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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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보게 된 그 기와집은 작아 보였다.
그 기와집에 핀 살구꽃은 지금도 늘 그 마을을 마을답게 해 주고 있다.
지금은 그 기와집을 헐어 버리고 그 기와집보다 더 번듯한 기와집을 지었다. - P70

내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아버지는 갈담장 가는 길 그 기와집보다 더 큰기와집을 지으셨다. 아버님은 그 집에서 돌아가셨고, 나는 그 집에서오래 살았다. 지은 지 오래된 그 집은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서 있다. - P73

갈담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 P79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갈담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청년들이 유일하게 이 고을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곳이었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곳이었다. 갈담장은 새로 만난 다른 동네의젊은이들의 싸움판이었다. 갈담에 거주하는 젊은 건달들이산중에서 나온 어수룩한 젊은이들을 봉 잡는 곳이기도 했다.
갈담의 젊은 패들은 그래서 오랫동안이 근방의 모든 젊은이들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 P84

우리들이 갈담을 거쳐 외지로 나갈 때 어깨를 펴고 다닌 지가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갈담장이라는 곳 때문에 늘 갈담의 깡패(?)들에게쥐여지내야만 했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젊은 깡패들 중에나이가 같은 놈들과 갑계를 하고 있다. 곗날이 되어 같이 놀다 보면옛날 갈담 청년들에게 당했던 이야기들을 한다. - P87

시골 장터는 처녀들이 오랜만에 마을을 벗어나 외지 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 P88

순창으로 중학을 간 나는 이제 갈담장보다 훨씬 큰 장을 보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 때만 해도 순창장에는그 유명한 ‘베개딱지‘ 장이 섰다. 베개딱지는 베개의 양옆에 대는한쌍의 딱지였는데, 그 딱지에 학을 수놓았다. 불란서 실을 사용한 수는붉고 화려했다. 순창군 일대에 사는 모든 처녀들은 닷새 동안베개딱지에 수를 놓아 장날이면 장으로 모두 가지고 나왔다.
순창군의 모든 처녀들이 장으로 모여들었으므로베개딱지전은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 P93

어느 장이든 파장 무렵의 싸움판은 늘 삶을 스산하게 했다.
장이 안 서는 날 시장통은 시장통에 사는 건달들의 싸움판이었다.
우리처럼 촌에서 유학 온 아이들은 시장통 아이들을 제일 무서워했다.
장날이 아니면 우리들은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 P105

고등학교 삼학년 때 나는 영농학생이었다.
영농학생은 학교의 일을 해 주고 다소의 장학금을 받는 학생을 말한다.
영농학생이 되면 학교의 농사를 다 지어야 했다. 학교에서 재배하는채소를 수확해서 장에 나가 팔기도 했다.
우리들도 다른 장꾼들처럼 리어카에 전을 벌리고 호객을 했다.
늘 웃기는 안뽕이라는 친구가 호객을 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사람들이 많이 꼬여 들었다. - P114

추석이나 설이 돌아오면 아내는 대목장을 보러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꼭 순창장을 간다.
어머님은 시장의 가게마다 들러 우리 큰며느리‘ 하며자기 며느리를 자랑하신다. 평생 동안 순창장을 이용했기 때문에가게 주인들은 어머님을 잘 아신다. - P118

어떤 농부가 만든 한 개의 도리깨나 갈퀴가 상품이 된다는 것은경제 활동의 평등을 의미한다. 제 맘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이러한 시장 질서는 농촌 경제 활동을 늘 활기차게 했다.
이러한 시장의 건강한 기능은 시골 마을의 모든 생활에건강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건조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상거래 속에 인간관계를 폭넓게 해 주는 기능까지 아울렀던 것이다. - P125

농촌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시골장은 이제 ‘재래시장‘이라는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갈담장과 순창장에는 5일마다 사람들이 모인다.
나이 든 몸으로 어렵게 주운 알밤을 가지고 나오기도 하고,
고사리, 참깨, 고추도 가지고 나온다.
젊은이들은 없지만 평생을 갈담장을 보아 온 사람들이아직도 장날이면 장에 가서 세상을 배워 온다. - P130

갈담장도 여느 시골장날처럼 아침나절이면거의 파장이 되어 버린다. 장바닥은 줄어들고,
장날이면 만나던 그리운 얼굴들은 하나둘씩 사라져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장은 선다. - P133

지금도 갈담장에 가 보면 국숫집이 하나 있다.
옛날 아버님이 장에 가시면 반드시 들러서 점심을국수로 대신했던 그 집이 지금도 있다. 다른 그 어떤 집의 국수보다나는 이 국숫집 국수를 좋아한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 추운 몸을움츠리고 손을 비비며 한일자 나무판자 의자에 앉으면국수솥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따뜻하던 그 길이,
지금도 시골 사람들을 기다리며김을 피워 올리고 있다. - P139

사람들은 살아갈수록 힘이 든다고 한다. - P150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은 아니지만 비 안 새는 번듯한 집이 있는데도,
삼시 세끼 밥 굶지 않고 한겨울에 상추쌈을 싸먹는 세상인데도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 P152

엄동설한에도 얼어죽지 않을 만큼 따뜻한옷이 옷장 속에 지천으로 걸려 있고,
구멍난 양말을 애써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세상인데도 살기가 힘들다, 벅차다.
심지어는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 P155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 P163

저것 좀 보라.
하늘로 오르고 싶은 대형 할인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자꾸 치솟으며 세력을 넓혀 가지만노점상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땅이 꺼져라한숨만 쉬고 있지 않은가! - P174

나는 확신한다.
사람들이 장터를 멀리하고, 장터에 가지 않으면서부터,
장터 대신에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으로 향하기 시작한 뒤부터비로소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도시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노점상들을 받아들일공간도 여력도 없다.
물건 구매자들에게 편익과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골몰하는 도시에게 장터는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고비생산적인 장소일 뿐이다.
세련된 도시는 세련되지 않은 장터를 싫어하는 것이다.
장터는 도시에게 버림받았다. - P190

그런 다툼은 멱살잡이 끝에 격해져서 우습지 않게 때로 파출소 같은 데로이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싱겁게 끝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구경꾼마저 즐겁게 하는 장터에서삶이 힘들다거나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거기서 삶은 들뜨고, 흥청거리고, 질퍽거릴 뿐이다. - P199

장날만 되면 이 세상이 거기 다 있었다. - P225

한때 70년대 초반에 정부는 오일장을 없애거나 축소시키려고무모한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새마을 운동에 저해가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당시 정부가 지적한 오일장의 문제점은 불공정 거래가 성행한다는 것,
지나친 소비를 조장한다는 것,
농민들의 관습적인 시장 이용으로 시간을 낭비하고그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
농촌에 퇴폐 풍조가 조성된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농촌 정책이었다.
그것은 전국의 들판에 있던 농민들의 휴식처인 ‘모정‘을그저 낮잠만 자는 곳으로 인식하고 막무가내 폐쇄하라고주문했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농촌 죽이기는 과거 지우기를 통해 결국은우리의 유구한 전통마저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시골 장터도 그렇게 스러져 갔다. - P238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시장 한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노인의 측면 사진이다.
시장 골목길의 빛과 어둠,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고층 아파트와시장의 슬레이트 지붕, 노인의 검은 두루마기와 흰신발,
노인이 앉은 의자와 그 옆에 받침이 떨어져 나간 의자가알맞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 P251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P255

신경림 시인의 시 「파장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명구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된 해가 1970년이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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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의 힘 - 능청 백단들의 감칠맛 나는 인생 이야기
남덕현 지음 / 양철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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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3] 내 기억 속의 아버지 2...
― 소나기로 보지 못한 야구, 담을 넘으신 아부지

1982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였고,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아부지와 형, 나 이렇게 셋이 대전에 사시는 큰고모님 댁에 갔다. 당시 큰고모님은 자양동에 살고 계셨다.

큰고모님 댁에는 삼 남매가 있었다. 맏이인 누나는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았다. 훗날 가수 신승훈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동창이었는지 선후배 사이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 아래로 우리 형보다 한 살 많은 형과, 나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날 나와 형은 큰고모님 댁의 형을 따라 한밭야구장으로 갔다. 아부지는 야구장에는 함께 가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전과 충청도를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은 OB 베어스였다.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 충청도 사람들에게 OB 베어스는 분명 우리 지역의 팀이었고,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원년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충청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원년 우승까지 해 놓고, 나중에는 배신 때리고 서울로 튀었다.

OB가 떠난 자리는 뒤에 빙그레 이글스가 채웠다. 장종훈·이정훈·이강돈 선수를 앞세운 강력한 타선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렸고, 빙그레 이글스는 훗날 지금의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밭야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관중석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 사람 참 많네.”

어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부터 신기했다. 프로야구가 막 시작된 때라 사람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고, 이른바 3S 정책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였다는 것은 훗날 알게 된 일이다. 어찌 됐든 그 시절 프로야구의 열기는 대단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신경식 선수와 김우열 선수 같은 당시의 쟁쟁한 선수들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였다. 특히 신경식 선수가 1루에서 다리를 일자로 쫙 벌리며 공을 받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야 공을 0.01초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마운드 쪽에서는 박철순 선수가 피칭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어린 내 눈에 박철순 선수는 그야말로 투수의 제왕이었다. 그가 너클볼로 이름난 투수라는 이야기도 그 무렵 귀동냥으로 들었다. 구종을 알아볼 나이는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가 눈앞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야구장은 벌써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 역시 곧 눈앞에서 펼쳐질 첫 프로야구 경기를 생각하며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세 지나갈 소나기인 줄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면 비가 그치고 경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야구장을 흠뻑 적실 만큼 계속 퍼부었다.

결국 경기는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나의 첫 프로야구 관람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만 바라본 채 끝나고 말았다. 야구장 안까지 들어갔지만 정작 경기는 한 이닝도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아예 본 적이 없다.

훗날 나는 한밭야구장에서 걸어서 삼십 분 남짓 떨어진 문화동에서 약 13년을 살았다. 한밭야구장 주변은 자주 걷던 산책길이 되었고, 밤에 보문산을 오르다 보훈대 쪽에서 내려다보면 야간경기의 불빛도 보였다.

그렇다고 야구를 본 것은 아니었다.

산길을 걷다가 멀리 불이 켜진 야구장을 바라보며,

“어, 저놈들 야구허고 있구먼.”

하고 지나치는 정도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야구장이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나는 끝내 관중석에 들어가 경기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한밭야구장은 처음부터 야구를 보는 곳이라기보다, 갑자기 퍼붓던 소나기와 함께 기억되는 곳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이야기는 야구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우리끼리 큰고모님 댁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했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문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밖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삼촌이다. 언능 문 열어.”

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문밖의 사람은 다시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뭐여? 나 니 삼촌여. 언능 문 열어.”

그러나 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저는 삼촌이 없다니까요.”

나와 형은 그 목소리가 누구인 지 알아듣지 못했다. 밤이라 모두 긴장했고, 대문 밖에서 낯선 남자가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던 모양이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말이 몇 번이나 오갔다. 문밖의 사람은 계속 자신이 삼촌이라고 했고, 문 안의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문밖의 사람은 한참 동안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그 사람은 담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담 위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우리는 담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우리 아부지였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부에게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 형에게 친삼촌은 정말 없었다. 형은 ‘삼촌’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남자 형제만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부지는 큰고모님의 오빠였다. 그 형에게 우리 아부지는 분명 외삼촌이었다. 아부지는 외삼촌인 자신도 당연히 삼촌이라고 생각하셨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았다.

다만 서로 말하는 삼촌이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는 장면이다.

“나 니 삼촌여.”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대문을 계속 두드려도 조카가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결국 월담을 감행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 병들어 누워 계시던 아부지와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도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날 대문 안에서 끝까지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라고 버티던 고모네 형은 훗날 학창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듬해 여름이 오기 전인 봄에 아부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소나기로 야구를 보지 못한 그날이, 아부지와 함께했던 마지막 여름이 되었다.

나는 그날 한 이닝의 야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야구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두운 밤, 닫힌 대문을 두드리다 끝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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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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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 내 기억 속의 아버지...

나는 늘 지갑 속에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넣고 다닌다.

아부지 사진이다.

사진 속 아부지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늘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상반신만 담긴 작은 사진이다.

아부지는 198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리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몇 장면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억보다 사진 속에서 아부지를 더 자주 만난다.

가장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아부지에게 졸랐다가 작대기로 맞았다. 왜 그렇게까지 졸랐는지, 아부지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크레파스를 갖고 싶었던 마음과 맞아서 서러웠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것이 아부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하지만 따뜻한 기억도 하나 있다.

아부지와 함께 웅천 시내의 백마루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날이다.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백마루는 훗날 유명 개그맨이 된 이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중국집으로, 웅천에서는 짜장면이 맛있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린 내게도 그 집 짜장면은 기막히게 맛있었다. 아부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아부지와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었던 모습은 희미하게나마 떠오른다.

백마루는 훗날 사라졌다. 그래도 그날 아부지와 함께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은 잊히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농사꾼으로 살아가던 아부지의 모습도 하나씩 떠오른다.

아부지는 농사꾼이셨다. 우리 집 논 가운데에는 바닥이 깊고 질어 농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수렁논이 있었다. 그 논만큼은 늘 소가 들어가 갈아야 했다. 아부지는 함께 농사를 짓던 그 소를 무척 아끼셨다.

어느 날 아부지가 소를 팔고 돌아와 우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왜 소를 팔게 되었는지, 어디에 팔았는지,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오랫동안 함께 농사를 지은 소를 떠나보내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부지의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아부지에게 그 소는 값을 받고 넘기는 가축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농기계도 들어가지 못하는 수렁논에 함께 들어가 한 해 농사를 지어 온 일꾼이었고, 어쩌면 한 식구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밭에 거름을 뿌리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나온 인분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똥차에 퍼 담아 밭으로 가져가 거름으로 썼다. 지금 생각하면 냄새부터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당시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한 귀한 거름이었다.

아부지는 그 인분을 밭에 뿌리셨다. 소를 부려 수렁논을 갈고, 인분을 거름 삼아 밭을 일구며 한 해 농사를 준비하셨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농사꾼 아부지의 모습이다.

농사일이 없는 날이라고 아부지의 손이 쉬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마을 상수도를 놓거나 마을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는 일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했다. 지금처럼 공사업체가 장비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모두 해 주던 때가 아니었다. 마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땅을 파고, 자재를 나르고, 콘크리트를 쳤다.

아부지도 성동리 사람들과 어울려 그런 일을 하셨다. 농사를 짓고 집안을 돌보며,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길과 시설을 함께 만들어 가던 시절이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부지가 몹시 우셨던 기억도 있다.

어린 나는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부지가 왜 그렇게 슬피 우시는지도 몰랐다. 그날 어디에서 소식을 들으셨는지, 주위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부지가 많이 우셨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소를 팔고 돌아오신 날에도 우셨고,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우셨다. 아부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아부지의 눈물은 두 장면이나 남아 있다.

내 기억에 남은 장면보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아부지의 모습이 더 많다.

추석 무렵, 주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 있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가을 들길에서 아부지와 형, 사촌이 함께 서 있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고, 아부지 형제분들과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가족사진도 있다.

아부지는 일곱 남매의 맏이였다.

아부지 아래로 큰고모와 작은아버지들, 둘째고모, 막내아버지와 막내고모가 있었다. 그 가족사진에는 나도 있고, 아직 아기였던 여동생도 있다. 막내동생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사진에 없다. 분명 나도 함께 있었던 날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진 속에는 한 집안의 맏이였던 아부지와 형제분들, 그리고 그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제는 그 사진 속 사람들 가운데 여러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아부지 형제분 가운데 살아 계신 분은 큰고모와 둘째 작은아버지, 막내아버지 세 분뿐이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지도 이제 얼추 스무 해가 되어 간다.

아부지가 포병으로 군 복무를 했다는 것도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에는 ‘장하다 우리의 포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군복을 입은 젊은 아부지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병든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젊고 건강했던 한 사람의 시간이 그 사진 속에 멈춰 있다.

향토예비군복을 입고 동네 친구분들과 학고방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아부지는 농사꾼이었고, 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이었으며, 성동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형과 아부지가 커다란 비행기 바퀴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김포공항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진 속에는 아부지와 형이 나란히 서 있고, 곁에는 사람보다 훨씬 커 보이는 비행기 바퀴가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형이 엄청나게 부러웠다. 왜 형만 아부지와 그곳에 갔는지, 나는 왜 함께하지 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부지 곁에 서 있는 형과 커다란 비행기 바퀴가 그렇게 부러웠다.

이제 와 생각하면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 것보다 아부지와 함께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것이 더 아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부지가 병들고 나서는 부모님이 함께 기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모습은 내가 직접 기억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다. 사진 속 어머니의 품에는 아직 젖먹이였던 막내동생이 안겨 있었다. 병든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도 어린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 사진에 남아 있다.

그 무렵 우리 가족에게는 아부지의 병을 고칠 만한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부모님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고 싶으셨을 것이다.

집에서 굿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머니는 아부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붙잡고 싶으셨을 것이다. 남편을 살리고 어린 네 남매의 아버지를 지켜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부지는 끝내 병을 이겨 내지 못하셨다.

돌아가시던 날, 아부지는 사랑방에서 계속 토하셨다. 곁에서 어머니는 “혼자서 어떻게 새끼들과 살라고 먼저 가느냐”며 통곡하셨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아부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것이다.

그때 나는 그날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아부지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그날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린 네 남매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방에서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부지와, 무너져 내리듯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만 어린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둘째 작은아버지도 지금으로부터 스물여섯 해 전 위암에 걸리셨다. 그러나 다행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살아 계신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문득 아부지를 생각한다.

아부지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절에 아프셨더라면 어땠을까. 아부지도 병을 이겨 내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들인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한다.

사진을 오래 바라본다고 잊힌 시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가끔 지갑 속 사진을 꺼내 아부지를 오래 바라본다.

사진 속 아부지는 오늘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함께한 기억이 너무 적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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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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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1] 새벽을 여는 어머니의 발길
― 웅천 성동리에서 자란 네 남매의 이야기

내가 열 살이던 무렵,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은 열두 살, 나는 열 살, 여동생은 여섯 살, 남동생은 네 살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네 남매가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을 지탱하는 것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이고, 남들보다 먼저 시작되는 어머니의 새벽이라는 것을.

겨울이 오면 집 안 풍경부터 달라졌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우내 총올치를 했다. 두 분의 손에서 길게 이어진 총올치는 팔자 모양으로 한 꾸리씩 만들어져 바구니에 담겼다. 그렇게 바구니를 채운 총올치는 장날을 기다렸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섰다. 장날은 구경을 가는 날이 아니라, 겨우내 손으로 만든 총올치를 내다 팔아 얼마간의 돈으로 바꾸는 날이었다.

총올치보다 값이 더 나가는 것은 모시였다.

할머니는 서천장에서 모시를 만들 재료를 떼어 오셨다. 그것을 물에 불리고 말리며 손질한 뒤, 가느다란 올을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 하나씩 이어 붙이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비볐는지 무릎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어린 나는 할머니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왜 그 일을 멈출 수 없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울이면 으레 총올치와 모시를 잇는 분들인 줄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어린 네 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겨울이면 총올치와 모시를 이어 장에 내다 팔았지만, 그것만으로 살림을 꾸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웅천천 가까이에 있는 석재공장에 다니셨다. 공장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린 네 남매가 있었고,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살림은 늘 남아 있었다.

겨울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도 어머니였다.

안방에는 연탄보일러가 있었다. 아직 날도 밝기 전, 어머니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 연탄을 갈았다. 밤사이 연탄불이 약해지거나 꺼지면 방이 식었기 때문이다. 새 연탄으로 갈아 넣고 불이 제대로 이어지는 것을 살핀 뒤에야 어머니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사랑방은 안방과 달랐다.

사랑방 아궁이에는 추수를 마치고 남은 왕겨를 넣어 불을 땠다. 왕겨는 그냥 넣어 둔다고 잘 타지 않았다. 손으로 풍로를 돌려 아궁이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했다. 풍로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바람을 먹은 왕겨가 서서히 타오르고, 그 열이 구들을 따라 사랑방을 덥혔다.

풍로 돌아가는 소리와 왕겨 타는 냄새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어머니는 또 다른 새벽을 맞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다슬기를 고동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새벽이 채 밝기 전에 카바이드등을 들고 웅천천으로 나가셨다. 카바이드에 물을 부어 불을 밝히는 등이었다. 손전등도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그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물속을 살피며 고동을 잡으셨다.

웅천천에는 봇담, 배챙이, 삽재처럼 고동이 잘 잡히는 곳이 따로 있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많이 잡을 수 있었고, 그 자리에는 말없는 텃세도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나간 새벽 물가에도 먼저 자리를 잡으려는 경쟁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잡아 온 고동을 모두 내다 판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집에서 삶아 먹었다. 고동을 삶으면 푸르스름한 국물이 우러났다. 무엇을 넣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소금을 넣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네 남매는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 살을 하나씩 빼먹었다. 어머니가 새벽 웅천천에서 잡아 온 고동 한 그릇은 우리 네 남매의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나도 자라면서 집안일의 한몫을 맡았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겨울이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집에서 불을 때려면 땔감이 있어야 했고, 누군가는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와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경운기를 몰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중학생 때는 지게에 지고 오던 나무를,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경운기에 싣고 왔다. 그렇게 해 온 나무는 우리 집이 겨울을 나는 땔감이 되었다.

그때는 그것을 특별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필요한 일이었고,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저마다의 일을 하셨듯, 나도 자라면서 내 몫을 조금씩 맡아 갔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 네 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할머니와 어머니 덕택에 형도, 나도, 여동생도, 남동생도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총올치 한 올과 모시 한 가닥, 새벽마다 갈아 넣던 연탄 한 장, 풍로를 돌려 살려 낸 왕겨불, 카바이드등에 의지해 잡아 온 고동 한 줌이 우리 네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네 남매의 졸업장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졸업장마다 총올치와 모시를 잇던 두 분의 손길과, 우리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두 분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내 기억 속 성동리에는 지금도 총올치를 잇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과,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새벽 배챙이로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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