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돌아와 보니 10촉 등이 희미한 옆방에서는 저 통통한 나방이 검은 옷걸이에 알을 낳고 있었다. 추녀 끝의 나방도 장식등에 탁탁 부딪치고 있었다. 벌레는 대낮부터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당신, 뭣하러 왔어요? 이런 곳에 뭣하러 왔어요?" "당신 만나러 왔지." "맘에도 없는 소리. 도쿄 사람은 거짓말쟁이라서 싫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지?" "물론 죽었어요." "당신이 내 배웅을 나온 사이에?"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배웅이란 것이 그토록 괴로운 것인 줄은 몰랐어요."
고마코의 입술은 아름다운 거머리의 또아리처럼 매끄러웠다.
고마코는 손을 살짝 가슴에 얹고, "한 쪽이 더 커졌어요." "바보. 그 사람의 버릇이야. 한 쪽만……." "어머, 싫어요. 거짓말. 얄미운 사람." 하고 고마코는 갑자기 변했다. 이것이었다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양쪽이 똑같게, 이제부터 이렇게 말해요." "똑같게, 똑같게라고." 하고 고마코는 살짝 얼굴을 가져 왔다.
내탕에서 올라오니, 고마코는 안심한 듯한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신상 얘길 시작했다. 여기서 첫 검사 때에 풋내기 기생일 때와 같은 줄만 알고 가슴만 벗었더니 모두가 웃어서 울어버렸다는 얘기까지 했다. 시마무라가 묻는 대로, "나는 정말 정확해요. 꼭 이틀씩 빨라져 가요." "하지만 연회에 나가는 데 지장은 없겠지?"
산의 안내서에는 등산로, 일정, 숙박소, 비용 등이 간단하게 쓰여 있을 뿐, 오히려 공상을 자유롭게 했다. 시마무라가 처음 고마코를 안 것도 전설의 살결에 신록이 싹트는 산을 돌아 이 온천 마을로 내려왔을 때의 일이었으므로, 자신의 발자국도 남아 있을 산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은 가을 등산철이므로 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무위도식하는 그로서는, 일도 없는데 괜히 힘들게 산을 쏘다니는 헛수고의 표본처럼 생각되었지만 그런 대로 또 비현실적인 매력도 있었다.
"저길 가볼까? 당신 약혼자의 무덤이 보이는군." 고마코는 허리를 쭉 펴고 시마무라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한 움큼의 밤을 갑자기 그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당신, 나를 놀리고 있군요." 시마무라는 피할 틈도 없었다. 이마에서 소리가 나고 통증이 왔다. "무슨 인연이 있다고 당신이 무덤을 보러 가요?"
밤톨로 얻어맞고도 화를 내는 기색이 없자 고마코는 잠시 동안 의아한 표정이다가 문득 엎어질 듯이 매달리며, "당신, 착한 분이군요. 뭔가 슬픈 거죠?" "나무 위에서 아이들이 보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도쿄 사람은 복잡해요. 주위가 시끄러우니까 정신이 흩어지는가 보죠?" "모든 것이 흩어졌어." "이제 목숨까지 흩어질 거예요. 무덤을 보러 갈까요?"
고요가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질 것만 같은 삼나무 숲을 빠져 스키장 가의 선로를 따라가니 곧 무덤이었다. 밭두렁의 조금 높은 한 모퉁이에 오래된 비석이 여남은 개와 돌로 된, 지장보살이 서 있을 뿐이었다. 빈약한 벌거숭이였다. 꽃은 없었다.
그리고 뒤에는 차바퀴 소리보다도 요코의 목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순결한 애정의 메아리가 울려 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헛수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 자신의 허무감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그럼으로써 고마코의 살려고 몸부림치는 적나라한 생명과 접촉할 수도 있었다. 그는 고마코를 가엾게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가엾게 생각했다. 그와 같은 양상을 무심히 꿰뚫는 빛과 같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끌리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효용도 없을 책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안심케 한다면 할 수도 있었다. 자기 직업을 통해 자기를 냉소하는 것은 사치스런 즐거움일 것이다. 이런데서 그의 가엾은 몽환의 세계가 생겨나는지도 몰랐다. 여행 중에 그걸 서둘러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러나 어쩐 일인지 오히려 고마코에 대한 애정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정체 모를 처녀와 도망치듯이 돌아가 버리는 것은 고마코를 향한 격한 사죄의 방법인 듯이 생각되기도 했다. 또 뭔가 형벌 같기도 했다.
부엌문으로 들어서니 눈앞에 그 집 사람들의 잠든 모습이 어지러웠다. 이 지방 사람들이 애용하는 헐렁한 바지와 같은 무명의 그것도 퇴색한 딱딱한 이불을 나란히 하고 주인 내외와 17, 8세의 처녀를 비롯 5, 6명의 아이들이 그을린 등불 아래 제멋대로 얼굴을 돌리고 자고 있는 것은 쓸쓸해 보이면서도 벅찬 힘이 잠겨 있었다.
고마코는 뭔가 어색한 듯이, 예를 들면 아기를 낳은 적이 없는 처녀가 남의 아기를 안은 듯한 동작이 되어 왔다. 머리를 들고 아기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는 식이었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아요?" "그저 좋은 여자야." "우스운 양반."
이 고장에서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싸늘하게 흐린 날씨가 계속된다. 눈을 재촉하는 것이다. 원근의 높은 산이 하얗게 된다. 이것을 산돌림 28) 嶽廻 이라고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에서는 바다가 울고, 깊은 산에서는 산이 운다. 먼 뇌성 같다. 이것을 몸통울림 29) 胴鳴 이라고 한다. 산돌림 보고 몸통울림을 들으면 눈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옛 책에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28) 산돌림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29) 몸통울림 : 산기슭으로 내리는 소나기.
갑자기 화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불, 불이야!" "불이야!" 불꽃이 아랫 마을의 한가운데서 치솟고 있었다.
밝은 은하수가 시마무라를 빨아들일 듯이 가까웠다. 바쇼 30) 芭蕉가 여행하면서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은 이처럼 선명하고 넓은 은하수였을까. 발가벗은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맨살로 감싸려고 가까이 내려와 있다. 무섭게 요염했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조그만 그림자가 지상에서, 반대로 은하수에 비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이 하나하나 보일 뿐 아니라 곳곳에 광운 光雲 의 은모래도 한 알 한 알 보일 만큼 맑았고 더구나 은하수의 한없는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이, 어어이."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불렀다. 30) 바쇼 : 일본 에도시대 전기 작가로 각지를 여행하며 맑은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울었어요. 집에 가서도 울었어요. 당신과 헤어지는 게 두려워요. 하지만 이제 빨리 돌아가 버려요. 그런 말 듣고 운 것, 잊지 않을 테니까." 고마코의 착각으로 해서 오히려 여자의 속 깊이까지 파고든 말을 생각하자, 시마무라는 미련에 몸이 오무라지는 듯했으나 갑자기 불 난 곳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다. 새로운 불길이 불똥을 뿜어 올렸다.
불탄 자리에 다시 타는 불을 향해 펌프 한 대가 비스듬히 활모양으로 물을 뿜고 있었는데, 그 앞에 문득 여자의 몸이 떠올랐다. 떠오른 것처럼 그녀는 떨어진 것이었다. 여자의 몸은 공중에서 수평이었다. 시마무라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순간,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못했다.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한 몸이 허공에떨어져서 유연해졌다. 그러나 인형 같은 무저항, 생명이 없는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시마무라에게 번뜩인 불안이 있었다고 한다면 수평으로 뻗은 여자의 몸이 머리가아래로 되지 않을까, 허리나 무릎이 굽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했으나 수평인 채로 떨어졌다. "아악!" 고마코가 날카롭게 부르짖고 두 눈을 감쌌다.
떨어진 여자가 요코란 것을 시마무라가 안 것은 언제였을까. 사람들이 앗! 하고 숨을 들이킨 것도, 고마코가 아악 하고 소리친 것도, 실은 같은 순간이었다. 요코의 종아리가 지상에서 경련한 것도같은 순간인 듯했다. 고마코의 절규는 시마무라의 몸 속을 관류貫流 했다. 요코의 종아리가 경련함과 동시에 시마무라의 발끝까지 차가운 경련이 스쳐갔다. 뭔가 절박한 고통과 비애 때문에 가슴이 몹시 뛰었다.
요코의 경련은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미미한 것으로 곧 그쳤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객석에서 나뭇가지 두세 개가 기울어져 와서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기 시작했다. 요코는 그 쏘는 듯이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은 내밀어졌고 목은 길었다. 불빛이 창백한 얼굴 위로 아른거렸다.
몇 해 전,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가운데로 야산의 모닥불이 피어올랐을 때의 모습이 문득 생각나자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순간 고마코와의 세월이 비쳐지는 듯했다. 뭔가 절박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곁에서 뛰쳐나갔다. 고마코가소리치고 눈을 감싼 것과 거의 같은 순간인 듯했다. 사람들이 앗! 하고 숨을 들이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외치며 술렁이고 순간적으로 두 사람을 둘러쌌다. "비켜요. 비켜 줘요." 고마코의 부르짖음이 시마무라에게 들렸다. "얘가 미쳐요 미쳐요." 그렇게 미치광이 같은 목소리의 고마코에게로 다가가려던 시마무라는 요코를 고마코로부터 받아 안으려는 남자들에게 밀려 비틀거렸다. 몸을 가누고 시선을 든 순간, 쏴아 하는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이즈伊豆의 무희 舞姬 길은 꼬불꼬불했다. 마침내 아마기 天城 고개가 가까워졌을 무렵, 빗발이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면서 굉장한 속도로 기슭쪽에서부터 나를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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