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아이에게 성마르게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우리가 받은 지식을 돌려주어야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될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다. - P59
‘아이‘도 독서의 필요성은 잘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한시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아이가 제출한 논술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다. 주제: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연인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편지에 썼던, "살고자 한다면 책을 읽으시오!" 라는 단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이는 플로베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P90
"텔레비젼은독서를 방해하는 제1의 적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텔레비전은 무기력한 수동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독서는 모든 것을 떠맡는 적극적 행위다" 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교사는 빨간 펜으로 묵묵히 동의를 표한다. (매우 우수!)*그러면서도 순간 교사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몽상에 빠진 학생처럼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적어도 그에게 몇몇 영화는 원작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떠오르지않았다. 사냥꾼의 밤」「아마르코드」 「맨해튼」 「전망 좋은방」「바베트의 만찬」 「화니와 알렉산더」 같은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가! 그 영화들의 영상에는 무언가 기호의신비가 담겨 있는 듯했다. 물론 이는 무슨 거창한 전문가적입장에서의 견해는 아니다. 자신은 영화 구성 기법이며 영화 애호가들의 전문 용어에 전혀 문외한이 아니던가. 다만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 영상들은 파내도 파내도 고갈되지 않을 듯한, 해석을 달리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의미를 전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 P93
때론 텔레비전의 영상조차 그랬다. 언젠가 모든 사람 을 위한 독서」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바슐라르의 만년의 모습, 「아포스트로프」에 출연했던 장켈레비치의 타래 머리,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밀라노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파평이 멋지게 골을 넣는 장면….… - P94
가독서가 과연 의사소통의 행위일까? 이것 또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벼운 농담 정도로나 봐줄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 말이 없다. 책을 읽은 즐거움을, 우리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느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그것은 책에서 그다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내용을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느낌을 발설하기 전에 시간을 두고 설익은 생각을 가다듬으며농익도록 뜸을 들이느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순간의 침묵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낸다. 책을 다 읽었지만, 우리는아직도 책 속에 있는 것이다. 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버거워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피신처로 여겨지는 것이다. 책은 거대한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책은 우리로 하여금 우연으로 가득 찬 일상사를 높은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읽었으되 우리는 말이 없다. 책을 읽었기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다. 몰래 숨어서 우릴 지켜보던 감시병이 튀어나와 "어때? 재미있어? 이해가 되니? 뭘 느꼈는지 얘기해봐!"라고 심문을 일삼는다고 해도 답변을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 P109108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작 책에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은 잊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바로 한 권의 문학 작품이 발하는 막강한 위력일 터이다. 일상마저도 까맣게 잊게 만드는… - P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