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 텔레토비에서 해피밀까지, 키즈 산업은 어떻게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었나
줄리엣 B. 쇼어 지음, 정준희 옮김 / 해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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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이는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아마도 스트레스를 간혹 대형할인마트에서 먹을것 사들이는 재미로 푸는 나 자신에 대해 한심해하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은 표지의 사진이 보여주듯 키즈마케팅을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하지만 쇼핑중독의 문제가 꼭 어린이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 책이 전체 연령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어린이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유는 아마도 <유년기의 자연화>라는 측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듯 싶다. 발달이론 중 하나인 <토들러 단계>에서 자연화란 사회적으로 습득된 특징이 인간의 본성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의 소비욕은 타고난 본성으로 간주되고 있다.(65쪽)

그러나 사실 소비라는 것은 본성이 아니다. 하지만 본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어렸을적부터 훈련되어져 자라는 아이들에게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비는 특히 영상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마케팅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욕구가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장시간 시청한 사람들일수록 지출이 높고 저축이 낮다는 통계(95쪽)를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텔레비전속에 비처지는 간접광고와 직접광고는 영아들이 광고와 프로그램과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트윈세대에게는 끝없이 그 욕구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단순히 어른들의 솔선수범으로 낭비를 줄인다거나, 불량식품이나 장난감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에 현실의 문제점이 있다. 즉 아이들은 <조르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고, 어른들은 그 조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항복하기 마련인 것이다.

소비욕구가 증대하는 것, 즉 소비문화 심취가 위험한 것은 우울증, 불안증, 자부심 저하, 심신증의 중대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과 텔레비전 시청 시간, 소비문화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 심리적 복지의 문제는 단순한 연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라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소비문화 심취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자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비문화에 심취함으로써 우울하고 불안하고 자부심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가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푼다는 나의 생각은 어찌보면 그 인과관계가 거꾸로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듯싶다. 쇼핑으로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점차 그 심리적 불만족의 정도가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염두해두어야만 할지도...

이런 심리적 복지 측면에서 만족과 행복의 열쇠는 보다 많이 획득하는 것보다 보다 적게 바라는 데 있다.(242쪽) 문제는 마케터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다 많이 획득하라고 부추긴다는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물들어 강력히 찬성하게 되고, 그 정도가 강할 수록 삶의 질은 낮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243쪽) 또한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청소년들이 음주와 흡연, 마약 복용에 보다 쉽게 빠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들 또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것이 더욱 큰 문제점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물질주의와 무능력이 서로 악순환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244쪽)

이런 문제점들은 직접 상품 마케팅을 담당하는 전문가들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업계의 도덕적 무책임에 있다.(261쪽) 광고대행사들은 기업고객들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기업들도 도덕적 책임감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중압감은 어린이들의 이익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람을 항상 압도하고 있다.(262쪽)

즉,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필요없는, 또는 해가 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와, 또한 그것들의 불필요성을 잘 알지만 아이들에게 팔려나가도록 아이들을 이용하는 마케터들을 양산하는 현실에서 진정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한 아이들로 자라도록 돕고 싶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텔레비전을 꺼야만 한다. 특히 텔레비전이 위험한 것은 광고를 할 수 있는 독점적 대기업들만이 조작된 이미지로 아이들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정보의 홍수 속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의 물결을 거부하고, 아이들의 일상속에 파고 들어가는 마케팅의 접근을 금지시켜야 한다. 현재 미국처럼 심각하진 않다 하더라도 학교내의 자판기나 학원 등에서 쏟아지는 홍보물로부터 자유롭도록 정책을 만들어가야 하며, 음식이나 장난감 등 잘못된 광고에 대한 제재를 가하도록 압력을 줘야한다. 그리고 제품에 대한 비밀이 없는 공개된 정보를 요구해야 한다. EBS 기획으로 꾸며진 텔레비전과 인간에 대한 기록에서 일주일간 텔레비전을 끄고 살았던 5개국 50가정들이 모두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가족들간의 시간이 많아져 즐거웠다고 말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험을 위해 텔레비전을 끄고 살았지만 앞으로도 텔레비전 없이 살고 싶다는 그네들의 소망을 우리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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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05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루살이 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을 사들이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부분에서 많이 놀랐다는 ^^

지난 주 다큐멘타리페스티벌 프로 중에서 텔레비전 혁명인가 뭐 그런 게 있었는데요... 보셨어요... 그 중에...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의 오지마을에 텔레비전을 설치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변화를 보는 것이었어요. 주로...그 날은 텔레비전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서 보여 주더군요...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드라마는 너무 재밌고 이런 식으로 포커를 맞추던데... 사실...그들이 텔레비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왜 안 들겠어요... 저렇게 멋지게 옷을 입고 근사한 도심지에서 살고 싶다. 이뻐지고 싶고 멋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뭐 이런 생각이요...

하루살이 2005-09-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를 잘 모르는데... 흐흑, 저도 가끔 스트레스 풀려고 먹고 있는 제모습에 놀랍니다.
아~그리고 텔레비전이 가져오는 동경이라는 측면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떠오르네요. 라다르크 사람들이 서구 여행객들과 텔레비전 속에 비쳐진 문명을 보게됨으로써 겪게되는 변화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이 책은 그 변화의 과정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답니다.(읽으셨는지도 모를텐데 괜히 아는척 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주강현 / 한겨레출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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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책장을 다 덮고나서 한참을 아쉬워했다. 원래 생각했던 무엇인가를 만족할만큼 얻지 못한 탓이리라. 그런데 도대체 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이었을까?

금줄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해 쓰여졌다는 부제가 해답의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록 금줄없이 태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금줄이란 것을 주위에서 간혹 보면서 자란 세대다. 그래서 어떤 숨겨진, 즉 책 제목의 수수께끼가 말하고 있는 어떤 비의나 감추어진 문화양식들을 책에서 찾아내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서울에서 자라고 조금 더 젊은 세대였다면 책의 내용들이 보다 더 새삼스럽게 다가왔을련지도.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너무 생소해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을 해보기도 한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굿, 남근과 여근의 풍속, 금줄, 미륵, 흰 옷, 개고기, 숫자 3, 돌하르방, 솟대, 서낭당, 광대, 구멍, 똥돼지 등은 주위에서 어느 정도 보아왔고, 관련된 이야기들도 그럭저럭 들어오던 터라 낯익다. 실은 우리의 문화가 낯익는게 타당한데, 이러한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 책이 쓰여진 이유가 될 터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와 복원을 주장할 수는 없다. 세월의 부대낌 속에서 부침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따라서 책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가 일상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왜 그토록 안타까운지에 대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사람이기 ‹š문이었을까? 일상에서 뜻한바는 알겠지만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화들이 사라지는 과정이 안타깝고 분명 지켜내야 할 유산이 있다는 것도 확신하지만 말이다. 즉 바로 이 부분이 책을 덮고 나서 느꼈던 막연한 실망감을 불러온 것 같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침향이다.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바다에서 떠오르는 나무들. 그 나무가 떠오를 때 세상은 변해있으리라는 기대. 미륵과 함께 현실을 견뎌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자 했던 민초들의 소원이 담긴 그 침향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찾지 못한 침향터를 알려주는 비목들이 한반도 곳곳에 감추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면 흥분이 된다. 그리고 머지않은 어느 순간 그 침향이 바다 위로 떠오를 것을 상상해본다. 아직도 세상은 침향을 묻어야 하고, 그 침향이 떠오르기를 기대해야 할만큼 나아갈 길이 멀다. 다만 남몰래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던 변혁의 꿈을 이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침향의 꿈도 조금은 퇴색되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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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0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삭혀진 글맛이 나네요~

주강현 하면..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책 생각만... 제가 왼손잡이라..뭐 특별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서... 그렇지만...흠..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보아선.. 읽기에 실패했던듯 합니다.

하루살이 2005-09-0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내용이 잘 기억안나는게 주강현 씨 글의 특징일지도...(농담? 혹은 진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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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나  과학이 현실과 멀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는데 지장 없는데 무엇하러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잔뜩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뜻모를 암호같은 공식만 가득할 뿐 그것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쓸모가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짐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그 이후 세계권력의 재편이나 힘의 싸움에서 핵은 결코 현실과 멀어진 적은 없다. 지금도 그 핵을 에너지로 쓸지, 무기로 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끌고 당기는 국가간의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 폭탄의 괴력을 알아챈 것은 물리학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직접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수학이나 과학은 삶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컴퓨터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힘든 요즘엔 더욱 그 알듯 모를듯한 공식들이 전혀 쓸모없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활패턴 자체를 완전히 뒤바뀌도록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수학, 과학의 근원적인 힘인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과학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SF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작품도 있어 판타지와 SF가 섞여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듯 싶다. 1+1=2라는 가장 상식적인 생각이 무너진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기우뚱거릴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테드 창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흥미롭다.

특히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우리의 사고가 시간적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고 있다. 즉, 나의 행동이 어떤 원인을 거쳐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원인적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빛이 물을 통과할때 굴절을 하는데 그 굴절한 빛이 도달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것만큼 굴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빛이 그대로 직진하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물 속에서 빛의 속도는 느려지기 때문에 물 속에서의 거리가 어느 정도 더 짧았을 때 전체 시간이 짧아질 수 있으므로 굴절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운명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순차적인 경로를 통한 인생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도달점이 정해져 있고, 그 도달점을 향한 길마저 정해져 있다는 것. 그 길이 바로 운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따라서 오히려 빛의 성질인 페르마의 원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운명론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나 <지옥은 신의 부재>같은 경우는 전혀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외모...>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해 똑같은 현상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옮겨적듯이 써내려가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입장차를 담아내고 있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외모에 대한 감상을 없애주는 기계를 착용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은 어떤 한쪽에 치우침없이 서술하면서도 우리네 사회가 어떻게 잘못 굴러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쇼몽>이나 <오!수정>이 기억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그것을 기억하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듯, <외모...>가 비록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입장차가 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정말 흥미진진하다.

세상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고의 기틀을(그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한 소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의심하고 깨뜨려보는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깨우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테드 창은 항상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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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1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무쟈게 사보고 싶네요....아..책이 탑을 그것도 여러개의 탑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이런 덴장...!)

물만두 2005-08-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하루살이 2005-08-3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의 탑이 무너지는 순간을 고대하며...
아~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하죠 물만두님.
 

앵자산은 1779년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던 소장파들이 관리의 눈을 피해 강학회를 열었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700미터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산이지만 그곳까지 들어가기 위한 길은 생각보다 깊었다. 더군다나 계획없이 갑자기 오르게 된 산이다 보니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조차 쉽지 않았다. 승용차를 타고 갔다면 길을 헤매더라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었을테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자칫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번 앵자산행은 전자의 경우인지 후자의 경우인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첫 출발부터 뒤죽박죽이었다.

광주시외버스를 타고 천진암으로 향하던 길, 얼핏 앵자산행 표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버스는 지나쳐버리고,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물어보았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천진암이라는 곳이 목표지라 생각하고 종점에 내리니, 마침 성지라는 곳을 보여주는 듯 거대한 십자가가 보였다. 그곳은 한창 새로운 성지개발을 위해 새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고 안도하고 겨우 산길을 찾아 올라서는데, 아무래도 걱정스럽기는 하다. 30분쯤 올랐을까? 중년부부가 산중에서 도토리를 줍는라 바쁜 모습이다. 이 산중엔 정말 도토리 천지라 다람쥐 먹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부부는 마을 사람들 같이 보여 얼른 앵자산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은 무갑산이며 앵자산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 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남아있고해서 걸어가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에 갈림길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더군다나 이정표 하나 없으니 이건 정말 눈감고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시계를 쳐다보며 아직 여유가 있으니 가볼데까지 가보자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2시간을 오르다 이제 서서히 내려서는 순간,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곳이 앵자산인지 무갑산인지 전혀 알지 못한채 하행을 준비했다. 내려가보면 어떤 산을 올랐는지 그리고 산행의 경로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서다 우뚝 발걸음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앞이 온통 덤불에 가시나무 투성이었다. 길은 사라지고, 다시 돌아서자니 한참을 가야하고, 이제 별 수 없었다. 밀림을 통과하듯 무조건 돌파하는 수밖에. 일단 큰 산이 아니니 계곡 쪽으로만 가면 분명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려섰다. 아, 팔은 가시에 긁히고, 다리를 묶는 덩굴들, 그리고 얼굴엔 거미줄과 뒤엉킨 가지들. 계속 내려설 수 있을까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다리에 힘도 빠지기 시작했다. 팔은 가시에 긁힌 자국으로 부어 오르고, 신발은 완전히 젖어버렸다.

길은 보이지 않는데, 마냥 헤쳐가야만 하는 기분. 그렇다고 절대 포기하고 주저앉을수도 없는 상황.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순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은 과연 누가 이 산중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찾으러 올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런 막막함도 잠시 조금 더 내려가다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동물이 지축을 울리며 도망간다. 이런! 멧돼지다. 막막함은 온데간데 없고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한다. 저 놈이 뛴 쪽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지만 결국 막혔다. 할 수 없다. 놈과 가까이 가더라도 그쪽이 그나마 길을 낼 수 있는 곳이니 죽음(?)도 각오하는 수밖에. 두려움에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찌하랴. 제발 맞닥뜨리는 일만 없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뚫으며 내려가길 20분 정도 드디어 사람이 다니는 길이 보인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아~ 살았다. (오! 나의 이 프런티어 정신이여. 전국의 산악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 나에게 상이라도...)

3시간의 산행이 이토록 짜릿한 적은 없었다. 최근 산에만 올랐다 하면 왜 길을 잃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핑계로 예상루트보다 더 먼 길을 택하다 결국 고생을 자초했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언제나 문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욕심은 욕심이라기 보다는 의지로 표현해야 하겠지. 그 의지가 없었다면 멧돼지와 막다른 길에서 오도가도 못했을터이니 말이다. 막혔다고 생각한 순간 터진 곳을 찾을 수 있음을 배운다. 막혔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버리는 순간 모든게 끝이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순간 모든게 끝이나 버린다.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항상 진행중이다. 삶은 무한하다. 아니 무한한 것이 삶이다. 멈추섬에 이미 진행중이 아니기때문이다. 삶이 진행중이라면 그래서 무한한 것이리라. 그 무한을 살아가는 방법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도 마음도 흐르도록 두자. 때론 격렬하게 때론 잔잔하게. 아~ 살아간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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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8-2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햐...실감납니다...
실화군요...!
폴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가 뜬금없이 생각나네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 그래서 포기할까 말까 고민할 때, 그 순간 난데없이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의 앞자락을 희미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조물주가 우리를 길들이는 방식인 걸까?

하루살이 2005-08-3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길들여지고 있었더군요. 무지 고생하면서 말이죠. 흑흑.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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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禍의 근원은 욕심에 있다고 선인들이 말씀하시고, 경서를 통해 주의를 주건만, 으례 당연한 가르침임에도 당연하게 지켜내지 못하는데서, 그런 말씀들이 세월의 잊혀짐 속에서도 굳건히 남아 우리의 눈과 귀로 전해져오는 것은 아닌가싶다.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시기 질투하지 말라 같은 명령투의 금언들은 간혹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못한채, 그저 지켜야만 하는 무엇으로 인식되건만, 실행은 무던히도 힘들다. 아마 금지된 행동이 가져올 결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말고는 정작 그 말씀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는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 근거의 빈약보다는 차라리, 욕망의 실현이 가져다 줄 달콤함이 잘못된 결말이 불러올 참혹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련지도 모른다.

이런!!! 로알드 달의 <맛>이라는 이 단편집은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나는 엉뚱하게 이다지도 딱딱한 소리를 해대고 있다니... <맛>을 읽는 재미는 마치 맛있는 과자가 다 없어질까봐 조심조심해서 하나하나 꺼내먹는 것에 비유될정도로 크다.  마지막 반전이 가져다주는 유쾌함과 통쾌함. 그래서 오히려 그 마지막 반전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싶을 정도다. 이 반전을 읽고 나면 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는 점이 너무 아쉬워서 말이다.

<맛>에 실려있는 단편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주인공이 집착하는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그것을 발견한 다음, 그것을 얻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집요한 작업의 과정 속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행동이나 대화를 통해, 마치 내가 그 탐욕의 현장 바로 그곳에 있으면서 주인공인마냥 착각할 정도록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리고 바라던 바를 얻어낸 것 처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의 느긋함이 어떤 여유로움을 주는 바로 그 순간에 로알드 달은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 갈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독자는 눈알이 튀오나올 정도록 아프기 보다는 웃음보가 터져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서 가슴 깊게 다가오는 탐욕의 허무함과 상실감.

자, 그 뒤통수를 맞고도 당신은 바로 그 어떤 것에 집착해 조마조마해하며 살아갈 것인지 저자는 입가에 웃음을 띠운채 넌지시 묻는다. 독자에게 어떤 직접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욕심이란 것의 끝없는 확장과 그 허무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유쾌한 삶의 행로를 살짝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웃어제낀 바로 그 어리석은 탐욕의 주인공처럼 되지 말라는 충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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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30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8-3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제 별 다섯 개 주는 거 정말 부담스러워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