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한달에 하루는 굶어보자고 생각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하루 끼니를 굶은 돈으로 배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나서는 것도 아니요, 결식아들의 배고픔을 직접 체험해보자는 뜻도 아니다. 그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TV를 끄고 온종일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을까 놀라게 된다. 매일 TV를 끄고 살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TV나 라디오 없이 하루를 보내면서 행복해한다. 물론 처음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지만.

순전히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재충전을 위해 회사나 학교를 쉬는 것 마냥, 나의 몸뚱아리도 가끔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내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내장들도 가끔은 쉬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괴상망측한 생각으로부터 하루 단식은 시작했다. 좀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하루 단식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하루 반 정도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전까지. 먹는 것은 차나 생수. 이런 날엔 TV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프로그램은 온통 음식 이야기다. 돌리는 채널마다 먹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배고픔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다이어트보다는 살을 찌워야 할 판에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 작정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참아낸다. 머리 속에 계속 어른대는 음식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 내가 얼마나 식욕이라는 탐욕 앞에서 무력한지를 실감하게된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시간을 먹는 것에 소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된다. 음식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리고 ,먹고, 설겆이 하고. 우리네 삶에 먹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으니, 하루의 많은 부분을 공들여 준비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느끼는건대, 하루 단식을 끝내고 먹게되는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쌀 한톨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내장도 푹 쉬워 행복해했을 테지만 혀와 뇌는 더욱 행복해진다. 물론 인내의 열매이긴 하지만.

끼니의 소중함, 참기 어려운 탐욕의 실체. 하루 단식은 의외로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제 두번 시도해봤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기는 힘들것 같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실험을 해볼지 확신할 순 없지만 나태해진 나의 마음을 일깨우는 소중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가끔은 비워보자.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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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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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가혹행위를 담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졌던 일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엔 학대자 개인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다, 이것은 미군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힘의 우월성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 누려보고픈 욕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느 잡지에서 이런 잔혹함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 실험을 예시로 들었다. 인간이란 불합리한 명령앞에서도 얼마나 복종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 실험을 통해 미군의 잔혹성과 함께 나치의 비인간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보다는 상황의 논리에 의해 행동이 선택되어진다는 측면을 이해했다고 할까... 이런 상황의 논리는 이 책 3장의 달리와 라타네가 행한 실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한 사람은 대략 65%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65%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거야' 라고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35%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머지에 대한 설명은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심리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한 논거로 짤막한 예시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일까? 실험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향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바로 이런 부분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 이외의 사람들, 실험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차곡차곡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실험이 끝나고 나서 피 실험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추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심리 실험이 가져다준 압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 경로가 뒤바뀌어 버린 사람, 그리고 주류를 형성했던 행동을 선택한 사람이, 실험이 끝난 후 비슷한 상황에서 비주류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심리실험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씻어내고자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 또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영화<어퓨 굿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퓨 굿맨>은 탐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인데 군대 내 폭력을 다룬 법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군대 가기전에 한번 보고, 제대 하고 나서 다시 우연찮게 접하면서 순간 내가 얼마나 변해 있었는지 굉장히 놀랬던 적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학생이 개구리복(군복)을 입고 나서는 사선에서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즉, 내가 겪은 상황이 어떤 사건의 당사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버렸다. 상황에 대한 이해, 실험의 당사자가 겪은 경험이 가져다준 변화를 나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 책은 20세기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심리실험 10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맛깔스럽게 써내려간다. 이 책의 흐름이 심리에서 뇌로 변해가듯, 심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도 유심론적 측면에서 뇌생물학쪽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흐름이 환원주의를 넘어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 못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즉, 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 등등의 여러가지 정신병을(이 책에선 또한 정신병에 대한 진단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뇌의 일정부분의 고장으로 발생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런 병에 뇌의 이런 부분을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치료방법이 횡행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환원적 방법을 통한 치료가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온 것을 현실로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당사자에겐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이해와 치료가 어떤 부작용이나 오해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을 가질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더 차분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은 이런 환원적 사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황우석 박사의 사건이 가져다준 희망과 절망의 희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만병통치약에 대한 인간의 숙원,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염원. 정말 가능한 일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오리무중인 인간 심리에 대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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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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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는 2,30년 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대도시가 아닌 조그만 소도시 대학에서 히틀러학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노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 이 부부는 결혼과 이혼을 여러번 거쳤기 때문에)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같기도 하며, 대화 중간 중간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소음이 끼어들고(이게 바로 책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를 의미한다.) 수많은 브랜드 이름의 홍수들이 넘쳐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다. 사건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유독가스를 실은 기차가 전복되면서 발생하는 소동, 그리고 어머니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실험용 약물을 복용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큰 얼개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야기보다는 주인공 각자의 행동양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본질보다는 항상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여진다. 그것은 소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족은 미국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헛간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 헛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과정속에 드러나는 대화를 엿들어보면

"일단 이 헛간에 관한 표지판을 본 다음에는 헛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항복입니다. 우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만 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에 파묻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네살짜리 아이와 아버지의 자동차 속 대화도 잠깐 들어볼까!

<오늘밤에 비가 올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오늘밤이라고 했어요>

<지식은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지요. 그것은 매일 매순간 변하고 자라요.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소설은 이런 생각의 현미경을 가지고 공포라는 감정을 들여다본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범람함으로써 쓸데 없이 비대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우리의 삶에서 비만이 주는 공포로 말미암아 수많은 다이어트가 성행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건강 정보들로 인해 나는 항상 어디가 아픈 사람이지 않는가 염려해야 하며, 잠재적 암 환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자신의 신체적 변화가 주는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검사에서 드러나는 수치로 인해 막연한 공포를 갖게 되고, 죽음이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뇌의 작용을 억제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하지만, 오히려 현실과 개념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리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유독가스가 새어나옴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진 석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나 감성을 갖어야할지도 잘 모르는듯이 보여진다.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또한 매체를 통해 겪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배워야지만 가능한 것일련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본질보다는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포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또 설령 걷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포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쉽사리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포장은 수많은 화이트노이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이트노이즈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네 삶은 우울한 색깔로 뒤덮여 가고 있는듯만 하다.

소설은 결말부에 충격적 사건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로 믿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믿음 또한 본질적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 믿지 않으면 건재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믿는 척 함으로써 발생하는 믿음일 뿐이다. 즉 포장지를 걷어낸 것은 거짓 믿음이며, 이것 또한 또 다른 포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는 진짜 사물에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고, 진실보다는 거짓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진실과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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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의 영화를 줄곧 보아오면서도 열광하지 못했던 것은, 영화가 대부분 우울하고, 환상 속에 담아낸 내면의 쓸쓸함을 견디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왠지모를 삐뚤어진 캐릭터들의 미워할 수 없는 악의, 그래서 차라리 악마가 아닌 악동으로 표현되어지는 감독이 표현하는 화면은 개인적으론 너무나 어둡게 느껴진다. 숨어들어 찾아간 안식처라기 보다는 빨리 벗어나고픈 하수도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울한 영화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계속 봐 왔던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빅 피쉬>를 통해서 그가 밝은 세상 속으로 한발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고, 과연 이런 변화가 돌연변이 인지, 아니면 점차 세상으로 나올 채비를 갖춘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아직 보진 못했지만, <유령신부>를 보니 이제 그가 세상과 화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너무나 유쾌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적 결말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의 색깔이 사라져버렸다고 단정지워버릴수 있을 정도로 변한듯 느껴지지만, 그의 화면은 여전히 환상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것은 안식처의 느낌을 준다는 것.

<유령신부>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느낌을 주는데다, 화려한 조명, 아름다운 음악 등이 상상의 세계에 잘 녹아들어 유쾌하다. 무엇보다도 뇌리에 가득 새겨진 것은 피아노 선율이다. 빅터와 빅토리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의 피아노 솔로, 빅터와 유령신부가 함께 치는 피아노 듀엣은 너무나 아름다워 절대 잊혀지지 않을것 같다. 이 음악은 팀 버튼의 <비틀 쥬스>, <배트맨2>, <가위손>, <화성침공>,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의 작품에서 신비로운 음악을 담당했던 대니 엘프만이라는 사람이다. 최근 인기를 누렸던 미국 시트콤 <위기의 주부들>과 영화 <스파이더 맨>도 그가 음악을 담당했다.

팀 버튼과 대니 엘프만의 관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의 관계와 비슷한듯 싶다. 아무튼 팀 버튼의 변화를 엘프만의 음악 속에서도 그대로 찾아질 수 있을듯 싶다. 그의 음악이 신비로움을 넘어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의 영화도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따뜻함이 녹아들어가 있는듯하여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서운하다. 아무튼 거북한 느낌없이 팀 버튼의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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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12-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팀버튼 참 좋아하는데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좀...
그게 저는 팀버튼의 냉소적인 면을 참 좋아하거든요. 저도 좀 냉소적 인간이라서 드물게 만나는 비슷한 부류의 인간에 대한 애정처럼. 그럼데 찰리는 마지막에 따뜻한 결말로 끝나서 속상했어요. ㅎㅎ 같은 사람에 대한 이렇게 서로 다른 기대라니.

하루살이 2005-12-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제가 거북해하면서도 계속 그의 영화를 본 것은 그 냉소 덕분이겠죠?
음~ 찰리도 따뜻한 결말이라니...
확실히 팀 버튼이 세상과 화해를 한 모양입니다.
전 <유령신부>의 해피엔딩에 엄청 놀랬더랍니다.^^
 
올드보이 한대수
한대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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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대수하면 '물좀 주소'가 떠오른다. 음유시인이라거나 히피라거나 같은 여러가지 레테르로 생각되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직 물좀 주소라는 거친 음성만이 귓가에 맴돈다. 간혹 길을 걷다 물좀 주소라고 읊조리게도 만드는 힘. 나에게 한대수는 사막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 사막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연상시킨다. 메마르지만 오아시스를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 모래바람을 등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놓여진 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을 걷고자 하는 외침. 그 자유의 목소리가 어떻게 그의 몸에서 만들어져, 세상을 향해 토해져 나오는지를 이 책은 살짝 보여준다.

크게 1,2,3부로 나뉘어진 '올드보이...'는 일단 사진이 눈에 띤다. 사진으로 밥 먹고 살아온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살펴볼 수 있을듯도 싶다. 노래로 밥먹고 산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밥 먹고 산다라는 표현에 놀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어린 학생에게 상담한 내용을 보면 이해가 갈법하다. 학업을 포기하고 노래를 공부하고 싶다는 여학생에게 한대수는 정규공부를 계속하도록 권한다. 노래를 비롯한 예술이라는 것을 하는 것은 배고픈 일이라는 것이다. 서태지와 같은 성공은 만분의 일도 안되는 케이스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음악이 좋아서, 또는 그림이 좋아서 그것에 전념하고 싶다면, 직업으로서라기 보다는 취미로 가지라는 것이다. 직업으로서 예술은 배고픔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취미로 즐기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버텨온 간난을 고스란히 드러내놓는것 같다. 모든 곡이 금지되어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러나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삶의 신산함이 그의 글 속에 녹아있는듯 싶다. 1부에선 이런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6,70년대 미국의 클럽 문화와 자신의 노래 역정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가슴으로 전해진다.

2부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 9.11테러로 인해 바라본 미국이라는 제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진술하는 부분은 그가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다. 2부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마약과 같은 약물 중독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카인, 헤로인, LSD, 대마초 등등 흔히 록이나 히피 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마약에 대한 상세한 설명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다. 중독성 여부나 그것의 효과부분에서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냥 무턱대고 모든 마약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된다. 그렇다고 한대수가 마약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싶다. 세상과 떨어져있음으로 인해 어떤 창조성의 계발을 가져오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천당이 될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즉 창조적 이면에 감추어진 파괴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중독성이 강한 약물일수록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뇌를 파괴시키는지, 그리고 그런 약물들로 인해 자신이 좋아했던 록스타들이 단명하게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고 있다.

3부는 여행일지다.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옥사나의 고향 몽골과, 유럽, 그리고 떠오르는 파워 중국을 다녀온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 여행일지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나는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갈때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 하는 점이었다. 그처럼 미술이나 음악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국적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될까? 곰곰히 생각해보건대 나의 여행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중점을 두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현지 음식정도. (하지만 이것도 몇년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게 됐으니 그다지 쉽게 경험할 순 없을듯하다) 그러나 한대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여행은 눈요기뿐만이 아니라 현지인들과의 대화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난 바로 그 부분에서 여행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조금 바꿔야하지 않을까 깨우친다.

삶은 결론없는 경험이다(298쪽)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 것이다. 그저 자연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세상에 대한 유일한 잣대를 벗어던지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행복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행은 다른 문화를 배우는 과정이다. 그네들의 습관, 음식, 관습을 배우고 그 속에서우리가 인류라는 공통인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우리가 똑같이 사랑 평화 인관관계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느끼게 된다.(299쪽)

모두가 똑같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토대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음악에 흥이겨워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하고, 그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내는 사랑, 그리고 내가 전하고 싶어하듯 남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같이 느끼고 이해하고자 하는 평화의 정신, 올드보이 한대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의 자유로운 삶의 향기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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