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전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8년만에 개정판을 낸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분단을 추구했고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아래에 있는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자신의 환영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남북한 정치지도자 중에서 나온 최초의 분단정권수립론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비록 탁치문제로 좌우가 분열되고소공위가 성과없이 결렬 상태에 놓였으나 아직 누구도 분단정권을 세우자고 나서지는 못한 상황이었다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소공위가 장기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일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어떤 이유에서도 분단정권의 수립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다이런 시점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 주장은 정치인들과 국민에게는 충격과 분노’ 그 이상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이승만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미 군정 측에서 간헐적으로 단정관련 발언이 제기되었다다음은 4월 7일 미국 발신으로 국내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미국과 미 군정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뜻을 전달받고 정읍발언을 했을지 모른다.

 

미점령당국은 남조선만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다조선의 미 군정당국은 남조선 정부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고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이승만 박사는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는데 미측이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제의한 중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①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② 미군의 복원계획으로 조선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그 수가 희소하여 지는 것.”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측근은 정읍발언’ 이전에 몇 차례 단독정부 수립론을 언급했다이승만은 5월 10일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자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 (주석 28)고 발언하였다또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로비스트인 굿펠로는 5월 24일 귀국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반부터 미·소 협력의 불가를 내세워서 단정노선북진 통일노선을 측근들에게 공언했다. 5월초에는 미·소공위가 휴회되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 만에 공개적으로 단정 수립을 주장했다미 군정 내부에서는 4월 초에 단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미 군정의 정치 고문 겸 이승만의 로비스트였던 굿펠로는 5월 말에 남한을 떠나면서 단정을 주장했다이승만굿펠로우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단정을 주장했고미 군정은 공식적으로 단정론을 부정했다.

 

이승만의 일련의 발언은 미국(군정)의 의도를 어느 정도 꿰고서 한 것으로 풀이된다굿펠로를 통해 하지의 의중을 읽은 것이었다하지만 이즈음만 해도 미국의 한반도 기본 정책은 소련을 적대시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의 수립 쪽이었던 것 같다러치 군정장관은 6월 11일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만일 이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하지는 1946년 6월초 서울에 온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를 만나 이승만이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끊임없는 그의 반소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될 어떠한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12월 5이승만은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반공주의가 트루먼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셜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장개석을 만났고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이승만 평전 p.18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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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3국의 상황이 그려진 만평


1853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 했던 일본은 서방으로부터 굴욕을 당했던 시점으로부터 50년 뒤인 1904년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됐다그 전쟁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과의 전쟁이었고그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었다지난번 청일전쟁 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 대가로 삼국간섭을 받았다특히나 1895년 민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1898년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청일전쟁의 결과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대만과 팽호제도를 영유하게 됐다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불과 10년 만에 최소 2배 이상의 육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전함의 숫자도 늘었다. 1896년부터는 103척의 함정을 건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고종황제,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아관파천하여 러시아의 조선 영향권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1897년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러시아 제국은 조선으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고조선에 군사·재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했을 때도 계속됐다만주에서도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남만지선의 부설권을 따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이른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동청철도와 남만지선도가 많이 파괴되었는데러시아 제국은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에 출병하여 아예 만주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영일동맹을 상징하는 포스터)

 

러시아 제국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다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껴 1902년 1월 30일 수도 런던에서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이 영일동맹은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명문화하고일본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수준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인정했다즉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영일동맹 이후 이에 압력을 받은 러시아는 1902년 4월 단계적인 만주 철군을 약속했다그러나 일부만 철수하는 데 그쳤다.

 

1903년 7월 일본의 제의로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권을 가르려는 러일교섭이 시작됐다그러나 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이 맞물려서 합의에는 실패했다양국협상이 결국 결렬되면서 전운의 기운이 돌게 됐다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승리의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따라서 1903년 말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양국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돌자 러시아는 자국 내부에 있는 혁명의 기운을 전쟁으로 끄고자했다.

(러일전쟁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904년 2월 일본의 함대가 러시아의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일어났다전쟁 전에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패배하고 결국 러시아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승리했지만그것은 쇠망하던 국가에 대한 승리에 불과하고 감히 서구강국에 대항하여까지 이길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개전 초부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붙였다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온 일본군을 맹비난했다일본에 대한 맹비난을 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전쟁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203 고지 관련 영화, 대략 1만 명이 전사했던 이 고지쟁탈전은 이후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04년 5월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요양·사하·봉천 등의 전장에서 대병력의 참호전을 치렀다이 과정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급증했다봉천에서만 러시아군 10만 명과 일본군 7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병사들은 땅에 바짝 엎드려서 전진해야 하고막대한 화력이 쏟아 부어지는 가운데 장시간 전투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04년 8월부터 1905년 1월까지 전개된 여순 공방전 중 일보인 203고지 쟁탈전의 경우 이곳에서만 최소 1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즉 203고지 전체가 시체로 산이 형성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돌격전술에 의존했던 것도 있었다어쨌든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157일 간의 포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발틱함대)


(대마도에서 일본 군함에게 격침당하는 발틱함대)

 

사실 육지에서의 전투는 것만 보기엔 일본이 이긴 것 같았지만일본은 지쳐가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전이었다러시아 제국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러일전쟁에 투입시켰다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는 말 그대로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 중간에 있는 발트해에 있었다. 19세기 당시 이집트에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해로로 더 가까이 연결되었다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따라서 러시아 발틱 함대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으로 향했고, 1905년 5월 27일 대마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함대에게 격파 당했다이로써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발틱함대 이동경로, 발틱 함대는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에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실상부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거듭났다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치러야할 일본의 경제적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미국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의 강화회담을 시작했고, 9월 5일에는 강화조약에 조인했다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여순과 대련을 이양 받았으며만주철도와 그 부속지의 양도 및 수비 병력 주둔권도 승인받았다또한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의 절반도 얻었다아무튼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할린, 러시아 령이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뒤 다시 러시아(소련)이 접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발포를 명령했고, 그 결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앞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반면에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경우 체면적인 부분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국가적으로도 위태로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기간에 이른바 러시아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1905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도 한몫했었다물론 이 혁명은 니콜라이 2세가 군대의 발포를 명령하면서 대학살극으로 끝을 맺었다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쇠약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고자 했는데조선의 식민지화가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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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11-18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따라 제 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는것 같습니다. 다들 항상 감사합니다.^-^
 

항전 이래 전국의 인민들에게는 희망찬 기상이 팽배해갔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제는 출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걱정에 차 있던 표정을 일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재차 갑자기 높아진 타협적 분위기와 반공에 대한 소문은 전국의 인민을 다시 의혹 속에 잠기게 하였다. 특히 문화인들과 청년학생들은 민감하여 이 점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화가 출판되는 이 시점에서 중국 정치 및 중국 문화의 동향문제를 한번 이야기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 생각한다. 문화문제에 있어서 나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를 한번 연구해보긴 했으나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다.

 

다행히 연안에 있는 많은 동지들이 이미 이에 관한 상세한 논문들을 많이 썼으므로 나의 변변치 못한 이 글은 단지 개막을 알리는 북소리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다. 전국의 선진적 문화일꾼들은 우리의 것을 모두 나쁜 것이라고만 하지 말고 1000가지 중에 1가지는 쓸모가 있는 것도 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해 함께 토론하여 정확한 결론을 얻어냄으로써 그것을 우리 민족이 요구하는 데로 적용시켰으면 한다. 과학적 태도란 실사구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자기는 옳다고 하여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하기 좋아하는그러한 망녕된 태도로써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재난은 지금 극도에 달하였다. 오직 과학적 태도와 책임적인 정신만이 우리 민족을 해방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결국 누가 그 진리를 발견하였는가 하는 것은 주관적인 과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천에 의해서 결정된다. 오직 1100만 인민의 혁명적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중국문화를 출판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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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일본의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과 2년 뒤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게릴라전과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전술로 인한 해전에서의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해 결국 패배했다비록 일본의 군대가 명나라 본토까지는 진격하지 못했지만조선반도 내에서 명나라군과 전투를 치렀고해전에서도 명나라 해군과 맞붙었었다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그로부터 대략 300년 뒤인 1894년 일본과 중국은 다시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조선반도를 놓고 일어났다그러나 300년 전과는 달리 전쟁에서 승리한 주체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메이지 천황,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조선에게 강제로 체결하게 했던 일본은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조선을 정복해야한다는 이론인 정한론이 대두되던 187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는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족들의 반란이 거세졌다. 1874년에는 사가의 난, 1876년에는 신푸렌의 난과 하가의 난이 일어났다그로부터 1년 뒤인 1877년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다세이난 전쟁은 무력으로 진압되며 사족층의 무력 반란도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꿈틀거리던 자유민권운동은 1870년대 중반이 되면서 거세졌다. 1874년에 입지사가 결성되었고, 1875년에는 애국사가 결성됐다자유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정부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면서 입헌체제의 수립을 요구했다이것은 서구문명의 도입과 함께 들어온 천부인권론이나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최초의 일본 자유민권운동 전국 조직인 애국사를 거쳐 1880년 국회기성동맹이 결성되면서 자유민권운동은 절정기를 맞이했다여기서 정당 결성의 움직임이 일어나 1881년에는 자유당, 1882년에는 입헌개징당이 결성되었다자유민권운동에 대한 메이지 정부는 대응은 양면적이었는데, 1881년 국회 개설 조칙에서 10년 안에 헌법 제정과 국회설치를 약속하기도 했지만자유민권운동 그 자체에 대해서는 탄압책을 펼쳤다그 결과 1884년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제국의 헌법을 만든 그는 일본에선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섰던 인물로 당연히 한국에선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했던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한다.)

 

1881년 메이지 정부는 입헌제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당시 최고 실력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초안을 준비하기 위해 1882년 3월 유럽 헌법 조사단을 이끌고 18개월에 걸쳐 유럽 주요 나라를 방문했다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의 헌법 학자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 헌법을 채택했고, 1886년 초안 작성을 시작했으며, 3년 뒤인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 즉 메이지 헌법이 천황에 의해 공포되었다헌법의 제정에 따라 1890년 7월에는 첫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아무튼 이로써 일본은 근대 천황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별기군, 특별한 기술을 배우는 군대란 뜻의 신식 군인으로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와 별개로 일본은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하고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1882년 이웃국가 조선에서 친일본세력의 배제를 의미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수도 서울은 청국군대에게 점령당했는데일본은 재빨리 조선과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맺었다그로부터 2년뒤인 1884년 이에 대해 친일본세력은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켜 반격하려 했다갑신정변 당시 일본 정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친일본세력을 도우려 했지만 아직 청국의 군사력을 몰아낼 수 없다는 확신에 따라 군사개입은 하지 못했고이에 따라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3일천하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이 들어가면서 이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본은 계획적인 군비확장에 힘을 기울였다육군력의 중심인 보병연대는 1878년에 15개였지만, 1884년에는 3, 1885년에는 4, 1886년에는 5개로 늘어났고, 1887년에 1개 더 추가되어 모두 28개 연대가 되었다또흔 1886년 일본은 군사적인 부분에서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바꾸었고, 1888년에는 사단을 편성했다해군력도 점차 증가하여 근해의 제해권 확보를 위한 전력으로 확장되었다. 1883년부터 1890년까지 42척을 증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건함 계획이 세워졌다.

(동학농민전쟁을 표현한 그림,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봉준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은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청나라군과 일본군 그리고 조선 조정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처럼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1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준비했다. 1894년 기준으로 일본 육군은 13개 사단을 소유하고 있었고이후 러일전쟁 해전에서 주력이 될 2척의 함대가 이 시기에 기공되고 있었다일본이 이러고 있던 1894년 조선의 전라도에선 이른바 동학농민운동(혹은 혁명)이 일어났다이 농민혁명은 흉작과 지방 관리들의 횡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1894년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고부성을 깨뜨리면서 이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전봉준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농민전쟁은 전국적으로 번졌고, 1895년에는 강원도·황해도·평안도 지방으로 흩어졌다그러나 이 농민전쟁은 전쟁 초기에 조정에서 요청한 청나라군과 이에 대응한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최신식 무기에 진압 당했다.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고내각을 교체하여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다이 과정에서 일본은 필연적으로 청나라군과 맞붙게 되었는데이리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해군은 조선 아산만 부근 풍도 서남해역에서 청 함선을 공격했는데이는 양측의 해전으로 이어졌다이 해전에서 청나라군은 일본 해군에게 패배했다두 달 뒤인 1894년 9월 17일에 시작된 황해해전에서도 청나라 함대는 일본 함대에게 패배했고이 해전을 기점으로 제해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1895년 1월 20일에 일어난 위해해전은 말 그대로 청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마지막 해전이었다격렬한 전투 끝에 2월 2일쯤이 되면 쯤 위해주변 남북의 포대들이 모두 함락되었고산동의 청나라 육군은 위해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위해해전은 1895년 2월 11일 잔존해있던 청나라군이 일본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물론 일본군은 위해를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다수의 포로를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등 국제법을 적지 않게 위반하였다.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 대립과 러시아를 그린 만화)

 

청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했던 청나라는 지상전에서도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1894년 8월 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던 일본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리홍장의 군대를 산산히 부수어버렸고평양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즉 이로써 조선반도에서의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본이 무력화시켰던 것이다더 나아가 그해 11월 일본군은 육지에서 다롄과 뤼순을 점령함으로써 그곳 요새에 있는 수많은 대포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게 대패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근대식 군복과 소총으로 무장한 것이 인상적이다.)

 

(청일전쟁 전개도, 청일전쟁 당시 조선반도와 중국 영토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최근에 출간된 청일전쟁 관련 서적이다.)


이렇게 연전연패를 기록한 청나라는 결국 패배를 인정했고,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강화조약을 조인하면서 마무리되었다그 뿐만이 아니었다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팽호 열도를 할양 받았고거액의 배상금 지불까지 약속받았다청일전쟁은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본과 중국이 치른 최초의 전쟁이었다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이번엔 조선 반도뿐만 아니라 청나라 영토에서도 전투가 치러줬고전쟁의 승리자는 일본이었다. 8개월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청나라군은 총 3만 5,000명이 전사했다그해 반해 일본은 1만 3,000명이 전사했다청나라의 전사자가 2.5배 정도 많은 것이다.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독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서구 세력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청나라에게 요동반도와 거액의 배상금 지불 등을 약속 받았지만조약에서 얻은 성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요동반도를 할양 받은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요동반도 환부를 강력히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포기했다. 1895년 일본은 이른바 을미사변을 통해 고종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친일정권을 세우며 강력한 내정간섭책을 추진했다그러나 고종이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조선엔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군사력은 증강되었고러시아 제국과의 이권다툼에서 경쟁하게 되었다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꺾은 일본은 이제 서양 세력과 전쟁을 할 준비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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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 - 역사 속의 인물 총서 7 역사 속의 인물 총서 7
엘렌 브라바르테브네 지음, 백선희 옮김 / 동아일보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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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이라고 불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랜 기간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을 통일한 정치인이다. 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 제2제국을 선포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 역사에 있어서 통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848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후 독일은 분열된 국가를 통일하고자 하는 논의가 쟁점으로 올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랑스 파리에서 프로이센 대사를 지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힘을 얻기 시작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63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그리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분열된 독일을 한국가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1870년 이른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최종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독일의 부유한 귀족계층을 뜻하는 융커(Jungker)출신인 그는 출신성분 답게 권위주의와 보수주의를 추구했다. 독일의 정통적인 보수주의자답게 그는 좌익 세력들을 매우 싫어했다. 따라서 1878년 사회주의자법을 만들어 좌파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였고, 이런 좌익탄압은 이른바 사민당에게도 행해졌다. 이러는 과정에서 가난에 허덕이던 민중과 혁명을 추구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이른바 자신의 권의주의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 국가하고는 다른 방향의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복지정책이었다.

 

1883년과 1884년에 그는 의료보험에 관한 법안과 산재보험에 관한 법안을 마련했고, 1889년에는 연금보험과 상해보험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연히 이러한 법안들은 당시 유럽국가들이 실행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또한 그는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 정책을 펼쳤으며, 경제와 민생이라는 부분에서 시장의 원리에만 맡기는 것이 아닌 국가의 개입을 추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는 사회는 일반적인 자유주의 국가들하고는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철혈재상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독일을 통일시킨 이후 영토팽창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실제로 보불전쟁 당시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획득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었다. 물론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있던 식민지 개발 원칙을 발표한 베를린 회담에서 중요할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는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독일이 팽창에 나서게 된 건 그가 물러나고 나서 정권을 잡은 빌헬름 2세 시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이 책은 독일의 지도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아주 짧게 다룬 입문서다. 책의 대부분도 사진과 그림이 다수를 이루고 있고, 거기에 부연설명이 붙었다.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아주 간략히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입문서이기에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사실 이 책보다는 더 두꺼운 비스마르크 평전이 그를 공부하기에는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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