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강아지를 키웠을 때는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관리하는 것은 어머니가 주로 하셨다. 나는 그저 학교 갔다오면 산책하고 귀여워해주는 것 말곤 없었다.

이제 나이를 먹어 반대로 딸내미를 위해 강아지 두마리를 키우고 있다. 

사료를 주고 똥을 치우고 관리하는 것이 오롯이 내 몫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가끔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뭐,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내가 정해놓은 것일뿐이니 강아지들이 그 경계선을 알아차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나도 깜짝 놀라곤 한다. 

어느새 알밤 하나를 강아지들에게 아주 세게 먹이곤 했기 때문이다.

'아 쫌!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몇대 쥐어팬다.

 

어라? 내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있었나.

나보다 약한 이에게 쉽게 폭력을 가하기 쉽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쉽게 폭력을 사용하진 않는다.

그런데 왜? 강아지들에겐 주먹이 쉽게 나왔을까.

 

아마 약한 대상인데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도덕적 제약이 사람에 비해 느슨한 것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내 안에 이런 폭력성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에 놀란다.

그리고 강아지를 키우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무엇인가를 키워낸다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관심을 갖고 방법을 찾고... 그 애정의 크기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러나 지금 난 딸내미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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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 마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면 99% 두 마리 개를 묶어둔 줄이 엉켜져 있다. 잠깐만 들여다봐도 그 엉킨 줄이 몇바퀴 꼬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한바퀴 엉켰을 때 반대로 돌아 푸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돌기 때문이다.

꼭 둘이 엉켰을 때만은 아니다. 강아지를 묶어둔 쇠파이프 기둥에 엉켜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빙빙 돌다 결국 한뼘쯤 움직일만큼의 줄을 남겨두고 버둥버둥대고 있다.

'이런 멍청이들!'

하고 한마디 내뱉으며 강아지의 엉킨 줄을 풀어준다.

그런데, 가만....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후려맞은듯한 생각이 든다.

내가 갖고 있는 고질병.

결국 병원을 찾아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일시적으로 나았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한다.

어라? 이거 나도 한 방향으로 계속 돌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작스레 찾아온 깨달음에 내 삶의 궤적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혹시나 어떤 부분에서 엉키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본다.

그 엉킴의 시작점을 찾아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일단 습관적 행동 중 잘못됐다 여겨진 것들은 멈춰보고, 반대로 풀어볼 요량이다.

부디 엉킨 줄이 풀리는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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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어

여름이면 찾아오는 손님. 1978년 한국을 찾아온 <죠스> 이후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죠스>의 '빠~밤 빠~밤 빠밤빠밤' 심장을 조여오는 듯한 음악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영웅과 악당의 대결구도. 죠스는 새로운 악당으로 등장한다. 죠스는 꽤 인기를 얻어 5년 후 <죠스바>라는 아이스크림까지 나왔을 정도. 하지만 이후 나온 상어 소재 영화들은 죠스의 아류이거나 그저 그런 영화에 그쳤다. 

좀더 자극적이거나 좀더 강력한 상대가 필요했을까. 20여년이 흐른 후 상어는 유전자 조작된 괴생명체로 나타났다.(물론 그 전에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상어가 제작되긴 했지만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딥 블루 씨>. 하지만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괴물이 꼭 상어일 필요는 없을터. 그래도 한정된 공간이 갖는 공포감을 잘 드러냈다.

이후 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상어 영화가 없다(순전히 개인적 평가다) 20년이 조금 못돼 <언더 워터>라는 영화가 나타났다. 서핑을 즐기던 여주인공이 상어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암초에 피신하면서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는 내용이다. 간만의 차로 인해 암초가 물에 잠기는 것은 시간 문제. 즉 한정된 공간에 제한된 시간이라는 요소가 더해졌다. 해변까지는 불과 200미터. 희망을 눈앞에 두고서 진행되는 사건이 흥미진진했다.

<47미터>는 이 <언더 워터>와 많이 닮아있다. 샤크케이지(상어를 구경할 수 있도록 고안된 철창 상자)라는 한정된 공간과 20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산소통. 즉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투라는 점이 비슷하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가 된 것이 바로 소리다. 심해라는 공간이 갖는 고요함이 공포심을 더욱 극대화한 것이다.  

 

2. 소리

<47미터>는 소리가 주는 심리적 공포를 잘 이용하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빛이 번쩍 하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리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친구들과 장난을 칠 때도 살금살금 다가가서 "왕"하고 큰 소리를 내 깜짝 놀라게 만든다. 고요함, 또는 잔잔함 속에서 쾅 터지는 소리가 주는 공포감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듯하다. 

<47미터>는 이런 큰 소리의 공포가 아니다. 심해의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가 긴장을 자아내는 것이다. 거친 숨소리는 평온을 잃었다는 표시이자 산소통을 빨리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급박함을 나타낸다. 영화는 이 소리를 적소에 잘 뽑아내고 있다.

 

3. 연결

생존은 연결의 문제이다. 케이지가 47미터 아래로 추락한 것은 케이블과 케이지를 연결한 고리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 구출됐다는 안도감도 잠시 다시 위기 속으로 내 몰린 것도 배와 연결된 케이블이 끊어져서다. 

두 여주인공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배와의 무선 통신이다.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그 연결만이 유일한 희망이 된다. 두 여주인공 사이에서도 서로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 끈은 바로 통신이다. 통신이 끊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모든 생명, 사물과 연결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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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6일

장마가 시작되기전 지붕이 올라가 비가 와도 작업이 계속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일이 자꾸 지연되면서 결국 장마가 시작될 때까지 기둥 하나 서 있지 못했다. 마음대로, 계획대로 된다는 건 드문 일이다. 

결국 기초공사를 하고 두 달이 그냥 흘러갔다. 아마 기초공사 후 바로 지붕이 올라갔다면 지금쯤 집이 거의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폭우에 쓸려내려간 땅을 복구하느라 진땀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완전히 나쁜 일이란, 반대로 완전히 좋은 일이란 없는가보다.

 계속된 폭우에 진입로 초입이 조금 씻겨내려가고 굳은 땅이라 생각했던 곳도 진흙탕이 되어 차가 빠질 정도가 됐다.

전봇대 주위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전봇대가 쓰러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뿐. 그래도 굉장히 신경쓰이는 부분이다. 이렇게 피해가 컸던 것은 옆 밭과의 경계를 절개한 사면에서 빗물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맨 땅이 위험한 것은 빗물을 품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낸다는 점에 있다. 부직포와 잡초를 긁어내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씻겨내려가진 않았을거다. 사면 끝자락을 중심으로 배수로를 놓아야 할 듯 싶다. 반면 집 앞 사면 경계는 굳이 배수로를 놓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설계도면이 갖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지형을 고려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상황을 다 반영할 수는 없는 법일테니까 말이다.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았기에 이번 장마로 입은 피해를 거울삼아 토목을 철저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퍽 다행스런 일이다.

 

아무튼 이번 폭우로 늪처럼 변해버린 땅은 모두 포크레인이 한 번이라도 긁어 놓은 곳이다. 다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 그렇다고 시멘트를 바를 일도 아니다. 어떻게 대책을 세우고 활용할 것인지 연구를 해야겠다.

 

공정이 늦어진 덕분에 알게 된 취약점.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드러나는 인간성. 아직 개선할 시간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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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80이 되신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말씀은 잘 하셨지만 눈에 총기가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이 어르신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3개월 전,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손에 컸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외할머니를 본 순간 눈에 총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몇 일 전, 다시 요양병원을 찾았다. 3시간 거리에 떨어져 계신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외할머니는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총기잃은 눈,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다리, 퉁퉁 부은 손발, 잘 삼키지도 못해 침을 흘리시고, 말씀은 하시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숨 쉬는 데도 산소흡입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 모습은 처량했다. 

 

맞다. 처량했다. 외할머니를 뵈러 갈 때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반갑게 맞이하시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증손녀가 나를 닮아 예쁘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던 그 모습도 이젠 기억 속에서만 찾아야 할 듯 싶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드리며 이를 앙다물었다.

 

그런데 이순간 외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죽음을 고귀하게 맞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설 좋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에서 마지막까지 고통없이 살 수 있도록 주사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를 받으며 계시는 것- 말 그대로 연명하는 것이 고귀한 죽음일까. 아니면 점차 추레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는게 나은 것일까. 

 

정말 사랑스러워했던 손주 앞에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손 한번 굳게 잡아주지 못한 채 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외할머니가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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