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영화 속에서도 박중훈이 연기하고 있는 왕년의 가수왕 최곤을 팔아먹고 싶어하는 제작사 사장이 나온다. 7080세대가 소비력이 있으니, 지금 그 구매력을 이용해 마지막으로 털어먹자는 심산이다. 최곤은 그것이 매니저와의 결별을 통해 이뤄진 일이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돈이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겠지만 사람은 없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한다. 영화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별이 스스로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그런데 이 영화는 음반 제작사 사장처럼 추억을 팔아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그렇더라도 괜찮다. 비디오 킬 더 라디오 스타 라고 괴로워하던 때가 벌써 수십년 흘렀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디오처럼 추억은 그것을 팔아먹는다고 해서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귓가에는 여전히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런데 정말로 라디오의 사람냄새가 좋나? 사실 라디오를 틀면, 특히 FM라디오는 음악이 줄어든 자리에 연예인들의 신변잡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TV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다방 아가씨와 철물점 아저씨, 고스톱 치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며 서로 정다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가능하기는 하다. 영월보다 더 적은 곳에서의 지역 방송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지금과 같은 거대한 도시 속에서도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곤의 방송이 서울로 들어가 전국방송이 되는 순간 영월에서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이것이 라디오 스타라는 이 영화의 매력이자 환상인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라디오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둘러보게 만들기도 한다.

가수와 매니저의 관계. 흔히 사회시간에 배웠던 1차적 관계인지, 2차적 관계인지 모호하지만, 우리는 2차적 관계 속에서도 1차적 관계를 목말라 하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최곤이 불렀던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가 여전히 사람들 입에서 불려지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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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행복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까요, 만족의 다른 이름일까요.

목요일 10시부터 1시까지의 3시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무엇으로 가득찼던 것일까요.

사형수 윤수와 자살을 시도하는 유정의 만남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유정이 자살을 꿈꾸는 것은 과거의 상처때문입니다. 그 상처 자체보다도 더 큰 것은 배신감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엄마에게 다가갔을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의 뺨을 때립니다. 위로하고 감싸주고 쓰다듬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부와 명예라는 다른 이름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아니죠. 어머니도 겁을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감당 못할 그 무엇. 영화는 유정이 엄마를 용서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윤수는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눈이 먼 남동생과 함께 노숙생활을 시작합니다. 유정의 애국가를 듣고 힘을 얻곤했던 동생은 어느 겨울날 숨을 거둡니다. 윤수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흔들리고 짧은 것인지를 깨우칩니다. 다시는 사랑 같은 것 못할 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가스배달을 하던 시절, 미용실 아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찾아온 위기는 아내의 자궁외 임신. 수술비조차 마련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결국 한탕 하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왜, 칼을 들었는지조차 모르게 말입니다. 동료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쓴채 사형만을 기다립니다. 이때 윤수의 칼에 쓰러졌던 파출부 아주머니의 엄마가 찾아옵니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편히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말입니다.

영화는 용서를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조차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하는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의 문을 서로에게 열어주며 비로소 용서라는 온기가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 겁니다.

그 행복은 과거를 씻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때문일까요.

이들의 행복이 조금은 낯설어 보입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살고싶다는 소망을 간직한 것은 오로지 삶이 살아갈만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너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행복지수. 경제강대국 보다는 못산다고 생각하는 동남아 국가들이 훨씬 높죠. 그 행복감은 윤수와 유정의 행복과 같은 행복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어디서 찾아온 것일까요.

옆 사람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죠. 한번쯤 안아보는 건 어떨까요.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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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0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우리도 안아보아요. 꼬옥~

하루살이 2007-01-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해라!!

파란여우 2007-01-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부끄)*^^*

하루살이 2007-01-0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고~ 함께 해요
*^^*

프레이야 2007-03-2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며 '용서'를 생각했어요. 그 할머니의 용서가 눈물겨웠어요.
용서는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욱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봉산 주봉

해가 막 떨어지려는 찰나의 도봉산 모습입니다.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의 실루엣은 북한산이고요. 뽀샵을 안한 사진이다 보니... 앞에 어둠 속에서 솟아있는 바위가 바로 도봉산 주봉입니다. 예전 산악인들이 바위연습을 많이 하던 곳이죠.

무척 추웠습니다. 감기 기운마저 있었는데. 하지만 바위가 품고 있는 자기장이 묘약이라고도 하더군요. 그 덕분인지 다음날 몸이 조금 괜찮아진듯 하기도 합니다. 추위에 조금 떨었지만 감기가 악화되지 않은걸 보면 효험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찬바람이 불어도 해는 뜨고 가라앉습니다.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군요. 갈대처럼 흔들흔들 거리는 제 마음 속엔 아직 태양이 들어서질 못했는가 봅니다. 따뜻한 햇볕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와 제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주었으면 합니다. 올라서는 해가 아니라 사그라드는 해을 향해 빌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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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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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은 것은 몇 주 전인데 이제서야 자판을 두드린다. 붕어에 가까운 기억력으로 8편의 단편 내용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쉽게 생각나진 않는다. 나쁜 소설과 국기게양대 로망스, 수인 정도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정도다. 어쨋든 소설이 꽤 재미있는 반전으로 끝을 낸다는 공통점이 있어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3편을 포함해 대부분의 소설들이 웃음 뒤에, 나와  내 주변을 힐끗 돌아보게 만든다는 묘미도 있다. 내가 처한 위치, 또는 목적이 흐지부지되고 주위 환경에 동화되거나 또는 차라리 오해가 나은 착각이나 속내를 비쳐보일 수 없는 아부 등이 소설을 전반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게양대 국기를 훔쳐 생계를 유지하는데 게양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난다. 소설만 읽어주겠다면서 결국엔 응큼한 행동을 한다. 거짓말의 냄새를 맡다가 어느새 거짓말을 풍긴다 등등) 

정말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다.

그냥 날 내버려두세요 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 인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의 인간. 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로 형성된다는 인간. 이러니 내 이럴수밖에.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갈팡질팡함이 꼭 내 마음 속을 닮아 애잔하면서도 부끄러운 웃음을 흘린다. 제발 내 무덤앞 비명엔 갈팡질팡하다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어쩌랴 갈팡질팡하는 것이 숙명에 가까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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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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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느낌은 당혹감이다. 음` 소설도 이렇게 쓸수 있는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나 할까. 짧은 논문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일기장을 보는 것 같다가 꿈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가 기괴한 공상과학영화를 보는 것 같다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루하다거나 너무나 황당무계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후려갈긴 것은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단편이다. 마치 논문을 써내려가듯 소설 속 달걀이라는 단어를 집중 해부하면서 이것이 음란소설임을 증명한다. 작가의 후기에서처럼 친구들이 정말로 이 소설을 음란 소설로 치부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글장난이 얼마나 그럴싸 하는지를 방증한다.

논쟁의 기술은 또 어떤가. 논쟁이라는 것이 토론과 달리 승부가 결정나는 한판 싸움임을 강조하며 그것이 생사와 맞먹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보고 있자면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끌여다들이는 한심한 작태에 웃음이 터져나오고, 논리가 아니라 치사함으로 승리를 거두고자 함이 결국 살인까지 이어지는 황당무계함을 보여준다.

그러고보니 유독 이 작가는 죽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8편의 단편에서  적어도 5편은 죽는 모습이 나온다. 노란 육교는 아예 죽음으로 향하는 망자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설정이다.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이야 어떠하겠는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일까? 요즘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만 몰두해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다. 당장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대도 눈하난 깜짝안할 태세다. 어쩌다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소설은 죽음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죽음이 죽음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집착하지도 초연하지도 않은 상태. 죽음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 그렇다면 그것은 또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인가?

두유전쟁을 보면 애시당초 이런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것 같다. 머리기름이 유전적 가치를 지닌 한 사내를 둘러싼 미국과 한국의 대결은 그저 코미디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 나타나는 죽음은 코미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한바탕 웃으며 살아보자~. 이래저래 이세상도 저세상도 코미디 아닌가? 망상에 가까운 꿈일지라도 놓치거나 버리지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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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하하하하
내년에는 순수문학책을 좀 읽어보려구요.
아마 하루살이님의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하루살이 2007-01-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도움이 될련지... 제멋대로 읽는 버릇이 많아서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