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그 세를 확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그만큼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라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논쟁을 하거나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할 수 있는 사람들로 끈이 이어져 있다. 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젓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안아주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듯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말이다. 바로 외로운 사람들이다. (물론 이 속에서 사업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마당발 개성을 더욱 잘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이 현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나의 기질상의 문제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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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연 수입이 3억 7000만원에 달하는 청년에 대한 기사가 회자되고 있다. 동영상을 클릭한 숫자에 따라 유튜브와 5 대 5의 수익배분을 나눠갖음으로써 큰 수입을 얻게 됐다. 또 최근엔 유료 앱 콘텐츠를 개발해 단번에 8000만원의 수입을 올린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앱 하나 잘 만들거나 동영상 하나 잘 만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마치 10여년 전 로또 하나 잘 맞으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처럼. 물론 로또야 순 운이지만-누군가는 복권을 20년 30년 꾸준히 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성실함이 행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근면, 성실의 이데올로기가 확률의 게임에까지 개입된다- 앱이나 동영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개개인의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것 한방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한 방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 한방의 기회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단순히 천운에 기대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인생역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 그러나 유튜브 동영상이나 앱 콘텐츠나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한 방은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그 기회가 넓어지고 있는 건 분명 사실이고,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이런 기회의 넓어짐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역시 모두에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행복하다면 한 방에 대한 목마름이 그토록 크진 않을 것이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도 한 방의 유혹은 그 힘을 많이 잃을 것이다. 사는게 힘들고 일이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때 한 방은 크게 다가온다. 한 방이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쉽다고 느껴질 수록 우리는 진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오직 한 방을 그리워한다. 그 한 방에 목메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가끔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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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바람이 부려나. 공중파에서 연일 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난달 EBS 다큐 프라임에 이어 지난 25일 SBS 스페셜에서도 춤을 다뤘다. 특히 춤을 통한 치유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춤이 주는 치유란 아픈 몸이 낫는 치료와 달리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작용을 말한다.  

춤이란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고전무용이나 현대무용, 발레와 같은 것에서부터 대중문화 속에서 보여지는 힙합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하다. 춤이란 이성 간의 성적 호기심이나 매력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도구 - 2005년 12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춤과 매력에 관한 논문을 보면 여자들은 잘생긴 남자보다 춤 잘 추는 남자에게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황홀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로 쓰이기도 하며, 집단 구성원간의 일체감을 이루는 일종의 종교적 역할을 수행 - 미시시피 지역에서 끊임없이 대립했던 흑인과 백인이 춤을 통해 화해한 일화가 있다. 또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선 재범률이 0건이 되기도 했다 - 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춤이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아를 바깥 세상으로 드러내어 표현함으로써 온전한 마음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측면이 주목받고 있다. 춤으로 병을 치유하는 타말파 연구소의 안나 할프린이라는 할머니는 90세에 이르는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용수로 명성을 떨치다 40대에 암에 걸려 죽음과 직면하면서 춤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치유라는 것이었고 그에 이르는 길로 춤을 택했다. 지금도 암이나 에이즈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마음을 춤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다.  

댄스 테라피를 비롯해 심리치료에 이용되어지는 춤은 남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며,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 된다. 이렇게 온전한 자아와 자아가 서로 소통함으로써 아픔은 치유되어질 수 있다. 이럴 때의 춤은 마치 명상과도 닮아 있다. 얼핏 도인술이나 기체조 같은 것을 확장하면 치유의 춤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포츠 댄스나 커플 댄스 등도 마음의 안정을 주는 한편 불편한 몸을 좀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춤이 갖는 치유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현대인이 하루 종일 몸을 어떻게 쓰는지 되돌아보자. 그리고 그 육체 속에 마음은 얼마나 갇혀 있는지도 살펴보자. 춤은 자꾸만 어둠 속으로 움츠려드는 자아를, 거짓으로 위장된 자아를 햇빛 속 온 천하에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창이자 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과 소통가능한 몸을 얻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자신의 몸을 돌아보는 춤을 추더라도 그것은 사회를 향한 소통의 몸짓으로 거듭난다.  

하루 중 잠시라도 홀로 또는 타인과 함께 자신의 몸뚱아리를 자유롭게 표현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혹시나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둬두었던 자아가 스스로 얽어맨 쇠사슬을 풀고 훨훨 날아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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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알레르기는 영화에서 종종 코믹적인 요소로 쓰이곤 한다. 모르고 땅콩을 먹다가 입술이 탱탱 부어오르거나 온 몸에 반점이 나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표현된다. 반대로 간혹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는 것을 소재로 스릴러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영화 속 이야기 또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든 음식 알레르기가 점차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알레르기란 그냥 두드러기가 나는 정도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것이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약물을 항상 지녀야 하고, 알레르기와 관련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소모해야만 한다. 이번 EBS 다큐 프라임 <아이들의 전쟁>에선 쌀 알레르기와 같은 희귀 사례 보다는 그나마 일반적인 사례들을 보여줌으로써 위험성이 보다 가깝게 접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땅콩, 우유, 계란, 밀, 과일 등등 알레르기의 종류는 셀 수가 없다. 알레르기 음식을 피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런데 왜 이런 치명적 알레르기가 늘어난 것일까. 

최근에 부쩍 늘어난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위생 가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도시와 농촌 간의 알레르기 비율을 비교해보면, 전자에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알레르기로 고생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이유는 바로 너무나도 철저한 위생 관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먼지 등에 존재하는 적고 약한 바이러스를 접하면서 조금씩 면역력을 키워 나갈 기회를 잃어버린 도시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아주 작은 병원균에도 쉽게 과도한 면역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면역체계의 오작동으로 알레르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엔 아토피의 병인도 이런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알레르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현대 의학으론 아직까지 이상 면역체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처방책이 없다. 위생 가설이 맞다는 전제 하에 어렸을 적 철저한 위생관리 보다는 오히려 조금은 더럽고 지저분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예방 차원일 뿐이다. 일단 알레르기에 걸리고 나서는 오히려 지저분한 환경은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일상생활을 무너뜨리고 행복한 삶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런 알레르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알레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첫걸음은 알레르기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알레르기를 치료할 수 없기에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알레르기를 갖고 있지만 '그게 뭐 어때'란 정신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몸에 점을 갖고 있듯 난 그냥 알레르기라는 것을 갖고 있을 뿐이야.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조심하며 살면 돼. 내 꿈과 인생을 위해 이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아.  

상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독히도 괴롭고 불편하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결국 행복의 길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동물, 인간, 질병>이라는 책에서도 질병에 관한 완전한 박멸을 꿈꾸기 보다는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국 에버딘 대학의 연구소에 재직하는 손한경 박사(보건학 전공)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을 무력화하려는 인간 때문에, 미생물은 유전자형을 바꾸거나 약물에 대한 감수성을 바꾸거나 사람 대신에 다른 종을 숙주로 선택하는 식으로 미생물, 인간, 환경의 삼각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삼각관계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인간의 면역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미생물의 감염력이 특별히 높아지지 않는 한 인간이든 미생물이든 커다란 재앙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롭게 나타나는 질병은 이미 이 균형 관계에 내재되어 밝혀지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균형이 파괴되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질병이나 오래된 질병의 새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알라딘 요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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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내 아이의 전쟁, 알레르기'가 이번주 방송됐다. 아토피에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치료과정 등을 보여주었는데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한 여지가 상당 부분 있다.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아토피의 원인인 가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의학적 방법은 현재로선 없지만, 가려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부염은 스테로이드로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양약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수많은 대체요법이 회자되고, 그 중엔 생명을 앗아갈만큼 위험한 것들도 있다는 점, 아토피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이 제작진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작진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내어 스테로이드 사용을 제시했다.  

아토피를 어렸을 때부터 앓아왔고, 현재도 완전히 낫지 못하고 몸에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 다큐의 주장은 반쪽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큐에서도 보여줬듯 아이의 아토피를 치유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황토집을 짓고 살아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냉온욕, 풍욕을 비롯해 수많은 비법들을 실천해봐도 완전한 치유는 멀기만 하다. 물론 이런 요법들로 아토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비법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람들은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그 방법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방법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반면 이런 대체요법들로 인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아이들에겐 차라리 스테로이드가 방법일 수 있다.  

제작진은 스테로이드에 대한 공포증을 이야기한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1990년대 10년간 공포증에 휩싸여 대체요법 광풍이 불다 점차 스테로이드 요법으로 돌아섰다는 자료는 일견 동감되는 부분이다. 우리도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대체요법이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잘못된 민간요법으로부턴 멀어져야 한다. 물론 아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에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부작용이 큰 요법을 떨쳐내는 것이 어렵게 된다. 아무튼 제작진은 사용법을 제대로만 익히고 쓴다면 스테로이드는 정말 마법의 특효약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다. 스테로이드는 정말 묘약이다. 피부가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는 곳에도 스테로이드는 그 힘을 발휘한다. 연고를 바르고 2~3일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피부는 깨끗해진다. 하지만 피부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려움은 언젠가 다시 나타나고 염증은 다시 도진다. 그러면 다시 스테로이드를 쓰면 된다. 그렇게 평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마치 여자들이 화장품을 평생 몸에 바르듯 그렇게 바르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스테로이드를 바르다 보면 여드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또는 코끼리 피부처럼 두꺼워지기도 한다. 얼굴에 자주 바르다보면 피부가 벌개진다. 또 쉽게 햇빛에 타 검게 그을리기도 한다. 그래도 밤에 잠못 이루고 피가 나도록 긁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테로이드의 약효는 항상 일정하지가 않다. 다행히도 스테로이드를 써서 가려움이 가라앉은 상태로 어느 순간 아토피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천운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토피를 달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1년에 스테로이드를 바를 정도로 심하게 악화되는 경우가 한두번 이던 것이 점차 간격을 좁혀간다. 계절마다 약을 쓰다 월마다 약을 써야 한다. 그리고 매주 약을 써야 하는 경우에 처한다. 이때가 되면 여드름과의 싸움에 지치고 벌개진 얼굴에 대인기피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발라도 발라도 가려움을 가라앉지를 않는다. 스테로이드의 마법이 사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위기감이 양약을 끊고 식이요법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스테로이드는 그저 대증요법인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내는. 아토피의 원인인 가려움을 잡아내는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명상이 될 수 있고, 채식이 될 수도 있으며, 자연적 삶의 양식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아직은 명확한 방법을 찾을 순 없지만 근본 치유를 하지 않고 대증요법만으로 사는 것은 불행을 잠시 유보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다큐프라임은 절반의 설득력만 지니고 있는 것이다. 2차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대체 요법을 찾는 것은 안되지만, 근본 치유를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는 마녀가 쓰는 마법의 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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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까리 2010-07-2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글에 완전 공감합니다. 아토피 환우들이 스테로이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생긴 요인 중 하나인 의사들의 무분별한 스테로이드 처방에 대해서 좀 언급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피부과 의사들은 스테로이드를 좀 강하게 처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무분별한 스테로이드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의료계에 먼저 뿌리내려야 일본과 같은 풍토가 자리잡힐 것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