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년 관객 수 1,200만을 돌파했던 영화 암살은 의열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친일파와 일본 제국주의자를 암살하는 가상의 작전을 다룬 영화다. 영화 암살에는 조승우가 연기한 한 독립운동가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약산 김원봉은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의열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징적인 시설과 인사들 그리고 친일파들을 대상으로 사보타주 및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가 전개했던 의열투쟁은 1920년대 초중반에 가장 격렬했었다.

 

영화 암살로 김원봉이 재조명 받은 이후 우리 사회는 김원봉에 대한 훈장과 재평가를 중심으로 논쟁이 불거졌다. 특히나 김원봉을 폄하하는 쪽에선 1948년 그가 월북했다는 사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요직책을 맡았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협력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김원봉은 독립운동가인 것과는 상관없이 빨갱이라는 인식이 이마빡에 박힌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평가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일제가 35년 동안 조선을 지배했을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노선들이 다양하게 있었지만, 이념을 떠나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독립을 이루겠다는 그들의 궁극적 목표에는 변함이 없었다.

 

즉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업적과 공로는 이념이 아니라 행적에서 나온다. 따라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와 서훈을 할 때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떠나서 한 인물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기여도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김원봉 빨갱이 혹은 전범 논란은 친일과 친미로 물들어진 반공주의자들의 수준 낮고 저열한 주장과 인식일 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인 2019년 문재인 정부는 약산 김원봉의 업적을 높이 사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했었고, 김원봉을 다룬 드라마 이몽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드라마의 낮은 역량으로 엉망이 되었고, 현 정부는 수구세력들의 극심한 저항에 시달렸다. 이처럼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발로 인해 지금도 김원봉은 국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올해 8월 만화 <식객><각시탈> 그리고 <!한강>등으로 유명한 만화작가 허영만씨가 새로운 만화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독립혁명가 김원봉>이다. 이 책은 약산 김원봉이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시점부터 1948년 월북을 하게 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특히나 악질 친일경찰이자 이승만이 아끼던 노덕술은 이 책에서 최악의 악역으로 등장하고, 노덕술은 1947년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김원봉을 고문하기까지한다. 노덕술에게 고문받은 그는 노여움을 참지못해 며칠을 계속해서 우는 것도 만화에서 잘 표현됐다.

 

해방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그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다가,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받았던 역사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분노하게 된다. 또한 그가 월북한 이후 2년뒤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김원봉을 눈엣가시로 여긴 이승만은 좌익소탕이라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진행하면서 수십만의 무고한 민간인과 함께 김원봉의 형제 4명도 같이 학살당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다. 허영만 작가의 책 <독립혁명가 김원봉>은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이 걸어온 길을 만화를 통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김원봉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선 김삼웅 선생의 <김원봉 평전>이나, 이원규 작가의 <민족혁명가 김원봉>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 허영만 작가의 이 책은 만화다 보니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동네 책방의 역사모임에서 <라틴아메카의 역사>를 함께 읽고 있어요. 올해 5월부터 시작했는데 거의 5개월 만에 상권을 끝냈고, 이번달부터 하권을 읽기 시작했어요. 모임을 통해 오랫동안 그들의 역사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가치관이 나의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것'이었음을 안타깝게 깨닫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시작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기원전 수만 년 전,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빙하기의 말미에 아시아의 인류가 빙하를 건너, 북아메리카의 끝자락을 건너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빙하기는 머지않아 끝났고, 따뜻해진 기후는 얼음으로 간신히 연결되었던 아메리카 대륙을 거대한 섬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꽤 오랫동안, 아메리카 대륙은 태평양과 대서양의 커다란 바다에 둘러싸인 채, 대륙 안에서 형성된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이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문화를 교류하고, 새로운 기술들을 발견하며 문명을 성장시켜 나가는 동안, 그들의 문명은 석기에서 청동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요.

ad
다른 문명과의 교류가 없이 거대한 대륙 안에서 성장한 문명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 이해하고 해독하는 것도 불가능했죠. 지금까지도 인류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혹은, 정복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한) 잉카나 마야의 문명을 해독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

공통점 없이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독자적인 기록이었을 테니까요. 수많은 SF 영화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문명에 대해 외계인의 클리셰를 동원하는 이유도, 우리가 여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청동기 문명의 끝자락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유럽인들이었어요. 1492년에 거대한 함선을 앞세워 건너온 철기문명의 이방인들은, 무기로도, 질병으로도, 정치력으로도,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앞세워 대륙을 순식간에 정복해 버리고야 말죠.

제대로 된 정복전쟁도 없이 그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대적인 '문명의 시차'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콜럼버스의 대항해에 대해 가졌던 '모험과 도전'이라는 호의적인 시각이, 끔찍하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왜 지금껏 '정복자'의 시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을까요?

라틴아메리카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자원들로 구대륙을 먹여살렸고, 금이나 은, 설탕과 염료에서, 커피와 카카오로 이어진 그들의 착취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죠. 게다가, 심각한 질병으로 90퍼센트에 가까운 원주민들이 몰살당하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실어 나른 노예들은, 지금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을 위협하는 인종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해요.

농업이나 광물 자원의 종속에서 시작된 식민지의 착취는,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로는 구대륙에서 팽창적으로 증가한 공업 생산품들의 소비시장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공고해지고야 말았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까지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농업, 광업, 목축업과 같은 1차 산업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식민 지배의 시작은 스페인이었지만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은 곧바로 제국 확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어요.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질서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넘어갔고, 남미에 대한 착취도 미국의 역할이었죠.

칠레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3년의 기록
 
대통령궁에서 자결해야 했던 아옌데의 비극 <아옌데의 시간>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로드 아옌데의 집권기였던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기록을 그래픽 노블로 그린 작품입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같이 읽다보니, 그들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 대통령궁에서 자결해야 했던 아옌데의 비극 <아옌데의 시간>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로드 아옌데의 집권기였던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기록을 그래픽 노블로 그린 작품입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같이 읽다보니, 그들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 아모르문디

관련사진보기


오늘 소개하고 싶은 <아옌데의 시간>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는 칠레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은 승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현재의 칠레와 남미가 벗어나지 못하는 지배의 굴레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하게 읽힐 수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읽혀서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아옌데의 시간>은 가상의 인물인 미국인 기자, 존 니치의 시선을 통해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하던 1970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져버린 1973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입니다.

작년에 칠레의 시위를 보면서 읽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관련기사 : 칠레의 2019년... 대한민국이 얻어야 할 교훈)와는 달리,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만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기에,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이용한 적절한 선택이라고 느꼈어요.

여기에 올해 다시 읽은 아옌데는, 80년 전에 칠레에서 있었던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 집권기의 비극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역사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만나다 보니 더욱더 아프게 읽히네요.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는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이었어요. 질산 비료의 원료였던 구아노의 주도권을 두고, 파라과이, 볼리비아와 벌였던 태평양전쟁 (1879~1883) 직후에 집권하면서, 중요한 자원이었던 구아노의 국유화를 통해 국가의 경제를 강건하게 하고, 공교육을 강화하여 국가의 기반이었던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의회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축출되고, 망명지였던 아르헨티나에서 자결하고 말아요. 그 후로 칠레는 영국이 주도하던 다국적 자본가의 지배에 억눌리게 되었고, 민중의 빈곤과 억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죠.

발마세다의 비극에서 구아노라는 자원을 구리로 바꾸고 영국의 지배를 미국으로 바꾸면, 이야기는 그대로 1970년에 집권했던 아옌데의 것이 됩니다. 쿠바 혁명의 성공과 1962년에 있었던 미사일 위기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미국이, 영국보다 더 집요하게 아옌데를 방해한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겠죠.

당시 소련과의 이념전쟁으로 한창이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공산주의에 잡아먹히는 것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여, 아옌데를 무력화시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아옌데의 충실한 조력자로 보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자신들의 무기로 선택했죠.
 
"피노체트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고 친절한 군인처럼 보인다. 그는 안전과 공공질서, 그리고 정치적 사건이라는 매우 새로운 문제들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 CIA 비밀 전보, p.77

1973년의 칠레는 혼돈이었습니다. 미국은 어떻게든 민중의 연대를 망가뜨리고자 애를 썼고, 분열된 민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무너진 연대와 민중의 혼돈은, 미국이 선택한 군부에게는 좋은 기회였음은 물론입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인들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대통령궁을 공격하였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자살을 선택하고야 말아요. 그 후로 칠레는, 40년이나 피노체트의 군부독재에 시달리며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가 되고야 맙니다.

헌법을 다시 쓰기로 한 칠레 민중의 선택
 

코로나19 시대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어내려가는 것은, 지금껏 세상을 지배했던 지배의 논리가 허상이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되풀이되는 역사의 비극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그 나라의 민중이 스스로의 뜻을 세우는 길뿐임을 깨닫는 경험이기도 하고요.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식민 지배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식민 지배의 주체는 계속 바뀌었지만, 기득권이 지키려 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었으니 현재의 극단적인 양극화는 당연한 결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2020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가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 있나요? 적어도, 코로나19의 방역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우리의 결정이고 잘한 결정이라고 보입니다. 덕분에, 안전하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그간 나를 지배했던 사대주의의 시각과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조금은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앞으로는, '선진국'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들을, 무조건적인 동경의 시선으로 '관대하게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가르침을 갖게 한 2020년의 고립이 마냥 '쓸데없던' 것만은 아닌가 봐요. 불행 중 다행인가요?

이 글을 쓰는 동안, 작년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이 촉발한 시위에서 약속했던 칠레의 국민투표 결과가 나왔네요. 아옌데와 발마세다의 후손은, 드디어 민중의 선택으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습니다. 피노체트의 40년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중의 칠레를 건설하기 위한 헌법을 다시 쓰기로 한 거예요. 그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을 옮깁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존엄하고,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발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직접·공공·보통 선거를 통한 주권 행사에서 비롯된 천부의 권리를 갖고 행동하는 미주 해방지구의 쿠바 국민은 호세 마르티 기념비 옆에서 그를 추모하면서 쿠바 전국국민대회를 열었다.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우리 아메리카 민중의 의지의 표현인 강령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저 코스타리카 산호세 선언을 전면 거부한다. 그 선언은 미제국주의 주도 아래 아메리카 대륙의 주권과 존엄성, 각 국가의 민족자결권을 침해한다.

 

2.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모든 민중에 대해 무지막지하고 불법적인 지배를 서슴지 않는 미제국주의를 강력히 비난하는 바이다. 1세기 이상 지속된 침략으로 멕시코, 니카라과, 아이티, 산토도밍고, 쿠바의 대지는 한 번 이상씩 침탈당했고, 텍사스같이 광대하고 자원이 풍부한 땅, 파나마 운하 같은 전략 요충지가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푸에르토리코처럼 전 영토가 점령지가 되기도 했다. 남아메리카 민중은 미 해병이 우리의 아내와 딸들, 나아가 우리 대륙의 가장 고귀한 선열(그중 한 사람이 호세 마르티다)을 모욕하는 현실을 감내해왔다.

 

우월한 군사력 불평등 조약, 매판 정부의 수치스러운 협조를 통한 지배로 (볼리바르, 이달고, 후아레스, 산 마르틴, 오이긴스, 티라덴테스, 수크레, 마르티 등이 해방하려 했던) 우리 아메리카 대륙은 착취의 대륙, 미국이라는 금융·정치 제국의 뒷마당, 국제기구 표결의 거수기가 되어버렸다. 남아메리카 국가들 중 쿠바는 이 국제기구에서 우리를 무시하는 거칠고 잔인한 북미에게 부담이 되는 괴물로 항상 간주되었다.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정부들이 이러한 제국주의 지배를 받아들임으로써 독립의 이상을 배반하고, 민중들의 주권을 파괴하며, 남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진정한 연대를 방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 대륙의 불멸의 선조들을 움직여온 바로 그 해방의 신념으로, 쿠바 국민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배를 거부하는 바이며, 그리하여 남아메리카 민중의 희망과 의지를 실현하려 한다.

 

3.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먼로 독트린을 영속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이 독트린은 호세 마르티의 예측처럼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의 아메리카 대륙 지배를 연장하고, 또한 오래전 호세 마르티의 비판처럼 차관, 운하, 철도 등의 독소를 손쉽게 주입하는 데 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앞에서 줏대 없는 정부의 굴복이자 아메리카 민족에 대한 미 독점기업의 전횡에 불과한 잘못된 범미주주의(Pan-Americanism)에 반대하여 쿠바전국국민회의는 마르티와 후아레스(Benito Juarez)의 남아메리카주의의 해방을 주창한다. 나아가 전국국민대회는 미국인, 즉 박해받는 지식인, 린치 위협을 받는 흑인, 악당들의 손아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우호의 손길을 뻗치며 전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 세계와 더불어 전진하려는 의지를 재천명하는 바이다.

 

4.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만약 우리의 조국이 제국주의 군대의 공격을 받는다면 쿠바를 지원하기 위한 소련의 자발적인 행위는 개입이 아니라 공개적인 연대 행위로 간주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미국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쿠바에 제공되는 그러한 지원은 소련 정부의 명예를 드높이는 반면, 쿠바에 대한 비겁하고 불법적인 공격은 미국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쿠바 영토가 미국의 침공을 받는다면 소련의 미사일 지원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미국과 전 세계 앞에 천명한다.

 

5.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서 대륙의 단합과 통일을 분열시키고 위협하기 위해 쿠바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이용하려는어떠한 세력도 철저히 거부한다. 첫 번째 사격에서 마지막 사격까지, 폭정을 전복하고 혁명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 속에서 쓰러져간 첫 번째 순교자로부터 마지막 순교자까지, 쿠바혁명의 첫 번째 강령에서 마지막 강령에 이르기까지, 쿠바 국민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왔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속화된 범죄행위와 모욕에 대한 쿠바의 정당한 대응인 쿠바혁명의 성공에 대해 소련 혹은 중국을 비난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 반대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아메리카 대륙과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가 미국 정부의 정책에 크게 위협 받고 있다고 믿는다. 미국은 남아메리카 정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책을 모방하도록 강요하면서 소련과 중국을 고립시키고,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으로 개입하며, 중국이 60억 인구를 사실상 대표하고 있는데도 중국을 유엔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세계 모든 민족과의 선린정책을 확인하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 의지를 재확인한다. 이 순간 이후 전국국민대회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리하여 미7함대에 의해 지탱되는 대만 괴뢰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지를 밝힌다.

 

6.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민중의 일반여론을 표현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민주주의는 결코 다음의 것들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 즉 금융과두제, 흑인에 대한 차별, KKK단의 폭력행위와 양립할 수 없다. 또한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를 쫓아내고, 폴 로비선의 위대한 음성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게 하며, 여러 정부와 교황 비오 7세를 포함한 전 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를 사형에 처하는, 그런 박해와는 양립할 수 없다.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민주주의는 허구적인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부유한 지주와 직업정치인이 장악하는 선거만이 아니라, 민중 중심의 이 국민대회가 지금 실천하는 것처럼 국민의 결정권에 의해 지탱된다는 쿠바인의 신념을 밝힌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대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 자유롭고, 가난한 자가 기아, 사회적 불평등, 문맹, 사법제도에 의해 비참하고 무능한 조재로 전락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남아메리카에 뿌리 내릴 것이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농촌 사람들에게 불행의 원천이 되는 낙후되고 비인간적인 대농장 체제를 비판한다. 이 체제는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되 제대로 경작하지도 않고 놀린다. 기아선상의 임금, 비합법적인 특권계급이 저지르는 가혹한 노동 착취에 반대한다. 문맹, 교사·학교·의사·병원의 부재, 아메리카 국가들에 만연한 노인 복지의 빈곤을 개탄하고, 흑인과 인디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다. 여성 차별과 착취를 비판한다. 우리 국민을 헐벗게 하고 민주주의와 주권의 완전한 실현을 가로막는 군사적·정치적 과두체제를 비판한다. 국민의 이익을 무시하는 부정한 거래로 국가의 천연자원을 외국 독점기업에 양도하는 것을 개탄하고, 국민의 정서는 무시한 채 미국에만 우호적인 정부를 비판한다. 과두제 정치와 제국주의 억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언론과 여타 미디어가 국민을 구조적으로 기만하는 행위를 비판한다. 미국의 도구이자 심복, 대리인에 의한 뉴스의 독점을 개탄하고, 단결하면 모든 나라에서 다수인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이 애국적·사회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가로막는 억압적인 법을 비판한다. 남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의도와 이익에 따라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우리의 자원을 약탈하고,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며, 우리 경제의 피를 빨아먹을 뿐 아니라 낙후한 상태를 영구화하는 독점기업과 제국주의자들의 기업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의한 저발전국의 착취를 거부한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 자신들 노동의 산물인 과일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아동의 권리, 의료 혜택과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 실제 쓸모가 있고 과학적인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학생의 권리, ‘전적인 인간 존엄성을 누릴 흑인과 인디언의 권리, 시민으로서 사회적·정치적 평등에 대한 여성의 권리, 노후 보장에 대한 노인의 권리, 연구와 작품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려는 지식인·예술가·과학자의 권리, 국가의 부와 자원을 회복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독점체의 국유화 권리, 세계 모든 국가와의 자유로운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 완전한 주권에 대한 국가의 권리, 요새를 학교로 바꾸고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흑인·인디언·여성·청년·노인 등,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권리와 미래를 지키기 위한 무장의 권리 등을 천명한다.

 

7.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위한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흑인·인디언·청년·여성·노인의 투쟁 의무,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국민의 해방 투쟁 의무, 거리나 지리적 분할과 관계없이 어디에 거주하든 억압 받고 착취당하고 식민화 되고 고통 받는 국민들과 더불어 공동의 대의를 만들어야 할 의무도 주장하는 바이다. 세계의 모든 인류는 형제다!

 

8.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단합되고 영광스러운 남아메리카가 경제를 미제국주의의 풍성한 전리품으로 만들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며, 겁먹은 장관들이 독재자를 따라 천박한 목소리로 합창하는 회의석상에서도 각 지역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확인한다. 따라서 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공동의 운명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대륙은 개별 국가의 자유로운 결정과 모든 국가의 공동의 목표에 뿌리내린 진정한 연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된 남아메리카를 향한 이 투쟁에서 공직에 앉아 강탈자 노릇이나 하고 있는 자들은 그저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여 석탄과 주석 광산에서, 일반 공장과 설탕 공장에서, 사파타와 산디노의 후손인 로토, 촐로, 가우초, 히바로 등이 자유의 무기를 드는 봉건적 압제에 짓눌리는 토지에서, 시인과 소설가, 학생, 여성, 어린이, 노인과 무력한 자들로부터,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우리 형제들의 이러한 목소리를 향해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죽 우리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쿠바는 실패하지 않는다! 쿠바는 오늘 여기서 남아메리카와 전 세계 앞에 쿠바의 역사적이고 변치 않을 혁명을 천명한다. 조국, 아니면 죽음을!

 

9.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이 선언을 아바나 선언으로 명명할 것을 결의한다.

 

쿠바, 아바나, 미주 해방지구

196092

피델 카스트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누구나 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도 공부나 독서 혹은 해야할 일을 할때 게을러지고 싶을 때가 많다. 이건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회가치나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상시적으로 원하는 게으를 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 <빠빠라기>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남태평양에 사는 추장은 쉴틈없이 일을하며 사는 문명인들을 '빠빠라기'라고 하며, 여유없는 현대문명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빠빠라기>에서 신랄하게 지적하듯이, 칼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층들에게 게으를 권리를 호소한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라파르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활성화된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타파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하고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단결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추구했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 시간 단축과 자본가로부터의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할권리를 부정한다. 이런 점에선 확실히 마르크스하고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에서 하는 주장들이 고찰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게으를 권리를 더 강조해서 주장하는 건 반대하는 입장이다. 물론 착취를 막아야 하고 노동을 줄이는 쪽으로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나 또한 게으름을 피울때가 있고, 거기에 대해 크게 여념하지 않는 편이지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라파르그가 무조건적으로 노동을 사라지게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해도 충분하고 나머지는 한가로움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걸까?


라파르그가 보기에 노동은 강요된 것으로 길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윤리와 사회정치적 경제논리와 자유사상가들의 논리에 그런 '길들임'의 기이한 윤리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편견을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게으름은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박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자유사상가들과 사회정치적 경제논리가 추구하는 길들임에 익숙해지는 순간 평생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라파르그의 생각인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자나'라는 자기 강박적 생각은 자칫 길들여지는 첫걸음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라파르그의 주장이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에서 기계의 생산력과 가내수공업이나 인간의 생산력에 대해 지적한다. 그는 자본가들이 이윤축적을 위해 노동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에게 기계 못지 않은 생산력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라파르그는 기계가 생산하는 양이 인간이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빠르게 생산한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자본가들에겐 인간 노동자 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더 중요시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와같은 그의 주장은 상당히 소름끼친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 원리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라파르그는 자본가들이 기계가 더 효율적이면 노동자들이 죽든 살든 혹은 해고당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점에서 그는 현재 느리지 않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폐해를 예견한 측면도 없진 않다.


이 책은 단순히 라파르그가 쓴 게으를 권리만 다루는 책이 아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남긴 여러 글들을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이 책에서 게으를 권리 외에 흥미롭게 읽은 파트는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사회주의와 지식인' 그리고 '여성문제'다. 마르크스를 회상하는 파트에선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을 담은 그의 회상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마르크스가 단기간에 러시아어를 마스터하여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그의 회상이다. 그외에도 마르크스의 천재성을 아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지식인 파트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변화와 흐름 그리고 라파르그 나름의 대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여성문제는 그의 본업인 의사답게 그 시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자본가와 지배계급 그리고 자칭 잘난 자유철학자들의 인종주의적 망언과 뇌피셜들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한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그런 문제가 성별 즉 생물학의 문제가 아닌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의 강요한 사회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게으를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본능적 혹은 이성적으로 공감되는 부분도 분명히 많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본능적으로 게으르고 싶을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얘기를 마치자면 그 당시 사회주의자 중에 마르크스와 가까우면서도 방법론에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인물의 주장을 알 수 있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게으름을 자주 부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게으름을 잠시 접어두라 얘기한 뒤,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0-11-11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네요. 몇번을 읽어도 그 예리한 통찰에 놀라게 됩니다 ˝모든 것에 게을러지자. 사랑하는 것과 게으름 피우는 것 빼고.˝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ㅋㅋ

NamGiKim 2020-11-11 00:35   좋아요 0 | URL
정말 재밌게 읽은 책입니다. 특히나 여성문제는 통찰력이 예리하죠. 거기다 현재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자주하는 실수도 반복하지 않고요. 게으름이라는게 나쁜게 아니라 사람의 생물학적 본능일 수 있다는 걸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ㅎㅎㅎ
 

(보신전쟁 전개 지도, 1868년 1월에 시작한 이 전쟁은 1869년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마지막 정부군이 항복하며 끝났다.) 


1868년에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길로 접어들었다에도 막부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그러나 반막부세력이 주도한 신정부가 탄생하였지만그래도 여전히 일본엔 도쿠가와 세력의 존속을 주장하는 친막부세력은 이에 저항했다따라서 막부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이들 간의 갈등은 있었던 것이다이런 갈등은 당연히 양측의 전쟁으로 이어졌고이것이 바로 보신전쟁이었다.

 

보신전쟁은 1868년 1월 26일 막부의 군함이 효고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번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보신전쟁 시작 1주일 만인 2월 2일 메이지 정부는 오사카 성을 장악함으로써 막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친막부세력은 3월 29일 고슈가쓰누마[甲州勝沼전투에서도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였으며, 4월 5일엔 영국 공사인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요청에 따라 교섭을 추진했다그 결과 신정부군은 5월 3일 에도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에도 성이 신정부군에게 장악당한 이후에도 친막부 세력들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물론 이 저항은 신정부군에게 진압 당했고, 1869년 6월 27일 이들이 항복하면서 보신전쟁은 메이지측의 승리고 끝이 났다.

 

보신전쟁 이후 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869년 1월 정권의 핵심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의 번주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누려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정부에 반환하는 판적봉환을 단행했고다른 번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신분제도를 개혁하여 다이묘와 상층 귀족은 화족일반 무사는 사족농공상민은 평민으로 정했다또한 사민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평민의 성씨 사용신분 간의 결혼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허용했고, 1871년에는 번들을 통폐합하여 현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를 파견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통해 변한 일본의 수도 도쿄)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중앙에 상투를 튼),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진은 1872년 런던 체류 중 촬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조선 후기 개화파 유길준에게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라 10,000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18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근대화가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특히나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서방에 파견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경험을 통해 한층 확고해졌다이와쿠라 사절단은 원래 서양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되었고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정부의 실권자들이 포함되었다. 1872년 신정부는 학제를 제정하여 전국을 여덟 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소학교·중학교·대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제도를 설치했고, 1871년에는 단발령도 공포했다서양 문물은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다서양식 단발머리에 양복모자구두를 갖춰 입고 소고기와 같은 육류를 먹는 것이 유행했다요코하마 같은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양식 건물이 축조되었고의자와 테이블 같은 가구도 수입되었다이 당시 돼지고기를 밀가루에 묻힌 후 소량의 기름으로 프라이팬에 지져내는 요리가 일본에서 유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カツ,pork cutlet)의 시초였다.

(돈까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음식이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반 국민을 기초로 한 근대적 군사제도를 탄생시켰다메이지 정부는 육군은 프랑스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이른바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로 했고이에따라 1871년 사쓰마·조슈·도사·히젠 등에서 번병을 차출해 중앙군인 어천병을 만드는 한편지방의 치안 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한 뒤 도쿄오사카진제이도호쿠의 4개 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징병제가 시행됨에 따라 1873년에는 4월부터 징병된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각 진대에 입대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874년에는 육군의 기간이 된느 보병연대 9개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1871년 일본의 군사력은 육군 병력 1만 4,800함정 14척에 불과했지만, 1877년을 거쳐 점차 증강되었고, 1868년부터 1877년까지 약 10년간 메이지 정부는 국가예산의 15.9%를 군사비에 투입했다보병연대도 1875년에는 14, 1878년에는 15개로 증강되었다. 1870년대 전반 메이지유신 정부는 근대국가’, 즉 서구형 국가 건설을 위해 폐번치현학제징병령지조개정과 같은 일련의 제도개혁에 착수했고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동시에 대외팽창과 탈아입구의 기점이기도 했다즉 메이지 정부는 이 시점부터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들이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하나는 1874년 일본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대만 출병이고다른 하나는 1873년쯤에 나온 이론인 정한론(征韓論)이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이다. 그는 조선 말기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다.)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일거에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주장으로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대두된 이론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 섬 즉 대마도에 개입하여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며 국교 교섭을 시도했었다하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은 외교문서가 종전과 달리 고종을 격하하는 등 당시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사신의 접견을 거부했었다이를 시작으로 일본 내에선 이른바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87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다 하쿠보가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1872년에는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조선 측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으며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 1873년 8월에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이와쿠라 도모미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사진, 1875년 일본은 시험삼아 강화도를 공격했었다.)

 

이후 정한론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고정한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때부터 유지해온 대외팽창적 전략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몰락과 때를 맞춰 일본은 1875년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 앞바다를 공격했다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인천 근해의 영종도를 불법 포격하고 방화와 살인·약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이러한 일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은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강화도 조약, 1876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76년 정월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를 지휘관으로 한 6척의 함선(군함 3수송선 3)을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을 이번엔 일본이 조선에게 한 것이다이로써 1876년 2월 3일 연무당(현재 서대문 옆)에서 12개 조항으로 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당연히 강화도조약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불평등조약이었다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를 개방했고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치외법권 지역도 인정해야 했다이처럼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대외팽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 시점부터 점차 팽창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