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픈 짐승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일년 전에 당신은 누구였나요
일년 전에 당신은 누구였나요. 바로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일년 전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벽 사이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살던 이들이, 어느 날 눈을 뜨니 그 벽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일년이 흐른 지금, 일년 전 내가 누구였는지 말할 수 있을까.
내 운명의 상대를 저 따위 벽에 의해 결국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그냥저냥 현실과 타협하며 사랑하고 결혼하고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벽이 무너지고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면?
주인공은 마치 암시처럼 사랑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 이라 말한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아마존족의 여왕 으로 적장을 사랑하지만 오해로 그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펜테질리아를 언급하는 부분애서 어쩌면 이 소설은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독출신 고생물학자인 주인공과 서독출신 유부남 프란츠의 불륜 이야기다. 뻔한 결말로 달려가지만, 뻔해 보이지 않는 것은 둘 사이의 프란츠가 그어놓는 경계와 , 주인공이 느끼는 빼앗긴 운명적 사랑에 대한 집착이다
로마인과 야만인 사이의 경계라는 하드리아누스의 방벽을 보러가는 프란츠 부부의 모습과 동독인인 주인공을 야만인의 범주에 놓는 모습에서 동독과 서독의 통합 속 경계가, 오랜 세월 그어진 벽으로 인한 주인공의 박탈감과 집착을 조금은 이해하게 해준다.
매일마다 달라지는 동독의 도시와 동독인의 삶에서 주인공이 영원한 사랑에 집착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 그런 사랑을 의심하고 불안해 하는 것도 당연한 것.
이 소설을 읽으며 윌리엄 포크너의 <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가 떠올랐다. 주인공 또한 에밀리처럼 자신이 만들어놓은 시간의 방안에서 프란츠를 놓아주지 못한체, 프란츠를 느끼고 프란츠를 만지며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뼈대만 남은 브로키오사우러스를 아름답게 여기며, 브로키오사우러스의 여사제를 자청하던 주인공을 보면서 그들의 사랑도 뼈대만 남아 화석으로 굳어졌다.
그저 그럴듯한 불륜의 이야기가 작가의 문장과 특이한 시대상황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같은 시간대를 살았지만 인간이 만든 장벽을 사이로 너무나 다른 교육과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벽이 허물어지면서 동독인들은 외롭고 외로워졌다. 그들이 아는 거리와 광장은 사라지고 이름이 바뀌고 집도 잃었고 직업도 바뀌었다. 거기다 사랑까지 잃은 슬픈 짐승.
( 모니카 마론은 서독에서 태어나, 동독에서 성장, 다시 서독으로 이주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다. )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내 연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도움닫기를 한 뒤 정확한 도약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되는 높이뛰기 선수처럼 자로 잰 듯한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내 집에 들어설 때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이 방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지고 몸이 노곤해지면 그의 두 팔이 내 등을 감싸 안는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가 왜 나를 떠났는지는 잊었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백 살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다. 어쩌면 이제 겨우 아흔 살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