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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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에 대한 단상(步行斷想)
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30.6km를 걸었다.

그런데 오늘도 걸었다. 아침에 5.2km, 오후에 20.3km. 합쳐서 25.5km다. 이틀 동안 걸은 거리가 무려 56.1km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 징하게도 걸었다.

오늘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집 주변을 걸었다. 아침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가 오후에 다시 길을 나섰다. 멀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적게 걸은 것은 아니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에만 20km를 넘겼다.

오늘 하루 걸음 수를 확인하니 약 3만 7천 보다.

오전에는 평지를 따라 5.2km를 걸었는데 약 6천 보였고, 오후에는 평지와 산길을 섞어 20.3km를 걸었더니 약 2만 6천 보가 나왔다. 산길에서는 보폭이 짧아지니 같은 거리를 걸어도 걸음 수가 더 많아진다.

이렇게 운동하면서 걸은 것만 약 3만 2천 보. 여기에 집에서 돌아다니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등 자잘하게 걸은 것까지 합하니 3만 7천 보가 된 것이다.

얼마 전에는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스물두 역을 따라 걸었다. 역사 따라 걷기 구간은 48km였고, 그날 하루 전체로는 약 57km, 7만 보를 걸었다. 나도 어지간히 걷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지하철 역사 따라 걷기와 어제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걸었던 이야기, 두 편 모두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에 올렸다.

그런데 책을 쓴 하정우, 이 양반은 하루 3만 보를 걷는다고 한다.

하루 3만 보라니.

내 걸음으로 환산하면 대략 24km다. 오늘 오후에만 20km 넘게 걸었는데 쉬는 시간까지 합치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다면 하루 3만 보를 걸으려면 도대체 몇 시간을 걸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일은 언제 하는겨?

물론 걷는 것이 일상인 사람도 있고, 출퇴근하면서 걸음 수를 채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정우도 일상생활에서 걷는 것까지 모두 합산한 숫자일 것이다.

그래도 하루 3만 보를 매일 채우려면 보통 부지런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하루 3만 보를 목표로 삼는 것과 실제로 날마다 3만 보를 걷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나야 장거리 걷기가 얼마나 힘든지 진즉에 알고 있다. 오래 걸으면 다리도 뻐근해지고 발바닥도 아프다.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해도 발바닥까지 그걸 좋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걷는 것이 좋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좋고, 오래 걸어 낯선 곳에 도착해도 좋다. 때로는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는다.

지난번에는 지하철역 스물두 개를 찾아 걸었고, 어제는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걷다가 가을 축제들을 만났다. 오늘은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걷는 길도 다르고, 만나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걷는 것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많이 걷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56.1km를 걸었더니 온몸이 노곤하다. 어디가 특별히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닌데 그냥 피곤하다.

하긴, 그만큼 걸었으니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더 신기한 일 아니겠는가.

얼마 전 내가 만든 말이 있다.

사와생보(死臥生步).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 있으니 걸어라.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읽을 수 있을 때 읽자는 뜻에서 만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여야겠다.

피즉휴식(疲則休息).

피곤하면 쉬어라.

집에 돌아와 쉬는 동안에는 틈틈이 책도 읽는다. 한참 걷고 난 뒤 편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시간도 좋다. 두 다리는 쉬고, 좋아하는 책은 읽고.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휴식 아니겠는가.

死臥生步 疲則休息.

살아 있으니 걷되,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

걷는 것도 좋지만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

그런데 또 길을 보면 걷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참, 사람 마음이란.

⸻

걷기 기록

2026년 10월 25일(일요일)

오전 걷기
전체거리 : 5.2km
출발시간 : 오전 7시 56분 33초
종료시간 : 오전 9시 33분 19초
소요시간 : 1시간 36분 46초
운동시간 : 1시간 14분 46초
휴식시간 : 22분 00초
평균속도 : 4.2km/h
누적고도 : 133m
걸음 수 : 약 6,000보

오후 걷기
전체거리 : 20.3km
출발시간 : 오후 1시 00분 58초
종료시간 : 오후 6시 21분 27초
소요시간 : 5시간 20분 29초
운동시간 : 5시간 01분 24초
휴식시간 : 19분 05초
평균속도 : 4.0km/h
누적고도 : 720m
걸음 수 : 약 26,000보

하루 합계
전체거리 : 25.5km
소요시간 : 6시간 57분 15초
운동시간 : 6시간 16분 10초
휴식시간 : 41분 05초
평균속도 : 4.1km/h
누적고도 : 853m

하루 전체 걸음 수 : 약 37,000보 (일상생활 약 5,000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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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6 0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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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극락보전은 나에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학생들을 법당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P27

남도의 봄, 남도의 원색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의 동백꽃이 윤기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선홍빛을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벌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읍 묵은 동네 토담 위로는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도의 봄빛이었다. 한껏 끌어안고 싶은 남도의 봄빛은 조선의 원색을 보여준다.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 P29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강진의 하늘빛은 언제나 맑다.
강진만 구강포의 푸르름보다도 더 진한 하늘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청색의 원색이다. 색상표에서 제시하는바 사이언(C) 100퍼센트이다. 솔밭과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지며 보리밭 물결이 자아내는 그 빛깔은 노란색과 청색 100퍼센트가 합쳐진 초록의 원색이다. 유채꽃장다리꽃, 개나리꽃은 100퍼센트 노랑(Y)의 원색이며, 선홍색 동백꽃잎은100퍼센트 마젠타(M)이다. 그 파랑, 그 초록, 그 노랑, 그 빨강의 원색을구사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남도의 봄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 원색을 변주하여 흑갈색 황토와 연분홍 진달래, 누우런 바다갈대밭을 그려낸 화가도 남도의 봄 이외엔 아무도 없다. - P30

건진국시와 헛제삿밥
여행이건 답사건 집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디 가서 잘것인가이고 그다음 문제는 무얼 먹는가이다. 그러나 이왕 맛있는 향토식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때론 큰 기대가 된다. 안동에는 향토식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이 지역 답사의 한차례 먹을거리가된다. - P31

안동은 내륙 중의 내륙인지라 뱃길이 닿지 않아 냉동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생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에 굵은 왕소금을 잔뜩뿌려 절여서 가져와야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만든 자반고등어는 짜도 보통 짠 게 아니다. 그래도 이 간고등어는 안동 사람들의 밑반찬으로 애용되어 반의반 토막을 썰어놓고 온 식구가 밥을 먹기도 한다. 전라도 음식으로 치면 밥맛 돋우는 젓갈 구실도 하는 셈이다. 그간고등어 중에서도 뱃자반이라고 해서 배에서 금방 잡은 싱싱한 놈을 곧장 소금에 절인 것은 진짜 별미이다.(대구에서는 이를 제자리간이라 한다) - P33

바로 이 점 때문에 제비원 석불은 많고 많은 전설을 갖게 됐다. 임재해(林在海) 교수가 「성주의 본향, 제비원의 노래와 전설」(『한국 민속과 전통의 세계』, 지식산업사 1991)에서 조사·발표한 것을 보면, 제비원 석불이 불심많은 착한 연이伊) 아가씨의 화신이라는 설화로 인해 이 석불을 모신절 이름이 연미사(燕尾寺)가 되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우리 산천의 지맥을 끊고 다닐 때 이 불상의 목을 잘랐다는 설 등등이 주저리주저리 얽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 무가(巫중성주풀이」라는 성주님께 치성 드리는 성주굿 노래는 어느 지역이든 성주의 본향(本鄕)을 따지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이 제비원 석불을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경상도 안동땅/제비원이 본일러라/제비원의 솔씨 받아 (...)그래서 안동은 불교 문화, 양반 문화의 본향임과 동시에 민속 문화의본향이라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35

안동은 언어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을 보여준다. 저전(田)을 모시밭이라고 하듯 천전(前)보다 내앞, 수곡(水谷)·박곡(谷)보다 무실(물실)·박실, 온혜(溫惠)보다 더운골 등이 입에 익숙하다. 언젠가 와룡면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데 윗골, 고누골, 음지마, 양지마, 가장실, 가느실, 밤실, 짓실, 대밭골, 택골, 도장골, 잣골, 오리실, 건너나별, 고불고개 등 듣기만 하여도 향토적 서정이 물씬 일어나는 동네 이름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많이 썼을 듯한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건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 고수의 저력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사람들은 일상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쓰다가품위와 권위를 찾을 때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독특함이 있다. 예를 들어평소에는 ‘더운골할배‘ ‘건네 아재‘ 하고 친숙하게 말하다가도 저전 장질(長), 춘양삼종숙(三從, 촌 아저씨) 하면서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 P37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4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존덕사(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 P39

병산서원은 하회 입구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십 리 (약 4킬로미터) 남짓 걸어가면 나온다. 옛날에는 시골 버스,
경운기나 다니는 비포장 흙길이어서 그것이 병산서원 보존의 큰 비결이었는데, 슬프게도 이 비책 아닌 비책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산서원 답삿길에 나는 항시 이 십릿길을 걸어다녔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면 고갯마루까지만 차를 타고 가서는 거기부터 오릿길이라도걸었다.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원림적(園林的)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 P39

"타고 온 자가 문명인이냐, 걸어온 자가 문명인이냐?"
이에 더 이상 못 참겠던지 차 타고 먼저 온 한 ‘노련한 동양철학자가느긋하게 답한다.
"편하게 타고 오면서도 걷는 맛까지 다 느낀 자가 문명인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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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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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가을 축제들을 만나다

—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가을의 한자락을 거닐다 —

2026년 10월 24일, 토요일

날씨: 하루 종일 비

ㅇ 걷기 코스: 집 → 유림공원(국화축제) → 신세계백화점 → 엑스포다리 → 둔산대공원 → 도안호수공원 → 가수원교 → 소태봉,옥녀봉 → 집

ㅇ 걷기 기록

* 전체거리 : 30.6km
* 출발시간 : 오전 9시 25분 15초
* 소요시간 : 7시간 02분 30초
* 운동시간 : 5시간 54분 45초
* 휴식시간 : 1시간 07분 45초
* 평균속도 : 5.2km/h
* 누적고도 : 532m

⸻

1. 이번에는 비를 맞으며 걸어보자

지난 10월 10일,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스물두 역을 따라 48km를 걸었다.

유성온천역에서 출발해 반석역을 찍고 판암역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유성온천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었고, 그곳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그냥 주말이니 또 한번 걸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마님은 일직근무를 나갔다. 지난번에는 마님이 사과를 싸줬지만, 이번에는 그럴 형편이 아니니 내가 직접 사과를 썰어 통에 담았다.

배낭을 챙기고 집을 나서려는데 밖에서는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아니, 모처럼 걷겠다고 나서는 날에 비라니.

그렇다고 비가 온다는 이유로 걷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 오전 9시 25분,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비가 꽤 내렸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걷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나무에서는 젖은 낙엽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릴 모양이었지만 걷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오래 걷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직은 레인코트를 꺼내 입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우산을 쓴 채 계속 걸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2. 비 내리는 국화축제, 그리고 태권브이

우산을 쓰고 걷다 보니 제17회 유성국화축제 현장이 나타났다.

국화축제가 한창이었다.

노란색과 분홍색, 자주색과 붉은색 국화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비를 맞은 꽃들은 색깔이 더욱 진해 보였고, 물기 어린 바닥에는 꽃과 주변 시설물의 모습이 비쳤다.

축제장에는 단순히 국화 화분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갖가지 조형물도 만들어놓았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로보트 태권브이였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바로 그 태권브이가 꽃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 있었다. 몸통에는 노란 국화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특유의 브이자 장식도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로켓처럼 생긴 조형물도 있었다.

태권브이와 로켓이라니.

어릴 적 만화영화를 보던 때가 떠올랐다. 꽃구경을 하러 왔다가 뜻밖에 어린 시절의 영웅까지 만난 셈이다.

국화꽃으로 만든 커다란 책도 있었다. 펼쳐진 두 장의 책장을 꽃으로 빼곡하게 장식해 놓았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괜히 더 눈길이 갔다.

이 밖에도 두 마리 학이 긴 목을 굽혀 부리를 맞대고 있는 조형물이 있었다. 서로 마주한 목이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녀석들, 사람들 사진 찍으라고 자세 한번 잘 잡았구먼.

국화꽃 사이에는 인공 폭포도 만들어놓았다. 바위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국화들이 가득했다.

한쪽에는 노란색과 자주색 국화들이 줄지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분홍색 꽃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축제장을 둘러보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 우산을 들고 구경하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꽃구경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에 젖은 국화와 물기 어린 바닥이 가을날의 운치를 더했다.

처음부터 국화축제를 구경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걷다가 만난 것이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 우연이었다.

3. 엑스포다리에서 레인코트로, 그리고 코스모스

국화축제를 구경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엑스포다리까지 걸어왔다. 출발한 뒤 거의 10km를 우산을 쓰고 걸은 셈이다.

이쯤 되니 우산을 들고 걷는 일이 슬슬 귀찮아졌다.

마침 엑스포다리 아래에는 비를 피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산을 접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레인코트를 꺼내 입었다.

이제야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레인코트를 입었다고 비가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장거리 걷기에는 우산보다 훨씬 편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갑천변에 펼쳐진 코스모스 꽃밭을 바라보았다.

분홍색과 흰색 코스모스가 강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붉고 푸른 아치가 교차하는 엑스포다리가 보였고, 반대편에는 높이 솟은 엑스포타워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가.

불과 엿새 전에도 왔던 곳이 아닌가.

지난 10월 18일 일요일, 고향 친구가 대전에 찾아왔었다. 그날도 비가 내렸지만 마님과 친구, 이렇게 셋이 함께 이곳을 찾아 코스모스를 구경했다.

그날의 이야기는 「가을비 속에 만난 동네 친구」라는 제목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엿새 만에 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날은 친구와 마님이 함께였고, 오늘은 나 혼자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엿새 전에도 느꼈지만 요즘 코스모스는 키가 작아 예전처럼 하늘거리는 맛이 없다. 그래도 넓게 펼쳐진 꽃밭을 바라보니 가을 분위기는 제법 난다.

같은 장소를 찾았으니 사진도 비슷하게 찍게 된다.

엑스포다리를 배경으로 한 장, 이번에는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려 엑스포타워를 배경으로 또 한 장.

그러면서 엿새 전 친구와 함께 걸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고향 친구와 함께한 코스모스 구경도 좋았지만, 오늘 혼자 걸으며 그날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는데도 함께하는 사람이 다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내 마음도 다르다.

엿새 전에는 친구와 함께 코스모스를 보았고, 오늘은 코스모스를 보며 친구를 떠올렸다.

꽃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엿새라는 시간 사이에 또 하나의 추억이 쌓였다.

4. 사과 한 조각과 따뜻한 커피

걷기를 이어가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준비해 온 사과를 꺼내고 따뜻한 커피도 한 잔 마련했다.

비 오는 날 오래 걸은 뒤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참 좋다.

사과 한 조각을 곁들이니 이만한 간식도 없다.

근사한 카페에 앉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걷다가 잠시 쉬어가는 이 시간이 좋았다.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옆에는 커피를 놓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사과를 씹었다.

오래 걷는 날에는 이런 짧은 휴식도 중요하다.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해도 계속 걷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리를 쉬게 하면서 주변도 둘러보고, 사진도 확인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배낭을 둘러멨다.

아직 걸을 길이 많이 남았다.

5. 둔산대공원에서 만난 또 하나의 우연

이번에는 둔산대공원에서 또 하나의 행사를 만났다.

「2026 대전지역 전통민속놀이 대축제」.

넓은 광장에 초록색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과 우산을 쓴 방문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천막에는 지역별 민속놀이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영 협조해 주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광장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바닥은 온통 젖어 있었다. 넓은 공간에 마련된 행사 시설들을 보니 맑은 날이었다면 제법 볼만했을 것 같았다.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얼마나 속상할까.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천막과 행사장을 설치하고, 준비할 것도 많았을 텐데 하필 비가 내리다니.

그래도 천막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고, 우산을 쓴 시민들도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신승훈의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우연히」.

우연히 그렇게 널 만난 거야.

오래전에 들었던 노래다.

노래 속에서는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이지만, 오늘 내게 우연히 찾아온 것은 사람 대신 축제들이었다.

국화축제를 만났고, 이번에는 전통민속놀이 행사까지 만났다. 그 사이 엿새 전 친구와 함께 보았던 코스모스도 다시 보고 왔다.

이쯤 되면 참 풍성한 하루다.

그냥 걷겠다고 길을 나섰을 뿐인데, 대전에서 열리는 가을 행사들을 연달아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만 찾아다녔다면 이런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걸으니 보인다.

오늘은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6. 갑천누리길, 물새들과 함께 걷다

다시 갑천을 따라 걸었다.

엑스포다리에서 가수원교까지 이어지는 길은 갑천누리길 1코스다.

총연장 약 10.3km.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을 따라 걸으면서도 자연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한쪽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는 갈대와 물풀이 우거진 하천이 펼쳐져 있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으니 도심과 자연이 나란히 있는 셈이다.

물가에서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녀석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 위를 떠다녔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헤엄치는 녀석도 있었고, 함께 움직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얕은 물에는 하얀 백로들도 보였다.

긴 다리로 물속을 천천히 걸으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고, 다른 녀석은 날개를 펼치기도 했다.

그 뒤로는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 재미있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심 한복판에서 물새들이 제법 한가롭게 자기들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월평습지 일대에는 갑천 습지보호지역이라는 안내판도 있었다.

안내판을 읽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단순한 산책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대와 물풀, 물새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도심 가까이에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징검다리도 만났다.

물 위로 콘크리트 블록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물이 흘렀다. 비가 내려 젖은 블록들을 바라보니 괜히 옛날 생각도 났다.

비가 내리는 갑천변은 한산했다.

산책로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나무 아래에는 젖은 낙엽들이 떨어져 있었다.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가을이 조금씩 깊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에는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니 길이 한결 조용하다.

우산을 쓰고 걷던 아침과 달리 이제는 레인코트를 입고 있으니 두 손도 자유롭다.

물가의 새들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며 걸었다.

오랫동안 도로와 교량을 다루던 토목기술자라 그런지 다리 아래 비탈면이나 시설물도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쉬는 날에도 그런 것까지 살펴보고 있으니 직업이란 것이 참 무섭다.

그래도 오늘은 업무를 보는 날이 아니다.

그냥 걷는 사람이다.

7. 도안호수공원에서 먹는 건빵

둔산대공원에서 민속놀이 행사를 구경한 뒤에도 한참을 더 걸었다.

대략 6km쯤 걸었을까. 도안호수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이곳에서는 아까 먹던 사과 대신 건빵을 꺼냈다.

‘우리밀 추억건빵’.

건빵이라니.

군대에서 먹던 그 건빵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건빵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팔고 있으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한 봉지를 뜯어 먹었다.

오래 걷다가 먹으니 건빵도 제법 맛있다.

지난번 48km 걷기에서는 코다리냉면에 동태전까지 시켜 먹었다. 결국 너무 많이 주문한 동태전은 절반이나 포장해서 들고 왔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오늘은 사과와 커피, 건빵으로 간식을 해결했으니 제법 소박한 편이다.

물론 30km 넘게 걷는 사람이 먹는 것을 너무 소박하게 챙기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뭐, 어쩌겠는가.

건빵도 맛있으면 그만이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8. 가수원교에서 방향을 바꾸다

갑천누리길 1코스의 끝은 가수원교다.

엑스포다리에서 시작해 갑천을 따라 내려온 길이 이곳에서 끝난다.

그러나 오늘 걷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수원교에서 방향을 바꿔 건양대학교병원 쪽으로 향했다. 이후 소태봉과 옥녀봉을 거쳐 목원대학교 방향으로 걷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하천을 따라 걷던 길에서 산길과 도심을 지나는 길로 바뀌었다.

비를 맞으며 오래 걸었으니 몸도 제법 무거워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집까지도 내 두 발로 돌아가야 한다.

애초에 어디까지 걷겠다고 정하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길도 오늘 걷기의 일부다.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최종거리 30.6km.

지난번 대전도시철도 1호선 48km 걷기보다는 짧았지만,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다는 점에서 지난번과는 또 다른 하루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갑천누리길에 얽힌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9. 8년 전 걸었던 길, 그리고 다음 걸음

2018년 10월.

그때도 갑천누리길을 걸었다.

갑천누리길은 모두 세 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는 엑스포다리에서 가수원교까지 이어지는 약 10.3km의 도심 속 갑천길이다. 2코스는 약 16.6km, 3코스는 약 13.0km로, 세 코스를 합하면 약 40km에 이른다.

2018년 10월에는 이 길을 두 차례로 나눠 걸었다.

먼저 1코스를 걸었다. 그런데 가수원교에서 걷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집까지 그대로 걸어 돌아왔다.

그렇게 걸은 거리가 20km였다.

다음에는 2코스와 3코스를 한 번에 이어 걸었다. 두 코스를 합하면 약 30km. 그렇게 두 차례에 걸쳐 갑천누리길 세 코스를 모두 완주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이번에는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1코스를 다시 걸은 셈이다. 물론 국화축제도 구경하고 코스모스 꽃밭도 둘러본 뒤, 가수원교에서 건양대학교병원 쪽으로 방향을 바꿔 소태봉과 옥녀봉, 목원대학교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으니 전체거리는 30.6km가 됐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2코스와 3코스도 다시 걸어보고 싶어졌다.

다음 주쯤 두 코스를 한 번에 다시 걸어볼까.

2018년에 걸었던 길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그때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새롭게 바뀐 곳도 있을 것이다.

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같지는 않을 테고.

이번에는 그냥 걷고 싶어 길을 나섰다가 국화축제와 전통민속놀이 행사를 만났다. 엿새 전 친구와 함께 보았던 코스모스를 다시 보았고,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걷다 보니 8년 전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러고는 또다시 걸어보고 싶은 길이 생겼다.

2018년 10월에 걸었던 그 길을, 2026년 가을에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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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 수업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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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속에 만난 동네 친구

— 비에 젖은 대전의 어느 일요일(’26.10.18.), 세월이 흘러도 이어지는 관계와 만남의 소중함

1. 대전에 오는 동네 친구

오랜만에 고향 동네 친구가 대전에 놀러 온다고 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니 알고 지낸 세월만 해도 반세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뿐 아니라 아내와도 인연이 있다. 아내에게도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일요일에 온다고 하자 아내가 토요일에 오라고 했다.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는 일기예보에 비가 저녁부터 온다고 했다며 부득불 일요일에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요일로 약속이 정해졌다.

모처럼 찾아오는 친구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고민했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으니 야외 나들이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대전에 왔으니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이 친구에게는 우리 부부와 관련된 특별한 이력이 있다.

바로 우리 부부의 중신애미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와 아내를 맺어준 사람이 바로 이 친구다. ㅋㅋ

2. 하늘거리지 않는 코스모스

친구를 만나 먼저 갑천변 코스모스 꽃밭으로 향했다.

분홍색과 흰색 코스모스가 넓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꽃밭 너머로는 엑스포다리가 보였다. 잿빛 하늘 아래 펼쳐진 코스모스는 제법 아름다웠다.

그런데 꽃밭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코스모스가 너무 작았다.

내가 기억하는 코스모스는 저렇지 않았다. 사람 허리춤을 훌쩍 넘기는 가느다란 줄기 끝에 꽃을 매달고, 가을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흔들리던 꽃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쓰러질 듯 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섰다. 꽃잎이 예쁜 것도 좋았지만, 코스모스는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더 좋았다.

요즘은 키가 작은 왜성 품종을 많이 심어서인지 예전처럼 훤칠한 코스모스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꽃은 촘촘하고 화려하지만 하늘거리는 맛이 없다. 꽃밭은 풍성해졌는데 운치는 오히려 줄어든 것 같다.

어린 시절 고향의 가을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는 길가에도 코스모스가 흔했다.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꽃들이 가을이면 피어났고, 가느다란 줄기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 시절 우리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다.

같은 동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쉰 살을 훌쩍 넘겼다. 그때는 매일 마주치던 얼굴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서 살면서 이렇게 날을 잡아야 만날 수 있다.

코스모스 구경을 마치고 꿈돌이와 꿈순이도 만나러 갔다.

대전의 마스코트인 꿈돌이와 꿈순이를 보니 1993년 대전엑스포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으니 꿈돌이도 우리와 함께 세월을 먹은 셈이다.

우산을 쓰고 사진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날씨가 영 고약했다.

3. 비 맞은 개꼬라지

일기예보에는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는 저녁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것도 적당히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대차게 쏟아졌다.

우산을 받쳐 들어 머리와 윗몸은 어느 정도 비를 피했지만,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빗물이 튀고 바닥에 고인 물을 밟을 때마다 바짓단이 젖어 들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길도 온통 구적구적했다.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구경은 계속했다.

마침 엑스포과학공원 일대에서 대전 빵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도 행사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천막 사이를 오가며 빵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섞여 돌아다녔다.

대전의 빵축제라면 역시 성심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성심당 부스에 가보니 줄이 드럽게 길었다.

비까지 맞아가며 그 긴 줄에 서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빵이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신발까지 젖어 가며 기다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축제장 성심당 부스의 긴 줄은 포기했다. 대신 그 근처에 있는 성심당 DCC점 튀소정거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그곳에서 빵을 한 보따리 샀다. 우리야 대전에 사니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지만, 멀리서 찾아온 친구는 기왕 온 김에 넉넉히 사 가고 싶었을 것이다.

친구가 산 빵은 내가 대신 들었다. 한 손에 빵 봉지를 잔뜩 들고 젖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사진에도 남았다.

그동안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신발 속까지 물이 들어왔다. 아내도 친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셋 다 비 맞은 개꼬라지가 되었다. ㅋㅋ

토요일에 오라고 했던 아내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4. 비에 젖어도 즐거운 하루

몸은 고단했지만 참 재미있었다.

어릴 적에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특별하지 않았다.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시간을 맞추고 먼 길을 오가야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어도 만나면 반갑고 편안하다. 오랜 친구 앞에서는 굳이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비에 젖은 풍경도,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던 모습도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날씨가 좋은 날 다시 만나면 좋겠다.

하지만 이번처럼 궂은 날씨에 고생한 하루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쨌든, 비는 실컷 맞았어도 친구는 참 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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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손장섭, 강연균, 임옥상 같은 호남의 화가들이 풍경 속에 그리는 시뻘건 들판이 남도의 역사적 아픔과 한을 담아낸 조형적 변형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였네요. 정말로 강렬한 빛깔이네요."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 - P16

월출산 도갑사
월출산의 대표적인 절집 도갑사(寺)의 정취는 아침나절 산안개가 걷힐 때 가장 아름답다고 기억한다. 매표소에서 돌담을 끼고 계곡을따라 조금 가다보면 비스듬히 출입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해탈문(解脫)은 국보 제50호로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목조건축으로 집의 생김새가 특이하고 주심포. 다포 양식의공존이라는 건축사적 의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정도 건물에 국보라는 가치를 부여한 것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시대가 오래되고드물다고 해서 국보가 되는 것은 아니리라. - P18

도갑사 관음32응신도
사실 도갑사의 불화로 말할 것 같으면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남는 조선시대 불화의 최고 명작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금은 일본 교토(京都)의 대찰인 지은원(知恩院, 지온인)에 소장되어 있는 <관음32응신도三十二應身圖)>다. 높이 2.3미터, 폭 1.3미터의 비교적 대작인 이 두루마리 탱화는 화려한 고려 불화의 전통과 조선 전기의 산수화풍이 어우러진 둘도 없는 명작으로 1550년 인종 왕비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돌아가신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자실(李)에게 그리게 하여이곳 도갑사에 봉안했다. - P20

이런 명화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나는 임진왜란, 또는 그 직전 이 일대에 빈발하던 왜변(倭變) 때 왜구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6세기 후반 강진. 영암 일대에 일어났던 왜변의 상황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제3권 양반편 마지막 장에 잘 그려져 있다. 활 잘 쏘는 이봉학이와 돌팔매질 잘하는 배돌석이가 재주 시합한 곳이 바로 영암성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그렇게 잦았고 그들은 우리 사찰의 범종과 불화를 가져다 일본 사찰에 거금을 받고 팔아넘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들이 이 그림을 반환해줄 리 만무인지라 잃어버린 문화유산의 이야기로만 남을 수밖에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근래에는 실물대 정밀 복사본을 만들어 도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 P22

이것으로 도갑사의 볼거리는 다 본 셈인데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따로 있으니, 월출산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 도선국사를 말하지 않는다면여기를 다녀간 의미가 반감된다. 그리고 영암 월출산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인물,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유허지가 도갑사 남쪽 성기동洞)에 있는데 한번은 가볼 만하다. 왕인박사는 백제 고이왕 52년(285)에 일본에 한문(천자문)을 전해주어 일본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제공했던 백제인이다. - P24

그러나 그가 영암 출신임을 크게 내세워 자랑하는 방식에 대해 나는조금은 생각을 달리한다. 왕인을 추앙할 사람들은 우리보다 일본인이다. 아펜젤러는 한국 개화사에서 이름난 것이지 미국 현대사에 족적을남긴 인물이 아닌 것처럼. 실제로 일본 도쿄의 우에노 공원을 거닐다가길가에 세워진 왕인 박사 추모비를 보면 일본 사람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영암의 왕인박사유적지도 이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사적지로 만들었으면 마음으로 생각게 하는 바가 더 깊고 그윽했을성싶다. 그러나 자못 거대한 기념관으로 치장해놓고 보니 혹시 식민지시절 일본에 당했던 아픔의 정신적 보상을 이런 식으로 찾으려는 것이아닌가 싶어 애처로운 마음에 오히려 발길이 한 번에 그치고 말았다. - P24

월남리에서 강진 쪽으로 불과 3킬로미터. 길가에는 ‘국보 제13호‘라는 큰 글씨와 이발소 그림풍의 관음보살상 입간판이 오른쪽으로 화살표를 해놓고 있다. 여기서 월출산 쪽으로 다시 3킬로미터.
우리는 이 입구부터 걸어가야 옳았다. 비탈길을 계단식 논으로 경작해 흙과 함께 살고 있는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그 일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그만 마을과 마을. 그리고 저 위쪽 마을, 오래된 한옥과 연꽃이 장엄하게 피어난다는 백운동(洞)의 연못도 구경하고, 가다가 모정(亭)에 쉬면서 촌로의 강한 남도 사투리도 들어보았어야 했다. 그러다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월출산의 동남쪽 봉우리가 환상의 나라입간판처럼 피어올랐을 것이다. 우리는 이 행복한 40분간의 산책로를,
무감각하게도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5분 만에 지나 무위사 천왕문 앞에 당도해 버렸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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