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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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든가, 언어에 이데올로기가 있을까, 없을까를 가지고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 사회주의권에서도 이런 논쟁이 붙었던 걸로 알고 있다. 말이 지니는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아니 언어는 중립이지만 사용하는 사람이나 환경에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지니게 된다는 관점이 있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도대체 언어는 어떤 존재인가? 언어가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순간 사람들, 사회, 환경, 즉 시공간과 사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언어가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언어를 사람이나 환경에서 떼어놓고 언어 자체만을 보면 그 언어는 생명을 잃는다. 그냥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러므로 언어에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자체에 있는지를 따지지 말고 언어는 이미 사용된 순간, 세상에 나온 순간 이데올로기를 지니게 된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요즘 자주 회자되는 '갑질'이라는 말에는 있는 자, 횡포, 약자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말 자체가 이미 어떤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는 사실까지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언어는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우리나라에서 떠돌아다니는 '종북, 퍼주기'라는 말도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니 언어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일은 언어를 잘 쓰는 지름길이 된다.

 

이 책에 쓰인 작은 제목은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다. '톺아보다'가 낯선 언어일 수도 있다.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톺아보다 : 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다.

 

별 도움이 안 된다. 톺아보다를 찾았는데, 톺아란 말이 또 나오니, 참... 그러면 '톺다'는 말을 찾아야 한다.

 

톺다 :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이런 뜻이겠거니 한다. 톺다란 단어는 세 개가 있고, 이 중에 톺다1에 두번째 풀이가 바로 위에 찾아적은 풀이다.

 

사전도 안 친절하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가 사전을 찾아가면 어휘 공부를 하겠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제대로 된 사전을 만들면 어문 규정은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어문 규정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을 통해서 말을 익혀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표준국어대사전조차 이러니 언어 공부를 사전을 통해 하기는 힘들다.

 

어문 규정보다 사전이 필요한 이유를 대고 있는 항목이 바로 '자장면, 짜장면'이다. 현실 발음을 무시한 규정에 얽매인 그런 표준어 규정으로 사람들이 '자장면'을 쓰게 강제했던 시절이 있었다. 외래어 규정에 의하면 '자장면'으로 쓰고 [자장면]으로 발음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부분에서 줄다리기는 규정과 실제 생활 사이의, 관과 민 사이의 갈등이다. 누가 우선해야 하는가?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에서 언어생활에서 국민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규정에 얽매여 실생활과 동떨어진 언어생활을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물론 그런 경우는 지금도 많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써서는 안 될 말, 그 말이 바로 '각하'라는 것. 그것도 '대통령 각하'라니... 요즘은 '대통령 님'으로 쓰고 있지만, '각하'란 말의 연원을 따지면 참 부끄러운 말이다. 왕도 아니로 겨우 신하들에게 쓰던 호칭을, 그것도 일제시대에 조선총독에게 부여되었던 칭호를 쓰다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 신분제 사회에서나 쓸 법한 칭호를 쓰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여기서 끝났으면 이 책이 제대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을텐데... 한발 더 나아간다.

 

그렇다. '대통령'이라는 말도 문제다. 국민의 의사를 대표한다는 사람에게 '다스린다'는 말이 들어가는 '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것. 그냥 사람들을 대표할 뿐인데... 그것도 특정한 기간만. 이 용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고치지 않으면 지금처럼 촛불을 대신해서 정권을 잡은 정부조차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밖에 많은 말들이 나온다. 여성이 직업을 가졌을 때 붙이는 '여(女)-'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으니 더 언급하지 않으련다. 다만, 그런 여성에게, 분명 남녀 모두에게 해당할 텐데도 이상하게 여성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하는 '기혼, 미혼' 칸에 대해서 이 책이 잘 지적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언어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야 한다. 이제 언어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언어는 밖으로 나온 순간 이데올로기를 띤다. 내가 어떤 의도를 하던 하지 않았던 언어는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그 자리에 이데올로기가 빠질 수가 없다. 그러니 언어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할지 한번쯤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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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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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다시 읽고 있다. 여러 나라 신화를 읽었지만, 기억 속에 많이 남아 있지 못하다. 읽고 잊어버리고, 또 읽고 잊어버리고...

 

어렸을 때 읽었더라면 기억에 더 오래 남았을까?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또 읽었던 우리나라 신화나 그리스로마 신화는 쉽사리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아마도 뇌의 많은 부분이 비어 있을 때 채웠던 지식이라서 그랬는지, 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른이 되면서 읽은 신화는 기억 속에 그리 오래 남아 있지 않는다.

 

다른 일들이 자꾸만 신화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로 들어와 신화를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읽었던 신화가 신비로움, 경이로움을 자아내었다면, 어른이 되면서 읽은 신화는 그런 것들을 걷어내고 과학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해석을 하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화를 읽으며 신화 속에 빠져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자꾸만 현실로 가져오려고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사실, 신화는 신들을 빙자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인간들이 꿈꾸던 것들을 신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것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화는 곧 우리들 이야기임에 확실한데...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현실에서 신화를 통해서 우리 삶을 다시 보기가 힘들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신화는 필요하다.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아니 우주에 존재하는 한, 신화는 인간과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면 신화 역시 사라지겠지. 다른 생명체가 나타나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또 신화라고 한다면,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와는 결이 다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인간이 끊임없이 등장해서 신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가는데, 이 북유럽 신화에는 인간의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신들의 이야기, 신들이 인간처럼 생로병사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신들에게 적대하는 세력인 거인족이 있고, 재주는 있으나 다른 세계에 살며 신들에게 물건을 만들어주는 난쟁이들이 나온다.

 

거인족과 신들은 갈등 관계에 있고, 또 신들도 서로 반목하기도 한다. 신들의 종류를 두 종족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 북유럽 신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이 전쟁을 하다가 휴전을 하고, 서로 신을 파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 신화의 앞부분에 나오는데...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들은 전쟁을 한다. 티탄족과 올림푸스 신의 전쟁... 북유럽 신화도 역시 신과 거인의 전쟁이 나오니, 비슷하다고 해야 할 수 있고.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은 불사의 존재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늙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이다.

 

한데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은 스스로의 힘도 힘이겠지만 다른 물건의 도움을 받아 더 강해지고, 또 늙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세상에 신이 죽는다. 발데르라는 신이 죽는 과정은 아킬레스가 죽는 과정과 비슷하다.

 

또한 마지막 전쟁, 라그나뢰크에서 신들은 거의 대부분 죽어간다. 거인족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 죽음 이후 다른 시대가 다시 시작한다. 역사는 순환한다. 그렇다. 하나만이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할 수 없기에 더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북유럽 신화는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나온 이야기일테니, 그들의 호전적인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신들은 계속 다른 존재들과 갈등을 한다. 그것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그렇게 신들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를 이룬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된다.

 

문명의 정점에 올랐다고 했을 때, 정점에서 내려올 일만 남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이 이대로 계속 존속하기는 힘들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라그나뢰크에서처럼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신화를 읽는 이유가 바로 현실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라면... 북유럽 신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책 276쪽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는 역시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듣고자 하는 자에게는 큰 소리로 알려주거라! 이 말을 새기는 자들은 번성하리니! 듣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려주거라!' (276쪽)

 

불경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한다. 성경에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고 한다. 그렇다. 듣고자 하는 사람, 들을 귀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유익한 말들, 그것이 바로 경전이고 또 신화다.

 

그런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 좀더 듣고자 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화이지 않을까 싶다. 경전보다 철학책보다 더 들을 수 있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이 신화니 말이다.

 

우리게에 좀 생소하지만 그래도 영화 '토르'나 '어벤져스'를 통해 알려진 천둥의 신 토르와 악당 로키를 접한 사람에게는 친숙한 신화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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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은 인문학이다 - 흥미진진 영어를 둘러싼 역사와 문화, 지식의 향연
고이즈미 마키오 지음, 홍경수 옮김 / 사람in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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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왜 그 말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왜 이 말이 이런 뜻으로 쓰이지 하는 생각. 우리말에서도 그런 궁금증을 유발하는 말들이 많다.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어느 순간 누군가가 붙인 이름이 사회성을 획득하면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언어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

 

그러나 자의성이라고 해서 막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개연성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어떤 뜻을 지닌 말이 탄생하게 된다.

 

어원은 그 언어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어원을 알면 더 많은 어휘들을 알 수 있다. 단지 어휘만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나타나게 된 역사, 문화적 상황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영어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다. 단지 어원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 시대에 나온 언어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읽어가면서 서양 역사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

 

영어 단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어서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파생된 다른 많은 언어들도 알게 되기도 한다.

 

아마 영어 단어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들이 읽으면 영어에 대해서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보이콧(boycott)이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도 우리나라로 치면 악질 마름 정도 되는 사람. 이 사람에 대해서 거부 운동을 벌인 것이 보이콧이라는 언어의 뜻으로 자리잡았다니... (318-319쪽)

 

이렇게 사람 이름이 영어 단어로 남아 사용된 경우가 많았고, (이 책에는 그런 단어들이 제법 나오는데, 우선 John Hancock이라는 말이 서명을 하다라는 말로 쓰인다는 것, 국수주의를 나타내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말이 나폴레옹의 열렬한 추종자 쇼뱅에서 왔다는 말, 미국의 특이한 선거구 획정 방식인 게리맨더링이 게리란 사람에게 왔다는 것, Dear John Letter라는 말이 이혼장을 의미한다는 것 등등)  달력에 있는 각 달의 이름도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책에서 한 설명이 좀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숫자가 7월부터 두 달씩 밀리게 된 사연, 본래는 겨울 두 달을 제외하고 열달로 달 이름을 붙였다는 것. 나중에 두 달을 추가했기에 밀리게 되었다는... 그런. 삼월을 시작으로 삼월로부터 몇 번째 달 하면 딱 들어맞는다는 말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72-79쪽)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읽으면 좋을 것이다. 현대사의 흐름을 익히게 되는 역할도 하고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알게도 되니 이래저래 좋다.

 

우리나라에서도 어원에 대한 책이 꽤 나오고 있는데, 어원을 알아가는 것, 언어의 역사를 알아간다는 것에 더해 우리 역사, 우리 삶을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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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능동태다
김흥식 지음 / 그림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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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이다. 분량이 상당히 적다. 그럼에도 주장은 강하다. 자기 주장을 하는데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짧고 명확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고 한다.

 

그 핵심은 바로 제목이다. '우리말은 능동태다'

 

능동태.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한다는 것,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우리말이 능동태라는 것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

 

그런데 지금 우리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나 잘 살펴보면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수동태라니? 영어시간에 배운 것이 떠오른다. 수동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말 문법에서는 피동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장에서 수동태라고 하면 무언가 좀 이상하다.

 

수동태 문장을 많이 쓰는 것부터 우리말이 오염되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수동태를 쓰는 것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 대상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동태다. 뉴스를 보면 피동형 표현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들은 그냥 전달할 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언어에서부터 나오니, 우리말이 잘못 쓰이는 것에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동태 문장은 자꾸만 길어진다. 장황해지면서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는 능동 표현을 해야 한다.

 

여기에 한자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한자를 서양의 라틴어로 여긴다면 우리말의 뿌리를 아는 데 한자는 많은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한자도 우리말에서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인정할 수 있다. 한자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영어에서 온 말은 우대하면서 한자어로 되어 있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우리말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 함을 이 책에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짧은 분량에 주장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우리말, 우리가 잘 살려 쓰지 않으면 누가 살려 쓰겠는가. 우리말 사용에 대해서 다시 생가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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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결딴낸 우리말
권오운 지음 / 문학수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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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다. 읽으면서 내내... 도대체 이 시에서 어떤 말이 잘못 쓰였단 말이지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읽고 또 읽어도 내가 알고 있는 어휘 목록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렇게 시에서 잘못된 어휘들을 잘 찾아내다니... 이렇게 잘못 쓰인 언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시를 감상하기보다는 먼저 마음의 문이 닫히고, 벽이 쌓여 시를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말이 잘못 쓰이고 있는 현실을 너무도 안타까워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저자의 목소리와 이오덕 선생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듯하다.

 

제발 우리말을 제대로 쓰라고, 잘 쓰라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리말을 잘 쓰지, 제대로 쓸 수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는 것으로 대체해야 하는데...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적확한 언어로 쓰인 글인가? 아니면 언어의 적확성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글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사전을 통째로 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저자는 사전도 비판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른 우리말, 고운 우리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저자처럼 어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작가들이 쓴 글에서도 잘못 쓰인 어휘들이 수두룩하니 우리말을 잘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학교 다니면서 국어 시간이 가장 많았고, 중요하다고 강조도 했는데, 국어 시간에 배운 어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국어 시간에 표준어로 수업을 한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쓰는 표준어가 얼마나 될까? 극도로 적은 양의 어휘들만 배우고 사용하고 학교를 마치지 않았는지.

 

일상에서 쓰는 말이 어휘의 보고라는 말이 있는데, 일상에서 쓰는 말 중에 잘못 쓰고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는 말을 시에 쓰고 있는 시인들이 저자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여러모로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고 잘 써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우리말을 어떤 식으로 배우고 익히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저자의 책만 읽으면 되나?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건 저자도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고.

 

결국 다양한 글을 읽고 다양하게 쓰인 어휘들을 비교해보는 경험을 해야 할텐데, 갈수록 쉬운 어휘만 쓰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앍고, 짧고 명확한 문장만을 다루고 있는 교과서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이도 힘든 일이다.

 

어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만 잘못 쓰인 어휘를 찾아낼 수 있고 고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엔 청소년들은 입시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여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고, 어른들은 먹고 살 걱정에 어휘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이래저래 우리나라 말들이 결딴나고 있는 현실인데, 작가들이, 언어로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살려내는, 더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한숨만 나오고 말았으니...

 

그렇다고 저자가 한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잘못 쓰인 어휘도 시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시인들이 의도적으로 낱말을 만들거나 틀리게 쓰기도 하고.

 

하여 시에서 하나하나 낱말에만 매달릴 수는 없지만, 저자의 주장을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는 시인들은 언어에 대해 아주 인색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깐깐하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에 맞는 언어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는가. 그래서 저자는 시인들에 대해서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마저 너무도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다면 우리말은 결딴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을 써서 경종을 울리는지도 모른다. 우리보도 좀 생각을 하라고. 우리가 쓰는 말에 관심을 가지라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우리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우리말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끄러움은 성찰을 이끌어내고, 성찰은 발전으로 가게 해준다고 그나마 위안을 할 수밖에.

 

가령 이런 말 '승부욕' 정말 많이 쓰는 말 아닌가. 승부욕이 강하다. 승부욕이 없다. 이렇게 잘 쓰고 있는 이 말이 잘못된 말이라니... '승부(勝負)'라는 말이 '이기고 짐'이라고 하니 여기에 바란다는 '욕(慾)'자를 쓰면 이기고 짐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강하다,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조심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굳어져 있는 말인데, 이 말을 어떻게 고쳐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우리말이 결딴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관심을 가지고 글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들에게 발을 거는 행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지적들을 통해 우리말이 제대로 쓰이도록 해야 한다는 저자의 열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우리말이 결딴나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덧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하나. 언어에 대해서 그리도 명확하게 주장하는 저자가 '고희'에 대한 설명에서는 내가 납득할 수가 없다.

 

고희(古稀), 나는 지금까지 일흔 살로 알고 있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이라고... 만 70이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일흔 살로 나오고.

 

237쪽. 고희(古稀)" '고래(古來)로 드문 나이'라는 뜻으로 일흔한 살을 이르는 말.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말  이라고 나온다. 어째 좀... 오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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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부욕(勝負慾)이란 말이 과연 잘못된 말일까?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8-11-19 13:30 
    가령 이런 말 '승부욕' 정말 많이 쓰는 말 아닌가. 승부욕이 강하다. 승부욕이 없다. 이렇게 잘 쓰고 있는 이 말이 잘못된 말이라니... '승부(勝負)'라는 말이 '이기고 짐'이라고 하니 여기에 바란다는 '욕(慾)'자를 쓰면 이기고 짐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강하다,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조심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굳어져 있는 말인데, 이 말을 어떻게 고쳐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 k
 
 
2018-11-19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9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9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