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 빛샘 한국 대표 문학 30
박태원 지음 / 빛샘(Vitsaem)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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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선 10억 재테크가 인기다. 1억 종잣돈을 모아 10억을 벌어보겠다며 갖가지 묘책을 찾는라 분주하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에서 평생을 살아가며 필요한 돈이 어느정도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20억 정도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10억을 만들어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의 절반밖에는 못 모으는 꼴이 되는데...

어찌됐든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은 바로 돈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문제가 결코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천변풍경이라는 이 소설속의 배경은 1930년대의 청계천 주변 민중들의 삶인데, 이들의 고민이 현재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30년대는 일제치하였음에도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들이밀듯이 지켜보고 있다. 시시콜콜한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우리가 언뜻 선입관을 가질법한 국가의 독립과 같은 문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 꼭 개인 자체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돈의 문제 등을 드러냄으로써 당시에도 이미 자본주의적 폐단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들이 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능동적이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론이 결코 해피엔딩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충고를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8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사람들은 무던히도 돈을 모으려 애쓴다. 정작 그 돈을 무엇을 위해 모으려 하는지 잊어먹은채 말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이젠 그것이 뜯겨져 원래의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경제적 이익을 볼 것인가에만 매몰되어 있는 개인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민중들에게도 웰빙의 삶은 가능한가?라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역사가 진행되가면서도 먹고사는 것이라는 근본적 문제는 어찌 이다지도 커다란 벽으로 남아 있는가? 청계천이 이런 문제를 쓸어가버렸으면 좋겠다. 진정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때 우리의 이웃들은 웰빙을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 역사는 진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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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물
스티브 마이어로비츠 지음, 정지민 옮김 / 아름다운사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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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똑똑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으로 공기를 더럽히고 나서는 청정기를 가지고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겠다고 하는 것이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듬뿍 뿌려놓고서 농약성분을 없앤다는(물론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말이긴 하지만) 세제를 찾는 꼴이나, 가축을 대량생산하고 공장의 하수를 함부로 버려 물을 오염시켜놓고는 정수기를 찾는 모습을 볼라치면 정말 도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라는 모습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물대신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청량음료를 마시고, 커피나 녹차, 코코아 등을 마시면서 그나마 다행인것은 건강음료라 해서 과일쥬스 등을 마시지만 이것이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생각때문일까? 아니면 이왕 죽는것 맛있는 거나 먹고 죽자는 생각인가? 길어야 100년 인생 뭘 그리 따지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맛있는 거 먹고 아프면 다시 약 사먹고 나으면 되고 그래도 안 나으면 수술하면 되는 거고??? 하기야 그렇게 사는 것도 행복할지 그 누가 말겠는가?

그렇지만 이건 도무지 평등하지가 못하다. 맛있는 것은 아무나 먹을 수 있도록 값싸게 제공되지만 깨끗한 물, 공기, 흙은 돈이 있어야 접할 수 있으며 혹이나 값싼 음식들로 몸이 아파할 땐 돈이 있어야 치료를 받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물과 공기를, 인간인 이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상 평생을 이것들과 함께 살아야 하건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것들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희생의 댓가는 과연 평등했는가?

따라서 깨끗한 공기와 물은 그저 단순히 누군가의 건강을 지켜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의 치료를 넘어 사회와 인간제도에 대한 치료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 내용은 아픔의 원인이 물 흡수의 부족일 수 있는데 다른 데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과 이런 아픔을 치유하는데는 깨끗한 물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정수를 시켜서 우리가 물을 흡수해야할지, 그리고 지금의 수돗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단상들은 수돗물의 위험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대중적인 것들의 위험성, 그리고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또다른 경제적 지출을 행해야 한다는 것. 불평등한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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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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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과 늑대
아이를 잡아먹고 성질이 거친 야성의 동물.
사람을 해치는 늑대인간.
그리고 순록을 싹쓸이 해서 사냥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건 정말 늑대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작자는 캐나다 늑대 서식지를 찾아 홀로 늑대들을 지켜본다. 순록을 너무 많이 사냥하는 그들의 모습을 밝혀낼 것이라는 상부의 희망을 안고서.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일처제의 가족관계, 함부로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자족하는 사냥 등등 인간보다 나은 모습에 놀란다. 에스키모인들의 전설마냥 약하고 병에 걸린 순록을 잡아먹음으로써 강한 순록들만이 세상에 퍼지도록 돕는 생태계의 적자생존이라는 법칙에 충실한 늑대와는 반대로, 어떻게 인간의 개입으로 생태계가 망가지는지도 알게된다. 작자는 늑대와 에스키모인들 사이에서 좌충우돌 우스꽝스럽게 적응해가며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미지의 힘은 우리의 이성마저도 제압한다. 늑대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한순간 미친듯이 날뛰며 그들을 다 쏴 죽이고 싶어한다. 본부로 귀환하기전 늑대굴을 조사하다 느닷없이 발견한 4개의 눈동자. 비행기를 피해 숨어든 어미와 어린 늑대. 작자는 그들을 관찰하며 키워 온 애정을 순식간에 망각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간단하게 부인한다. 눈동자를 맞는 순간 찾아오는 두려움. 그것은 적나라한 공포심으로 물들어 급기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킨다.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이성인가?

선입견 편견, 몰이해로 비롯된 이미지들이 늑대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어느 순간에도 꿈쩍 않을 이성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사냥을 나가기전 늑대가 울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선 그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PS 절에 가면 삼신각이 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도사가 호랑이를 팔에 괴고 앉아 있다. 백두산 호랑이는 분명 백두대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호랑이가 살았다는 것은 자연이 그만큼 살아있었다는 의미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의 동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생명체들이 모두 자신의 생명을 맘껏 누릴수 있었음을 상징한다. 호랑이가 사라진지 오래, 늑대도 사라졌다. 이젠 삼신각의 도사는 자신의 팔 아래 어떤 동물을 괴고 앉아 있을수 있을까? 산신령은 슬프다. 인간이 기원을 한대도 그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 잃어버린 세계를 우리는 이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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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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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바라보는 또는 비판하는 또는 읽는 방법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굳이 큰 틀로 나누자면 영화이론이나 인문사회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식 글쓰기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이 두가지의 분류는 다시 글쓰는 이마다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된다.

여기 시오노 나나미가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영향으로 영화에 대해 관대하고 풍부하게 접한 작가는 그 영화들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처럼 말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영화는 주로 영화속 주인공들에 대해 탐착하고 있다. 물론 영화속 주인공과 함께 그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뛰어난 창작자는 절대로 간단히 인간을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서로 모순된 양면을 한 몸에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서, 그런 불균형을 묘사하지 않고는 한 인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P45)-그렇다면 이런 관점은 심리학적 관점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심영섭의 영화읽기와 어떤 차이를 드러낼 수 있을까?

작가가 로마시대의 영웅을 그려냈듯이, 영화 속에서도 그녀의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웅이라는 이름대신 품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말이다. 영웅에 대한 집착이 마쵸적 성격을 드러냈듯이 품격에 대한 집착은 일면 계급적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도전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국철학을 내세웠다고는 하나, 도대체가 온 세상사람들이 성인이 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영화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품격이라는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도 이런 어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책에서 이야기하듯 '모순된 양면, 그 불균형을 갖춘 사람들이 어찌 품격을 지닐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런 불균형 속에서 품격을 찾는 재미도 솔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재미는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영화이었을때뿐이지만 말이다. 정말 영화보기는 어디에 돋보기를 들이대는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상의 장르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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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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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지프스는 병들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반복되는 바위올리기를 끝내리라 다짐한다.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바위를 안고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정말로 갑자기 부닥치는 삶의 우연성. 끝내리라는 다짐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 의지가 꺾인다. 그래서 발길은 또다시 산으로 향할수밖에 없다.

<폭소>는 이런 삶의 우연성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주인공들이나 그와 관련된 주변인물들은 정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이것이 이들의 삶을 온전치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실은 정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반복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차라리 끝을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그 굴레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물론 그 굴레는 처음의 굴레와 조금 달라 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삶의 복귀는 체념인지 생의 의지인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난 이 세상 모든 일에 왜?라고 묻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이 자신을 위로해주어야'만 하는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이란 그냥 이런 것이 아닌가 자문해본다. 뭐 별거 있겠냐고? 우연에 휘둘러 어찌어찌 길을 나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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