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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이었던가, 일요일이었던가. 카톨릭 신학대학교의 학과일정이 TV를 통해서 드러났다. 15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된 신학생들의 삶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영원과 하루>라는 제목으로 KBS 스페셜로 방송됐는데,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 30세 이전의 학생들에게 입학이 허용되고, 같은 해에 입학하면 군대를 같이 가거나, 그 기간동안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전체가 함께 같은 일정을 가도록 짜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 숨이 막힐듯하다. 하지만 이런 하나됨이 남다른 일체감을 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불필요한 생각일듯 싶지만, 이것이 카톨릭 조직이라는 곳에서 권력싸움의 밑바탕이 되지않을까 불손한 상상을 해본다.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 걱정 속에서 들어간 신학대학교의 삶이 그들이 무엇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동년배들이 느끼는 생각, 욕구와 동떨어진 삶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 차분히 보여주는 속에서, 나 또한 명상에 잠긴다. 특히 그들이 대답하기를 꺼려했던 이성과의 관계를 큰 의미의 사랑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과연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겨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학생들의 이야기였다. 프로그램 속에서도 탈락율이 35%에 이른다고 알려주고 있지만, 무엇이 이들에게 그토록 단단했던 신념을 깨뜨리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데는 다소 소홀한듯 싶다.

다만 졸업반, 성직자의 길을 택하기전 휴학한 학생의 입을 빌려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함으로써 이루려고 하는것, 그것으로 가느 것에 일말에 후회가 없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 그것은 단지 신학도로서만의 문제는 아닐듯 싶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 그것에 대한 믿음 역시 이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지금 내가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휴학생의 고민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하여,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TV가 보여준 65%의 신학도들보다 35%의 탈락자들이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믿음, 그리고 흔들림, 선택, 그리고 후회.

삶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발자국만이, 비록 비틀거리고, 주춤댈지라도, 온화하기만을 바랄뿐이다. 질질 끌려가지않고, 더디더라도 힘차게 내 딛어지기만을 바랄뿐이다. 무지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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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12-2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셔요?
저도 이 프로그램 봤어요. 서류상 심정상 천주교 신자로서 35%에 든 사람들도, 65%에 들었으면서도 나중에 탈락해버리는 사람들도 보아왔지요. 점점 사제지망생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도, 역시 주위에서 한다고 하면 잘 생각해보라고 일단 말려보고 싶어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일생을 걸 무엇을 발견했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어느 신학생이 '남들이 다 하는 일 못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하는 기쁨'을 얘기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런 확신과 정열, 실천력이 있다는 게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답니다.

하루살이 2006-01-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제 지망생이 줄어드는 걱정보다는 진정한 사제가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신과 정열, 실천력을 죽는 날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존경스러워할만한 일이겠죠. 님께서도 새해에는 그런 정열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지난달부터 한달에 하루는 굶어보자고 생각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하루 끼니를 굶은 돈으로 배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나서는 것도 아니요, 결식아들의 배고픔을 직접 체험해보자는 뜻도 아니다. 그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TV를 끄고 온종일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을까 놀라게 된다. 매일 TV를 끄고 살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TV나 라디오 없이 하루를 보내면서 행복해한다. 물론 처음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지만.

순전히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재충전을 위해 회사나 학교를 쉬는 것 마냥, 나의 몸뚱아리도 가끔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내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내장들도 가끔은 쉬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괴상망측한 생각으로부터 하루 단식은 시작했다. 좀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하루 단식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하루 반 정도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전까지. 먹는 것은 차나 생수. 이런 날엔 TV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프로그램은 온통 음식 이야기다. 돌리는 채널마다 먹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배고픔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다이어트보다는 살을 찌워야 할 판에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 작정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참아낸다. 머리 속에 계속 어른대는 음식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 내가 얼마나 식욕이라는 탐욕 앞에서 무력한지를 실감하게된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시간을 먹는 것에 소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된다. 음식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리고 ,먹고, 설겆이 하고. 우리네 삶에 먹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으니, 하루의 많은 부분을 공들여 준비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느끼는건대, 하루 단식을 끝내고 먹게되는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쌀 한톨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내장도 푹 쉬워 행복해했을 테지만 혀와 뇌는 더욱 행복해진다. 물론 인내의 열매이긴 하지만.

끼니의 소중함, 참기 어려운 탐욕의 실체. 하루 단식은 의외로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제 두번 시도해봤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기는 힘들것 같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실험을 해볼지 확신할 순 없지만 나태해진 나의 마음을 일깨우는 소중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가끔은 비워보자.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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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오늘은 남산 길이 달라 보인다. 너무 예쁘다.

단풍나무의 잎들은 여전히 초록색이다. 간혹 단풍이 든 나무들도 초췌한 색이다. 은행나무가 그나마 예전같은 밝은 노란색을 뽐낸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 자체를 뜯어보면 전혀 예뻐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도 군계일학이란 말을 쓸 수 있으려나. 아름답고 투명한 선홍빛 나뭇잎을 지닌 정말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도 간혹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벚나무의 칙칙한 누르스름한 단풍잎, 언제 단풍이 드었는지도 모르게 땅을 뒹글고 있는 갈색의 잎들. 눈 앞의 나무들은 생명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잠깐 눈을 들면 세상이 달라보인다. 울긋불긋한 숲 전체가 너무 아름답다. 더불어 숲이란 말을 여기에다 인용해도 될까. 더불으니 아름답다. 자꾸 뒤를 돌아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남산의 단풍이 점차 절정에 들어간듯하다. 

혼자서는 아름답지 못한 것들도 모여있으니 이렇게 마음을 빼앗을수가 있단 말인가. 숲을 빠져나와 멀리서 바라보니 산은 또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시내 한 복판에 붉으스름한 언덕배기. 붓 한번 싹 스치고 지나간듯한 모습.

나무만을 보아도, 먼 거리서 숲만을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산 속에 들어가면 있다. 적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절정의 맛을 선사하는 것. 그 거리두기가 어렵다.

부딪혀 아프지도 않고, 떨어져 외롭지도 않을 그 거리를 찾아헤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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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산 근처에 사시는거죠? 아니면 직장이?
암튼... 축복받으신 겁니다!

하루살이 2005-11-0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낙엽비를 맞으며 걸었죠. 부럽죠.
그러고보니 정말 축복받은것 같네요.
 

지난주 일요일 SBS 스페셜로 방송됐던 고지마 원숭이가 자꾸 떠오른다. 일본의 고지마라는 무인도에 살고 있는 원숭이 집단을 촬영한 기록을 보여준 다큐프로였다. 5년이라는 시간의 공백동안 변한 집단의 권력구조 속에서 제작진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야시'라는 암컷 서열 1위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 몰락의 과정이었던 듯 싶다.  내가 보기엔 서열의 혜택이라는 것이 먹이의 접근도에서 드러나는 것 같고,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먹이를 구한다는 것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졌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바뀌기 전까지 분쟁을 조절하고 외부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해왔던 서열 2위였던 수컷 원숭이가 서열 1위로 오르는 순간 먹이에만 집착하고 모든 제 문제들은 그냥 놓아둬버리는 나태함을 보여준다. 누구도 자신의 권력을 침탈할 수 없다는 안정적인 요소가 그의 게으름을 불러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서열 맨 꼴찌였던 암컷 한마리. 원숭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를 먹기 위해 자신에게 매달린 새끼마저 떼어놓으려 하는 어미를 보는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달려드는 새끼와 그것을 떼어놓으려는 어미, 그리고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새끼를 쥐어패는 모습 속에서 모성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보다 못한 할머니 원숭이가 어미를 새끼에게 보내는 장면, 그리고 새끼를 안으면서도 쥐어박는 모습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온한 생각.

가족은 굴레다. (사랑이 굴레인것 처럼)

원숭이를 통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걸까? 모성이라는 것도 결국 교육을 통해 확장되어지고, 강화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보험금을 위해 아이를 살해하는 어머니, 벌어먹는 게 힘들어 동반 자살을 택하는 어머니,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가 아이들 먼저 강에다 던져버리는 냉정함...

모성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모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 한계를 계속 넓혀왔고, 아예 한계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기야 그래서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핑계를 댈터이니 원숭이를 가지고 모성을 논하지는 말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성은 본능이라고 배워온 터이니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본능도 있을 것인가?

어머니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라지 말자. 어머니의 이름으로 한 여성을 저울질하지 말자. 

아~ 그러니, 나의 사랑스러운 어머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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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맞수>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말 그대로 한 분야의 맞수들을 골라 그들의 경쟁 심리와 함께 서로 이해하고 존경해주는 모습들을 비쳐준다. 이번 주에는 소백산 근처의 말금마을이라는 곳의 두 농부가 주인공이다. 60이라는 같은 나이지만 한 명은 어렸을적부터 전형적인 농부로서 살아온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기업체에서 간부까지 지내다 퇴직 후 자리를 잡은 5년 경력의 초보다. 문제는 이 초보가 유기농 농법을 시도하면서 매사 부딪힐 수밖에 없는 외부환경이다.

전통 농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고추가 제대로 건조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배추가 잘 자라는지 돌보며, 무우를 캐내어 시장에 내놓을 궁리를 한다. 자신이 거둔 농작물의 품질에 대해 자부심도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는 정도 어려움에 몰리지 않고 잘 해내고 있다.

반면 5년차 농부는 아침 9시나 10시 쯤 느긋하게 일어나 원두커피를 갈아서 커피 한잔 마시고서 천천히 일을 시작한다. 농삿일이라는 것도 그저 자신이 먹을거리만 구하면 되는 것이라 풍작을 기대하지도 않는듯하다. 벌레 한마리 한마리를 손으로 잡아 천천히 던져놓고 잡초는 잡초대로 그냥 놔두고, 놀려둔 땅은 놀려두는대로 땅의 힘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후가 되면 밭에 스피커를 열어놓고 모차르트를 틀어주기도 한다.

이웃사촌은 그 음악소리가 못마땅하다. 하우스 안에서 음악작농은 효과를 보지만 야외에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며 비판하기도 하고, 다른 것은 다 신토불이라면서 왜 음악은 양놈 것을 듣는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웃은 도움을 청하는 초보자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주고, 그를 선량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뿐이라고 이해하면서.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저녁에 집을 수리하는 톱질 소리에 불만도 쌓이고, 비둘기 피해가 염려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호밀농사를 짓겠다는 고집에 화도 난다.

초보 농부는 친환경적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로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도 과감히 차를 처분하기로 마음 먹는다. 대신 당나귀를 기를까 고민중이며, 염소도 한마리 살 생각이다. 이웃은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 당나귀는 무리며 임도 또한 경사가 심해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하지만 고집불통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이웃사촌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은 덕분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방식의 차이가 서로에게 낯섬을 넘어 무엇인가 자신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폐해의 크기가 서로 감당하지 못할 지경까지 된다면 과연 그들의 평화는 계속될 수 있을 것인지 염려스럽다. 만약 이들 농부가 바로 옆에서 밭농사가 아닌 논농사를 다른 방식으로 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초보농부의 삶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삶의 방식과 무척 닮아 있었다. 다만 농부 내외가 자급자족을 해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베짱이로서의 삶의 여유를 부리다 굶어죽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작물은 최대한 스스로 자라도록 내버려두고 사람의 손길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여가로 돌릴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은 과연 꿈일 것인가? 초보 농부는 부족한 것은 이웃에게 빌리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급자족은 아직 먼 꿈이고, 진정 자급자족을 이루기 위해선 자신의 여가 대부분을 헌납해야만 되는 것은 아닐까?

전통 농부가 밤낮없이 농사를 하는 것은 농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함이다.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만 하는 작물이 있고, 배짱을 퉁기면서 제값을 챙기는 작물도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적 논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최상의 작물을 위해 비료와 농약을 아낌없이 준다. 물론 그 농부도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자라난 작물이 건강에도 좋고 자신 또한 농약을 마시지 않아도 되니 좋은 줄은 알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게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옆의 초보농부는 바로 그런 면에서 과연 유기농을 통한 친환경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땅에서 키워야 할 아이들이 이미 성인이 되어 있기에 가능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교육에 대한 문제 등을 생각해보면(또한 문화적 혜택이나 여행, 의료 등등의 제반 조건들도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이 또한 어려운 문제일수밖에 없다. 자급자족은 말 그대로 자족일뿐인데 그 이외의 비용이 들어갈 경우는 어떻게 해결가능할 것인가? 더군다나 농촌을 점차 살아가기 힘든 곳으로 만들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서 말이다.

복지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베짱이로서의 삶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몽상이 되지 않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또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바로 이웃과도 평화를 정착하지 못하면서 친환경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겠는가? 아사 직전이면서도 벌레가 먹을 것을 남겨놓는다는 여유가 관연 가능하겠는가? 초보 농부의 미래가 궁금하다. 어쩌면 그 속에 나의 미래도 조금은 투영되어 있을테니...(만약 단순히 퇴직 후의 전원적인 삶이라는 양태를 띤다면 차라리 젊었을 적 돈 버는데 집착해 나이든 후 느긋하게 별장 생활을 꿈꾸는게 낫지 않겠는가? 행복을 미래에 차출당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또 그것이나마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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