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vs 남자 - 정혜신의 심리평전 1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느끼는건대 유독 심리학은 발달단계에 대한 분류가 많은 것 같다. 에릭슨 피아제 프로이드 등등 잘 알지도 못하지만 또 무수히 많기에 접근하기도 겁나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우리앞에 내세우는건 일정한 분류기준이며 그것에 따른 발달과정인 것같다. 정혜신의 이 책 남자 대 남자는 21명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는데, 마지막 이회창을 제외하면 모두 두명씩 짝을 이루고 있다.

그 짝의 앞 뒤로 나오는 인물들은 비슷한듯 보이지만 그 내부심리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대조를 통해 보여준다. 앞과 뒤는 말 그대로 앞과 뒤의 관계로 뒤에 나오는 인물들이 앞에 나온 인물에 비해 좀더 성숙된 심리상태에 있음을 주장한듯 여겨진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미성숙과 성숙의 문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겉모습이 성인이라 하더라도 유아기적 성향을 띠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옆에서 발견할수 있듯이, 그 심리적 경향까지도 성숙된 모습으로 비쳐지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오히려 아직 미성숙한 모습들을 훔쳐볼 수 있다는데서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평전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과 개인적 접촉을 갖지 못한채(또는 않은채) 객관적이라고 표현되어지는 대중매체를 통해 밝혀진 모습과 그 인물들의 저작물 등만으로 심리를 해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이라고는 하지만 인터뷰라는 것이 인터뷰어라는 필터를 통해서 드러난것이 또한번 언론매체를 거쳐서 드러나는 것이고, 또한 솔직한 개인고백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책과 같은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때는 뭔가 치장이 섞여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까지 겹쳐지면 책 속의 인물들이 과연 진짜 그네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책이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겉모습의 그네들을 전달하면서 호기심의 대상인 속마음을 추적하는 것이 매우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복잡한 이론을 내세우기보다 흔히 뒷다마라고 말하는 얘깃거리마냥 그네들의 속내를 친구들에게 과감히 뱉어내듯이 토해내는 글들 덕택에 마치 찻집에 앉아있는 마냥 편안하며 즐거운 기분을 갖게 해준다.

그 여유로운 기분의 뒷면에는 책 속 인물들의 유명세에 묻혀진 평범함을 찾을수 있는 쾌락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에게로 돌아오는 화살이라 아련한 통증을 가져오기도 한다. 나의 심리적 경향성이 이건희나 장세동과 닮은 듯 보이다가 유시민 강준만의 그것과도 닮아 있는듯 하면 순간순간 내가 이런 면도 있었구나라고 자각하게 된다. 내가 유명인과 닮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유명인도 평범한 사람의 심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감하는 것과 함께, 책을 덮으면서 앞쪽의 인물군에 속한 것이 더 많았는지 뒤쪽의 인물군에 속한 것이 더 많았는지 셈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뒤쪽 인물군에 속한 심리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내 또 한번 깨닫는 것은 대중가요 '가시나무새'의 가사마냥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앞과 뒤쪽의 경향성이 모두 섞여 있는 혼합체 바로 그 모습이 나인 것이다.

자, 이제 나의 실체를 알았으니 다음엔? 아마 책 속 인물들도 자신의 실체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심리를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행동으로 표현해낼 도리밖에 찾아내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일련지 모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그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못마땅한 나를 밀어낼 수 있기를 거울 속의 나를 보며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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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2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거 같네요... 사실.....설령 뒷다마같은 것일지언정...우리가 아는(뭐, 이름밖에 아는 것이 없다해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귀를 간질이게 만드는 마력이...있는거 같고요...

2005-04-28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4-2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황송할수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13
요시다 타로 지음, 안철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접하게 된 동기는 <굶주리는 세계>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북한은 지금도 기아에 허덕이고,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경제적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쿠바는 비슷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 대한 해결을 부의 집중화로 풀이한 이 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다른 해답을 찾고자 하다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먼저 쿠바라고 하면 우린(우리인지 나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정보도 없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꺼라고 생각된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 체제가 다른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국가라는 점,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장기독재 상황(카스트로 집권은 40년을 넘기고 있다)이라는 것, 그리고 영화나 그 밖의 모습을 통해서 바라본 아바나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난민들 등등. (최근엔 체 게바라와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영향으로 긍정적 이미지도 많이 갖을 수 있게되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대부분 미국을 통해서였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다시 쿠바를 들여다보면 놀라운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는 거의 모든 경제 복지 부분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우리가 보아온 난민이라는 현상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권의 지원이 줄어들고(줄어들었다기 보다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인해 급격한 경제적 혼란을 겪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상황에서도 의료부문과 교육부문에 대한 복지정책엔 큰 변함이 없을 정도로 사회주의적 평등이념은 굳건했다. 현재 미국의 국민총생산량의 14분의 1임에도 불구하고 평균나이나 유아사망률, 대학의 수나 교수비율, 박사의 수 등 에선 미국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형편이라는 사실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다. 쿠바라는 나라가 북한과는 달리 이렇게 굳건히 어려움을 견뎌내고 점차 진정한 복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가게 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도시생태농업을 들고 있다. 비료지원도 끊기고, 석유와 같은 에너지의 수입도 힘들고, 심지어 지금의 북한보다 더욱 가혹하게도 약품과 같은 의료지원도 이뤄지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들은 배고픔을 탈출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빈터에 무조건 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비료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유기농이라는 방법으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국가도 도시농업에 대한 플랜을 세워서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다. 도시농업은 시민의 자발적 농민단체와 정부의 지원, 대학의 연구단체가 하나가 되어 점차 그 생산력을 높여가고, 그것은 석유의 부족으로 인한 유통이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그 지역에서 난 생산품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생태적 건강성을 갖게되는 이유가 된다. 또 석유부족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로 교통수단이 바뀌게 되고, 에너지 또한 태양열과 같은 지속가능한 수단으로 모습을 바꾼다. 의료정책 또한 허브와 같은 자연의학과 침 뜸과 같은 전통의학 동양의학 등을 접목해서 건강을 회복한다. 또한 유기농 야채 중심의 식단으로의 변경은 자연스레 현대병이라 일컫는 비만과 당뇨, 암의 발생률을 떨어뜨려 의료비가 30~40% 줄어드는 부가적인 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즉 도시의 빈터에 과실수와 채소를 심는다는 행위 하나가 국가 전체의 모습을 건강하게 탈바꿈시킨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정부의 헌신과 시민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가능하다. 아바나 시민이 모두 성인군자가 아닌 바에야 이런 변화에 모두 수긍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 사회주의의 실패요인중 하나인 노력과 결실의 불평등함이 가져다주는 나태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임승차에 대한 문제점이 사회제반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야채나 과실을 훔치거나, 일하지 않으면서도 복지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등) 하지만 이들은 풍부한 사회자본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해나간다. 또 노력에 대한 결실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인 요소도 부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기주의에 기초한 시장과 권위주의에 기초한 하향식 관료조직의 문제를 해결할 제 3의 대안으로 서구학자들이 제안한 사회학적 개념이 사회자본이다. 제임스 콜먼이 제창한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의 유형을 말한다) 시민사이의 네트워크가 충실해서 시민활동이 활발해짐으로써 무임승차자가 되게끔하는 동기가 희박해져 사람들의 태도도 협력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신뢰는 개인적 도덕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시스템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것도 경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쿠바를 바라볼때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진정 유토피아라는 것이 물질적 소유의 확대인지 행복의 확장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한다고 본다.

쿠바의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보여지는 것은 교육과 의료의 완전무료와 그것을 바탕으로한 자발적 시민단체에의 참여,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분권적 자율적 지방정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전체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이 아직 물질적 풍요를 우리만큼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배고픔으로 죽거나 범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병 하나 걸렸다고 집안이 망할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장애인 가족을 두었다고 소외되거나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 자살이나 살인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못사는 나라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분명 쿠바가 유토피아는 아닐지 몰라도 그들이 향해가고 있는 지점은 유토피아임을 이책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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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1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유토피아라는 것이 물질적 소유의 확대인지 행복의 확장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한다고 본다.

음~ 이 역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그나저나 체게바라 평전을 5개월에 걸쳐서 읽고 있는 저는...참...에휴...

클레어 2005-04-1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멋진 리뷰입니다. 책 꼭 읽고 싶게 만드시네. 일단 추천에다 퍼가기 합니다. 흐흐~

하루살이 2005-04-1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한숨쉬지 마세요. 저도 평전 읽는데 6개월 걸렸던 것 같네요. 이 책에선 게바라를 도덕적 공산주의라고 평가하더군요. 그리고 지향해야 할 것은 생 시몽과 같은 공상적 공산주의인것 같습니다. 소련과 같은 국가적 공산주의는 실패라고 보면서요. 솔직히 그 차이점을 잘 파악하고 있진 못합니다. 게바라와 도덕, 왠지 어울리지 않나요?
지안님, 고맙습니다. 근데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항상 걱정인 것은 도대체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나는 뭘 해야 할 것이냐?인것 같습니다. 뭘 해야하죠? 흑흑.

클레어 2005-04-1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하긴요...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잖습니까?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거구요.. 물론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책을 읽은 사람중에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비젼을 아바나에서 찾고 정책을 만들어간다면 하루살이님은 이미 뭔가를 한 것일 겁니다. 흐흐~

하루살이 2005-04-11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데...^^
 

서울을 쳇바퀴 삼아 살아가는 아그들아.

봄은 벌써 돌아갈 채비를 하려 화려한 나들이옷을 챙겨 입었구나.

매화꽃이 피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진달래가 물이 한참 올랐다.

아마 2,3일 안으로 벚꽃이 피지 않을까 싶다.

내가 꽃구경하러 여러군데 돌아다녀봤지만 남산만한데도 찾기 힘들더라.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친구들은 새겨듣거라.

이번 주말이면 봄은 떠나간 겨울 여인을 찾아 서울을 비울것이니, 잠깐만 짬을 내어 배웅해주거라.

주말이 지나면 떠나간 빈자리의 쓸쓸함만 보일터이니 꼭 이번 주말안으로 봄여인을 만나라.

생애 봄날을 맞듯이 그 여인을 맞이하거라.

그리고 네가 발디디고 있는 그 곳에 그 떠나는 자의 향기를 전해주거라.

 

봄은 보아야 봄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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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1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4-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의 어원은 정말로 봄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ㅋㅋ

소리샘 2005-04-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을 보는 눈에 봄이 깃들고 봄을 느끼는 마음에 봄이 온다죠?
보이는 것마다 봄이네요..^^
봄산을 지나 봄기운 잔뜩 품고 걸어 내려온 봄바람이 부드럽습니다.
남산의 봄도..지금은 여린잎들과 한창이겠죠?

하루살이 2005-04-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옷 갈아입었어요.
 

김지하 시인의 최근 시집 <유목과 은둔>과 관련한 인터뷰를 듣다 감정의 혼돈에 휘말려 괴로웠습니다. 90년대 초반 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에, 자신의 생명사상을 근거로 분신을 만류해오던 목소리가 가져오던 혼돈과는 사뭇 다릅니다. 지금의 혼돈이 달리 다가온 것은 어찌 보면 저도 이제 나이를 점점 먹어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최근 '인생 뭐 별거있냐' 라는 우스개 소리가 삶의 진심을 담아낸듯 여겨지고 있는 와중에 시인의 은근살짝 사는 것이라는 말은 인생 뭐 별거없다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허망함이 잔뜩 가슴속에 스며드는 찰나에 인터뷰를 하던 탁석산 씨가 멋진 해석을 하는군요. 젊었을 적 치열하게 살았기에 나이들어 느슨하고 풀어헤쳐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말을 계속 듣다보니 그의 젊었을 적 고생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를 짐작케합니다. 외롭고 회한 가득한 긴 투쟁의 세월을 건너다 보니 어느새 백발...  삶이 얼마나 허망했을 것인지 말이죠. 전사로서라기 보다는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을뿐이라는 그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그의 외로움과 회한을 짙게 드리우게 만듭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꼭 그런 일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보다는 나에 대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아주 작은 욕심으로 느껴집니다. 물론 그 나의 삶이 사회와 따로 떨어져 별개의 것으로 이루어질 순 없을테지만 말이죠.

그래서 저도 혼돈된 마음을 어느 정도 씻어냅니다. 생명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라는 시인의 말에 동감하며, 그가 죽음의 근처에서 찬란한 생명의 꽃을 피워내기를 바랍니다. 그 꽃이 세상을 바꾸는 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꽃으로 피어날 것을 말이죠. 그래서 저도 배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정답이 없듯이, 그리고 그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은근살짝 훔쳐보기를 통해서 진짜 나의 삶을 나의 방식대로 찾아 내멋대로 살아가길 말입니다.

생명있는 것들은 왜 죽는거죠? 라는 시인의 질문이 귓가에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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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0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보았거든요... 클링턴이 나오는가 싶더니...끝나고 김지하 시인이 나오더군요... 그가 한 말 중에서...그 즈음의 나이가 되면...죽는 꿈을 많이 꾼다던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하루살이 2005-04-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물론이고 저도 아직 그런 꿈을 꿀 때는 아니겠죠?
활짝 꽃피는 동산을 거닐고 푸른 하늘을 나는 그런 꿈을 꾸시기를...
 
 전출처 : 인간아 > [퍼온글] [번역] 제국과 맞서기

제국과 맞서기

아룬다티 로이



나는 “제국과 맞서는 법”에 대해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질문이며 내겐 쉽게 내놓을 답이 없습니다.

“제국”과 맞서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제국”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 정부(와 그것의 유럽 위성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 그리고 다국적기업들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일까요?

많은 나라에서 제국은 기타 종속적 우두머리들과 몇몇 위험한 부산물들 즉 민족주의, 종교적 편협성, 파시즘, 그리고 당연히 테러리즘을 싹틔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업의 세계화 기획과 팔짱을 끼고 나란히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국이라는 인도는 현재 기업의 세계화 기획의 선두에 서있습니다. WTO는 인구 십억의 인도 “시장”을 억지로 개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인도 엘리트 집단은 기업화와 사유화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수상, 내무장관, 해외투자장관, 즉 인도에서 엔론사와의 거래를 승인했던 사람들, 나라의 하부구조를 다국적기업들에게 팔아 넘기고 있는 사람들, 물, 전기, 석유, 철강, 보건, 교육, 원거리통신을 사유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두 RSS의 멤버들이거나 숭배자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RSS는 히틀러와 그의 방법들을 공공연히 숭배해온 힌두교 극우단체입니다.

인도에서 민주주의의 파괴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능률과 속도에 발맞추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세계화 기획이 인도 민중의 삶 속으로 거세게 질주해 들어오는 동안 대규모 사유화와 노동 “개혁들”이 사람들을 자기 땅과 자기 일에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수백명의 피폐해진 농부들이 살충제를 먹고 자살하고 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나라 전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트 집단이 세계 정상 부근의 어딘가에 있는 상상의 목적지로 여행해 가는 동안 땅과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범죄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좌절과 국가적 환멸의 분위기는 역사가 보여주듯 파시즘의 완벽한 온상입니다.

인도 정부의 두 팔은 완벽한 협공 작전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한 팔로는 인도를 통째로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고 다른 팔로는 주의를 딴 데로 돌리며 힌두민족주의와 종교파시즘을 들짐승의 울부짖음 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합창곡으로 배합하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는 핵실험을 실시하고 역사책을 다시 쓰고 교회를 불태우고 이슬람사원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검열, 감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의 정지, (특히 종교적 소수자들인 무슬림 민중과 관련하여) 누구는 인도 시민이고 누구는 아닌지에 대한 규정이 지금 흔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구자라트 주에서 이천명의 무슬림들이 주정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계획적인 학살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무슬림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발가벗겨지고 집단 강간을 당한 후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방화범들이 상점과 가정집, 직물공장, 이슬람사원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십오만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무슬림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이 황폐화되었습니다. 

구자라트가 불타는 동안 인도 수상은 MTV에서 자기의 신작시들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살을 조성한 정부가 올해 1월 충분한 다수표를 얻고 선출되어 정권을 다시 잡았습니다. 아무도 학살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학살의 설계자이자 자랑스런 RSS 멤버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는 구자라트의 주수상으로서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가 사담 후세인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잔학 행위가 CNN에 나왔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담 후세인이 아니며 인도 “시장”은 전지구적 투자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대학살은 난처한 문제거리조차 되지 않습니다. 

인도에는 일억 이상의 무슬림이 삽니다. 우리들의 오래된 땅에 시한폭탄이 째각거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자유 시장이 국가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이 하나의 신화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시장은 국가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빈부격차가 커져갈수록 자원을 매점하려는 싸움이 거세집니다. “결탁에 의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키우는 작물과 우리가 마시는 물과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우리가 꾸는 꿈을 기업화하기 위해서 기업의 세계화는 가난한 나라들에서 인기 없는 개혁들을 강행하고 반란을 진압할 충직한 권위주의적 부패 정부들의 국제 동맹을 필요로 합니다.

기업의 세계화 ― 또는 그것을 제 이름으로 불러볼까요? 제국주의 ― 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정의를 시행하는 척하는 법정을 필요로 합니다. 

한편으로 북반구의 나라들은 자신들의 국경선과 대량 살상용 무기 저장고를 강화합니다. 결국에 그들이 세계화하려는 것은 돈, 재화, 특허, 서비스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시인해야만 할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도 아니고 인권에 대한 존중도 아닙니다. 인종차별이나 화학무기와 핵무기나 온실가스방출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 조약도 아니고 (신이시여 이것만은 예외로 해주시기를!) 정의에 대한 국제 조약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이상이 모두 “제국”인 것입니다. 이 충직한 동맹, 이 외설적인 권력의 축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과 그것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 크게 멀어져 가는 간격.

우리의 투쟁, 우리의 목표, 다른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그 간격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국”에 저항해야 할까요?

좋은 소식은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큰 승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곳 라틴 아메리카에서 여러분은 매우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볼리비아에는 코참밤바가 있습니다. 페루의 아레퀴파에서 봉기가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아르헨티나 민중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IMF가 야기한 참혹한 파괴의 잿더미에서 나라를 고쳐 짓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기업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이 힘을 모으고 있으며 이는 종교적 파시즘에 반대하는 진정한 유일 정치 세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의 세계화의 빛나는 저 대사들, 엔론, 벡텔, 월드컴, 아서 앤더슨에 대해 말하자면 지난 해 그들은 어디에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당연히 이곳 브라질에서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누가 대통령이었으며 지금은 누가 대통령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무력하고 절망적인 어두운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차양을 쳐놓고 그 아래에서 양복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폭탄 비가 우리 위로 내리고 크루즈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미끄러져 가는 동안 계약서에 서명이 되고 특허가 등록되며 석유수송관이 설치되고 천연자원이 약탈되고 물이 사유화되고 조지 부시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이 갈등 상태를 “제국”과 그것에 저항하는 우리들 사이의 직접 정면 대결로 본다면 우리가 지고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장 막을 수는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발가벗겼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열린 장소로 끌어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세계를 무대로 그 잔인하고 부정한 나신을 드러낸 채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제국은 분명 전쟁으로 치닫겠지만 그것은 이제 그 그림자를 보는 것마저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자기편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추악한 그 모습을. 오래지 않아 미국 민중 대다수가 우리의 동맹이 될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 워싱턴에서 25만명의 사람들이 이라크전에 반대하며 행진을 했습니다. 매달 그 항의는 힘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미국은 하나의 은밀한 역사였습니다. 특히 자기 민중들에게 비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의 비밀은 역사가 되었으며 미국의 역사는 공개적인 지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거리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모든 주장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깊이 헌신한다는 소리입니다. 독재와 이데올로기적 타락에서 구원하기 위한 민중 죽이기는 물론 미국 정부의 오랜 농담입니다. 이곳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분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살인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최악의 만행들은 미국 정부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지요.) 그가 없어지면 이라크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리란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미스터 부시라는 사람이 없어지면 전 세계가 한결 더 나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사담 후세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백악관의 부시를 폭격해야 할까요?

부시가 사실도 국제 여론도 개의치 않고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음은 더없이 명백합니다. 동맹을 구하는 모병 공세 속에서 미국은 사실들을 날조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기사찰이라는 제스처게임은 국제 에티켓의 어떤 왜곡된 형태에 대해 미국 정부가 내놓는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양보물입니다. 그것은 마치 최종 순간의 “동맹들”이나 어쩌면 국제 연합이 기어 들어갈 수 있게 “애완견용 출입문”을 남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새 이라크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기억의 날을 세울 수 있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귀를 멀게 하는 굉음이 되기 전에 계속해서 여론을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전쟁을 유리어항으로 바꾸어 미국 정부의 만행들을 사방에서 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그리고 그들의 동맹들)를 그들 자신으로 즉 비겁한 아기 살해자들, 물에 독을 푸는 자들, 겁 많은 장거리 폭격수들이라고 폭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불복종을 백만 가지 다른 방법으로 재창안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집단적인 골칫거리가 되는 백만 가지 방법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조지 부시가 “우리와 한편이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양하겠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세계 민중은 심술쟁이 미키마우스와 미친 율법학자들 중에서 한쪽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제국과 맞서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의 숨구멍을 막기. 창피주기. 조롱하기. 우리의 예술과 우리의 음악과 우리의 문학과 우리의 완강함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슬기와 우리의 더없는 가차없음으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세뇌 당해 믿게 된 그런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기업 혁명은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인 그들의 생각, 그들 판 역사, 그들의 전쟁, 그들의 무기, 그들의 불가피성 개념을 우리가 거부할 때 붕괴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많고 그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그들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고요한 날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2003년 1월 27일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 제3회 세계사회포럼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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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5-04-05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 시장이 국가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이 하나의 신화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시장은 국가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라는 부분을 주목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들을 둘러싼 우리의 손은 여전히 굳건하게 옆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