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일본의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과 2년 뒤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게릴라전과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전술로 인한 해전에서의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해 결국 패배했다. 비록 일본의 군대가 명나라 본토까지는 진격하지 못했지만, 조선반도 내에서 명나라군과 전투를 치렀고, 해전에서도 명나라 해군과 맞붙었었다.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그로부터 대략 300년 뒤인 1894년 일본과 중국은 다시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조선반도를 놓고 일어났다. 그러나 300년 전과는 달리 전쟁에서 승리한 주체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메이지 천황,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조선에게 강제로 체결하게 했던 일본은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을 정복해야한다는 이론인 정한론이 대두되던 187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는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족들의 반란이 거세졌다. 1874년에는 사가의 난, 1876년에는 신푸렌의 난과 하가의 난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77년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다. 세이난 전쟁은 무력으로 진압되며 사족층의 무력 반란도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꿈틀거리던 자유민권운동은 1870년대 중반이 되면서 거세졌다. 1874년에 입지사가 결성되었고, 1875년에는 애국사가 결성됐다. 자유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정부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면서 입헌체제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도입과 함께 들어온 천부인권론이나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최초의 일본 자유민권운동 전국 조직인 애국사를 거쳐 1880년 국회기성동맹이 결성되면서 자유민권운동은 절정기를 맞이했다. 여기서 정당 결성의 움직임이 일어나 1881년에는 자유당, 1882년에는 입헌개징당이 결성되었다.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메이지 정부는 대응은 양면적이었는데, 1881년 ‘국회 개설 조칙’에서 10년 안에 헌법 제정과 국회설치를 약속하기도 했지만, 자유민권운동 그 자체에 대해서는 탄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884년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제국의 헌법을 만든 그는 일본에선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섰던 인물로 당연히 한국에선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했던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한다.)
1881년 메이지 정부는 입헌제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 실력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초안을 준비하기 위해 1882년 3월 유럽 헌법 조사단을 이끌고 18개월에 걸쳐 유럽 주요 나라를 방문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의 헌법 학자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 헌법을 채택했고, 1886년 초안 작성을 시작했으며, 3년 뒤인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 즉 메이지 헌법이 천황에 의해 공포되었다. 헌법의 제정에 따라 1890년 7월에는 첫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아무튼 이로써 일본은 근대 천황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별기군, 특별한 기술을 배우는 군대란 뜻의 신식 군인으로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와 별개로 일본은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하고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1882년 이웃국가 조선에서 친일본세력의 배제를 의미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수도 서울은 청국군대에게 점령당했는데, 일본은 재빨리 조선과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뒤인 1884년 이에 대해 친일본세력은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켜 반격하려 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 정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친일본세력을 도우려 했지만 아직 청국의 군사력을 몰아낼 수 없다는 확신에 따라 군사개입은 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3일천하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이 들어가면서 이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본은 계획적인 군비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육군력의 중심인 보병연대는 1878년에 15개였지만, 1884년에는 3개, 1885년에는 4개, 1886년에는 5개로 늘어났고, 1887년에 1개 더 추가되어 모두 28개 연대가 되었다. 또흔 1886년 일본은 군사적인 부분에서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바꾸었고, 1888년에는 사단을 편성했다. 해군력도 점차 증가하여 근해의 제해권 확보를 위한 전력으로 확장되었다. 1883년부터 1890년까지 42척을 증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건함 계획이 세워졌다.
(동학농민전쟁을 표현한 그림,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봉준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은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청나라군과 일본군 그리고 조선 조정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처럼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1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준비했다. 1894년 기준으로 일본 육군은 13개 사단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후 러일전쟁 해전에서 주력이 될 2척의 함대가 이 시기에 기공되고 있었다. 일본이 이러고 있던 1894년 조선의 전라도에선 이른바 동학농민운동(혹은 혁명)이 일어났다. 이 농민혁명은 흉작과 지방 관리들의 횡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1894년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고부성을 깨뜨리면서 이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농민전쟁은 전국적으로 번졌고, 1895년에는 강원도·황해도·평안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이 농민전쟁은 전쟁 초기에 조정에서 요청한 청나라군과 이에 대응한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최신식 무기에 진압 당했다.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고, 내각을 교체하여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필연적으로 청나라군과 맞붙게 되었는데, 이리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해군은 조선 아산만 부근 풍도 서남해역에서 청 함선을 공격했는데, 이는 양측의 해전으로 이어졌다. 이 해전에서 청나라군은 일본 해군에게 패배했다. 두 달 뒤인 1894년 9월 17일에 시작된 황해해전에서도 청나라 함대는 일본 함대에게 패배했고, 이 해전을 기점으로 제해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1895년 1월 20일에 일어난 위해해전은 말 그대로 청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마지막 해전이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2월 2일쯤이 되면 쯤 위해주변 남북의 포대들이 모두 함락되었고, 산동의 청나라 육군은 위해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해해전은 1895년 2월 11일 잔존해있던 청나라군이 일본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물론 일본군은 위해를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다수의 포로를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등 국제법을 적지 않게 위반하였다.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 대립과 러시아를 그린 만화)
청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했던 청나라는 지상전에서도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1894년 8월 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던 일본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리홍장의 군대를 산산히 부수어버렸고, 평양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즉 이로써 조선반도에서의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본이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해 11월 일본군은 육지에서 다롄과 뤼순을 점령함으로써 그곳 요새에 있는 수많은 대포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게 대패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근대식 군복과 소총으로 무장한 것이 인상적이다.)
(청일전쟁 전개도, 청일전쟁 당시 조선반도와 중국 영토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최근에 출간된 청일전쟁 관련 서적이다.)
이렇게 연전연패를 기록한 청나라는 결국 패배를 인정했고,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강화조약을 조인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팽호 열도를 할양 받았고, 거액의 배상금 지불까지 약속받았다. 청일전쟁은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본과 중국이 치른 최초의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이번엔 조선 반도뿐만 아니라 청나라 영토에서도 전투가 치러줬고, 전쟁의 승리자는 일본이었다. 8개월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청나라군은 총 3만 5,000명이 전사했다. 그해 반해 일본은 1만 3,000명이 전사했다. 청나라의 전사자가 2.5배 정도 많은 것이다.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독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서구 세력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청나라에게 요동반도와 거액의 배상금 지불 등을 약속 받았지만, 조약에서 얻은 성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요동반도를 할양 받은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요동반도 환부를 강력히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포기했다. 1895년 일본은 이른바 을미사변을 통해 고종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정권을 세우며 강력한 내정간섭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조선엔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군사력은 증강되었고, 러시아 제국과의 이권다툼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꺾은 일본은 이제 서양 세력과 전쟁을 할 준비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