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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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얕은 공감과 거짓된 연민, 금방 지치고 바닥을 보이는 나의 위로와 수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글들이었다. 열띤 위로로 가장된 자기만족과 담담함으로 감춘 무심함을 들키고, 나에게 기대하며 다가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거리만큼 떠나가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했다. 진심을 들켜버린 그 순간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린 나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화자(話者) ‘가 묻듯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30/123)”가를 생각했다. 답은 가깝고 명료함에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내가 쌓아올린 것,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는 죄책감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아니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를 혐오해.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적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쏘아붙인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다.(18/123)”

 

는 다큐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내보내고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 애썼다. 윤주는 뺨에 신경섬유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얼굴 대부분을 머리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는 떠나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으로 홀로 살아가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윤주에게 는 조금 특별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는 욕심을 부렸고, 윤주의 방송날짜를 시청률이 높은 추석으로 정하고 수술날짜도 의사와 상의해서 미뤘다. 수술실에 들어간 윤주의 종양은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으로 밝혀졌다. 화자는 죄의식에 갇혀버렸다. 수술을 미룬 그 세달 동안 악성으로 변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학적 의심 때문에 는 괴로웠다. 윤주를 대했던 마음이 자족적이고 가식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거라는 의심과 선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위로 사이에서 덧없어한다.

 

는 브뤼셀의 L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브뤼셀을 향한다. 그것이 도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L’과 면담했던 브뤼셀의 의사 박씨에게서 받은 L의 자술서와 일기를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복기한다. 여기에 윤주의 어린 시절과 암 투병 중인 현재의 불행, ‘의 죄의식이 오버랩 된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35/123)”

 

L의 이름은 로기완, 북한에서 연길을 거쳐 브뤼셀로 망명한 탈북인(북한이탈주민)이다. 연길에 어머니와 불법 입국했고,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판 돈으로 베를린을 거쳐 브뤼셀에 도착했다. 호스텔 굿 슬립 good sleep’ 리셉션 직원의 냉랭함 앞에서 뒤돌아 가슴에서 방수포에 싸인 650유로를 꺼내 세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묵직한 통증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는 화자를 따라 나 역시 먹먹함을 느꼈다. 일주일을 머뭇거리던 로기완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지만, 밀입국할 때 버렸던 신분증이 없어 북한인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 159센티미터 단신, 47킬로미터의 왜소한 몸인 그는 헬로봉주르조차 알지 못하는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일상에서는 요구받지 않는 그 증명서들이 로와 같은 이주민, 망명자들에게는 그들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들이 된다. 그것이 주는 위로는 영원한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8/123)”

를 브뤼셀로 이끌었던 로의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던 시절의 로가 그러했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인생의 많은 순간 그렇게 살아간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그 사회의 터미널에 있는 이방인이 된다. 대사관을 나와 담장에 기대 설움을 토해내고,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열하던 로의 모습에서 외로움의 극치를 본다.

 

로의 국적이 북한임을 판별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의사 박 역시 탈북인이다. 그는 남한에서 벨기에로 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죄의식과 함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다. 상처(喪妻)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북한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의 국적을 판별하기 위해 면담을 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이 로의 자술서와 함께 주 벨기에 한국대사 앞으로 쓴 코멘트는 로와 같은 난민신청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91/123)”

 

이 코멘트를 쓰고 있는 박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렇게 는 이방인 로의 행적을 쫓으며 냉담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과 슬픔에 전이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음을, 진심이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쩔 수 없기에 인정하고 슬픔은 슬픔으로 반응해야 했다. 타인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감으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깨달아 가는 동안,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그것의 형태로 선명해지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 생각의 변화와 함께 멀리 있는 윤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성공적이었지만 귀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윤주의 수술 소식과 함께 그것의 형태를 선명하게 갖춘다. 그리고 는 그 귀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그 귀에 대고 고백한다. 그것은 윤주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그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단절됐던 통화이기도 하다. 다의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 의사 박의 삶 역시 의료 조력 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박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는 윤주, , 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이것이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잣대는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가깝고 명료하다. 그런데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이 필요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막연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해서 나는 현실의 로기완, 윤주, 박에게 거짓 없는 연민과 환대를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소설 속의 정제된 표현들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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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04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머 저 이거 표지 때문에 연예인이 썼거나 드라마 대본집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이런 내용이었다니..! 😱

그레이스 2024-04-04 08:11   좋아요 1 | URL
^^
넷플릭스에 영화가 올라오고 광고가 있어서 그런듯요.
잠깐 스쳐가는 광고 영상으로 본 송중기 배우때문에 읽는 내내 방해가 됐어요.
159센티미터 47킬로의 로기완과 배우가 매칭이 되지 않아서....
배우의 이미지를 지우느라 애쓰면서 읽었네요.
영화는 안보려구요 ㅠ
책이 넘 좋았거든요^^

새파랑 2024-04-05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를 보니 흥미롭네요.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이 진심인지 아닌지 자주 고민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거 같네요~!! 마지막 질문에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4-04-05 15:46   좋아요 2 | URL
^^
참 어려운 문제인듯요
함께 슬퍼하고 할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조차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얄라알라 2024-04-07 19:17   좋아요 1 | URL
남 얘기처럼 소비할게 아니라 뜨끔뜨끔 자기를 돌아봐야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인거 같아서 읽기가 겁나기도 하네요^^:

그레이스 2024-04-07 19:31   좋아요 1 | URL
예~
내내 저 스스로를 비추고 각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기도 해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샤이닝>, 서울행 기차 안에서 <메모의 즉흥성과 맥락의 피연성>을 읽었다. 얇은 책들을 가져간 것은 집에 돌아가면 읽고 논제를 만들어야 할 다른 책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마저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읽다 중단한 채로 미뤄두기 싫어서, 이동 중 완독 가능한 분량의 책을 선택했다. 노란 책은 넘 빨리 읽어서 시간이 남았다.ㅠㅠ
욘 포세는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 나만의 평가가 나올듯 하다.
어쨌든 독서는 기차가 최적의 장소!
아직 천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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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26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욘 포세 전에 읽으려다 포기해서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저 메모에 관한 책은 무슨 철학책 같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4-03-26 21:20   좋아요 1 | URL
ㅎㅎ
메모에 관한 책은 잠자냥님 소개하신 글 보고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샀습니다.
제목을 끌리게 참 잘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스 2024-03-26 21:22   좋아요 1 | URL
욘 포세는 다 사놨는데,,, 다들 평이 달라서,,, 겁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것 같아요.
저는 좀더 읽어봐야겠습니다.

stella.K 2024-03-26 22:03   좋아요 1 | URL
허어, 욕심이 넘 많으신 거 아닙니까? 지금도 잘 쓰시는데 더 잘 쓰시려고 읽으시다닛! ㅎㅎ
그런 거라면 오히려 제가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 리뷰를 넘 오래 쓰고 쓰다보면 삼천포, 또랑에 자주 빠지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ㅠ

그레이스 2024-03-26 22:13   좋아요 0 | URL
;;;;;

페넬로페 2024-03-26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 가셨군요.
잘 다녀 오세요^^

그레이스 2024-03-27 00: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벌써 다녀 왔어요
매년 엄마모시고 부산 다녀오는 여행이예요
비도 오고 이제는 엄마도 나이드셔서,
거의 호텔 안에만 있다가 바다보고 와요^^

희선 2024-03-27 0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차 타시다니 기분 좋으셨겠습니다 바다도 보시고 오셨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4-03-27 09:36   좋아요 0 | URL
예~
희선님 감사합니다.
비오는 바다도 좋았어요^^

샤이닝 보면서 희선님 글이 생각났는데,,, 어딘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단발머리 2024-03-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며칠전에 교보 갔는데 샤이닝이 진짜 작아서 깜짝 놀랐어요 ㅎㅎ책 집중해서 읽고 싶기도 하지만 기차를 타고 싶네요 ㅋㅋㅋㅋㅋ
기차여행과 고르신 책이 찰떡입니다!

그레이스 2024-03-27 09:39   좋아요 1 | URL
예^^
샤이닝은 단편 분량이예요.
뒤에 노벨상 수상소감도 좋았어요
작가를 조금 더 알려줘서 다음 작품 볼 때 도움이 될 듯해요
오만원짜리 독서실 ㅋㅋ
기차여행은 가끔 기분전환에 최고예요

새파랑 2024-03-2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욘포세는 <샤이닝>으로 시작하면 되는건가요?

기차가 정말 책읽기에는 가장 좋은 곳인거 같아요. 지하철은 좀 힘들다는...

그레이스 2024-03-27 14:21   좋아요 1 | URL
제가 다른 책은 안읽어봐서...샤이닝이 얇아서 부담이 없긴 해요 ㅎㅎ
지하철도 좋긴한데,,,

책친놈 2024-03-27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책이 기다리고 있어 얇은책을 읽는다는게 공감되네요 ㅋㅋㅋㅋㅋ
저도 샤이닝 사놨는데 욘포세 작품마다 평이 갈리는 리뷰를 보며 겁나기도, 할게 많기도해서 아직 미루기만 했네요. 그래도 분량이 짧으니 이번주중으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ㅎ 여행 잘다녀오세요👋

그레이스 2024-03-27 14:22   좋아요 1 | URL
^^
저 말고 또 계셨군요
선뜻 못읽고 계셨던...!
화이팅!
 
메모의 즉흥성과 맥락의 필연성 - 23년차 단행본 편집자의 메모 실례
김영수 지음 / 인간희극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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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정보를 요약하고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보도자료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편집자가 아닌 나와 같은 독서가들에게 필요한가? 하다가 마지막부분에서 ‘제텔카스텐‘을 알게 되었다. 하나만 건져도 이 얇은 책을 읽은 보람이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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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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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을 치고 고독한 공간을 만들어 읽어야만 한다. 그의 침묵을 읽어내려면! 어두운 숲은 죽음에 가까이 간 사람의 낯설고 적막함! 빛나는 은유 덩어리! 죽음이 이렇게 빛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고 영원한 빛 가운데 있을 것이란 믿음이 은유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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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희극에서 정치생활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정치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재 사건·인물이 창조된 인물과 각색된 사건과 직조되어 있다. 그는 프랑스의 1789년 혁명으로부터 왕정복고 시대를 재창조함으로 대치시키고 고발한다. 고리오 영감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인물의 외형, 성격, 사회적 지위, 삶 등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전반부의 많은 양을 차지한다.

 

만들어진 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들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푸셰와 말랭이다. 말랭은 푸셰의 그림자다. 말랭은 1789년 이래 열두 번째로 섬기게 된 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드 공드르빌 백작으로 신임을 받고 있다. 그의 인생 역전은 푸셰를 닮았다. 조제프 푸셰 역시 혁명의 출발선에서는 미미한 존재였지만 혁명정부와 제정, 왕정복고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입장을 계속 바꿔가면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 시대의 가장 권세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특색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조제프 푸셰는 동시대나 후세의 사람들에게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배후에서 조종하며 상황파악이 빠르고 언제든지 승자 편으로 갈아타는 인물이다.

 

수도원의 위선 속에서 자라난 창백한 얼굴의 이 사내는 자신이 속했던 산악당의 비밀과 마침내 그가 끼어드는데 성공한 왕당파의 비밀을 모두 그러쥔 채 인간과 사물과 정치판의 이해관계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연구해 나갔다. 그는 보나파르트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에게 유용한 충고와 소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자신의 기량과 유용성을 증명해 보인 데 만족한 푸셰는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삼가면서 만사를 굽어보는 위치에 머무르고자 했다.(98p)”

 

이 소설의 배후에 푸셰가 있고 사건에 얽혀있는 발자크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 말랭이다. 말랭은 푸셰처럼 수많은 얼굴과 그 각각의 얼굴 밑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갖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48p)”였다.

 

발자크가 또 한사람의 푸셰로서 말랭을 창조한 것은 츠바이크가 말했듯, 모든 저술가들이 푸셰를 저평가할 때 그만은 이 특이한 인물을 높이 보고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백작 로랑스 생시뉴와 그녀와 친척인 시뫼즈 후작의 쌍둥이 아들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가족을 잃고 저택을 잃은 귀족들이다. 나폴레옹 살해 모의에 가담하고, 적극적으로 왕정복고에 참여하는 왕당파 로랑스는 심각한 상황에서 유딧의 면모가 드러나는 상속녀다. 국외로 도피 중이던 시뫼즈형제들은 그녀와 뜻을 함께 한다. 몰래 숨어들어와 나폴레옹을 죽이는데 참여하려고 몰래 국내로 숨어들어와 위기를 만난다. 시뫼즈의 소유지 공드르빌의 관리인이던 미쉬는 혁명의 피바람이 트루아에 불 때 자코뱅 당원 행세를 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 땅의 관리인이 되면서 사람들의 의심과 비난을 산다. 하지만 로랑스와 시뫼즈 형제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며 옛 주인의 자녀들을 돕는다.

 

로랑스 생시뉴와 미쉬 중 누가 주인공일까? 이 소설에서 역시 주인공을 한사람으로 좁혀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사건의 대칭점 혹은 여러 지점에서 긴장과 위기와 전환의 국면을 이끌어 간다.

 

미쉬는 초반부부터 그에 대한 인물 설명에서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을 짙게 깔고 등장한다.

앞날을 예견하게 해 주는 관상이 있다. 만약 단두대에서 죽는 사람들의 얼굴을 정확히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처형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심지어 무고하게 죽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이상한 표지가 있다는 것을 라바터와 갈의 과학은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13p)”

발자크는 왜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그의 최후를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복선이란 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실제로 그렇게 그는 죽음을 당한다.

 

미쉬는 실제로 이들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관리인으로 거둬준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일까? 그보다는 공드르빌 땅에 대한 원시적 욕망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비록 관리인이었지만 공드르빌은 자신이 뿌리내린 곳이고 삶의 터전이었으므로 이 곳을 로랑스나 시뫼즈로부터 빼앗아 소유한 말랭, 그리고 그를 내려보낸 정부는 원수였다. 그는 혁명, 왕당파, 공화파와 같은 정치사상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공드르빌의 소유주가 마리옹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소유주는 국가참사회원 말랭이었다. 발자크는 그 매각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 흐름을 읽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눈에 띈다.

 

시대는 제국의 여명기였다. 오늘날 프랑스 혁명사를 읽는 사람들은 대중의 정치적 사고(思考)가 그 시대의 아주 근접한 사건들 사이에서 얼마나 엄청난 간극을 보였는지 모를 것이다. 격렬한 소요 후에 각자가 느끼는 평화와 안정에 대한 전반적인 필요성이 더없이 심각한 이전 사건들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는 강렬한 새로운 이해관계에 의해 부단히 성숙하여, 신속하게 늙어 갔다. 그리하여 미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주 단순해진 이 사건의 과거를 추적하지 않았다.(24~25p)”

 

역사는 부단히 성숙하여 신속하게 늙어 갔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끓어올랐다가 피곤함 속에 빠르게 식어버리는 군중들의 심리를 소름끼치게 전달한다.

 

로랑스와 시뫼즈 형제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던 경찰 코랑탱은 덫을 놓고 상원의원 말랭 납치범의 누명을 씌운다. 한 개인의 원한 그 너머 배후에는 말랭과 푸셰, 나폴레옹과 왕정복고를 모의하던 인물들의 암투가 자리한다. 한 개인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사건을 당한 경우, 그것이 국가의 정치적 음모나 격랑에 휩쓸린 것일 때, 그 사람의 무력함과 답답함은 절망적이다.

 

납치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당시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자세히 보게 된다. 이런 지점이 발자크의 소설의 뛰어남이기도 하고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법 제도는 급박한 변화만큼이나 계속 수정이 가해지고 있었고 그 아래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별히 미쉬의 재판을 보며, 보게 되는 부조리는 오늘날도 역시 존재하는 것들이다. 군중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공개 재판으로 인해 배심원과 재판장이 군중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불평등한 재판이다.

그가 했든 그의 장인이 했든 간에, 공포 정치 동안 현 내에서 처형된 모든 사람의 목을 자른 인물로 통하는 미쉬야말로 더 없이 어이없는 설화의 대상이 되었다.(244p)”

 

사회가 재판을 창안한 이후로, 사법 당국이 범죄에 맞서 누리는 권한과 동등한 권한을 사회가 무고한 피고인들에게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낸 적은 결코 없습니다. 재판은 쌍방향이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252p)”

 

재판 풍경은 앵무새 죽이기, 나는 고발한다를 오버랩시킨다.

 

재판 방청을 대중에 허용하는 것은 공개성을 내포한다는 사실 그리고 법정 심리의 공개는 과도한 고통을 부과하기 때문에 만약 입법자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면 그런 고통을 부과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프랑스가 인식하지 못하는 한, 대중의 연설은 언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체로 풍습이 법률보다 더 잔인하다. 풍습이란 사람들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한 나라의 이성이다. 이성에 기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풍습은 법을 능가한다.(265p)”

 

납치혐의는 반역죄의 혐의로 확대된다. 실제로 이들이 받는 선고는 사형과 징역 24년이다. 네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 미쉬가 단두대로 향하는 장면은 미쉬의 죽음을 예고했던 처음부분을 소환한다. 그의 죽음 예고는 희생양으로서 죽게 될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간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나는 미쉬의 생애를 관통하는 혼란한 역사 가운데 희생당한 민중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그렇게 원했던 왕정복고의 시대를 맞이한 로랑스 백작은 열정을 잃은 존재(312p)”였다고 서술한다. 미쉬가 죽고 3명의 청년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아드리엥만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이것이 자신이 그토록 불태웠던 증오의 결과라는 자책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열정을 잃은 시점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했다. 당시 재판이 끝나고 그녀는 미쉬와 청년들의 구명을 위해 예나전투의 전쟁터를 찾아간다. 그녀는 로랑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당한다.

 

성경 속 단어와 이미지 말고는 묘사할 수 없을 군사적 장관 가운데서, 그 엄청난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사람이 로랑스의 상상력 속에 엄청난 거인의 규모로 부각되었다.(303p)”

 

그가 그렇게 증오했던 나폴레옹이 이 엄청난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인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미쉬와 청년들의 구명을 위해 탄원한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녀를 불태우던 증오와 사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 때가 그녀가 열정을 잃어버린 시점이다.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 선택이 평범한 일상에서는 그리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푸셰와 같은 인물들이 정치하고, 사람들이 무관심하다면 그때 누리는 평화는 평화가 아닐 것이다. 개인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드레퓌스 사건을 바라보며 군중과 민중을 나누었다. 그녀는 군중을 민중의 희화(戱畫)로 보지 않고 군중을 민중과 동일시하는 것은 근본적 오류(전체주의의 기원)”라고 한다. 군중은 일차적으로 각 사회계급의 찌꺼기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민중의 올바른 변화를 위하여 궐기할 때 군중은 언제나 <강력한 사람><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함성을 지른다.

 

이 소설은 많은 지점에서 많은 것들을 숙고하게 한다. 프랑스의 혁명으로부터 공화정과 제정과 왕정을 반복하고 급진적인 산악당 혁명가들이 자신들이 돌린 수레바퀴를 멈추지 못하고 쓰러지는 역사를 살펴보게 했다. 그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남은 푸셰와 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소설 속 미쉬와 같은 민중이 있음을 보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군중의 모습도 본다. 남는 질문은 …… 나는 군중인가, 민중인가, 지식인인가?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조제프 푸셰' 평전이다. 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말랭이라는 분신을 만들어 낸 푸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책이다. 역시 츠바이크의 평전은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명식의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는 프랑스의 혁명사를 참고하기 위해 항상 들춰보는 책이다두 책 모두 개정판이 나와 있다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조제프 푸셰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판되었다. 갖고 있던 책에 밑줄이랑 표시들을 해놔서 다시 신간을 살까 갈등하는 중이다. 함께 읽을 계획 중인 책이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이다. 발자크 전작읽기가 끝날 때까지 읽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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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2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하고 그레이스님은 서로 독서 친구라는게 느껴집니다~!! 한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참고독서까지 하시다니~!!

전 ‘푸셰‘가 누구인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레이스님은 지식인이십니다~!!

그레이스 2024-03-25 12:45   좋아요 1 | URL
^^
이런 친구를 찬쉐의 책에서는 글벗이라고 번역했더라구요^^
예 ~
동아리를 오래 함께 하다보면 방향도 비슷해지고 참고하는 책들도 같아지는 듯요!
너무 감사한 동행이십니다!
지식인!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많아요. 저 역시 군중과 민중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중인듯요.

<조제프 푸셰>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