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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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4] 용택이 성을 찾아 천담리로 가던 날

아부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번에는 훌쩍 자라 스물다섯 살이 된 내가 떠올랐다.

1998년 어느 날.

군대 휴가를 나온 한 청년은 서울에서 임실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친척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책 두 권 때문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와 『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였다.

청년은 김용택 시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용택이 성은 어린 시절 일을 어쩌면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는지, 아무래도 기억에 문학적인 재구성이 조금은 보태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청년은 당최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의 기억을 붙잡고 더듬기 시작하니, 기억은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떠오르면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따라 나오고, 그것이 다시 오래 묻혀 있던 장면을 불러냈다.

책을 읽는 동안 청년은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워매, 우리 동네 야그그만.”

김용택 시인이 써 내려간 섬진강변의 냇물과 논밭, 장날과 시골 사람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웅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은 김용택 시인을 마음속으로 ‘용택이 성’이라 불렀다. 유명한 시인이라기보다 우리 동네 어디쯤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정겨운 시골 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청년은 임실에서 다시 덕치행 버스를 타고 덕치 차부에 내렸다. 차부에 있던 어르신에게 물었다.

“천담리 가려면 어디로 가야혀요?”

어르신은 저쪽 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짝 고개로 넘어가소.”

“아, 그려요. 고맙습니다.”

청년은 그 말 한마디만 믿고 고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같으면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확인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길이 맞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넘고 한참을 걸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갔다.

그 무렵 길가에는 하림 닭고기 공장으로 기억되는 큰 시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장소와 공장 이름은 이제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근처에서 더는 무작정 걸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히치하이킹을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요즘 같으면 낯선 차를 얻어 타는 일은 꿈도 꾸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길가에서 손을 들고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 차를 멈춰 준 사람은 전주로 가던 치과의사였다.

그분은 아마 군인 한 명을 차에 태워 준 일을 오래전에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청년은 거의 삼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날의 길과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보니, 용택이 성의 고향을 찾아 걸었던 기억과 어린 시절 웅천장의 풍경이 어느새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

이제 기억은 천담리에서 다시 웅천으로 향한다.

용택이 성은 갈담장의 풍경을 글로 남겼지만, 청년이 떠올린 것은 웅천장이었다.

그 청년은 바로 젊은 날의 나였다.

어린 시절 웅천장날은 작은 축제와 같았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었다. 장날이 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읍내로 모여들었다. 웅천역에는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내렸고, 버스차부에도 인근 마을에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웅천에는 기차역과 버스차부가 있었고, 농협과 의원, 지서도 있었다. 중국집과 라사도 있었으며,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라사’는 당시 양복점을 뜻하던 이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웅천은 갈담보다 훨씬 큰 읍내였고, 어린아이의 눈에는 제법 번듯한 도시처럼 보였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갖가지 물건과 사람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고무신과 옷가지, 농기구와 생활용품이 좌판에 늘어섰고, 어디선가 뻥튀기 기계가 굉음을 터뜨렸다.

“뻥!”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랐다가도 금세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다시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어른들에게 장날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날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구경하는 날이었다.

장터 주변에는 중국집과 국밥집, 막걸릿집뿐 아니라 보신탕집도 있었다. 보령과 서천 쪽에서는 보신탕집이 낯선 풍경이 아니었고, 특히 서천 판교는 오래전부터 보신탕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지역의 식문화 속에서 웅천장 주변의 보신탕집도 자연스러운 읍내 풍경의 하나였다.

중국집 가운데에는 사천성도 있었다. 훗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도 소개된 집으로, 지금은 웅천장을 찾는 외지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설 대목의 웅천장은 평소 장날보다 더욱 붐볐다. 어느 해였는지는 또렷하지 않지만, 설을 앞두고 엄니를 따라 가래떡을 빼러 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불린 쌀을 빻아 만든 뜨거운 반죽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잠시 뒤 희고 긴 가래떡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뽑혀 나왔다. 기계 밖으로 길게 밀려 나오는 가래떡을 바라보는 일은 어린 내게 참 신기하고도 짜릿한 구경이었다.

갓 뽑은 가래떡을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물면, 뜨겁고 말랑한 떡이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카, 맛이 기가 멕히네.”

별다른 고물도 양념도 없었지만, 그때 먹었던 따끈한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엄니와 함께했던 가래떡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이번에는 아부지와 함께 웅천 시내의 ‘백마루’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날도 다시 생각났다.

예전에는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장날 풍경을 하나씩 더듬다 보니 문득 그날도 웅천장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장날에 아부지를 따라 읍내에 나갔다가 백마루에 들러 짜장면을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백마루는 훗날 사라졌다. 그래도 그날 아부지와 함께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 기억은 짜장면과 함께 오래전 웅천장날의 한때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날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아무 때나 읍내에 나가기 어려웠다. 장날이 되어야 장도 보고 다른 볼일도 한꺼번에 보면서 겨우 면사무소에 들르곤 했다.

내가 왜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올랐는지도 훗날 엄니에게 들었다.

내가 태어난 때는 추석 무렵이었다. 그해 아부지는 벼를 베고 타작하며 추수를 마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당시에는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일부러 하루를 내어 가기 어려웠고, 장날이 되어야 겨우 읍내에 나가 면사무소에도 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농번기에는 그 장날마저도 나갈 수 없었다. 결국 농사일이 뜸해진 겨울에야 출생신고를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늦어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실제 생일이 한 달쯤 늦은 사촌은 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생일순으로 매겼는데, 그 녀석은 늘 내 앞번호였다. 분명 내가 먼저 태어났는데도 사촌이 언제나 앞에 있으니 어린 마음에는 그것이 영 이상했다.

‘작은아부지는 내 것도 좀 같이 해주시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웅천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장항선이 이설되면서 읍내에 있던 옛 웅천역은 문을 닫았고, 새 웅천역은 읍내 외곽으로 옮겨갔다. 장날이면 사람들을 싣고 와 읍내에 내려놓던 옛 역에는 이제 열차가 서지 않는다.

그래도 웅천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추석을 앞두고 작은아부지와 형제들이 모여서 함께 벌초를 한다. 벌초를 마치고 웅천장으로 가서 식사도 한다. 예전처럼 읍내 전체가 들썩일 만큼 붐비지는 않지만, 시장 안에는 채소와 나물, 고구마와 곡식을 펼쳐 놓은 좌판이 이어지고, 오래된 식당들도 여전히 손님을 맞는다.

신기한 것은 문다방 간판이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도 문다방은 분명히 있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 앞을 수없이 오갔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아직도 장터 한쪽에 뻥튀기 기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낡은 기계 주변에는 튀겨진 곡식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그 옆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쫄랑거리며 돌아다닌다.

어린 시절 귀를 막게 했던 그 “뻥!” 소리가 지금도 웅천장 한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장터의 모습도,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지만, 문다방 간판과 뻥튀기 기계를 보고 있으면 옛 웅천장과 지금의 웅천장이 잠시 한자리에 겹쳐 보인다.

용택이 성의 갈담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던 내 기억 속에서도 웅천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차역과 차부, 농협과 의원, 라사와 문다방,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뻥튀기 소리와 설 대목에 엄니와 함께 뽑았던 김 나는 가래떡, 중국집과 보신탕집, 아부지와 마주 앉아 먹었던 백마루의 짜장면, 장날에야 갈 수 있었던 면사무소까지.

흩어져 있던 기억들은 그렇게 하나의 웅천장으로 이어졌다.

용택이 성이 써 내려간 것은 갈담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 품고 있는, 자기 고향 장날의 풍경을 글로 남긴 것이었다.

나에게 그 장날은 갈담이 아니라 웅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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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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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갈담장의 실제 규모를 생각하면 다소 크게 묘사된 부분도 있고, 객관적인 장세와는 차이가 있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과는 별개로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임실 강진장뿐만 아니라 임실장, 관촌장, 오수장, 운암장, 순창장, 쌍치장, 복흥장, 장수 장계장, 남원장, 인월장, 전주 남부시장, 전주 중앙시장, 정읍 샘고을시장, 김제 원평장, 고창장, 무장장, 해리장, 완주 삼례장, 무주 안성장, 부안 줄포장, 진안 마령장, 구례장, 화순장, 곡성장, 영광장, 영암장, 금산장, 부여장 등 충청과 호남의 수많은 장터들이 담겨 있다. 특히 대부분의 사진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되어 우리 시골 장터가 가장 활기를 띠던 마지막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진 속에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좌판, 장꾼들의 모습은 물론 당시의 거리 풍경과 시장 주변 건물까지 자연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단순한 수필집을 넘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버린 우리 시골 장터의 생활상과 지역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생활사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많은 오일장이 명맥만 유지하거나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김용택의 추억을 담은 책이 아니라, 충청과 호남 곳곳의 장터가 가장 활기찼던 시절을 사진과 글로 남겨 놓은 귀중한 기록물이다. 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며, 오래도록 간직할 만한 충분한 소장가치를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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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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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비교 분석보고]

김용택의 『장날』에 나타난 갈담장과 웅천장의 장세 비교
― 2000년 인구와 배후생활권을 중심으로 ―


1. 분석 개요

가. 분석 목적

ㅇ(배경) 김용택의 『장날』에서 전북 임실군 강진면 갈담장을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크고 활기찬 장터로 묘사

ㅇ(비교) 갈담장의 실제 장세를 살펴보기 위해 내 고향 충남 보령시 웅천읍의 웅천장과 중심지역 인구, 인접 읍·면의 배후인구, 교통 및 생활권 기능 비교

ㅇ(기준) 『장날』에 수록된 사진들이 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장터 모습을 담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당시 장세를 비교하기 위한 기준 시점을 2000년으로 설정


나. 비교 대상

1) 갈담장 생활권

ㅇ(중심지역) 임실군 강진면

ㅇ(인접지역) 임실군 운암면, 청웅면, 덕치면, 정읍시 산내면

2) 웅천장 생활권

ㅇ(중심지역) 보령시 웅천읍

ㅇ(인접지역) 보령시 남포면, 주산면, 성주면, 미산면


2. 중심지역 인구 비교

가. 강진면

ㅇ(인구) 2000년 강진면 인구 2,457명


나. 웅천읍

ㅇ(인구) 2000년 웅천읍 인구 9,579명


다. 비교 결과

ㅇ(차이) 웅천읍 인구는 강진면보다 7,122명이 많고 약 3.9배 규모

ㅇ(절대규모) 웅천읍은 자체 인구만으로도 하나의 중심상권을 형성할 수 있는 규모였던 반면, 강진면은 주변 산간 면 지역의 수요까지 흡수해야 장터 유지가 가능한 구조

ㅇ(의미) 중심지역 인구만 비교하더라도 두 장터의 경제적 기반과 잠재 소비수요에서 상당한 차이 존재


3. 배후생활권 인구 비교

가. 갈담장 생활권

ㅇ(인구) 2000년 생활권 인구는 5개 면 총 약 10,171명

* 강진면 2,457명, 운암면 2,141명, 청웅면 약 1,908명, 덕치면 약 1,785명, 산내면 약 1,880명

ㅇ(비고) 강진면과 운암면은 확인값이며, 청웅면, 덕치면, 산내면은 현재 인구에 강진면과 운암면의 2000년 대비 인구감소 비율을 적용한 추정값


나. 웅천장 생활권

ㅇ(인구) 2000년 생활권 인구는 5개 읍·면 총 27,086명

* 웅천읍 9,579명, 남포면 7,051명, 주산면 4,009명, 성주면 3,846명, 미산면 2,601명


다. 비교 결과

ㅇ(차이) 웅천장 생활권은 갈담장 생활권보다 약 16,915명이 많고 약 2.7배 규모

ㅇ(주변지역) 웅천읍을 제외한 남포면, 주산면, 성주면, 미산면의 인구만 합산해도 17,507명으로 갈담장 생활권 전체 추정인구를 크게 상회

ㅇ(시장기반) 장터를 이용할 수 있는 잠재인구와 물품 소비량, 농수산물 반입량 등을 고려할 때 웅천장의 경제적 기반이 갈담장보다 현저히 큰 구조


4. 중심지 기능 비교

가. 웅천장

ㅇ(행정기능) 웅천은 1995년 읍으로 승격된 보령 남부지역의 중심지로서 행정, 교육, 상업 기능이 집중된 지역

ㅇ(도로교통) 국도 제21호선과 지방도를 통해 남포면,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 등 주변 지역과 연결되는 구조

ㅇ(철도교통) 장항선 웅천역이 위치하여 사람과 물자의 중장거리 이동에 유리한 조건

ㅇ(교통특성) 국도와 지방도에 장항선 철도가 결합된 교통체계를 갖춘 지역으로 도로와 철도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교통 구조

ㅇ(시장기능) 농산물뿐 아니라 서해안 수산물과 웅천 모시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어 시장의 품목과 이용계층이 넓은 장터


나. 갈담장

ㅇ(행정기능) 강진면 소재지로서 면사무소 등 행정기능을 수행하며 지역 주민의 생활 중심 역할 담당

ㅇ(지역기능) 갈담장은 섬진강과 임실 남서부 산간지역 주민들이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고 농산물을 거래하던 지역 중심 장터

ㅇ(도로교통) 국도 제15호선, 제27호선, 제30호선이 통과하거나 연결되어 주변 지역의 접근성이 비교적 양호한 구조

ㅇ(교통특성) 철도교통은 없으나 여러 방향의 국도망을 통해 임실, 순창, 정읍, 남원 방면과 연결되는 도로교통 중심의 구조

ㅇ(생활중심) 객관적인 상권 규모와는 별개로 주변 산골 주민들에게 사람과 물자, 소식이 한곳에 모이는 중요한 생활공간


5. 중심지 이론에 따른 분석

가. 중심지와 배후지의 관계

ㅇ(중심지) 장터는 주변 주민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심지이며 장터 유지를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배후인구 필요

ㅇ(최소수요) 배후인구가 많을수록 판매 가능한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증가하고 상설점포와 전문상점의 유지 가능성 확대

ㅇ(접근성) 시장의 실제 이용권은 배후인구뿐 아니라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의 형태와 연결 방향에 따라 결정


나. 갈담장과 웅천장 적용

ㅇ(갈담장) 약 1만 명 규모의 산간 생활권을 배후로 하면서 강진면 소재지와 국도 제15호선, 제27호선, 제30호선을 기반으로 한 도로교통 중심의 지역 장터

ㅇ(웅천장) 약 2만 7천 명의 배후인구와 읍 소재지 기능, 국도 제21호선, 지방도, 장항선 웅천역을 바탕으로 보령 남부권의 중심 장터

ㅇ(도로망) 도로 노선의 수와 방사형 연결성에서는 강진면이 오히려 우세한 구조

ㅇ(철도망) 웅천읍은 장항선 철도를 통해 도로망의 한계를 보완하고 장거리 인구와 물자의 이동에 유리한 조건 확보

ㅇ(기능차이) 웅천장의 배후인구가 갈담장보다 약 2.7배 많다는 것은 단순한 이용객 수의 차이를 넘어 거래 품목, 점포 수, 상설시장 기능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의미

ㅇ(종합판단) 두 지역의 교통조건은 강진은 도로교통 중심, 웅천은 도로와 철도가 결합된 교통 중심의 구조이며, 장세 차이의 핵심 요인은 교통망보다 배후인구와 상설상권 규모에 있는 것으로 판단


6. 『장날』의 갈담장 묘사에 대한 해석

가. 문학적 기억과 실제 시장 규모

ㅇ(기억) 김용택에게 갈담장은 어린 시절 세상의 여러 사람과 물건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가장 크고 화려한 공간

ㅇ(체감규모) 작은 산골마을에서 생활한 어린이의 시선으로 볼 때 장날의 갈담장은 평소의 조용한 마을과 대비되어 실제 규모보다 훨씬 크고 북적이는 공간으로 기억될 수 있는 조건

ㅇ(문학성) 『장날』의 묘사는 장터의 면적이나 거래액을 객관적으로 비교한 것이 아니라, 갈담장이 지역 주민과 작가의 삶에서 차지했던 존재감을 표현한 문학적 기록


나. 객관적 비교 결과

ㅇ(중심인구) 2000년 웅천읍 인구는 강진면 인구의 약 3.9배 수준

ㅇ(배후인구) 주변 읍·면까지 포함한 웅천장 생활권은 갈담장 생활권보다 약 2.7배 큰 규모

ㅇ(교통여건) 강진은 도로교통 중심, 웅천은 도로와 철도가 결합된 교통 중심의 구조

ㅇ(판단) 교통 여건은 서로 장단점이 존재하지만, 실제 장세와 경제적 기반은 배후인구와 상설상권 규모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으로 판단


7. 종합 결론

ㅇ(갈담장) 갈담장은 강진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임실 남서부와 섬진강 산간생활권 주민들에게 중요한 지역 중심 장터였으며, 김용택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물건이 모이는 큰 공간

ㅇ(웅천장) 웅천장은 웅천읍 소재지를 중심으로 강진면보다 약 3.9배 많은 자체 인구와 갈담권보다 약 2.7배 큰 배후인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보령 남부권의 중심 장터

ㅇ(교통비교) 강진은 국도 제15호선, 제27호선, 제30호선을 기반으로 한 도로교통 중심의 지역이었고, 웅천은 국도 제21호선과 지방도, 장항선 철도가 결합된 교통 중심의 지역

ㅇ(장세비교) 인구수의 경제학과 중심지 기능을 기준으로 볼 때 웅천장은 갈담장보다 시장 규모와 상권 범위에서 현저히 우세하며, 두 장터의 객관적인 장세는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

ㅇ(최종해석) 김용택이 『장날』에서 갈담장을 크고 성대한 장으로 묘사한 것은 실제 경제규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골마을 주민과 어린 김용택의 삶에서 갈담장이 차지했던 기억과 감정의 크기를 표현한 문학적 서술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


※ 갈담장 생활권 인구 중 청웅면, 덕치면, 산내면의 2000년 인구는 현재 인구와 강진면, 운암면의 2000년 대비 인구감소 비율을 적용한 추정값이며, 해당 지역 통계연보 원자료 확보 시 보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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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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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보게 된 그 기와집은 작아 보였다.
그 기와집에 핀 살구꽃은 지금도 늘 그 마을을 마을답게 해 주고 있다.
지금은 그 기와집을 헐어 버리고 그 기와집보다 더 번듯한 기와집을 지었다. - P70

내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아버지는 갈담장 가는 길 그 기와집보다 더 큰기와집을 지으셨다. 아버님은 그 집에서 돌아가셨고, 나는 그 집에서오래 살았다. 지은 지 오래된 그 집은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서 있다. - P73

갈담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 P79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갈담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청년들이 유일하게 이 고을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곳이었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곳이었다. 갈담장은 새로 만난 다른 동네의젊은이들의 싸움판이었다. 갈담에 거주하는 젊은 건달들이산중에서 나온 어수룩한 젊은이들을 봉 잡는 곳이기도 했다.
갈담의 젊은 패들은 그래서 오랫동안이 근방의 모든 젊은이들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 P84

우리들이 갈담을 거쳐 외지로 나갈 때 어깨를 펴고 다닌 지가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갈담장이라는 곳 때문에 늘 갈담의 깡패(?)들에게쥐여지내야만 했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젊은 깡패들 중에나이가 같은 놈들과 갑계를 하고 있다. 곗날이 되어 같이 놀다 보면옛날 갈담 청년들에게 당했던 이야기들을 한다. - P87

시골 장터는 처녀들이 오랜만에 마을을 벗어나 외지 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 P88

순창으로 중학을 간 나는 이제 갈담장보다 훨씬 큰 장을 보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 때만 해도 순창장에는그 유명한 ‘베개딱지‘ 장이 섰다. 베개딱지는 베개의 양옆에 대는한쌍의 딱지였는데, 그 딱지에 학을 수놓았다. 불란서 실을 사용한 수는붉고 화려했다. 순창군 일대에 사는 모든 처녀들은 닷새 동안베개딱지에 수를 놓아 장날이면 장으로 모두 가지고 나왔다.
순창군의 모든 처녀들이 장으로 모여들었으므로베개딱지전은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 P93

어느 장이든 파장 무렵의 싸움판은 늘 삶을 스산하게 했다.
장이 안 서는 날 시장통은 시장통에 사는 건달들의 싸움판이었다.
우리처럼 촌에서 유학 온 아이들은 시장통 아이들을 제일 무서워했다.
장날이 아니면 우리들은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 P105

고등학교 삼학년 때 나는 영농학생이었다.
영농학생은 학교의 일을 해 주고 다소의 장학금을 받는 학생을 말한다.
영농학생이 되면 학교의 농사를 다 지어야 했다. 학교에서 재배하는채소를 수확해서 장에 나가 팔기도 했다.
우리들도 다른 장꾼들처럼 리어카에 전을 벌리고 호객을 했다.
늘 웃기는 안뽕이라는 친구가 호객을 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사람들이 많이 꼬여 들었다. - P114

추석이나 설이 돌아오면 아내는 대목장을 보러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꼭 순창장을 간다.
어머님은 시장의 가게마다 들러 우리 큰며느리‘ 하며자기 며느리를 자랑하신다. 평생 동안 순창장을 이용했기 때문에가게 주인들은 어머님을 잘 아신다. - P118

어떤 농부가 만든 한 개의 도리깨나 갈퀴가 상품이 된다는 것은경제 활동의 평등을 의미한다. 제 맘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이러한 시장 질서는 농촌 경제 활동을 늘 활기차게 했다.
이러한 시장의 건강한 기능은 시골 마을의 모든 생활에건강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건조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상거래 속에 인간관계를 폭넓게 해 주는 기능까지 아울렀던 것이다. - P125

농촌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시골장은 이제 ‘재래시장‘이라는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갈담장과 순창장에는 5일마다 사람들이 모인다.
나이 든 몸으로 어렵게 주운 알밤을 가지고 나오기도 하고,
고사리, 참깨, 고추도 가지고 나온다.
젊은이들은 없지만 평생을 갈담장을 보아 온 사람들이아직도 장날이면 장에 가서 세상을 배워 온다. - P130

갈담장도 여느 시골장날처럼 아침나절이면거의 파장이 되어 버린다. 장바닥은 줄어들고,
장날이면 만나던 그리운 얼굴들은 하나둘씩 사라져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장은 선다. - P133

지금도 갈담장에 가 보면 국숫집이 하나 있다.
옛날 아버님이 장에 가시면 반드시 들러서 점심을국수로 대신했던 그 집이 지금도 있다. 다른 그 어떤 집의 국수보다나는 이 국숫집 국수를 좋아한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 추운 몸을움츠리고 손을 비비며 한일자 나무판자 의자에 앉으면국수솥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따뜻하던 그 길이,
지금도 시골 사람들을 기다리며김을 피워 올리고 있다. - P139

사람들은 살아갈수록 힘이 든다고 한다. - P150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은 아니지만 비 안 새는 번듯한 집이 있는데도,
삼시 세끼 밥 굶지 않고 한겨울에 상추쌈을 싸먹는 세상인데도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 P152

엄동설한에도 얼어죽지 않을 만큼 따뜻한옷이 옷장 속에 지천으로 걸려 있고,
구멍난 양말을 애써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세상인데도 살기가 힘들다, 벅차다.
심지어는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 P155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 P163

저것 좀 보라.
하늘로 오르고 싶은 대형 할인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자꾸 치솟으며 세력을 넓혀 가지만노점상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땅이 꺼져라한숨만 쉬고 있지 않은가! - P174

나는 확신한다.
사람들이 장터를 멀리하고, 장터에 가지 않으면서부터,
장터 대신에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으로 향하기 시작한 뒤부터비로소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도시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노점상들을 받아들일공간도 여력도 없다.
물건 구매자들에게 편익과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골몰하는 도시에게 장터는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고비생산적인 장소일 뿐이다.
세련된 도시는 세련되지 않은 장터를 싫어하는 것이다.
장터는 도시에게 버림받았다. - P190

그런 다툼은 멱살잡이 끝에 격해져서 우습지 않게 때로 파출소 같은 데로이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싱겁게 끝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구경꾼마저 즐겁게 하는 장터에서삶이 힘들다거나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거기서 삶은 들뜨고, 흥청거리고, 질퍽거릴 뿐이다. - P199

장날만 되면 이 세상이 거기 다 있었다. - P225

한때 70년대 초반에 정부는 오일장을 없애거나 축소시키려고무모한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새마을 운동에 저해가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당시 정부가 지적한 오일장의 문제점은 불공정 거래가 성행한다는 것,
지나친 소비를 조장한다는 것,
농민들의 관습적인 시장 이용으로 시간을 낭비하고그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
농촌에 퇴폐 풍조가 조성된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농촌 정책이었다.
그것은 전국의 들판에 있던 농민들의 휴식처인 ‘모정‘을그저 낮잠만 자는 곳으로 인식하고 막무가내 폐쇄하라고주문했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농촌 죽이기는 과거 지우기를 통해 결국은우리의 유구한 전통마저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시골 장터도 그렇게 스러져 갔다. - P238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시장 한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노인의 측면 사진이다.
시장 골목길의 빛과 어둠,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고층 아파트와시장의 슬레이트 지붕, 노인의 검은 두루마기와 흰신발,
노인이 앉은 의자와 그 옆에 받침이 떨어져 나간 의자가알맞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 P251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P255

신경림 시인의 시 「파장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명구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된 해가 1970년이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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