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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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라니. 멋모르는 어린아이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청춘 시절에는 그 시절에 흠뻑 빠져 나이들어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청춘 시절은 현재만이 있는 시절이다.

 

어쩌면 어린시절은 미래가 더 많이 보이는 시절이라면 청춘은 현재에 몰입한 시절이다. 그런 시절이 지나고 서서히 늙어가면 이제는 현재에서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보게 된다.

 

미래는 조금, 과거는 많이. 과거가 많이 보일수록 더 늙었다고 할 수 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앞으로 살아갈 세월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빨리 압축되어 존재하고, 미래는 느리게 펼쳐서 존재하길 바란다.

 

어느 순간 나이듦에 대해서 저항하기 시작한다. 과거를 그리워하기 시작하고, 현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때부터가 늙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저항한다고 해도 늙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늙음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 그것은 무(無)다. 도무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언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물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경험할 수도 없는.

 

사람은 누구나 늙고 죽어간다는 것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경험은 우리가 언어로 다시 전달할 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일회성이다. 불가역적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경험을 하되 경험했다고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태가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저항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저항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몸은 자꾸만 중력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땅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점점 더 중력이 몸에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 두려운 것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늙어감에 대해서 자신이 서서히 죽음이라는 구멍을 향해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청년기를 지나고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인간이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까, 사람들은 늙어감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아무리 젊다고 생각해도 이미 뒤쳐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최근에 나온 책들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부정하려고 해도, 자신의 언어와 젊은이들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체념이라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것 아니겠는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삶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이 책에서는 많은 문학작품이 언급된다. 거기서 늙어감, 죽어감에 대해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회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 무의 무의미함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저 공허하고 잘못된 기대, 자기기만을 되풀이하는 연습에 익숙해질 뿐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한사코 부정하며 자기기만의 희생자가 된다.  204쪽.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자신과 거짓말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207쪽

 

이것을 꼭 자기기만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를 살면서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불러올 수 인간이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인간은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 자기기만을, 거짓말 타협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체념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수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단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늙어감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유한한 삶, 일회적인 삶을 잘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올 미래를 미리 당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미래는 현재에는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간다면, 늙어가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이미 죽음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살아갈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럼에도 우리는 늙어감,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 만약 죽음이라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지금보다 나아질까... 그 점을 생각하면...

 

늙어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서양문학에 대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지만 그래, 그래 하면서 읽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프루스트, 괴테, 토마스 만 등의 소설이 기본 바탕이 되고 있으니... 원. 그래서 내게는 많이 난해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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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12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kinye91님의 이 글에 공감하는 내용이 참 많아요. 과거가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늙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자신이 아무리 젊다 생각해도 어느 순간 이미 뒤처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도 느무느무 공감했어요. 저는 제가 나이가 들더라도 태생이 철이 없어서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다 죽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것과 무관하게 어느 순간 꼰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럴수록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17-08-12 14:13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요. 저도 적어도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노력해야겠지요.

돌아온탕아 2017-08-1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리뷰네요. 잘 읽고 갑니다. :)

kinye91 2017-08-13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다 - 수의사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생명, 공존, 생태 이야기
해를 그리며 박종무 지음 / 리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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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말에는 '사람 사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인(人)'이라는 글자 역시 서로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니까 사람이란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 즉 자신 홀로가 아닌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여기에 '간(間)'이라고 하여 사이란 뜻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으니,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관계맺는다는 것이다.

 

책의 닫는 글에서 '아인쉬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4개월 후에 지구상의 인류도 사라질 거라고 이야기했단다.'(282쪽)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잘 살면 될 줄 알지만,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는 것,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그래서 만물은 서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우주에 확장하면 우리는 우주의 어느 행성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라면 그곳에 제2의 지구를 만들어 이주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우리는 우리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꿀벌뿐만이 아니라 많은 미생물들이 없다면 인간이 살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그만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인간 이외의 생명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멸종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기만 하고 있다. 그런 결과 지금 인간들도 살기 힘든 상황으로 지구를 몰아가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을 무시하고, 배제하기만 하면 결국 인간 자신도 살아갈 수 없음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대,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학대, 병원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배제하는 온갖 박테리아, 미생물들, 자신들의 편리란 이름으로 뭉개버리는 자연들...

 

이들을 이렇게 무시하고 배제하기만 하면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이 된 지구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여기에 우주의 다른 별들을 개척한다고 해도 인간이 잘 살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지금껏 관계맺어 왔던 다른 생명체들이, 또 무생물들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보장이 없고,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적응이 되기까지는 살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딸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인간과 생명, 진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만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고 하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삶, 대량 축산에 의지하는 육식 위주의 삶을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그렇다. 우리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과이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과의 관계, 또 무생물들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 바로 우리 인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읽고서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생명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지만 살아갈 수 있음을 저자는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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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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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떨어지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만큼 나 자신도 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화란 보통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없고(자신이 속으로 자신과 주고받는 말도 대화로 볼 수 있다고 바흐친은 주장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반적으로), 둘이 주고받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고가는 말 속에서 어떤 품격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품격이 낮은 말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쓰는 말 역시 품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니, 자신을 비추어보고 싶으면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보라고 한 말이 있듯이, 주고받는 말에는 일방적으로 품격이 낮은 말만 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서로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품격 낮은 대화가 이루어질 때는 상대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나에 대해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정도로 품격이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써온 말 중에 격이 높은 말이 얼마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찔해진다. 그냥 내뱉은 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냥 마음 속에서 생겨난 말들을 거르지 않고 밖으로 표출한 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을 많이 했다는 생각. 이 책의 한 부분인 '지적'이라는 제목을 지닌 글에서 남을 지적할 때 손가락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엄지를 빼고 나면 네 손가락 중에 지적질을 할 때 한 손가락 주로 검지 손가락은 상대를 향하고 있지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글.

 

그만큼 자신을 세 번 정도 되돌아 본 다음에 남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그 정도는 되어야 말에 품격이 실릴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사람에게도 품격이 있어서 그를 '인품'이라고 하듯이 저자는 말에도 품격이 있다고, 즉 '언품'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언품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현란한 말하기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듣기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그렇다. 모든 말하기는 결국 듣기다. 듣기가 잘 되어야 말하기를 할 수 있다.

 

듣기, 이는 상대를 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찬찬히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듣기다.

 

말의 품격은 그래서 듣기, 경청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듣기가 곧 잘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듣기보다는 제 말만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고,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격 떨어지는 말들을 뱉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만큼 말이 품격을 잃은 시대이기도 한데, 말이 품격을 잃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어지럽다는 것이다. 공자가 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말 했겠는가.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말, 그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말만 앞세우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자신의 말보다는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 그런 사회는 품격이 높은 사회다.

 

'말의 품격' 이 책은 그런 품격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사회지도층이라고 자부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막해서 사방에서 비판을 받는 그런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제발, 품격있는 말 좀 쓰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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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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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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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7-08-05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말하는 사람들 보면 님처럼 저도 화가납니다. 온 오프라인을 통틀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들을 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말을 해야만 자기의사를 표현할수있나 싶습니다.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는 생각이 말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말이 생각을 만드는 것이라 하더군요. 결국 막말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저급화 시키는 자해를 하는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kinye91 2017-08-05 08:26   좋아요 1 | URL
결국 막말이, 저급한 말들이 난무하는 사회는 저급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과 생각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화려하고 세련된 말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이 담긴 말들을 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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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뉴스를 보는데, 낙서 문화에 대해서 나온다. 그래피티가 아니다. 공공장소에 낙서하는 것을 그래피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뉴스는 그래피티로 이야기하지 않고 몰상식한 행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이도에 있는 등대에 가보면 사람들이 한 낙서로 가득하다고 한다. 방송에 나온 등대 속은 온갖 언어들로 가득차 있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또 그런 언어들로 채워진다고 한다.

 

이 언어들은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을까? 따스함일까? 차가움일까? 부드러움일까? 날카로움일까? 사람들이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할까, 찌푸리게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언어들에서 어떤 감정보다는 낙서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차가움과 날카로움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리게 될 것이다.

 

장면 둘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갔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여름이라 주변은 온통 푸른데, 나무 줄기들이 하얗게 서 있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팻말들에 적혀 있던 문구. 자작나무가 아프단다. 왜냐?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를 무슨 도화지로 착각을 했는지, 온갖 언어들로 장식을 해놓기 때문이란다.

 

하얀 껍질을 벗겨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희디 흰 줄기에 자기의 이름을 써놓는다든지, 누구 왔가 감이라고 써 놓는다든지, 누구야 사랑해라고 사랑 고백을 자작나무 줄기에 해놓는다.

 

자작나무에 새겨져 있는 언어, 무슨 온도를 지니고 있을까? 오이도에 있는 등대에 있는 낙서와 자작나무에 있는 낙서가 다를까?

 

장면 셋

 

잘 알려진 산에 가 보면 바위 곳곳에 이름이 적혀 있다. 한자어로...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들, 그 언어들.

 

자기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었는지, 도처에 이름들이 있다. 가끔은 아는 이름을 만나고서는 - 그것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유명한 사람 - 반갑기도 하지만, 도대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온갖 이름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 자신의 행적을 언어로 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북한 장면을 보면 세상에! 그 좋은 명산인 금강산에 온갖 구호들이 적혀 있으니...

 

그 언어들은 무기가 되어 우리들에게 다가든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런 장면들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책이 바로 이기주의 이 책, "언어의 온도"였다. 세 장면에서 나타나는 언어들은 나에게 따스함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따스함이 아니라 불쾌감만을 주었다.

 

하지만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와 나를 잇는 역할도 하지만, 나와 남을 잇는 역할도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고 한다.

 

적당한 온도... 사람에게 따스함을 주는 온도, 그런 온도를 지닌 말.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언어가 나와 나, 나와 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래서 따스한 언어들이 총출동한다.

 

그냥 휴가 때 이 한 권을 들고 떠나 조용히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덮어주기 때문이다. 일상에 지쳐 모난 마음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작가의 언어를 기록한 이 종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목숨값이 헛되지 않도록 언어를 종이에 새겨야 하는 것 아닌가.

 

종이에 새겨진 언어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하게 새겨질 때 나무의 목숨값은 헛되지 않게 되고, 그 때서야 비로소 언어는 따스함이라는 온도, 부드러움이라는 결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값을 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말들, 글들은 참 따스하다. 우리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는 언어들이다.

 

그래서 마음이 거칠어질 때 책의 어느 한 편을 들춰 읽고 싶어진다. 아무 쪽이나 괜찮다. 거칠고 차가운 마음을 잘 보듬어 줄테니까.

 

나무의 목숨을 언어의 온도로 잘 감싸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조용히 한적한 곳에서 이 책을 펼치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등대나 자작나무, 또는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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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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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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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서 서로를 볼 수 없는 '상사화'

 

어쩌면 죽음과 삶 역시 이러한 상사화 같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느 한쪽만 존재하게 된다. 한쪽이 오면 한쪽은 물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삶은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죽음은 자신이 볼 수 없다.

 

죽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도대체 죽음 뒤에 어떤 삶이 있을까?

 

그냥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 분명 새로운 삶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죽어보아야만 알 수 있으니 여전히 죽음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어쩌면 그는 근사체험(近死體驗)을 한 사람들을 통해, 또 자신의 근사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라고.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고.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들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나.

 

악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면, ' 저 사람 죽을 때가 되었나,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하면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고 하는 로스 박사의 말은, 많은 과학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죽어가는 사람의 소망이 담겨서 환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그것은 상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죽음은 실제라고 말을 한다.

 

영적 존재는 분명 존재한다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가장 사랑하는 영적 존재가 있고, 그 존재와 죽음의 순간에 함께 하게 된다고, 그 때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로스 박사의 말을 믿으면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이 책에 나오는 용어로 하면 우선 육체라는 고치를 벗고 영혼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일,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적인 변환을 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죽음, 그렇다면 사람들이 굳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묘지나 화장터가 혐오시설이 되는 나라에서는 로스 박사의 이런 책이 반드시 읽혀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문화를 지니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죽음을 그냥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오는데, 이럴 땐 부모의 죽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애도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한다. 그래야만 아이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꼭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냥 행복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로스 박사의 말을 들으면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 나를 심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이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잘 살기 위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지만,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해주지 못한 그 삶에 대해 이렇게라도 근사체험을 통해 들려주는 이유는 바로 지금 잘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한다.

 

읽어볼 만하다. 읽어봐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도. 잘 죽는다는 것, 그것은 잘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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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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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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