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닌 단편선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29
이반 부닌 지음, 이상철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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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자체가 러시아어라는 사실만 알아볼 정도로 러시아어에 문맹이다. 아마도 남편이 들여왔을 이 손바닥 보다 작은 책이 러시아어로 된 시집이라는 짐작만 했다. 장식품으로 놓여있던 책의 표지에 우연히 스마트폰 번역기 화면을 갖다 대고서야 И. Бунин이 이반부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집의 제목 Холодная весна』차가운 봄이라고 번역된다. 곧 이 시집의 위치는 몇 안 되는 이반 부닌의 작품들 곁으로 정해졌다. 사실 작품들이라고 말했지만 부닌 단편선아르세니예프의 인생두 권뿐이다. 그 외에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기도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으로 부닌 단편선을 뽑아 읽게 된 나의 사정은 잊었다. 부닌의 명징한 글에 사로잡혔고 복잡한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이 단편들의 과거의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맑고 간결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시리게 아름답고 깨끗한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라는 배경이 주는 정서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다른 부수적이고 복잡한 사건들이 희미해져 사라진 한 줄기의 선명한 느낌일 테다.

 

이 책은 원래 첫 번째에 위치한 소설의 제목 어두운 가로수길로 출간되었던 단편집에서 선별 수록한 책이라고 한다.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부닌 단편집의 주제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하는 화자들의 생각에 달려있고,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글이 될 수 없기에 지나간 사랑보다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하고 싶다.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화자의 사회, 종교,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상황에 좌우되겠지. 그 총합이 작가의 사유일테고.

 

수록되어있는 작품의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이고 상류층이다. 한 작품만이 주인공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 간다. 남자들이 젊은 시절 사랑한 여인들은 대부분 하녀, 농민의 딸, 가난한 집 출신들이다. 그들은 신분의 격차, 아버지,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삶 때문에 그녀들을 떠날 수밖에 없다. 여인들은 남겨진다. 이후 그녀들의 실존적 삶이 불행했음이 당연하지만 화자(혹은 주인공)의 기억만 존재할 뿐이다. 몇 편의 작품에서 해후가 이루어지지만 그녀들의 삶은 발화되지 않기에 남성의 회환만이 남는다. 그 회환은 시적이고 사랑의 기억은 아름답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되돌아보며 그 순간의 선택이 달랐다면 하고 생각한다. 어두운 가로수길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는 춥고 비오는 어느 가을날 지친 여행길에서 들른 주막에서 사랑했던 나데지다를 만난다. 그녀는 이 주막의 여주인이고, 그가 버리고 떠난 농노 신분의 소녀였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아버지가 농노 해방증을 주었다는 말에서 부모의 개입으로 그녀와 헤어져 떠날 수밖에 없던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자신도 불행했다고 용서해달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무덤에서 시신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점이다. 기차역을 향하는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선택했더라면 지금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욕망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한 어느 공작의 후회와 교훈의 발라드는 한 편의 전설이다. 기차가 멈춘 곳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우울함은 그를 바라보는 부인조차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루샤) 차가운 가을의 화자는 여성이다.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화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차가운 가을날 그녀의 약혼자는 전선으로 떠나 한 달 후 전사한다. 그가 떠나기 전 산책길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시()이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고 피난하고 크림의 내전에서 홀로 남아 조카의 어린 딸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불가리아, 세르비아, 체코, 벨기에, 파리, 니스 등을 유랑한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질문한다. ‘대체 내 삶에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오직 그 차가운 가을 저녁만이 있었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처음 사랑했던 그와의 약속을 기억한다. 단편 전체가 시().

 

모래시계를 뒤집어 모래가 밑으로 흐르면 그 속에 파묻힌 것들이 드러나듯,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은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살 희망을 잃게 만든다. 그 때 어떻게 사랑했는가가 기억하는 현재의 마음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이 저버리거나 때론 어쩔 수 없이 빼앗긴 혹은 떠나버린 사랑, 한 순간 불태우고 버린 범죄와 같은 욕망들을 말하는 화자들에게 판결봉을 두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왜 여성들은 실존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자신의 과오조차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들 사회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닌의 소설은 시적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단어, 문장, 그것들이 모여 그리는 풍경 모두 그림이고 시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으며 나의 마음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으로 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반 부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서 더욱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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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4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러시아 특유의 감성 너무 좋습니다 ~!! 전 아르세니예프보다는 부닌 단편집이 더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4-05-04 17:40   좋아요 1 | URL
아!
전에 새파랑님 리뷰를 본 듯도 하네요.
부닌 단편선 좋아요~
아르세니예프도 좋은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5-0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한두개가 아니지만 ㅎㅎ)
어떤 러시아의 느낌을 줄지 궁금해요^^

그레이스 2024-05-05 17:50   좋아요 2 | URL
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ㅠㅠ

서니데이 2024-05-07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어린이날 연휴 잘 보내셨나요.
작은 크기의 시집은 러시아어 원서로 된 책이군요. 러시아어 배우기가 어렵다는데, 원서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5-07 06:4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러시아어로 문학을 읽는 것 저도 넘 부럽네요.
무슨 언어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린이가 없어서 어제는 어버이날을 대체했습니다.
비가 계속 오네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자운영 2024-05-1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번역이나 독해는 독서와 똑같이 편리하고 쉬운 일인 시대입니다.

yamoo 2024-05-14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 단편선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아르셰니에프의 인생을 새롭게 봅니다. 원래 있던 책인데, 그레이스님이 가치를 새롭게 불어넣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05-14 15: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작품 하시느라 바쁘셨나봐요.
감사합니다 ~~

젤소민아 2024-06-06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4-06-06 13: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