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노지에서 (방울)토마토를 기르는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우스 안에서 재배할 때는 어느 시기가 되면 적심이라는 것을 한다. 적심이란 (방울)토마토의 생장점을 자르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자라는데 힘쓰지 말고 열매를 맺고 익게 하는데 힘을 쓰라는 것이다. 즉 성장을 멈추고 성숙하라는 것이다. 물론 생장점은 줄기 끝에만 있는 것(끝눈 생장)이 아니라 곁눈(곁눈생장)에도 있다. 그래서 적심을 한 이후에도 곁눈생장점에서 자라는 곁순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렇게 끝눈과 곁눈의 생장점을 활용해-외떡잎식물은 곁눈 생장점이 없다- 나무의 가지를 쳐서(전정) 원하는 모양이나 쓰임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경우는 많다. 사람을 포함해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일정시기가 되면 성장판을 닫아 성장을 멈춘다. 사람의 경우 성장판이 닫히고 나서도 성장호르몬이 나와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게 되면 말단거대증이 된다. 성장을 멈추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충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생장점을 잘라버리면 문제가 된다.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면 열매를 맺고 익히는 과정도, 즉 성숙의 과정도 약해진다. 성숙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정도로의 성장은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만을 강요한다. 피로사회의 이유라 생각된다. 성장을 멈추고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 성숙의 시간을 넘어 숙성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멈춤을 통해 가능하다. 잠시라도 멈추어보아야 한다. 물론 충분한 성장이 이루어진 뒤에 말이다.

성장을 주저하거나 반대로 성장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성장과 성숙, 그리고 숙성이 모두 이루어져야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에게도 적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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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장마였지만 소나기가 내리면서 매말렀던 땅이 촉촉해졌네요. 햇볕까지 강렬하다 보니 풀들이 쑥쑥 자랍니다. 풀과 함께 키우는 농사 방식이 가능한지를 시험해보고 있지만 정말 어렵네요. 일단 최소한의 외부 투입을 줄이고 밭에서 자라는 풀들을 베어 썩혀 양분을 보충하자는 생각은 현실에 많이 부딪힙니다. 다양한 방식의 실험이 필요할 듯 싶어요. 

 

 블루베리 밭의 풍경입니다. 아래 절반은 예초한 모습이고요, 위쪽은 아직 풀을 그대로 놔둔 상태입니다. 둘의 생육상태를 비교해보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블루베리 키보다 높게 풀이 자라도록 놔두는 것은 블루베리 생장에 해를 끼칠것 같네요. 게다가 풀들이 씨를 맺기 시작하면 내년엔 더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키가 너무 크지 않을 때, 씨를 아직 맺지 않을 때 적당한 순간에 한번씩 풀을 깎아주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깎은 풀을 나무나 작물 뿌리 근처에는 놔두지 않는 것이 나을듯 싶어요. 풀이 썩어 양분을 공급하라는 뜻으로 놔두었더니 병충해의 온상이 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원줄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흩뿌려두는 것이 좋을듯 하네요.

수박의 생장점이 자른 풀을 모아둔 곳으로 갔다가 풀들이 썩는 과정에서 함께 타버렸습니다. 풀들을 퇴비화하는 작업도 요령이 필요할 듯 싶어요. 

 

위 사진은 참외가 풀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입니다. 저 풀 속에 참외가 숨어 있습니다. 사진으론 좀처럼 찾기 힘들지만 ^^. 풀을 건들면 벌레들이 우르르 도망갑니다. 벌레들의 천적이 나타나 생태적 균형을 이루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 과정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일단 병해충 방지 차원에서 풀을 제거해보았습니다.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지만 훨씬 깔끔해 보입니다. 물론 깔끔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쪽이 참외의 성장에 더 좋냐가 관건이겠죠. 올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잘 관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풀과 함께 농작물을 키운다는 것은 굉장히 멋지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냥 방치하는 수준이어서는 안됩니다. 적정하게 키우는 것이 중요한데요, 이 적정하게라는 수준을 아는 것이 바로 자연농법이나 보존농업 또는 퍼머컬처의 기술이자 지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외부의 투입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시도는 일단 땅이 힘을 갖춘 뒤에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땅에 힘이 없으면 작물은 자라지 못하고 수확물 또한 보잘것 없습니다. 땅심을 기르되, 그 땅심의 원천은 바로 작물이 자랄 그 땅에서 자라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소 긴 시간을 필요로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볼 생각입니다. 자연이 갖는 힘을 이용한 농사! 가능한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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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마가 오고 볕이 따가워지면 풀과 벌레가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초제와 농약을 뿌리는 것이죠. 말끔하고 깔끔하게 처리됩니다.

하지만 제초제와 농약은 내가 없애고 싶은 풀만 또는 벌레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땅 속 미생물도 벌레의 천적도 함께 사라집니다. 풀은 없앨지 모르지만 병충해와 같은 다른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제초제에 대한 내성이 생겨 더 강한 것을 뿌려대야 합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제초제에 내성을 갖고 있는 풀은 420여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번째는 예초기나 화염방사기 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방법인 것이죠. 기계를 이용해 빠른 속도로 풀을 베어나가거나 태워버립니다. 물론 이 방법은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꽤나 효율적인 일입니다. 아니면 부직포와 같은 천이나 비닐로 땅을 덮어 풀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또한 화석연료의 사용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직접 손으로 풀을 뽑거나 잘라내는 방법입니다. 화석연료가 일반화 되지 않았던 예전엔 호미나 낫을 이용해 풀을 처리했을 겁니다. 저도 이런 방법으로 풀을 뽑거나 자르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아하!' 하고 깨우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풀 하나하나에 왜 이름이 부쳐져 있는지를 말이죠. 풀 하나하나를 일일이 손으로 만져서 제초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풀의 특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마 보릿고개 시절을 겪던 예전엔, 아니 훨씬 더 이전부터 이런 풀들을 솎아내며 먹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풀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게 눈에 들어오면서 이들 각자에게 이름을 붙여줄 이유가 생겼을 테죠. 어떤 것은 작물에 이로운 작용을 할 수도 있고, 우리의 식탁에 오를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고, 그냥 뿌리까지 뽑아서 없애야 좋은 것도 있을 수 있었을테니까요. 즉 구분을 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용도 하고 하려면, 그리고 그 지식을 서로가 공유하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냥 잡초로 몽땅 불려져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죠.

 

지속가능한 농사를 위한 방법 중에 하나는 피복작물을 심는 것입니다. 흙을 맨 땅으로 두지않고 작물을 심어두어 토양에 유기물을 제공하는 것과 함께 땅이 침식되는 것을 막기도 합니다. 이런 피복작물로 다양한 풀들이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흔히 우리가 말하는 잡초들도 흙을 살리는 주역이 될 수 있지않을까요. 그런 것이 가능할지 시험을 해봅니다. 잡초를 어느 정도 자라게 놔둔 후 예초를 해서 작물 근처에 덮어둡니다. 아마 최소 3~5년 정도 이 작업을 계속해 가면 토양에 유기물이 풍부해지고, 이 덕으로 땅심이 크게 자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강아지풀, 개망초, 쇠뜨기, 제비꾳, 쑥, 민들레, 애기똥풀, 씀바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풀들을 오늘도 조금씩 조금씩 잘라내어 흙 위에 살포시 덮어줍니다. 무척 지난한 작업이긴 하지만 꼭 보답을 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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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단옥수수를 먹어본다. 생으로도 먹고 삶아서도 먹을 수 있는 옥수수다. 초당옥수수도 단옥수수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단옥수수는 옥수수의 당 성분이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전분으로 변하는 속도가 일반 옥수수에 비해 느린 변이종이다. 그래서 단맛이 훨씬 강하다. 초당옥수수는 단옥수수보다 훨씬 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당을 초월한, 초당인 것이다. 초당두부의 초당과는 다른 뜻이다. 초당두부의 초당은 소금 대신 바닷물로 간수를 대신해 두부를 만든 초당 허엽(허균의 아버지)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튼 단옥수수를 먹어본 소감은 맛의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맛은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이며 여기에 감칠맛을 더하기도 한다. 단옥수수는 분명 단맛이 강하지만 맛있다고 느껴지기엔 2% 부족했다. 물론 개인 간의 호불호가 다르긴 할 테지만 말이다. 단옥수수는 아쉽게도 씹는 맛이 떨어진다. 알갱이가 작은데다 씹자마자 단물이 빠져나오면서 그냥 삼켜버리게 된다. 다행히 생으로 먹을 때는 옥수수알 뿐만 아니라 심지부분까지 씹게 되면서 이런 부족한 부분을 다소 채워준다.

 

이제 맛의 분류에 씹는 맛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싶다. 단지 씹히는 감각이 조금 부족한 것만으로 맛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그럼과 동시에 건강한 치아가 왜 오복 중에 으뜸으로 여겨질 만큼 소중한 것인지도 통감한다(요즘 오른쪽 이 전체로 씹는 것이 불편하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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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이것처럼 명확한 것은 없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하다.

왜 콩 심은데 팥이 나지는 않는걸까.

과학적 해답은 유전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전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유전자가 절대적이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 유전자라는 것도 발현이 되어야만 그 쓸모가 있는 것인데, 즉 콩 심은데 콩이 나야만 하는 것인데, 그 발현이라는 것이 굉장히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전자가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지만 비로소  유전자의 형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텃밭에 고추 모종을 심고, 그야말로 관리를 하지않고 내버려 두었다. 거름을 주지도 않았고, 벌레를 잡아 주지도 않았다. 아주 가끔 고추보다 키가 커버린 풀만 뽑아주고, 정말 2주간 비가 오지않아 말라죽을 것만 같았을 때 물을 주었다.

조금 매운 고추라는 유전적 특성을 지닌 품종을 심었는데, 고추를 따서 먹어보니 청량고추 저리가라 할 정도다. 물을 주지않다보니 껍질이 두껍고 맛은 매워진 것이다. 즉 재배환경을 맞추어주지 않으니, 자신의 품종 성격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고추로서의 기본적인 특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요즘 딸내미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생겨나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사교육은 한 번도 시킨적이 없다. 공부를 하라고 잔소리를 한 적도 없다. 다만 정리정돈과 씻는 것, 식탁 예절 정도에서 큰 소리가 나온다. 만약 도시에서 살았다면 옆집에서, 또는 친구들이 하고 있는 사교육에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교육들이 아이들의 유전적 잠재성을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잠재성을 드러내는 사교육은 얼마나 될까. 그런 면에서 그냥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딸내미를 보며 불안해하지 않는 내 모습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정말 그럴까? ^^;).

다만 아이에게 다양한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만은 주고싶다. 그런 기회들 속에서 잠재된 능력이 꿈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듯하다. 고추가 그나마 제대로 크려면 풀을 뽑고 물을 주는 것과 함께 적절한 양분이 있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 다양한 경험들이 양분이 되어주지 않을까.그 이외엔 스스로 크는 것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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