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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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올해의 작가에 심하게 집착하는 내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준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만해도 올해의 작가는 레비카 솔닛이요, 올해의 책은 멀고도 가까운이었는데... 괜찮다. 카테고리를 수정하면 된다. 올해의 에세이는 멀고도 가까운이고, 올해의 소설은 작은 것들의 신이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을 찾기 어렵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 아주 긴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은 느낌이다.   

 

영국 문화와 인도 문화, 지주와 공산주의자, 불가촉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대립된 축이 이야기 속에서 매듭을 묶어가고 풀어가는 방식이 아주 탁월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 속, 주인공의 태도나 생각이 그려지는 방식이 특히 좋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라헬은 공항 라운지에서 빈 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승객처럼 결혼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냥 자리에 앉는다는 기분으로. 그녀는 그와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34)

그때, 그들이 코친 외곽에 이르렀을 때, 빨간색과 하얀색이 칠해진 철도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왔다. 자기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했기에 이렇게 됐음을 라헬은 알았다. (87)

우리 고모 베이비야.” 차코가 말했다.

소피 몰은 곤혹스러웠다. 두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베이비 코참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의 베이비도 개의 베이비도 알았다. 곰의 베이비도, 그래. (곧 라헬에게 박쥐 베이비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고모 베이비라니 당황스러웠다. (201)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난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 믿는 사람이다. 가장 따뜻하거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고 말이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정확히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이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해도 그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 해도 인간의 사랑에는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권태의 모습으로, 질투의 모습으로 혹은 이별의 모습으로. 사랑은 끝나고, 새로운 사랑이 또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마마치 시대엔 파라반들이 다른 불가촉천민과 마찬가지로 공공도로에서 걸어다니는 게 허락되지 않았고, 상체를 가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말할 때는 상대에게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소능로 입을 가려야만 했다. (107

 

인간을 위와 아래, 고귀한 혈통과 천한 혈통으로 분류하는 것을, 그 분류에 따라 인간을 심하게 차별하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신분 차별 때문에 사랑이 금지된다는 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를 읽게 되었을 때 더 실감나게 전해진다. 만지지 못한다는 것,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말할 때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인생에 씌워진 굴레.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까지 전해오는 정해진 운명. 물건을 건넬 때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두는 삶. 그런 삶, 그런 역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벨루타가 변한다. 한 순간에 변한다. 암무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수 백 년의 시간이 덧없는 한순간으로 응결되었다.(245)

 

그 짧은 순간, 고개를 들자 벨루타는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을 보았다. 너무나도 까마득하게 한계를 벗어나 있었던 것들, 역사라는 눈가리개에 가려져 있어 보기 힘들었던 것들을.

간단한 것들.

예를 들면, 라헬의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깊게 볼우물이 패고 눈에서 미소가 사라지고도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것을. 그녀의 갈색 팔이 둥글고 탄탄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어깨는 빛이 났지만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도.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 이젠 더 이상 자신에게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 위에 올려서 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배와 상자. 작은 풍차. 그만이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님도 알았다. 그녀 역시 그에게 줄 선물이 있음을.

이러한 깨달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단번에 그를 베었다. 차갑고, 또한 뜨거웠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암무는 그가 알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도 시선을 돌렸다. 역사라는 악귀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을 다시 그 오래된 상처투성이 가죽으로 포장해서 그들이 진짜 살던 곳으로 끌고 갔다. ‘사랑이 법칙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곳으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암무는 베란다로, 다시 연극으로 되돌아갔다. 몸을 떨면서. (246)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오는 깨달음을 뒤로 하고, ‘역사의 자리, 연극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벨루타와 암무. 하지만,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이미 그가 알았음을 알아버렸으므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예전처럼 연기하며 살 수 없다.

이 사랑이 이렇게 절절한 이유가, 이루어지면 안 되는 사랑이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한. 그 사랑에 대한 금지가 그들의 욕망을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닌가. 그 사랑에 대한 반대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은 아닌가. 만약 학교에서,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만나고, 서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그들의 사랑은 이처럼 절절했을텐가. 이처럼 필사적이었을텐가.

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지지하고 있나 보다. 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오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나 보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꼭 이루고 싶은 사랑이 있었다는 이야기고, 그리고 결국에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을 응원한다는 건, 죽어도 좋을 만큼 위험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런 사랑이 두렵다는 뜻이다.

나는 벨루타처럼, 암무처럼 사랑할 수 없다.

이런 사랑은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이란, 이들의 사랑이란 건 그런 사랑이다.

 

암무쿠티 ……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 온몸을 기대었다. 그는 그저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춥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아려오는 욕망이기도 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그 미끼를 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를 원했다. 절실하게. 그의 젖은 몸이 그녀를 젖게 했다. 그녀가 양팔로 그를 안았다.

그는 냉정해지려 애썼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뭘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내 일. 내 가족. 내 생계. 모든 것을.’

그녀에게 격렬하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잠잠해질 때까지 그를 안고 있었다. 어느 정도라도.

그녀는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두 사람은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살과 살을 맞대고. 그의 검은색에 그녀의 갈색을 맞대고. 그의 단단함에 그녀의 부드러움을 맞대고.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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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7-0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동 서점 갔을 때부터 계속 눈에 들어오던데 :-)
장바구니 담았습니다 ~

단발머리 2016-07-06 14:22   좋아요 1 | URL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경우가 많고 이 책도 그런대요^^ 구입하려고 해요.
세 번은 더 읽을 것 같아요~~~~

잠자냥 2016-07-0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이군요. ㅎㅎ

단발머리 2016-07-06 17:29   좋아요 0 | URL
으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우앗!!! 했어요.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마냥 아쉬웠구요.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어요.^^

2016-07-06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6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0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비교불가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설이죠 ^^

단발머리 2016-07-08 08:08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죠. 작중 인물들에게 완전히 매료됐어요.

저는 번역가에게도 큰 점수를 주고 싶어요. (심사단도 아닌데 점수를 줍니다.ㅎㅎ)
원서를 안 읽어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글로도 아름답게 읽히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