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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보나르의 그림을 떠올리며 작가가 썼다고 하지만,(실제로 설터는 이 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프랑스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를 생각했다고 했다. 441페이지. 물론 작가가 모델로 생각한 부부가 있다고 한다. 그 아내쪽은 셜터의 책 속 ~ 그녀 깊은 곳엔 철새의 본능이 있었다~를 비명으로 쓸 것이라고 했다) 내게 이 책의 앞부분은 세잔의 식탁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식탁 위 사과들은 떨어질 것 같고, 접시들은 아슬아슬하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듯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식탁.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모여 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서로 다른 곳을 보며, 환한 식탁보 아래 같이 자리잡고 앉아 있다. 허무와 공허 사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아래로의 추락이지만 추락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종이인형처럼 각자 다른 곳을 보며 위태롭게 앉아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는 기다린다. 그럼에도 그 그림은 조금만 떨어져서 보기만 한다면 아름답고 조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이 책을 덮으면서 보나르의 그림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20대가 30대가 세잔의 식탁그림같았다면, 그들의 그 다음 남은 인생은 보나르의 아침식탁이란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은 텅 빈 식탁,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드라도 비리도, 그들이 만나는 인물들도 아니다. 그저 삶.
내가 가진 바구니는 가득 차 있어, 누구에게나 나눠주며 받는 이들도 즐거워할 시기가 있었다. 살면서 바구니는 비어가고, 인색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밝음은 빛을 잃고, 마음은 초초해진다. 빠지는 머리카락과 깊어가는 주름살, 그럼에도 마음은 여전히 바구니가 가득 찼던 그 때처럼 떠나고 싶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러다 깨닫는다. 처음부터 바구니는 비어 있었던 것.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비어 있는 바구니에 가득 담겨있었던 건, 내가 의미를 부여했던 수 많은 것들. 빛이 사라지고 바구니를 보면 그저 낙엽들과 솔방울들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과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
가벼운 나날
살아가는 건 가벼워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집, 윤기나게 잘 관리되어진 가구들, 친구들과의 만남과 와인잔이 부딪치는 소리.
아이들과 강아지.
그 모든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더라고 말하는 네드라.
짧은 문장들이 시어처럼 나열된 이 책의 주인공은 삶이다. 네드라와 비리가 살아가는, 누구나 결국은 같아지는 삶.
무겁고 어렵고 어깨를 짓누르고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될 것 같지만, 그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하려 찍은 사진마저도 낯설다고 마치 거짓같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예전 책표지인 보나르의 그림엔 아침과 식사만이 주인공일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보며 사람들은 상상하겠지.
곧 아이들과 젊은 부부가 모여 떠들며 식사할거야.
지팡이에 의지한 누군가와 좀 더 젊은 누군가가 앉아 식사를 할거야.
식사준비를 마쳤지만, 급작스레 찾아 온 통증으로 급하게 병원을 간 걸까.
아침부터 찾아온 연인을 맞으러 급하게 나간걸까.
모두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겠지만, 이 소설은 그저 텅 빈 아침식사,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삶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 그러다 지쳐 어느 순간 삶에 자신을 맡기며 늙어가고, 조용히 힘든 마라톤을 끝내는 것.
사랑은 가고, 아침의 햇살도 잦아들때쯤, 서로 악수 쯤을 나누며 헤어지는 부부를 보며, 어쩌면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껍데기를 껴안고 서로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부부가 옳은 것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은 결국 혼자이기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인지 .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가정부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우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는 가정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거창할 이유는 없지만, 가정부의 말이 너무나 와닿는다. 아침의 커피.
세잔의 식탁에서 보나르의 식탁으로 가는 길, 그 길에서 잃게 되는 것들과 희미해져가는 것, 그러나 따사롭고 보드랍게 몽환적으로 덧칠해 져가는 것, 그것이 책 속에서 내가 느낀 삶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빨 없는 개(돈 없는 유대인이란 뜻) 라고 지칭되는 비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별로 돈이 없다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부유한걸이란 생각, 일명 유한 마담인 네드라의 대책없는 돈관리? 70년대엔미국도 일찍 결혼을 했구나, 유전력이 무섭구나. 이딴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거다. 딱 내 수준에 맞게 책을 보는 것같은 자괴감 흑흑)
<인상파 이후의 인상파로 불리기도 하는 보나르는 기억으로 그림을 그렸다. 기억처럼, 있는 그대로는 아니나 정서적으로 정확한 형태, 화려한 현재성으로 빛나는 색채와 붓질, 그와는 사뭇 대조되는 내부적인 삶의 사실들, 보나르의 그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실제로 이 책을 덮는 순간 붓자국이 완벽한 빛과 시간을 모두 머금은 서글픅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이 눈앞에 그려졌다. 44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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