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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평점 :
아이들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는 연말에 청소년수련관 강당을 빌려 발표회를 했다. 6학년이던 큰 아이는 <템페스트>를 연주했다.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대견했었다. 그 연주회를 위해 몇 달을 그 한곡만 연습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제법 연주회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먼저 강당으로 갔고, 일부러 시간을 낸 남편과 나는 시간에 맞춰 갔다. 어린 아이들부터 연주를 시작했고, 큰 아이는 마지막 주자였다. 무대에 올라온 아이는 먼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연주할 곡을 소개 했다. 긴장도 하고 쑥스러웠는지 삐딱하게 서서 빠른 속도로 읽어갔다. 다들 아이의 건들거리는 태도에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스러웠다. 자리에 앉은 아이는 연주를 제법 잘 해내고 큰 박수를 받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아이에게 인사하는 매너와 연주할 때 혀를 내밀던 것을 나무랐다. 믿고 피날레를 맡긴 선생님과 관객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그날만큼은 그동안 연습하느라 수고했다고 잘 했다고 칭찬만 해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마 남편도 돌이켜 보면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된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큰아이에게는 미안한 기억이 많다.
작가 카하트가 살던 파리 좌안지역의 동네, ‘데포르주 피아노:공구, 부품’ 간판이 걸린 19세기의 매력이 느껴지는 가게. 그는 중고 피아노를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곳을 찾고 주인 뤼크를 알게 된다. 피아노 수리도 하지만, 뤼크는 중고 피아노들을 사들여 수리해서 판매를 한다. 그의 방식은 특별하다. 관계와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에게서 피아노를 산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에게만 피아노를 판다. 중고 피아노를 매입하는 것도 사람을 신뢰하고 선금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상적인 것은 알코올 중독자인 조율사 요스에 대한 그의 태도다. 거리의 부랑자 같이 사는 요스의 실력을 믿고 그를 고객에게 보내준다. 술에 취해 큰 실수를 저지른 뒤에도 그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는 모습에서 일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운영방식을 보게 된다. 수공업이 번성했을 시절의 파리 거리 장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느껴지던 ‘19세기의 매력’은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
뤼크가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 역시 남다르다.
“뤼크는 피아노를 얻은 방식을 이야기할 때는 늘 모호한 표현을 썼다. 절대 ‘샀다’거나 ‘거래했다’거나 ‘경매에서 낙찰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가 ‘나한테 왔다’거나 ‘도착했다’고 말했다. 마치 문간에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피아노의 ‘도착’을 언급하는 방식은 사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일치했다. 피아노는 한동안 그와 함께 살러 온, 떠날 때까지 그가 보살펴야 할 영혼이었다.”(41p)
작가는 자신의 피아노를 만나기까지 공방을 찾으며 피아노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스타인웨이, 음색이 돋보이는 베르슈타인, 피아노의 귀족 뵈젠도르퍼, 슈팅글, 에라르, ……그리고 파지올리.
피아노 연주 영상에서 STEINWAY & SONS 라는 로고를 자주 보게 된다. 스타인웨이는 세계적으로 콘서트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피아노다.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파지올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작가는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에서부터 피아노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도 전해 준다.
스타인웨이에 대한 그의 묘사는 정교하다.
“그 피아노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된, 1896년산 스타인웨이 C모델이었다. 그 구조적인 면은 기본적으로 현대 스타인웨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체형 철제 프레임은 케이스 안에 수평으로 자리를 잡고 주위의 현을 잡아당겨 단단히 고정했다. 그 프레임에 적용된 수많은 특허기술은 금속에 돋을새김으로 직접 기록되어 있었다. ‘교차 현 스케일’, ‘관형管形 액션 프레임’, ‘카포 다스트로 봉捧’ 현들 밑의 울림판에는 정교하게 스타인웨이 로고가 박혀 있었으며, 그 위에는 ‘왕실 피아노 공급자’라고 찍혀 있었다. 그 양옆에는 유럽의 군주와 그들의 문장이 도열해 있었다. ‘프로이센 왕과 독일 황제’, ‘스페인 여왕’, ‘이탈리아 여왕’, ‘영국여왕’, ‘영국 왕세자’. 이런 식으로 보증인을 과시하는 것은 천박하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스타인웨이가 피아노 제작의 정상에 올라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81p)
여러 시간 여러 장소로부터 와서 뤼크의 손을 거쳐 다시 누군가에게 보내지는 피아노들 속에서, 작가는 운명의 피아노를 만난다. 슈팅글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
“그 자그마한 크기와 세세한 부품의 아름다운 배치를 보자 마음속에서 한 단어가 꿈틀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그럼에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당돌, 나는 이 피아노가 당돌해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데렐라 같은 피아노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 작은 피아노가 어쩐지 좋고, 따라서 내 가족에게 맞는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45p)
“나는 음계를 몇 개 쳐보았다. 그러다 화음 몇 개를 이어가보았고, 마지막으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아르페지오를 몇 개 쳤다. 음들이 울려 퍼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46p)
피아노를 만나고, 서투른 연주를 하고,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교육기관을 찾고 데려다 주면서 유년시절의 피아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일 년에 한번 피아노 선생님의 집에서 열리는 연주회에서 경험했던 공황과 현기증, 그리고 “아무런 의미 없는 곡예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서커스의 동물이 느꼈을 법한 감정”(89p)의 경험을 떠올린다. 우리 아이들의 학원 연주회를 보고 돌아오던 때를 생각나게 한 장면이었다. 지금이라면 작가의 말처럼 그런 터무니없는 행사를 가지고 법석을 떨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피아노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킬리언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에게 음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음악을 끌어낼 수 있는 직관력 있는 교사를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마스터 클래스 참관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경험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 공방을 찾고 뤼크와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며 피아노로 연상될 기억들을 쌓아 간다.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피아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닳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파괴당한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새로 좋은 악기를 들이면 음악의 영역으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이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커다란 덩어리가 발휘하는 특별한 연상의 힘은 그 개별적인 피아노 한 대만 갖고 있는 것이다.”(217P)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피아노를 계약하고 오셨다고 했다. 딸이 둘이나 있는데 피아노는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나무로 된 거냐’ ‘삼익이냐 영창이냐’ 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한*’이었다. 한*? 그 펌프 만드는 회사 그 한*? …… 두 분도 삼익이나 영창을 생각하고 피아노 거리로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점포 앞을 지나는데 피아노 연주 소리가 너무 좋아서 들어간 곳이 그 매장이었고, 직원의 유창한 말솜씨에 넘어가 계약을 하고 오셨다고 한다. ‘역사는 얼마 안됐지만 잘 만든 것 같더라’로 우리의 논쟁은 끝이 났고 며칠 후 다행히 원목으로 된 피아노를 받았다. 나는 공부를 핑계로 하농의 고비를 넘지 못했고, 동생은 그나마 반주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은 갖췄으나, ‘피아노는 모셔두기만 하냐?’ 는 아빠의 핀잔을 듣는 날이 많아지고, 곧 피아노는 거기 원래 그렇게 조용히 있었던 가구가 되어갔다. 아이들 피아노 시작할 때, ‘피아노 가져올까?’ 했더니, 남편은 ‘어디 건데?’ 하고 물었다. ‘한*’ 했더니 코웃음 치는 남편에게 나는 ‘그래도 소리는 좋아’ 했었다.^^
피아노가 공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 피아노 주인의 삶도 함께 온다. 이 소설은 유난히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기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