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아이에게 성마르게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우리가 받은 지식을 돌려주어야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될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다.
- P59

‘아이‘도 독서의 필요성은 잘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한시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아이가 제출한 논술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다.
주제: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연인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편지에 썼던, "살고자 한다면 책을 읽으시오!" 라는 단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이는 플로베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P90

"텔레비젼은독서를 방해하는 제1의 적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텔레비전은 무기력한 수동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독서는 모든 것을 떠맡는 적극적 행위다" 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교사는 빨간 펜으로 묵묵히 동의를 표한다.
(매우 우수!)*그러면서도 순간 교사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몽상에 빠진 학생처럼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적어도 그에게 몇몇 영화는 원작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떠오르지않았다. 사냥꾼의 밤」「아마르코드」 「맨해튼」 「전망 좋은방」「바베트의 만찬」 「화니와 알렉산더」 같은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가! 그 영화들의 영상에는 무언가 기호의신비가 담겨 있는 듯했다. 물론 이는 무슨 거창한 전문가적입장에서의 견해는 아니다. 자신은 영화 구성 기법이며 영화 애호가들의 전문 용어에 전혀 문외한이 아니던가. 다만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 영상들은 파내도 파내도 고갈되지 않을 듯한, 해석을 달리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의미를 전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 P93

때론 텔레비전의 영상조차 그랬다. 언젠가 모든 사람 을 위한 독서」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바슐라르의 만년의 모습, 「아포스트로프」에 출연했던 장켈레비치의 타래 머리,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밀라노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파평이 멋지게 골을 넣는 장면….… - P94

가독서가 과연 의사소통의 행위일까? 이것 또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벼운 농담 정도로나 봐줄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 말이 없다. 책을 읽은 즐거움을, 우리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느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그것은 책에서 그다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내용을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느낌을 발설하기 전에 시간을 두고 설익은 생각을 가다듬으며농익도록 뜸을 들이느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순간의 침묵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낸다. 책을 다 읽었지만, 우리는아직도 책 속에 있는 것이다. 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버거워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피신처로 여겨지는 것이다. 책은 거대한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책은 우리로 하여금 우연으로 가득 찬 일상사를 높은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읽었으되 우리는 말이 없다. 책을 읽었기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다. 몰래 숨어서 우릴 지켜보던 감시병이 튀어나와 "어때? 재미있어? 이해가 되니? 뭘 느꼈는지 얘기해봐!"라고 심문을 일삼는다고 해도 답변을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 P109108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작 책에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은 잊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바로 한 권의 문학 작품이 발하는 막강한 위력일 터이다. 일상마저도 까맣게 잊게 만드는…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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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7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그레이스님의 페이퍼 읽다가 「바베트의 만찬」 이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라는 걸 이제서야 알았네요
영화 넘 재밌게 보았는데 말이죠^^

TV에서 이젠 최대 적이 스마트폰으로 넘어 왔네요. 영화도 독서의 적인지는?^^

그레이스 2022-02-07 21:40   좋아요 1 | URL
저는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 갖고 있어요^^ 작가는 뒷부분에 계속 끊임없이 떠올리게 되는 영화나 TV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말해요.
무언가를 읽어낸다는 의미로 볼때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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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몸의 변화를 겪는 소년 페낙은 당혹스럽고 외롭다. 청년의 몸은 폭발하고, 장년은 자신의 몸을 관찰할 시간이 없다. 노안과 함께 찾아온 노년의 몸은 불안하다. 몸의 변화를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다면 정말 외로울 것이다. 유머를 잃지 않는 글에서도 몸의 존재로서 고독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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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07 18: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이 슬프네요 ㅜㅜ 나이를 먹는건 고독한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02-07 18:58   좋아요 5 | URL
불안하고 고독하기도 하지만 잠깐씩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도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2-02-07 19: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노안과 함께 찾아 온~~
저는 노년이군요, 으흐흑😫😫

그레이스 2022-02-07 19:20   좋아요 4 | URL
^^;;;;;;;

mini74 2022-02-07 19: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넘 멋진 100자평~ 인데 공감으로 밀려오는 슬픔 ㅠㅠ 눈에 좋은 음식을 찾아먹게 되네요. 요즘은 귀도 좀 먹은거 같은 ㅎㅎㅎㅎ

그레이스 2022-02-07 19:22   좋아요 4 | URL
시력과 청력이 함께 가는 것 같긴해요
아이들이 뭐라하면 잘 못알아들어요
뭐라고?
하면 왜이렇게 크게 말하냐고... ㅋㅋ

scott 2022-02-10 23:39   좋아요 2 | URL
청력은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늦게 퇴보 하는뎅 ㅠ.ㅠ

그레이스 2022-02-11 12:00   좋아요 2 | URL
그게 소리를 시각으로도 같이 듣지 않나싶어요 ㅎㅎ
 

"사람이 살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서로 싸우는라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페르망탱이 내게 침을 뱉지 않았어도 내가 그 고통 속에 몸을 던졌을까. 나의 참여는 단지 날아온침의 궤적과만 관련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단다.
- P136

2년 만에 다시 쓰는 이 일기에서 내가 우선 주목하고싶은 건 바로 그 눈물이다. 오늘 아침 난 실제로 내 몸 안의 눈물을전부 다 쏟아버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있을 수 없는 살육의기간 동안 내 정신이 축적해온 눈물을 모조리 쏟아버린 것이다눈물은 자아의 배설이다. 그 엄청난 양이란! 우리는 울면서 오줌눌 때보다 훨씬 더 시원하게 자신을 비운다. 맑은 호수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도 더 깨끗이 자신을 청소한다. 그 정화의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면 종착역에 정신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눈물로 표현된 정신은 비로소 몸과도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있다. 내 몸도 오늘 밤엔 잠을 잘 잘 것이다. 안도의 울음을 실컷울었으니, 이제 끝났다. 사실 이미 몇 달 전에 다 끝난 것이었지만,
확실히 마침표를 찍기 위해선 이러한 의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끝났다. 그가 훈장을 준 건 바로 그래서다. 내 레지스탕스의 끝, 눈물에 영광 있으라!
- P140

 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지적 노동을 할 때 느끼게 되는 몸의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책들의 고요한 떨림,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결, 종이의 섬유 위에서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 풀의 자극적인 향, 잉크의 광택, 꼼짝 않고 있는 몸의 무게, 너무 오랫동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저린 발끝, 그 바람에 일어서려다가 뒤뚱거리며 가방에 부딪치기도 한다. 계속 앉아만 있을 순 없다. 몸을 흔들어대며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좌우에서 스트레이트를 퍼붓고, 훅, 어퍼컷, 연타, 라운드(이젠 확실히 왼쪽 주먹이 완전하게 펴지지 않는다. 그러나 훅이나 어퍼컷은 여전히 칠수 있다). 머리로는 복싱의 리듬에 맞춰 시구를 암송한다. 수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문장들을 머리가 깨질 정도로 외는 동안 팔은춤추고, 주먹은 때리고, 땀은 흐른다. 세탁통에서 퍼낸 차가운 물몸에 물을 끼얹어봐, 몸을 말려, 옷을 다시 입어, 공부를 시작해, 공부를 시작하라고, 그리하여 또다시 부동의 자세. 문장들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그 느낌! 순례하는 매는 인쇄된 책이라는 너른 들판위를 탐색 중이다. 귀한 사상들이여, 그대는 내 먹이요 내 풀밭, 어서 몸을 숨겨보시게 내가 가서 그대를 먹어치우고 소화까지 시켜버릴 테니! 빌어먹을,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지? 오늘 저녁엔 여기서 멈추자, 눈꺼풀이 모래처럼 무거워지고 펜은 자꾸만빗나간다. 잠을 자자, 대지 위에 몸을 눕히고 잠을 자자꾸나.
- P141

1954년 1월 28일 목요일30세 3개월 18일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 꿈, 새벽 5시에 불안이 잠을 깨웠다.
아니, 불안이라는 녀석이 내가 잠에서 깨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난 다시 잠이 들긴 했지만, 불안이 곧 또다시 날 잠에서 끌어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집게로 신생아의머리를 끄집어낼 때처럼 내 가슴팍을 붙든 채로, 아, 이번엔 안 돼!
싫어! 안 돼! 민첩하게 가슴을 뒤틀어 집게를 피한 덕에 내 몸은불안에서 벗어났다. 그러고 나선 돌고래처럼 편안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성격이, 아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잠이었다. 편안함 자체가 되어버린 잠, 불안이 도저히 해코지할 수 없는 피난처,
모든 걸 다 포함하는 잠, 내 몸이 몽테뉴의 수상록』 속으로 풍덩빠져든 것이다! 그렇게 자고 나서 깨어나자마자 난 얼른 메모를 남겼다. 『수상록』의 물 흐르듯 유연한 깊이 속으로, 그 책의 종이 속으로, 몽테뉴라는 사람 속으로 도망쳤었다고.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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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2-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새로 나온 문제집과 강의교재를 살 생각이 들어서 잠깐 기뻤습니다.
새 노트와 펜 같은 것들도요.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2-02-06 22:23   좋아요 2 | URL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뭔가 시작하는 것은 기분좋은 흥분을 가져다주죠~
준비 잘 하시고 밤 동안 평안하세요~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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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는 연말에 청소년수련관 강당을 빌려 발표회를 했다. 6학년이던 큰 아이는 <템페스트>를 연주했다.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대견했었다. 그 연주회를 위해 몇 달을 그 한곡만 연습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제법 연주회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먼저 강당으로 갔고, 일부러 시간을 낸 남편과 나는 시간에 맞춰 갔다. 어린 아이들부터 연주를 시작했고, 큰 아이는 마지막 주자였다. 무대에 올라온 아이는 먼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연주할 곡을 소개 했다. 긴장도 하고 쑥스러웠는지 삐딱하게 서서 빠른 속도로 읽어갔다. 다들 아이의 건들거리는 태도에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스러웠다. 자리에 앉은 아이는 연주를 제법 잘 해내고 큰 박수를 받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아이에게 인사하는 매너와 연주할 때 혀를 내밀던 것을 나무랐다. 믿고 피날레를 맡긴 선생님과 관객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그날만큼은 그동안 연습하느라 수고했다고 잘 했다고 칭찬만 해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마 남편도 돌이켜 보면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된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큰아이에게는 미안한 기억이 많다.

  

작가 카하트가 살던 파리 좌안지역의 동네, ‘데포르주 피아노:공구, 부품간판이 걸린 19세기의 매력이 느껴지는 가게. 그는 중고 피아노를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곳을 찾고 주인 뤼크를 알게 된다. 피아노 수리도 하지만, 뤼크는 중고 피아노들을 사들여 수리해서 판매를 한다. 그의 방식은 특별하다. 관계와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에게서 피아노를 산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에게만 피아노를 판다. 중고 피아노를 매입하는 것도 사람을 신뢰하고 선금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상적인 것은 알코올 중독자인 조율사 요스에 대한 그의 태도다. 거리의 부랑자 같이 사는 요스의 실력을 믿고 그를 고객에게 보내준다. 술에 취해 큰 실수를 저지른 뒤에도 그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는 모습에서 일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운영방식을 보게 된다. 수공업이 번성했을 시절의 파리 거리 장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느껴지던 ‘19세기의 매력은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

 

뤼크가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 역시 남다르다.

뤼크는 피아노를 얻은 방식을 이야기할 때는 늘 모호한 표현을 썼다. 절대 샀다거나 거래했다거나 경매에서 낙찰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가 나한테 왔다거나 도착했다고 말했다. 마치 문간에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피아노의 도착을 언급하는 방식은 사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일치했다. 피아노는 한동안 그와 함께 살러 온, 떠날 때까지 그가 보살펴야 할 영혼이었다.”(41p)

 

작가는 자신의 피아노를 만나기까지 공방을 찾으며 피아노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스타인웨이, 음색이 돋보이는 베르슈타인, 피아노의 귀족 뵈젠도르퍼, 슈팅글, 에라르, ……그리고 파지올리.

피아노 연주 영상에서 STEINWAY & SONS 라는 로고를 자주 보게 된다. 스타인웨이는 세계적으로 콘서트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피아노다.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파지올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작가는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에서부터 피아노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도 전해 준다


스타인웨이에 대한 그의 묘사는 정교하다.

그 피아노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된, 1896년산 스타인웨이 C모델이었다. 그 구조적인 면은 기본적으로 현대 스타인웨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체형 철제 프레임은 케이스 안에 수평으로 자리를 잡고 주위의 현을 잡아당겨 단단히 고정했다. 그 프레임에 적용된 수많은 특허기술은 금속에 돋을새김으로 직접 기록되어 있었다. ‘교차 현 스케일’, ‘관형管形 액션 프레임’, ‘카포 다스트로 봉현들 밑의 울림판에는 정교하게 스타인웨이 로고가 박혀 있었으며, 그 위에는 왕실 피아노 공급자라고 찍혀 있었다. 그 양옆에는 유럽의 군주와 그들의 문장이 도열해 있었다. ‘프로이센 왕과 독일 황제’, ‘스페인 여왕’, ‘이탈리아 여왕’, ‘영국여왕’, ‘영국 왕세자’. 이런 식으로 보증인을 과시하는 것은 천박하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스타인웨이가 피아노 제작의 정상에 올라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81p)

 

여러 시간 여러 장소로부터 와서 뤼크의 손을 거쳐 다시 누군가에게 보내지는 피아노들 속에서, 작가는 운명의 피아노를 만난다. 슈팅글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


그 자그마한 크기와 세세한 부품의 아름다운 배치를 보자 마음속에서 한 단어가 꿈틀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그럼에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당돌, 나는 이 피아노가 당돌해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데렐라 같은 피아노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 작은 피아노가 어쩐지 좋고, 따라서 내 가족에게 맞는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45p)

 

나는 음계를 몇 개 쳐보았다. 그러다 화음 몇 개를 이어가보았고, 마지막으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아르페지오를 몇 개 쳤다. 음들이 울려 퍼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46p)

 

피아노를 만나고, 서투른 연주를 하고,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교육기관을 찾고 데려다 주면서 유년시절의 피아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일 년에 한번 피아노 선생님의 집에서 열리는 연주회에서 경험했던 공황과 현기증, 그리고 아무런 의미 없는 곡예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서커스의 동물이 느꼈을 법한 감정”(89p)의 경험을 떠올린다. 우리 아이들의 학원 연주회를 보고 돌아오던 때를 생각나게 한 장면이었다. 지금이라면 작가의 말처럼 그런 터무니없는 행사를 가지고 법석을 떨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피아노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킬리언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에게 음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음악을 끌어낼 수 있는 직관력 있는 교사를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마스터 클래스 참관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경험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 공방을 찾고 뤼크와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며 피아노로 연상될 기억들을 쌓아 간다.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피아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닳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파괴당한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새로 좋은 악기를 들이면 음악의 영역으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이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커다란 덩어리가 발휘하는 특별한 연상의 힘은 그 개별적인 피아노 한 대만 갖고 있는 것이다.”(217P)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피아노를 계약하고 오셨다고 했다. 딸이 둘이나 있는데 피아노는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나무로 된 거냐’ ‘삼익이냐 영창이냐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이었다. *? 그 펌프 만드는 회사 그 한*? …… 두 분도 삼익이나 영창을 생각하고 피아노 거리로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점포 앞을 지나는데 피아노 연주 소리가 너무 좋아서 들어간 곳이 그 매장이었고, 직원의 유창한 말솜씨에 넘어가 계약을 하고 오셨다고 한다. ‘역사는 얼마 안됐지만 잘 만든 것 같더라로 우리의 논쟁은 끝이 났고 며칠 후 다행히 원목으로 된 피아노를 받았다. 나는 공부를 핑계로 하농의 고비를 넘지 못했고, 동생은 그나마 반주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은 갖췄으나, ‘피아노는 모셔두기만 하냐?’ 는 아빠의 핀잔을 듣는 날이 많아지고, 곧 피아노는 거기 원래 그렇게 조용히 있었던 가구가 되어갔다. 아이들 피아노 시작할 때, ‘피아노 가져올까?’ 했더니, 남편은 어디 건데?’ 하고 물었다. ‘*’ 했더니 코웃음 치는 남편에게 나는 그래도 소리는 좋아했었다.^^ 


 

피아노가 공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 피아노 주인의 삶도 함께 온다. 이 소설은 유난히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기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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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1-31 05: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드님나이때 저도 tempest 2악장을 발표회때 쳤어요. 그런데 저는 3악장을 더 좋아해서 지금도 자주 듣고 있어요.
피아노얘기 재미있네요.

Falstaff 2022-01-31 07:55   좋아요 5 | URL
윽, 그레이스 님의 아드님도 그렇고, hnine 님도 그렇고, 초등 6학년이 템페스트를.... 타고나신 거 아닙니까?
전 영화 <하녀>에서 이정재가 출근하기 전에 그랜드피아노 연주하는 거 보고 헉! 했던 기억밖엔.. ^^;;;

그레이스 2022-01-31 08:31   좋아요 4 | URL
제가 보기엔 아이들이 거쳐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나마 남자애들에게 맞는 곡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걔네들이 그 곡을 어떻게 이해했겠어요 ㅠ

그레이스 2022-01-31 13:12   좋아요 4 | URL
hnine님은 그 경지까지 가셨군요^^
저는 매일 꾸준히 연습해야 하는 레슨과정을 통과 못한 터라.^^

새파랑 2022-01-31 1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 아닌가요? 😅 전 체르니 30번까지 치고 포기했는데 ㅎㅎ 엄청나네요~!! 지금은 피아노 계속 칠걸 후회가 남습니다 ㅜㅜ

그레이스 2022-01-31 12:43   좋아요 5 | URL
ㅋㅋ
맞아요
우리는 템페스트 하면 셰익스피어가 먼저 떠오르는 독서인이죠?!
ㅎㅎ
그래도 30번까지 치셨네요.
악보도 못읽는 남성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체르니 30번 그때가 고비라고 하더라구요.ㅋㅋ
오늘도 열독중이시겠네요.
새파랑님 행복한 명절 되시길요~!

미미 2022-01-31 12: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딩때 구입한 피아노를 쭉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팔고 난 후 기분이 참 안좋았어요. 나중에 디지털 피아노를 사고 싶은데 이 글 읽으니 고민됩니다. 소리만 좋으면 장땡 같은데요?ㅋㅋㅋ큰아이 넘 대견한데요? 피날레라니~^^♡ 혀내밀고 삐딱하게 서서 자기소개 읽고 다 천재느낌입니다.ㅋㅋㅋ

그레이스 2022-01-31 12:46   좋아요 6 | URL
ㅋㅋ
천재! 그렇게 봐줄걸...!
다행히 지금도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요~
정말 다행이죠!

mini74 2022-01-31 14: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영창. 딸이 넷이라고 엄마가 곗돈 부어 사오셨어요 ㅎㅎ 하농 잔짜 지겹죠 ㅠㅠ

그레이스 2022-01-31 15:03   좋아요 2 | URL
^^
그때는 그랬죠?!

희선 2022-02-01 01: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피아노 오래 배우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네요 새로운 것도 아니고 중고 피아노를 고치고 그걸 파는군요 아예 모르는 사람한테 팔지 않고 아는 사람이 소개해야 한다니... 피아노에도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겠습니다 피아노만 아는 것도 있을 것 같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2-02-01 15:22   좋아요 3 | URL
특별히 제가 성장하던 시대에는 피아노에 대한 추억이 있었을거예요~^^

얄라알라 2022-02-03 14: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변에서 아이가 여럿이신 분들 혹은 형제자매 많으신 분들을 보아도, 유독 큰 아이에게는 차고넘치는 칭찬보다는 격려성 질책(?)과 조언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피날레 연주를 했던 자녀분의 무대 매너와 대화를 디테일까지 기억하시는 애정이 느껴집니다.
근데 저는 영창과 삼익은 바로 알았는데 ˝한*˝?은 모르겠어서 검색해보려고요^^ 그레이스님 유년기의 추억이 가득한 가구 이야기에 덩달아 훈훈해집니다!

그레이스 2022-02-03 14:16   좋아요 2 | URL
^^~♡
펌프회사랑 이름만 같은건지 아님 거기서 만든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름 듣자마자 그 광고부터 생각났어요 ^^

레삭매냐 2022-02-03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아노는 자고로 공간을 많이
잡아 먹는 그런 가구랍니다 헷

그레이스 2022-02-03 23:18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이사할때는 더 애물단지죠^^

서니데이 2022-02-04 19: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피아노가 있지만, 이웃집에 시끄러울까봐 가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 때는 정말 고가였어요. 근데 한*는 처음 들어서 어디인지 궁금해지네요.
그레이스님, 잘 읽었습니다.
오늘 날씨가 추워요.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2-07 06:33   좋아요 3 | URL
^^
감사합니다 ~
모두 궁금해하시는군요
한일이예요 ㅋㅋ
진짜 소리는 좋았어요^^
건반이 조금 무겁기도 해요 ㅎㅎ
작가가 받은 피아노가 스타인웨이도 아니고 뵈젠도르퍼도 아니고 슈팅글이어서
그때 생각이 났어요^^
이번에 쇼팽콩쿠르 1등 한 부르스 샤오 유 리우(?)는 파지올리를 연주하더라구요^^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세요
 


아마도 오연호 기자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덴마크의 아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진로를 위해 탐색하는 시간을 갖은 뒤 진학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공교육과 학제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고민했던 기억이 났다. 대학을 거부한 아이들의 이야기도 읽어보았었다. 그런 결정을 한 아이들의 고민과 사회적 시선을 보며, 덴마크와 같은 지원 제도나 공동체의 지지가 있지 않는 한 아이들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길이란 생각을 했었다.


대학 진학하기 전 약 3개월 동안 아이들은 무엇을 할까? 수능을 보고 진학이 결정되기까지 어떤 아이들은 1주일 어떤 아이들은 4개월이란 기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빨리 결정된 아이들과 달리 정시 예비번호까지 받은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지내고 있을지. 마음에 들지 않은 학교일 경우 재수까지 생각하느라 더 고민이 깊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대학으로 바로 진학해야하고 실패하면 다시 입시생 모드로 돌아가야 하는 정해진 과정을 생각해보며 마음이 답답하다.


2년 전 함께 독서했던 아이가 올해 대입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지 못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 예비번호를 받고 입학할지 재수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내 첫마디는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이럴 때 실컷 놀아야지.”였다. “놀만큼 놀았어요사실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여행도 제대로 못하니 답답함이 오죽하겠는가? 대학이 결정된 친구들은 그 친구들대로, 종합학원에 등록한 친구들은 그 친구들대로 자신과 처지가 다르니 함께 어울리기도 힘들고 어디도 마음 붙이기 힘든 아이의 상황이 헤아려졌다. “무슨 책을 읽고 싶어?” “소설은 못 읽겠구요.경제나 사회과학 분야요.” 여기서 다시 마음이 찡했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고, 감정을 읽어내기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다. 처음에 반 정도 읽고 만나서 어떻게 읽었느냐고 했더니 조금 어려웠다고 했다. 아담 스미스나 맬서스, 마르크스. 케인즈는 들어봤지만 그것도 이름뿐이고 그들의 경제학과 용어들이 생소하다고 했다. 대견했다. 그 와중에 정독하고 용어들도 찾아보고 이해해보려고 했던 노력이 보였다. 그럼 이 책 읽으면서 소개되는 학자나 저서 중에 관심 가는 부분이 있었냐고 했더니, 맬서스와 베블런이라고 한다. 그 나이 남자 아이들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큰 흐름을 읽어내기 보다는 마음이 꽂히는 대로 읽고 확대 해석하고 있는 대답들에 그래! 그래야 너희지. 더 나이 들어서 시니컬한 태도로 그 이론은 실패했잖아! 뭐하러 읽어?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와 이 책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사이에서 고민했었다. 장하준의 책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읽었다. 출판과 함께 서울도서관에서 강연했던 자료까지 찾아보았었다. 그의 강연의 서두와 그 책의 서론에서 장하준의 말에 감화되다시피 했었다. 경제학을 전문지식인 집단에만 맡겨두고 무지한 것은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자유방임시장 정책이 실패했다는 진단과 빈부격차의 양극화가 나타났을 때 출간된 책이다. 그의 이전 저서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지만 그는 신고전주의 학파의 자유시장 경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한다. 이 책에서는 균형을 맞추며 소개하고 있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고 있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역시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해서 시카고학파로 이어지는 자유방임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고전주의학파와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 학파  두 흐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경제학강의가 케임브리지학파에 기울고 있다면 이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고전주의학파에 약간 힘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더 쉽고 친절하고 유머가 섞여있어서 덜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탓에 어디선가 들었을만한 유머도 있다. 한 챕터마다 한 경제학자들의 성장배경과 교육과정, 그가 함께 했던 사람들, 에피소드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과 용어에 대해 예화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1903년 케임브리지 대학이 경제학과를 윤리학으로부터 독립, 개설했다는 사실로부터 짧은 역사뿐 아니라 당시 경제학이 현재의 경제학과 얼마나 다른 토양위에 있는가를 알게 된다. 경제학은 모형의 제시다. 제시된 모형이 실패하면 다시 다른 모형을 제시해 온 역사가 경제학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정치경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왔고, 장하준 교수도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는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경제가 세분화되고 전문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되면서 정치가들은 그들에게 의존하고 경제정책을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레이건의 선거캠프가 애덤 스미스를 하나의 이미지로 선택했을 때는 그가 하려는 레이거노믹스가 어떤 방향인지를 읽어야하는데 애덤 스미스로부터 온 경제 모형이 무엇인지를 그릴 수 없다면 선택은 포장된 경제 공약에 미혹될 위험을 갖게 된다.

 

국부론에서 제시하는 애덤스미스의 생각은 왜곡되고 오해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이란 표현은 스미스 경제이론의 뚜렷한 상징이 되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 결실도 얻게 된다.”

애덤 스미스의 분업에 대한 핀 공장의 사례는 경제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라고 한다. 직접 읽어봐도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 애덤 스미스가 두 세기가 넘도록 읽혀지고 경제 분야의 한 학파의 기원을 만들었지만 그가 먼저 쓴 도덕 감정론을 간과하면 그를 오해하게 된다. 예전에 읽었던 애덤스미스 구하기란 소설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마르크스 편에서 저자는 그의 자본은 철저히 자본주의라는 기반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를 경제학자라고 볼 것인가에 대한 모호한 지점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관계, 잉여가치의 분배에 대한 생각들을 분석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어날 예측만 할 뿐 모형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들과 차별된다. 또한 그의 분석과 예측에도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도시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던 혁명이 러시아 농민의 것이 되었다. 지식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혁명은 그가 예언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러기에 이론도 체제도 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학자라기보다 사상가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자본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읽히고 있다. 시대를 읽고 현상을 파악하고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는 사상과 도구를 제공하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분노의 포도를 인용하며 마르크스에게 찬사를 바치고 있다.


네가 어디를 둘러보든 나는 거기 있을 거야. 굶주린 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 나는 있을 거야. 경찰이 시민을 폭행하는 곳에 나는 있을 거야.사람들이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는 곳에도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집에 살며 스스로 재배한 식량으로 연명하는 곳에도 나는 있을 거야.”

요사이 다시 마르크스의 자본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또 다시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불러낼 만큼 계급화 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닌지. 공산주의 선언서문이 계속 맴돌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장은 케인즈 편이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엄선된 엘리트들만 가입이 허락되는 비밀 모임 사도들 Apostles’ 의 회원이다. 이 모임에는 러셀, 무어, 화이트헤드 등의 철학자들과 포스터, 레너드 울프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다수는 졸업 후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한다. ! 그 블룸즈버리 그룹! 맞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가 속해 있고, 그녀와 관계해왔던 그룹이다.

명석한 그는 마셜의 경제학 원론을 읽고 마셜 교수의 권유를 받아 경제학에 입문하지만 그의 공부는 8주 만에 끝이 난다. 국가고시를 통해 채용되어 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그의 경제에 관한 통찰력은 빛을 더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경제학으로 이끌어준 마셜의 원론을 반박함으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그의 딜레탕트 기질과 솔직함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하나의 학파를 이루는 큰 줄기가 되었고, 미국의 경제공황 시기에 큰 힘을 발하게 된다. 케인즈 학파는 경제위기 때마다 정부의 기능 확대에 이론적 근거가 되어왔다. 케인즈주의자는 민간경제가 완전고용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고, 정부지출은 경제를 활성화시켜 불완전고용의 틈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밀턴프리드먼을 읽으면 오늘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의 역할과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그는 금융정책을 통한 통화량 조절로 경제상황을 주도해야 한다고 한다.

 

경제학사는 결국 애덤 스미스와 케인즈의 아이디어가 다시 인용되고 수정된 모형 제시의 역사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자유방임시장경제냐 사회주의 시장경제냐의 논쟁이다. 두 학파 모두 자본주의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알지 못했던 변수들의 출현으로 인해 정답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 가지 주목한 것은 케인즈나 애덤 스미스나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높이 평가하는 데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해답은 거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서를 마치고 그 아이는 책이 좋았다고, 전혀 모르던 영역인데 알게 되어서 좋았다고 한다.나는 언젠가는 알아야 할 내용이니 지금 읽어 두면 나중에 생소하지 않아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격려했다. 책을 덮고 아이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재수하기로 했다고. 2월에 종합학원에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서 힘들다고, 1년 후에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서 지금 학교로 돌아가면 어떨지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나는 일단 결심했으면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고, 생각을 비우고 학원에서 하라는 대로 그대로 하라고 그러면 성적은 잘 받을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생각을 비우라니! 그런데 할 수 있는 말이 그런 것밖에 없었다. 생각을 비우고 공부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니 얼마나 적응하기 힘든 전환인가? 함께 읽은 이 책이 그 아이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길 바란다. 돌아오는 길이 스산했다.


이 아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들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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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29 17: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이론과 실용, 기타 문학장르)과 함께 경제지와 매일 발행되는 신문, 잡지를 병행해서 읽으면 실물 경제와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 아이 내년에 원하는 대학에 꼬옥 합격했으면 좋겠네요
그레이스님 설 연휴
밥보다 책 ^ㅅ^

그레이스 2022-01-29 18:24   좋아요 4 | URL
예~^^
스콧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미미 2022-01-29 18: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교수의 책<나쁜 사마리안들>을 읽고 많이 놀라고 감탄했었는데 경제학 책 놓은지 너무 오래되었네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23가지>도
가까운곳에 두고 그저 한번씩 바라만보는..ㅋㅋ 올려주신 리스트 저도 찜합니다~♡

그레이스 2022-01-29 18:25   좋아요 3 | URL
저도 그 책들 읽고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새파랑 2022-01-29 18: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고등학생들은 수준도 높고 고민도 많을거 같아요~ 코로나 때문에 수능이 끝나도 잘 못노는군요 ㅜㅜ 여러모로 왠지 안타깝습니다. 함께 읽은 책이 위안이 되었을거라 확신합니다~!!

그레이스 2022-01-29 18:26   좋아요 4 | URL
참 안됐어요
해외 여행 길도 막히고,,, 한번 바람 휙 쐬고 오면 좋을텐데...

라파엘 2022-01-29 18: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 책이죠. 곁에 그레이스님과 같은 어른이 있으니, 그 학생은 복이 많은 인생인 듯 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1-29 19:12   좋아요 4 | URL
되돌아보고 저 말고 책들이 기억에 좋게 남았으면 합니다~^^

mini74 2022-01-29 20: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불안한 맘이 짠하네요.ㅠㅠ 그런 아이를 위해 책을 고르는 그레이스님 맘도 넘 고우세요. 꼭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요. 그레이스님 복 마니마니 받으시고 즐거운 설 연휴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1-29 20:52   좋아요 4 | URL
^^
미니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명절도 잘 보내시구요~^^

페크pek0501 2022-01-30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네요. 나라마다 교육 제도를 비교해 보면 정말 다른 점이 많아요.
한 예로 우리나라에선 거의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은 경우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그 부분을 읽고 신선하게 느껴졌었죠.

명절 잘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1-30 00:4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페크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1-30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다보니 너무 일찌감치 학교 결정되고 매일 뒹굴거리는 우리집 둘째가 보이는군요.(뭐 원하는 학교에 간건 아닙니다. 재수를 은근히 권했던 저에게 엄마 난 재수할 자신이 하나도 없어라는 말로 끝내버렷네요. ㅎㅎ) 너 그렇게 읽고싶었던 책이라도 좀 보지 하면 건성으로 대답하고 게임하는.... ㅎㅎ 그레이스님같은 분을 만나서 그 아이는 또 한해를 버틸 힘을 얻어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책 둘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레이스 2022-01-30 00:53   좋아요 0 | URL
수험생 부모 하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뒹굴거리는 것도 충전중이라고 하더라구요. ^^
맞아요 책도 사람도 힘을 주는 존재죠.
바람돌이님 이번 명절은 맘편히 아이들 세뱃돈도 두둑히 주시면서 행복하게 보내세요~♡

희선 2022-01-30 0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덴마크 괜찮네요 한국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부터 대학 입시를 생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치원부터는 일본이 그럴지... 고등학생 때 이런 경제 책을 보다니... 저는 그때 그런 거 하나도 모르고 지금도 잘 모르는군요 지금 답답한 마음이 책을 보고 좀 나아지면 좋겠네요

그레이스 님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그레이스 2022-01-30 08:37   좋아요 0 | URL
가끔 생각하는데, 그 나이때 이런 책들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해요^^
희선님도 즐거운 명절 되시길!~♡

초란공 2022-01-30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은 저에게도 아주 도움이 많이 될듯 합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1-30 08:34   좋아요 0 | URL
예 ~
제게도 그래요~
명절 행복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