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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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올해의 작가에 심하게 집착하는 내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준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만해도 올해의 작가는 레비카 솔닛이요, 올해의 책은 멀고도 가까운이었는데... 괜찮다. 카테고리를 수정하면 된다. 올해의 에세이는 멀고도 가까운이고, 올해의 소설은 작은 것들의 신이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을 찾기 어렵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 아주 긴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은 느낌이다.   

 

영국 문화와 인도 문화, 지주와 공산주의자, 불가촉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대립된 축이 이야기 속에서 매듭을 묶어가고 풀어가는 방식이 아주 탁월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 속, 주인공의 태도나 생각이 그려지는 방식이 특히 좋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라헬은 공항 라운지에서 빈 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승객처럼 결혼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냥 자리에 앉는다는 기분으로. 그녀는 그와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34)

그때, 그들이 코친 외곽에 이르렀을 때, 빨간색과 하얀색이 칠해진 철도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왔다. 자기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했기에 이렇게 됐음을 라헬은 알았다. (87)

우리 고모 베이비야.” 차코가 말했다.

소피 몰은 곤혹스러웠다. 두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베이비 코참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의 베이비도 개의 베이비도 알았다. 곰의 베이비도, 그래. (곧 라헬에게 박쥐 베이비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고모 베이비라니 당황스러웠다. (201)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난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 믿는 사람이다. 가장 따뜻하거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고 말이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정확히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이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해도 그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 해도 인간의 사랑에는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권태의 모습으로, 질투의 모습으로 혹은 이별의 모습으로. 사랑은 끝나고, 새로운 사랑이 또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마마치 시대엔 파라반들이 다른 불가촉천민과 마찬가지로 공공도로에서 걸어다니는 게 허락되지 않았고, 상체를 가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말할 때는 상대에게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소능로 입을 가려야만 했다. (107

 

인간을 위와 아래, 고귀한 혈통과 천한 혈통으로 분류하는 것을, 그 분류에 따라 인간을 심하게 차별하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신분 차별 때문에 사랑이 금지된다는 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를 읽게 되었을 때 더 실감나게 전해진다. 만지지 못한다는 것,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말할 때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인생에 씌워진 굴레.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까지 전해오는 정해진 운명. 물건을 건넬 때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두는 삶. 그런 삶, 그런 역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벨루타가 변한다. 한 순간에 변한다. 암무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수 백 년의 시간이 덧없는 한순간으로 응결되었다.(245)

 

그 짧은 순간, 고개를 들자 벨루타는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을 보았다. 너무나도 까마득하게 한계를 벗어나 있었던 것들, 역사라는 눈가리개에 가려져 있어 보기 힘들었던 것들을.

간단한 것들.

예를 들면, 라헬의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깊게 볼우물이 패고 눈에서 미소가 사라지고도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것을. 그녀의 갈색 팔이 둥글고 탄탄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어깨는 빛이 났지만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도.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 이젠 더 이상 자신에게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 위에 올려서 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배와 상자. 작은 풍차. 그만이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님도 알았다. 그녀 역시 그에게 줄 선물이 있음을.

이러한 깨달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단번에 그를 베었다. 차갑고, 또한 뜨거웠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암무는 그가 알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도 시선을 돌렸다. 역사라는 악귀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을 다시 그 오래된 상처투성이 가죽으로 포장해서 그들이 진짜 살던 곳으로 끌고 갔다. ‘사랑이 법칙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곳으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암무는 베란다로, 다시 연극으로 되돌아갔다. 몸을 떨면서. (246)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오는 깨달음을 뒤로 하고, ‘역사의 자리, 연극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벨루타와 암무. 하지만,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이미 그가 알았음을 알아버렸으므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예전처럼 연기하며 살 수 없다.

이 사랑이 이렇게 절절한 이유가, 이루어지면 안 되는 사랑이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한. 그 사랑에 대한 금지가 그들의 욕망을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닌가. 그 사랑에 대한 반대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은 아닌가. 만약 학교에서,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만나고, 서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그들의 사랑은 이처럼 절절했을텐가. 이처럼 필사적이었을텐가.

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지지하고 있나 보다. 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오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나 보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꼭 이루고 싶은 사랑이 있었다는 이야기고, 그리고 결국에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을 응원한다는 건, 죽어도 좋을 만큼 위험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런 사랑이 두렵다는 뜻이다.

나는 벨루타처럼, 암무처럼 사랑할 수 없다.

이런 사랑은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이란, 이들의 사랑이란 건 그런 사랑이다.

 

암무쿠티 ……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 온몸을 기대었다. 그는 그저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춥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아려오는 욕망이기도 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그 미끼를 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를 원했다. 절실하게. 그의 젖은 몸이 그녀를 젖게 했다. 그녀가 양팔로 그를 안았다.

그는 냉정해지려 애썼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뭘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내 일. 내 가족. 내 생계. 모든 것을.’

그녀에게 격렬하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잠잠해질 때까지 그를 안고 있었다. 어느 정도라도.

그녀는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두 사람은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살과 살을 맞대고. 그의 검은색에 그녀의 갈색을 맞대고. 그의 단단함에 그녀의 부드러움을 맞대고.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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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7-0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동 서점 갔을 때부터 계속 눈에 들어오던데 :-)
장바구니 담았습니다 ~

단발머리 2016-07-06 14:22   좋아요 1 | URL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경우가 많고 이 책도 그런대요^^ 구입하려고 해요.
세 번은 더 읽을 것 같아요~~~~

잠자냥 2016-07-0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이군요. ㅎㅎ

단발머리 2016-07-06 17:29   좋아요 0 | URL
으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우앗!!! 했어요.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마냥 아쉬웠구요.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어요.^^

2016-07-06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6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0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비교불가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설이죠 ^^

단발머리 2016-07-08 08:08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죠. 작중 인물들에게 완전히 매료됐어요.

저는 번역가에게도 큰 점수를 주고 싶어요. (심사단도 아닌데 점수를 줍니다.ㅎㅎ)
원서를 안 읽어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글로도 아름답게 읽히니까요.... ^^
 
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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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야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결혼 후에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었던 여자 사람이 많았던 때도 있었다. 나에게는 결혼 후의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한계치가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에 현모양처에 대해서는 꿈꿀 시간이 없었다. 다행이다. 행복한 결혼식, 사람들의 환영 속에 손을 흔들며 떠나는 신혼 부부, 외국 항공권과 공항. 거기까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상상해 보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콩깍지 상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갈등의 요소가 무수히 있다 하더라도 아무튼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 모든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상태다. 갈등의 폭발은 아이와 함께 온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이다.

사랑과 결혼의 너머에서 아이를 만나리라는 것, 그리고 내 이름이 ‘** 엄마로 바뀌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그만큼 내가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무심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엄마가 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엄마지만,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아닌 나도 있다. (66)  

 

작년에 아롱이 엄마 모임에 갔을 때다. 엄마들이 삼삼오오 반대표 아이네 집에 모였고,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기 소개시간을 가졌다. 저 쪽 끝에서부터 한 명씩 자신을 소개하는 걸 듣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56개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 차례였다

.... ... 저는 ***이라고 합니다.”

순간 이 평범한 문장을 듣고 있던 56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크게 동요하는 걸 느꼈다. 나도 놀랐고 56개의 눈동자들도 놀랐다. 센스 있는 대표 엄마가 정리를 해 주었다.

~~ 그래. ** 엄마, 멋지다. 소개할 때 우리, 자기 이름도 말하자~”

다른 엄마들은 모두 자신을 “** 엄마라고 소개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학교 반모임이니까, 아이들 때문에 만난 것이니까,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잠시 정신을 놓고 딴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이름을 말해 버린 거다. “, 저는 ***입니다.”

나는 엄마지만,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아닌 나도 있다.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에 도달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절망할 때가 많다. 동시에 엄마가 아닌 나를 의식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엄마로서 괜찮은 건지 자꾸 묻게 된다. 이게 틀린 건 아닌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내가 가진 고민은 마이코의 것과 같다.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아닌 나를 의식하고 있는 마이코의 고민 말이다.

수짱의 고민은 조금 다른데, 그의 고민 역시 엄마에 대한 것이다.

 

엄마가 되는 인생과 되지 않는 인생 (101)

엄마가 되지 않는 인생이 될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삶이 괜찮은 건지, 그런 자신이 왜 불안하게 느껴지는지 수짱은 생각하고 고민한다. 서둘러 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수짱의 모습이, 마스다 미리의 그림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여전히 라는 생각(128),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작은 속삭임이  

자유를 준다.

편안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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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어요. 사실 저는 이 만화가 연애만을 주제로 한 내용인 줄 알았어요. 왠지 이 만화를 읽으면 수짱처럼 솔로의 아픔을 느낄까 봐 읽을까 말까 주저했습니다. ^^;;

단발머리 2016-06-28 09:43   좋아요 0 | URL
제목과 다른 내용도 있더라구요.
예를 들면, <결혼해도 괜찮을까?>에는 노부모님을 봉양하는 사람들의 애로사항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도 아주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이 댓글을 통해 저는, cyrus님이 솔로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ㅎㅎㅎㅎ
 
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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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야. 폴로네즈란다.˝


전쟁의 포화 속, 피아노 학원 선생님.
그녀의 빨치산 애인.
두 사람의 약속을 오가며 전해주는 야네크.
여인의 피아노 연주.

˝쇼팽이야. 폴로네즈란다.˝ (37쪽)


교수대 밧줄 끝에 매달린 빨치산과 그의 연인.

그렇게 끝나버린 사랑.
쇼팽의 폴로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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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6-06-24 16:51   좋아요 0 | URL
그중 2개는 제거에요ㅜㅜ

2016-06-24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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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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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 친구 마이코는 머리도 좋고 미인이고 수짱처럼 아직 싱글이다. 비교적 예쁜 편이라 업무에서 덕을 보는 것도 있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다시 새 직장을 찾기 힘들 나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이코는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성실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자신이 편한 쪽만을 생각하는 남자의 답을 듣는다. 그와 헤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응석부릴 수 있는 남자를 잃는 외로움,이 두렵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젊은 남자와 바람난 여자의 불행한 최후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나의 최후가 불행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불행한 최후는 불륜의 문제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이코의 행동이 옳다는 건 아니다. 그녀의 행동은 옳지 않다. 그건 마이코도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유부남인 애인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가 없다. 응석부릴 수 있는 남자를 잃고 나서 겪게 될 외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두렵기 때문이다.

대학 친구 결혼식에 다녀온 마이코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기쁜 일도 괴로운 일도 서로 나누며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결혼의 맹세에 대해 생각한다. 결혼 자체가 대단하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이런 굉장한 약속을 파기하는 일에 공범이 되지는 않겠다고 결정한다.

 

 

 

불륜남과 헤어질 것을 맹세한다.

 

저번 주에는 곱상한 외모의 P13년 일편단심 팬심을 단박에 돌려놓더니만, 어제부터는 H감독과 배우 K의 일대 사건이 미국 언론에까지 뜨겁게 보도되고 있다고 한다. 남의 연애사에 딱히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굳이 한 마디를 더하고 싶은 이런 심리.

사랑은 열병처럼 찾아온다,고 들었다. 나도 그렇게만 들었다. 배우로서의 커리어,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모두 뒤로 할 정도로 둘의 사랑이 절박했다면 그렇겠구나,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사랑도 변한다. 바뀔 수 있다. 유학 시절, 어려서 만나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엄숙한 맹세를 했던 사람이 떠났다. 그 사람이 새로 자리한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 있을지는 모르는거다. 사람은 변한다. 변했던 사람이, 변해 버린 사랑을 가진 사람이 말하는 사랑의 맹세를... 하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다시 한 번 생각해도 마이코는 참 지혜롭다.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불륜남과 헤어질 것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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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6-2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석부릴 수 있는 남자를 잃는 외로움...왜 이렇게 이해될까요.ㅎㅎ
그래도 아닌건 아닌것도 같고 한편 그럴 수 있으니 사람인 것도 같고...
더 나은 이성을 만났을때 난 어떨까 생각도 하고, 난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도 같고...알 수 없는게 사람이고 사랑인 것도 같고 그러네요.
p는 정말ㅜㅜ 이해도 공감도 용서도 안되지만요.

단발머리 2016-06-28 09:46   좋아요 0 | URL
응석부릴 수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죠.
전 마음에 드는 멋진 이성은 다 화면에서만 보는 경우라서요.
흔들릴 수가 없어요. 저를 흔들수는 있지만, 제게 가까이 오지는 않을테니까요.
안심되면서 슬픈, 이 상황은 뭘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P는 사실, 조폭의 각본에 의해, 교묘하게 당했다,는 이야기도 돌 더라구요.
경찰들은 알고 있는데, 언론이 하도 난리니까, 그냥 두고 있다고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에궁... 참....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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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일을 하게 된다면, 그건 다시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일을 했지만, ‘사회적 고용 관계에 있지 않은 내가 가정에서 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무임금 노동, 그림자 노동이다. ‘이긴 이되 로써 분류되지 않는 같지 않은 이다.

 

작년 여름이던가. 권인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안착해서, 그 안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사회적 고용관계를 하지 않고도, 고용관계 속에서 일하지 않고도, 자기의 삶이 보장되는 식으로 가는 방식은 굉장히 근원적으로 (저는) 방해가 되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 19: 페미니즘이 불편한 이유>

 

나는 속상했고, 서운했다. 그 다음 몇 개의 글과 댓글에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변주했다. 그런 식으로라도 내가 화났다는 걸 누구에게든 알리고 싶었다. 나는 사회의 소외 계층, 모든 경쟁과 정보에 뒤쳐진 전업주부 아닌가. 사회적 고용관계를 맺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내게는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 자체가 부정된 것 같아 더욱 그랬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스스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좋아하는 A님이 나를 말려 주셨다.

권인숙 씨 발언이 어떤 시각에서 나온 줄은 알겠지만 마음 쓰지 마세요. 연대! la solidarite! 연대가 중요합니다.^^”

연대가 중요해요. 그녀가 말하는 연대의 범위와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내가 그 연대의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A님이 나를 말려준 것이 내내 고마웠다.

알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발언이 어느 순간, 어느 때에든지 먹고 살 만한 중산층 여성의 한가한 넋두리쯤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알고 있다.

4인 가족, 외벌이로 서울에 살고 있는 나는 경제적 활동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있다. 많이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많이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산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주요해서 혹은 정확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일을 해야만 하는 대다수의 일하는 여성들에 비해 내가 놓인 상황은 선택적이다. 나는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업주부 13년차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마스마 미리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속 주인공의 고민은 정확히 나의 것과 맞닿아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다시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을 거고, 집안일은 똑같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다.

 

그런대도 내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일을 하고 싶어 할까. 나는 왜 사회적 고용관계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할까. 다들 그래야한다고 하니 그러는 건 아닐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 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테고, 또 많은 시간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작은 위로라고 한다면, ‘마스다 미리’. 그녀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삶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문장들과 깔끔하고 꾸밈없는 그림들을 통해서다. 답을 찾아가는 내 지루한 여정에 말동무가 생겼다. 다정하고 차분하고 그 와중에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친구, 그런 친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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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6-28 09: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전 차분하지 않은 사람이라서요.
차분한 글을 쓰고 싶어요. 아주 많이요.
근데 항상 제 글은 날아다녀요. ㅠㅠ
이 글이 차분하다고 하시니 기분이... 날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