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미남형 대통령 존F.케네디(John F. Kennedy)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하는 한편, 베트남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케네디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에 대대적인 물적 인적 지원을 했고, 1961900명 안팎이었던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3년 불과 2년 만에 16,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던 1963년 응오딘지엠 정권이 즈엉반민(Duong Van Minh)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고, 케네디 또한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미국의 대통령 자리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B.존슨이 이어받게 됐다.

(통킹만 사건 당시 작전 지도)

 

대통령 존슨은 전 대통령이던 케네디보다 반공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존슨 또한 미국 관료들이 전적으로 믿었던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를 강력히 신봉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을 때, 도미노 이론에 따른 아시아의 공산화를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1964년 남베트남의 상황은 심각했다. 응오딘지엠 통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남베트남은 군부 내부에서 일으키는 체제전복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민중은 남베트남 정권에 등을 돌렸으며, 1960년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창설된 베트콩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당시 예측했던 대로 사이공 정권은 분파 투쟁에 휘말려 있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심각해지는 위기 상화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964년이 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을 생각하게 됐다. 19642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단행하기에 앞서 이른반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34A라는 일반 암호 아래 북베트남에 맞서는 일련의 비밀활동 계획을 추진할 것을 승인했고, 폴 하킨스 장군(Paul Harkins)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이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노이측으로 하여금 남베트남에 가한 압박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민주화운동가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작전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U-2 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 침입 및 정찰 강행

2. 북베트남 내부 정보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3. 정보수집을 윟나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4. 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5. 철도·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6.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426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이렇게 대표적으로 6가지를 언급했다. 이중 6번째에 있는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은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기 전 진행된다. 이 은밀한 작전은 미국 대통령 존슨이 명령하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책임하여,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 대한 비밀작전을 실행함과 동시에 미국은 이 작전의 일환으로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을 실행했고, 미국 민간항공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를 가장한 미국 CIA 소속기와 조종사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19647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인물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Westmoreland)가 남베트남 주둔 미군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총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의 지휘하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촉발하기 위한 작전을 7월 말에 실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북베트남령의 섬들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47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북위 19도선에서 60마일 떨어진 북베트남 연근해의 섬들이었고, 해안에서 최소한 8마일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구축함 매독스(USS Maddox)호는 해안에서 동남방 100마일 해역에서 통킹만을 향해 베치 되었다.

(USS 매독스호, 미국 구축함인 USS 매독스호는 북베트남 영해에 침투해서 북베트남측과 교전을 벌였다.)

 

그날 남베트남 무장 보트들은 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상륙했던 이들은 집중적인 포격이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사이 상륙정PT를 타고 뭍에 오른 병사들은 후퇴하던 게릴라들을 송두리째 섬멸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1972년에 출간한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저서 최고의 인재들에서 이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64년 이른 여름에 34A 작전활동은 강렬해졌다. 남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북베트남을 후미에서 공격하는 방식을 취한 미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전개되고 있으며 전쟁에 내재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하노이에게 슬그머니 경고하고 있었다. 전복의 시도는 예상되로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시기에 비록 북베트남에 별다른 손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사전에 발표도 없이 라오스 국경지역에 가한 폭격과 해안에 위치한 북베트남의 해군 시설에 대해 남베트남이 초계어뢰정으로 치고 빠지는 습격이었다. 후자는 큰 피해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베트남에서는 보복의 압박이 커져갔다. 초계어뢰정으로 기습하는 일은 하킨스와 맥 번디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의 선원들까지 참여시킨 가운데 계획되고 시작되었다. 맥나마라와 러스크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작전을 조종했다. 그것은 사실상 미국의 작전이었다.”

 

출처 : 최고의 인재들 p.659~660

 

남베트남 툭수부대가 북베트남의 섬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매독스 호가 통킹만으로 진입한지 36시간이 지난 82일 호놀룰루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전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매독스 호가 3척의 북베트남 어뢰정과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괴되고 1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다만 미군 측 부상자는 한명도 없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듀이커에 따르면 1차 교전에서 북베트남측이 발포한 이유는 그 지역 베트남민주공화국 지휘관들이 두(통킹만 영해의 매독스호와 남베트남군의 북베트남측 섬의 상륙을 가리킨다.) 작전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현장에서 미군 전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과 교전을 벌이자 국방부와 국무부의 긴급 조치 관련 지휘부 인사들은 본격적인 베트남전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교전 당시 사진)

 

전문을 받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또 다른 구축함 터너 조이(Turner Joy) 호에게 매독스 호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84일 이른 시각 2척의 미국 군함이 암호명 데 소토(DE SOTO)라는 정보 수집 임무를 띠고 급파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34-A 작전에 동원된 남베트남 전투함들도 북베트남 시설들을 공격했었다. 196484일 존슨 행정부는 존슨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두 구축함은 북베트남 연안으로부터 22km 이내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날 주위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하나도 없었다. 북베트남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미국의 구축함들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했다. 매덕스호의 존 헤릭(John J. Herrick) 대령이 국방부에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은 박태균 저자의 책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덕스호에 가까이 있는 북베트남 함정으로부터 어뢰가 발사된 것 같다. 그러나 소리만 있었지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매덕스호의 어뢰 관련 보고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매덕스호 자체의 엔진 소리를 어뢰 공격으로 잘못 탐지한 것 같다.”

 

출처 :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p.164

 

이 마지막 전문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고,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게 된 존슨 대통령은 당일 저녁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존슨이 발표한 대국민 선언문이 있기가 무섭게 다음 날인 8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이것은 존슨 대통령의 북폭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통킹만에 대한 보복공격으로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한 미국은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한 미군 조종사 1명을 포로로 붙잡았고, 이 포로가 바로 베트남 전쟁 최초로 북베트남측에게 붙잡힌 미군포로였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보복성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존슨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시간은 이미 폭격기들이 발진한 다음이었다. “오늘 통킹 만의 공허상에서 미국 군함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적대 행위가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 군대에게 이에 상응하는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첫번째 북폭에서 64대의 해군 전폭기들이 17도선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빈(Vinh)의 항구 시설과 유류 저장 시설들을 폭파했다. 국방부는 북베트남 유류 공급 시설의 1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10분 동안 올린 전과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게 된 것이다.”

출처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03~206

(통킹만 사건을 보도한 미국의 언론)

 

통킹만 사건에 대한 보복 폭격이 있고나서 2일 뒤인 196487일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통킹만 결의안(Gulf of Tonkin Resolution)을 의회에 내놓았고, 미국 하원은 414 0으로 지지하였으며, 상원은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이 북베트남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고,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통킹만 사건의 진실은 19716월 뉴욕타임즈가 실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개입 확대과정 30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의해 폭로됐다. 펜타곤에서 일했던 대니얼 엘즈버그(Daniel Ellsberg)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는 1964년 미국이 개입한 통킹만 사건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었고, 그 내용은 통킹만 사건이 미국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즉 두 번째 공격은 미국의 조작이라는 사실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측도 통킹만 사건에 대한 발표를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전을 지휘하는 로버트 맥나마라)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의 괴뢰들은 항공기와 함정으로 베트남공화국의 영공, 영해를 빈번히 침범하면서 스파이 활동과 파괴활동을 위한 많은 돌격대를 잠입시키고 있다. 730,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정권의 군함은 북베트남 영내의 두 개의 섬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81, 라오스 방면에서 침범한 T-28형기 4대가 게안 성의 남칸 국경감시소와 눈데 읍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남칸 감시소는 82일에도 라오스 방면에서 침입한 7대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 731일부터 82일에 걸쳐, 미국 해군 구축함이 베트남공화국의 연안에 접근, 초계중인 베트남공화국 해군 초계정에 대해 공화국의 영해상에서 발포했다. 초계정은 이에 응전, 이를 공화국 영해에서 추방했다. 83일 오후 11, 타이콘테로가 기동함대의 엄호하에 군함 4척이 공화국 영해에 침입, 구앙빈 성의 론, 데오 강 양 지구에 포격을 가했다. 85일 오후 0시 반부터 5시까지, 통킹만에 정박한 콘스털레이션, 타이콘테로가 두 항공모함에 발진한 스카이레이더기는 공화국 영내 각지를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고 폭격을 가했다. 공화국 인민해방군과 인민은 이들을 반격, 그중 3대를 격추하고 3대에 손해를 입혔다. 조종사 장교 1명을 사로잡았다.”

 

통킹만 사건은 1971년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문서 내용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미국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다. 사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북베트남 영해에 들어가 그들의 공격을 유발시킨 거도 그렇고, 남베트남 특수부대를 북베트남의 섬들에 상륙시켜 교전을 벌인 것도 미국의 작전이었다. 이들은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치밀한 군사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북베트남이 먼저 시작했다는 반공주의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수많은 문건과 펜타곤 페이퍼가 증명하듯이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가속화했다. 다만 그 수법이 치밀한 작전과 계획에 의한 것이기에 더 교활했을 뿐이다.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인 개입 및 침략을 개시한 미국은 결국 본인들이 일으킨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며, 미국건국이래 최초의 패배를 맞보게 된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 2002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례출판, 2015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최고의 인재들, 데이비드 핼버스탬, 글항아리, 2014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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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던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무엇보다 호치민(Ho Chi Minh)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이 이끌었던 농민군대 베트민(Viet Minh)이 강대국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를 섬멸하고 식민지해방전쟁을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 편에 서서 그들의 독립투쟁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던 존재가 있었다이 나라는 소위 자유의 나라(Land of Freedom)’이라고 불리는 미국(United States)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46년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군함으로 포격하며 민간인 6,000명을 학살하고 시작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이 자체적으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면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졌다특히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을 기점으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이른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Bao Dai) 황제를 위해 1,000만 달러나 지원했었다심지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네이팜 폭탄과탱크항공기대포박격포자동소총, PT 보트 등의 군수물자들도 프랑스에게 지원해줬다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1950년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연단위로 증가했고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마무리로 접어들던 1954년엔 프랑스의 전쟁비용 80% 가까이를 미국이 대신 부담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고 있는 중이었고,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되면서 패배는 사실상 기정사실이 되었다디엔비엔푸 요새가 포위되자 프랑스는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프랑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아이젠하워는 프랑스군의 패배를 막기 위해 참모들과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이들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Operation Vulture)이라 하여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를 점진적으로 포위해 나가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대규모 공습을 실행하고자 했다.

(독수리 작전,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군으로부터 포위당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동반한 작전을 구상했었다.)

 

독수리 작전을 입안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베트민들을 대상으로 원자폭탄(Atomic Bomb) 2~3발 정도를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했었다실제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1954년 4월 30일 원자폭탄 사용 문제를 부통령 닉슨(이후에 대통령이 된 그 사람 맞다.)과 NSC 사무국장 로버트 커틀러와 함께 논의했었다비슷한 시기 조르주 비도 외무장관을 포함한 프랑스 관리들은 덜레스가 일주일 전에 원자폭탄 두 발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으며당시 미군 공군참모총장인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기도 했다.

(펜타곤 페이퍼,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미국의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말짱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조심해야겠어.’”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는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었다.)

 

물론 디엔비엔푸 전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프랑스 군대에게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지원한 것을 제외한다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없었다그러나 분명한건 미국이 침략자 프랑스를 돕기위해 핵공격까지 감안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었다는 사실이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의 공저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신무기 사용을 포기한 것은 디엔비엔푸 지역에서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자칫 프랑스군까지 피해를 볼 우려가 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함락된 디엔비엔푸 요새,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끝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는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것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국가가 지배자를 물리친 새로운 역사였다.)

 

이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측에게 제안했던 핵공격 얘기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그러나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제안했다는 얘기는 프랑스 장군 폴 엘리외무장관 비도외무차관 장 쇼벨이 남긴 일기와 회고록에 언급돼 있으며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정치학자 맥조디 번디(McGeorge Bundy)도 비도의 주장대로 덜레스가 비도에게 원자탄 사용 문제를 제기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당시 덜레스가 나토는 핵무기를 재래식 무기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따라서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미국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핵무기 사용까지 깊이 고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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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린 제주4.3평화공원.

오늘 저는 제작년 초에 가족과 들렸던 4.3 평화공원을 들렸습니다. 처음 들렸을 때도 매우 슬펐지만, 이번에 다시 들리니 억울하게 학살당한 피해자분들을 생각하게 되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72년전에 좌익소탕이라는 명분아래 저질러진 국가 폭력은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곳을 두번째 들리게 된 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독립이 되었죠. 독립된 한국에선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창설됩니다. 여운형이 창설한 이 조직들은 해방 이후 치안과 행정을 담당해나가며 새조국건설을 위해 전진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했고, 제주도에도 미군이 상륙했습니다. 제주에 상륙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했고,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경찰들과 관리들을 재등용합니다. 여기서 부터 제주도민들은 점령군의 모습을 보인 미군과 그의 앞잡이 친일세력들을 싫어하게 됩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3.1절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 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하다가 경찰에 발포한 총에 몇명이 맞아 죽는 일이 생기죠. 거기다 그 시기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면서 미소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였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죠.

이런 일이 있자 1948년 제주도에선 남로당 김달삼을 중심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친일파 청산을 내걸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 날이 바로 1948년 4월 3일이었습니다. 이 봉기에는 당연히 남로당 뿐만 아니라, 친일파와 미군정에 분노한 일반민중들도 참가합니다. 이런 상황이 있자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과 우익청년단들을 대거 투입하죠.

이렇게 해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시 미군정 최고사령관 하지가 임명한 브라운 대령은 좌익을 뿌리뽑는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지역에 레드라인을 설정해놓고, 그 범위에 있는 생명체는 싹다 죽이도록 허용합니다. 이에따라 이승만이 파견한 서북청년단과 경찰은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고, 특히 1948년과 1949년 사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일어난 학살은 추악하고도 잔혹했습니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은 최소 3만 명을 넘겼고,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그리고 유아도 포함되었습니다. 임산부 배안에 있던 애와 1,2살 짜리 아이들도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죠. 이런 광란의 학살극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경찰총장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의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과거 좌익 경력이 있던 인물들을 예비검거하며 학살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주도에서의 학살은 1954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종료가 됩니다.

제주도 학살은 엄청난 고통을 남겼습니다. 우선 이 학살로 제주도 인구 10%가 죽었습니다. 코리안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이 반공주의 국가가 되며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런 침묵이 깨진건 87년 민주화가 되면서 부터였고,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와서야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됐죠. 이처럼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된 반공주의는 산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폭력을 저지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제주4.3사건에서의 학살은 과거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와 베트남이 그랬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내전이 일어납니다. 이 내전에서 영국이 빠지자 미국이 개입했죠. 개입한 미군은 소수의 고문단과 최신식 무기 지원을 통해 좌익진영의 그리스 게릴라들을 학살했습니다. 미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지원하에 활동하는 우파와 미군고문단은 소위 자신들이 적대지역으로 설정한 곳에 네이팜폭탄을 투하하고, 이들의 씨를 말렸으며 그 지역마을들을 불태웠죠. 미국의 이런 전략은 그리스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주4.3은 그리스 내전의 연장선상일수도 있을 겁니다.

그로부터 몇년 뒤 베트남 문제 개입한 미군은 똑같은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들은 소위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지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온갖 최신식 무기와 장비를 동원해서 그 지역을 폭격 및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초토화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베트남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죠.

다시한번 제주4.3평화공원을 들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들릴때 항상 노는것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가 노는 곳에서 과거에 어떠한 국가폭력이 있었는지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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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문제에 대한 무지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난징조약의 결과로 영국에 조차되었다. 아편전쟁이란 영국이란 마약상이 인도에서 생산해낸 약을 팔다가 국민의 건강을 우려한 중국이 이를 막으면서 수가 틀리자 전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아편전쟁 자체가 잘못된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후 맺어진 난징조약은 중국이 언제라도 무시해도 사실 비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난징조약에서 영국은 분명히 홍콩 반환을 약속했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넘겨 받은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인도 같은 경우는 포르투갈에 비슷하게 빌려준 고아를 무력으로 탈환했는데, 중국은 조약을 지키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니 중국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인내력을 보였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에 경도된 이런 혐중세력은 중국이 마치 자유로운 홍콩을 강제 점령한 것처럼 알고 있다.

이렇게 이들 혐중세력은 마치 홍콩이 독립국이었다가 (혹은 처음부터 영국령이었다가) 1997년 중국의 제국주의적 압박때문에 중국에 넘어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다수다. 또한 영국령 홍콩은 그런 혐중세력이 생각하는대로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었으며 영국 지배하에서 여러번 홍콩에서 폭동이 날 정도로 살기 좋지 않았다. 홍콩이 그나마 민주개혁을 하게 된 것은 영국인이 떠나갈 때쯤 자신들을 대신해 홍콩의 주권을 가진 중국에게 ˝엿먹으라˝는 심정으로 자기들은 실시하지도 않았던 민주제도를 홍콩에 대거 도입하고 바로 떠난 것이다. 즉 그들은 후반부에 홍콩을 중국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던 영국이 중국을 엿먹이기 위해 서구식 민주제도를 대거 도입하고 떠난 것을 가지고, 마치 영국이 통치했을 때는 민주주의가 보장되었던 나라인 것 처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즉 미국의 네오콘식 사고방식 우월하다는 반공주의적 환상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홍콩이 경제 발달을 하게 된 계기는 영국지배가 아니라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홍콩을 통해 중국투자가 활성화되면서부터 이다. 그때부터 홍콩에 중국으로 가려는 자금이 들어오면서 홍콩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홍콩이 부유하게 된 것은 영국지배 탓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 탓이며, 2000년대 들어 상대적으로 빛을 잃은 것도 중국의 경제 발전 탓이다. 중국 자체의 개혁개방도가 심화됨에 따라서 굳이 해외자금은 굳이 홍콩으로 들어올 필요 없고, 중국 본토로 직접 가면 되기 때문이다.

홍콩경찰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위대 진압, 중국의 비민주적인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인권적인 차원에서 비판을 받아야하겠지만, 한국에서 이런 비판을 하는 자들은 박근혜 정부시절 경찰의 폭력으로 백남기 노인이 사망한 사건에서 물타기를 하거나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강하게 존치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홍콩문제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격렬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홍콩 보안법 보다 더 오랜시간(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오고, 죄없는 사람을 좌파, 빨갱이, 용공 민주화 이후에는 종북 딱지를 붙혀 사상적 탄압을 해온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자유‘, ‘민주‘, ‘안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합리화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홍콩 보안법에는 반대하면서 국가보안법에는 찬성하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홍콩 시위가 극우반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점에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 특히나 서방과의 커낵션이 너무나도 뚜렸한 조슈아 웡을 마치 홍콩 시위의 전부인냥 내세우고 있다. 또한 2019년 12월 우크라이나 아조프 부대 출신들로 추정되는 네오나치들이 홍콩에 가서 시위를 지원했지만, 이것이 홍콩 시위를 대표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 이들이 반중을 내세우며 홍콩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한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홍콩 시위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고 보는 것은 삼가야 겠지만 최소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홍콩 시위 과정에서 중국공안이 시위대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않지만, 2020년 미국에서 일어난 조지플로이드 사건에 대해선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비하하고 폄하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억울하게 죽은 조지 플로이드가 미국 경찰에게 죽은 것은 ˝깜둥이가 잘못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중이다.

종합하면 혐중세력은 홍콩문제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포털이나 커뮤니티에 달린 몇몇 선동글을 읽고 중국 혐오에 열을 올리고 있고 최소한 중국측 입장이 어떤것인지는 1%조차 생각하지 않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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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인상 -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총서 8
백남운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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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 반공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확장했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 힘입어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소련의 위협을 더 많이 강조했고, 그런 역사적 내지는 정치적 관점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사례보다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사례를 세계사 시간에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서방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그러한 전제들은 과연 정확한 판단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과 서방 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 중심이 판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고 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사실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이라는 책 이전에도 소련 방문기를 다룬 책으로는 월북한 문학작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도 있지만, 지도부를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처럼 분명히 개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집필된 이들 방문기와는 그 성격과 간행 취지가 다르다. 쏘련인상은 북한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북한 내각의 최초의 공식 소련 방문 일정과 성과를 정부 각료의 입장에서 정리하였기에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문 보고서다. 그리고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가 처음 방문하여 썼던 쏘련기행하고도 시대적인 차이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태준 작가가 소련을 처음 방문할 당시는 냉전이 점차 시작하려던 시기였고,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이었던 반면에, 백남운의 쏘련인상은 냉전초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노골화 되고, 한반도 분단 정부가 남북한에 수립된 상태였다.

 

여기서 국제적인 동향을 얘기하자면, 백남운이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홍명희와 더불어 북한 정치 지도부로써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개입과 폭력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던 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19473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시점으로 그리스 내전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노골화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과 같은 자주통일을 위한 시도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더 나아가 제주4.3항쟁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도 잔혹한 학살극이 미국의 지원세력들에 의해 일어났다. 또한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물자를 장제스 세력에게 지원하여 반공의 보루를 강화했다.

 

이처럼 백남운이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 초의 미국은 제국주의적 개입과 간섭을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수법은 정말로 간악하고 사악했다. 그들은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인권, 민주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개입을 합리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과 학살도 자연스럽게 합리화됐다. 쏘련인상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악한지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자 내지는 역사학자답게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매우 잘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왜 거짓과 위선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국가의 소위 원조정책은 미제의 마샬안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샬식 원조의 특징은 상대국가의 식민지화와 미제의 반공파쇼제 확립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달러를 구세주로 광신하는 채귀인 셈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05

 

쏘베트정부의 평화정책은 미영 반동도당들의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전쟁준비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 전시기에 비하여 군사비 지출을 현저하게 증가시켰습니다. 미제예산에 있어서 1948~1949년도 군사비 지출은 1939~1939년도에 비하여 거의 15배로 증가되었습니다. 1949~1950년도에는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교서에 지적된 바와 같이 군사비 지출은 예산총액의 38%에 달하며,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다른 항목의 지출을 총계하면 1949~1950년도의 미국군사비는 국가예산의 반액 이상에 달하는 것입니다. 1949년도의 영국군사비는 1939년도에 비하여 3배로 증가되였습니다. 이상의 숫자들은 북미합중국과 영국의 현재의 지도자들의 침략적 정책을 여실히 증시하는 것입니다.”

 

출처 : 쏘련인상 p.149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완전히 처단하기도 전에 그 처단을 약속한 미제가 오늘은 전쟁방화를 일삼고 있다. 세계평화 옹호의 세력이 나날이 장성되여 가는 오늘에 있어서 반쏘전쟁뿔럭인 북대서양동맹(NATO)을 체결한 미제는 소위 세계제패의 야망을 방공선결성에 빙자하여 엄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파쇼 두목이였던 히틀러 강도배의 수법을 되푸리라는 신파쇼 두목인 미제의 전략태세인 것이다. 미제의 제2 ‘방공선즉 동양침략선은 그 거점인 하와이로부터 인도양과 호주 비율빈(필리핀) 등을 거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중거점과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조선 동해안을 거쳐 화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지대를 행동의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쏘련인상 p.210

 

따라서 저자 백남운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세우는 개념은 일종에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행위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소위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방어를 위해 개입했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에 반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계는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제국주의적으로 어떠한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나 서방에선 마치 소련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실제로 소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휘두른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정도였으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동유럽을 중심으로만 사회주의 라인을 형성했을 뿐이다. 즉 트루먼 독트린처럼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구실로 타국의 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소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되는 학습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반소 반북주의가 퍼져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 한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했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쏘련인상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보고 느낀 백남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그 회담이 조소(북한과 소련)관계에 있어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고 얘기하며, 동등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무조건적으로 친미만 외치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하고는 분명히 다르며 매우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저자 백남운은 회담에서 자신의 받은 인상을 요약했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담은 오후 8시로부터 920분까지 계속되엇던 것이다. 나는 이 회담 중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조쏘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구체적 계획성이 일층 강화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결코 외교적으로 빠게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적인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쏘련정부의 최고지도자의 성의있는 태도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 대원수의 차관에 관하여 직접 말한 민주적 원조의 원칙이 타민족의 자주 독립권을 존중하고 보장하여 주는 쏘련정부의 대외정책이 기본이 되는 것을 절실히 나는 체감한 바 있었다.

 

둘째로 위대한 쓰딸린의 말하는 모습은 토막 토막 그치는데 그것이 붉은 실로 짼 구실처럼 원칙으로 일관된 것이다. 인류의 신사회를 창조하는 최고의 기사인 만큼 세계 노동인민의 태양으로서 숭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니와 사물에 정통하는 태양이 그 두뇌 속에 서리고 있는 듯이 세계 정치사정을 꿰뚫으고 있는 천재적 정치가인 인상을 받게 되였다. 회담하는 중에 두 번이나 쓰딸린이 입을 빙그레 하고 눈우슴을 보냈다. 조선사정에도 정통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미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인 듯하였다. 쓰딸린의 일언일소는 실로 세계 민주정치의 역사적 발전방향의 지표인 인상을 직각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협조에 대한 기본적 원칙으로서 해명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대표단의 방쏘 목적이 달성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 조국의 통일발전을 위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한 바 있었다.

 

세째로 회담하는 분위기가 마치 친숙한 동지들이 공사를 상의할 때 정색하는 정도로 그렇게 막이 없는 분위기이였다. 그것은 쏘련정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일호의 야심이 없는 까닭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 대표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까닭이였다. 그러므로 조쏘 양국간의 영구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독립을 보장하는 유일의 정치노선이라는 원칙이 이 회담으로써 다시금 재확인될 뿐 아니라 전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쏘련인상 p.86~87

 

그 외에도 쏘련인상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처럼 레닌박물관을 포함한 소련의 여러 박물관들을 포함한 관광지들을 본 것과 학교 및 공장시설을 방문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백남운이 보게 된 소련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리고 인민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는 사회였다. 쏘련인상에서 가장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소련의 농업관련 분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소련의 농업분야는 발전적이지 못하고 풍족하지 못하다는 편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 백남운이 접하게 된 소련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후재건을 마친 소련의 농업생산은 예전에 공업화를 추진하던 시기와 전쟁 이전의 시기보다도 훨씬 더 풍족한 상황이었다. 즉 전후재건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소련의 농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꼴호즈 조직의 창조자인 쓰딸린의 창안에 의하여 1927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의 방침이 결정되였던 것이며 1929년부터는 꼴호즈 조직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전인 1940년도의 쏘련농업은 벌써 7천여 개소의 농기지정소와 53만대의 뜨락또르와 182천대의 꼼바인 228천대의 화물자동차가 작업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계화의 수준이 미국을 훨씬 능가하였던 것이다.

 

1940년도에 쏘련 꼴호즈에서는 쏘련 토지경작의 4분지 3과 모든 파종면적의 절반 이상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고 곡물면적의 절반을 꼼바인으로 추수하였다. 1940년도에 미국에서는 대지주의 자본주의적 농업체제로서 토지경작의 절반과 파종면적의 3분지 1만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업기계의 능률에 있어서 미국 뜨락또르의 1마력이 5.8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한다면 쏘련 뜨락또르의 1마력은 32.6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노동의 기계화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시킨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1~112

 

쏘베트정부는 대독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승리한 이후 새로운 전후 5개년계획에 있어서 꼴호즈와 쏘호즈의 생산조직을 재건할 뿐 아니라 전전의 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이 전후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동안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1940년도에 대비하여 1950년도의 말기에는 토지경작의 기계화가 70%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며 기계화된 춘기 및 추기 파종은 59%로부터 70%로 곡물에 대한 꼼바인의 추수는 43%로부터 50%로 휴간지의 재경과 전지의 추경은 71%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어 있다. 1949년도의 농업부문에서는 15만대의 뜨락또르와 29천대의 꼼바인과 160만대 이상의 견인기계 기타 농업기계를 받았다. 농기 농구의 거대한 기술적 발전은 그 품질의 개진과 새로운 구조형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도의 농촌경제는 전전인 1940년도보다도 4배 이상의 뜨락또르 기타 농기를 받았던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2

 

이처럼 백남운과 북한 정치인들이 비춰진 소련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실현된 사회였다.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으며, 파시즘적임 침략을 무찌르고 급속도로 전후재건에 성공한 소련이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정치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비추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북한 정치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였고, 실질적인 목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 북한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아직도 실행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저자 백남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남운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개척자로서, 1930년대 초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역사상을 창도하여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조선에 뿌리심어 놓은 책이었다. 그 또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신민당에서 활동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협력했으며 1947년 그가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여운형 암살과 좌우합작운동 실패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그 또한 월북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주도한 남북협상에도 참가했고,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초기 북한의 교육을 담당했다. 1961년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그리고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를 관장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역임했고, 1979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처럼 백남운은 북한 정권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서방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마르스크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고, 북한 정권 초기 인사들의 소련 방문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문학가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더불어 같이 읽어야할 책이다. 그 책과 같이 읽으면 반소주의와 반북주의의 편협한 제국주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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