문제는 외꾸눈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 두 눈을 가질 수 있는냐인데 그 것마저도 그런 의사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나에게로 눈을 돌리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아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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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아이 -상 영원의 아이
텐도 아라타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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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쇼이치로, 료헤이라는 3명의 아이.아동학대 속에서 자신을 두터운 껍질에 감춰버려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다. 하지만 이 세명의 아이는 서로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마음을 열음로써 세상으로 나선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들에겐 어릴 적 학대가 악몽처럼 등장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끊임없는 악순환. 소설은 아동학대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눈물샘을 자극하며 보여준다. 게다가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해 마지막 반전을 가져옴으로써 읽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특히 이 소설이 주는 생각할 거리는 아동학대라는 사회적 이슈이외에도 홀로서기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근대적 교육, 특히 서구적 교육을 받아오면서 개인을 강조하고 그 개인의 독립성을 요구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독립성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음을 깨우쳐야 할 때가 온것은 아닐까

혼자서만 너무 애를 쓰면, 자신은 물론이고,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는 것만이 어른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거야. 사람을 믿고, 맡기고 또 다른사람의 어려움을 받아들여주는 것도 사람에게는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되는 게 아닐까? 천천히라도 좋아. 자신의 마음을 열어봐, 어때 다른 삶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어리광이라도 한번 피워보라고. 그걸 자신에게 허락해 보면 어떨까 (3권 P160)

사실 홀로서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그것을 시도해본 사람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러나 알아서 척척척, 혼자서도 잘해요를 강요당해온 우리에게 있어선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광에 불과했다. 그리고 어른은 어리광을 절대 피워선 안되는 것이지 않은가? 이렇게 혼자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견뎌내기 위해선 우린 거짓 웃음과 태연함을 가장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선의의 거짓말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홀로서기는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들이 얼마나 타인의 가슴에 시퍼런 멍을 남기는 줄은 알지 못한다. 나의 선의의 행동이 때론 타인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거짓말이나 비밀로 자신을 감싸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일도 있으니까요.물론, 그런 일도 있겠지.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 또 비밀을 오래 숨기고 있다보면,거기에 길들여져 버리지 않을까. 길들여지면 아주 간단한 진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두려워서 거짓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어.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크게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는 거야.(3권 P350)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기댈 수 있다는 것. 그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산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삶의 가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니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삶, 어찌보면 나의 등을 살며시 받쳐주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삶일련지도. 이 시간 비록 비틀거리더라도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인다. 순간이며 영원한 삶의 행복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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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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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을 읽을 때 그 상징체계를 파악하는 것 만큼 재미난 일도 없을 것이다. 줄거리나 문체가 가져다주는 것 이상의 쏠쏠한 재미가 그 속에 감추어져 있으니까.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미장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화는 점차 읽혀지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영화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책을 들여다 볼 때도 이런 숨은의미찾기의 기쁨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나 영웅적 인물의 등장과 소멸로 역사는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엔 거대한 흐름이 있게 마련이며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 그 흐름이 일순 바뀌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 흐름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바뀌는 것이며 그 터닝포인트에서의 사건이나 인물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채는 것 만큼 역사읽기의 즐거움 또한 없을 것이다.
이 책 호메로스에서 돈 키포테까지는 바로 이런 감추어진 역사읽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고등학교때 세계사라는 과목이 선택사항이라 책 한권 읽지 않았음을 후회하게 만드는 이 책은 역사적 사건 이면의 도도한 흐름을 살며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바로크시대나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암흑의 시대라는 중세가 결코 캄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다.

반면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고대 로마사나 서양사에 대한 뒷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즉 이면에 나타나는 즐거움을 그 표면을 알고 있을때 가능한 것이며 그 표면에 대한 지식없이 이면만을 본다는 것은 소가 뒷걸음치다 개구리를 잡아놓고서 마치 개구리 잡는 법을 알고 있는듯이 뽐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서가 딱딱함을 벗고서 말랑말랑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줄 수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썩 괜찮은 메뉴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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