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던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는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호치민(Ho Chi Minh)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이 이끌었던 농민군대 베트민(Viet Minh)이 강대국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를 섬멸하고 식민지해방전쟁을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 편에 서서 그들의 독립투쟁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던 존재가 있었다. 이 나라는 소위 ‘자유의 나라(Land of Freedom)’이라고 불리는 미국(United States)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46년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군함으로 포격하며 민간인 6,000명을 학살하고 시작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이 자체적으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면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졌다. 특히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을 기점으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이른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Bao Dai) 황제를 위해 1,000만 달러나 지원했었다. 심지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네이팜 폭탄과, 탱크, 항공기, 대포, 박격포, 자동소총, PT 보트 등의 군수물자들도 프랑스에게 지원해줬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1950년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연단위로 증가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마무리로 접어들던 1954년엔 프랑스의 전쟁비용 80% 가까이를 미국이 대신 부담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고 있는 중이었고,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되면서 패배는 사실상 기정사실이 되었다. 디엔비엔푸 요새가 포위되자 프랑스는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아이젠하워는 프랑스군의 패배를 막기 위해 참모들과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이들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Operation Vulture)이라 하여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를 점진적으로 포위해 나가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대규모 공습”을 실행하고자 했다.

(독수리 작전,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군으로부터 포위당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동반한 작전을 구상했었다.)
독수리 작전을 입안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베트민들을 대상으로 원자폭탄(Atomic Bomb) 2~3발 정도를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했었다. 실제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1954년 4월 30일 원자폭탄 사용 문제를 부통령 닉슨(이후에 대통령이 된 그 사람 맞다.)과 NSC 사무국장 로버트 커틀러와 함께 논의했었다. 비슷한 시기 조르주 비도 외무장관을 포함한 프랑스 관리들은 덜레스가 일주일 전에 원자폭탄 두 발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으며, 당시 미군 공군참모총장인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기도 했다.

(펜타곤 페이퍼,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미국의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말짱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는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었다.)
물론 디엔비엔푸 전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 프랑스 군대에게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지원한 것을 제외한다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건 미국이 침략자 프랑스를 돕기위해 핵공격까지 감안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었다는 사실이다.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의 공저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신무기 사용을 포기한 것은 디엔비엔푸 지역에서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자칫 프랑스군까지 피해를 볼 우려가 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함락된 디엔비엔푸 요새,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끝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는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것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국가가 지배자를 물리친 새로운 역사였다.)
이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측에게 제안했던 핵공격 얘기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제안했다는 얘기는 프랑스 장군 폴 엘리, 외무장관 비도, 외무차관 장 쇼벨이 남긴 일기와 회고록에 언급돼 있으며, 존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정치학자 맥조디 번디(McGeorge Bundy)도 비도의 주장대로 덜레스가 비도에게 원자탄 사용 문제를 제기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당시 덜레스가 나토는 핵무기를 재래식 무기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따라서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핵무기 사용까지 깊이 고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