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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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러시아 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17년 인류최초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1789년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가치아래 전개되었던 프랑스 혁명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만큼 그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 베트남 혁명 그리고 그 외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해방투쟁들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러시아 혁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혁명가 레닌이 식민지 민중에게 주장했던 가치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생시킨 계기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지도하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가 단행했던 공업화와 대숙청까지를 혁명의 일환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서방학계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러시아 혁명을 연결해서 보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에서 독자적인 좌파조직을 만들어 좌파운동을 해왔던 토니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레닌의 사후를 끝으로 스탈린 집권 시기를 아예 반혁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서방 학계에서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1990년대 수정주의 학파들이 많은 연구 성과물을 냈다. 개방된 소련의 문서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과장되서 알려진 대숙청(The Great Purges)이 매우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치 게티(Arch Getty)가 바로 그러했다. 아치 게티 외에도 소련 역사를 수정주의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고, 그가 쓴 개설서 러시아 혁명 1917~1938(The Russian Revolution)’은 러시아 2월 혁명부터 1936~1938년에 일어난 스탈린의 대숙청까지를 수정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쓴 러시아 혁명사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2.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혁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대다수 민중의 삶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강대국인 동시에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낙후성은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연설중 발췌한 일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투르크의 베이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봉건 통치자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 귀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모든 패배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민을 차지하던 러시아가 산업혁명의 바람을 맞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도시 노동자 계급의 탄생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에 비해 매우 늦었다.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전제정 또한 유지됐으며 황실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말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던 1905년 아시아의 신흥강국 일본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본 러시아에선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차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또한 일정부분 굴복했는데, 전국적으로 선출된 의회 두마를 설립함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비밀경찰의 활동으로 탄압당하기 일쑤였다. 1905년 혁명은 차르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과 일정부분 두마 허용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며 혁명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됐다. 1914년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8월 유럽에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현대화된 전쟁에서 싸우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동반한 무기의 현대화는 구식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제국군의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독일군은 제국의 서부 영토를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총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과 그 과정에서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 및 부정부패는 민중을 분노하게 했고, 2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민중이 혁명을 했던 이유에는 경제적 궁핍함과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19176월에서 7월 초에 케렌스키가 감행한 러시아의 갈리시아 공세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혁명가 레닌이 그해 4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주장하고 선언한다. 볼셰비키 레닌이 주장한 4월 테제의 핵심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였고, 또 다른 구호 , 토지, 평화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책에선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새 혁명 지도부하에서 활력을 되찾아야만 부르주아지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핵심 기관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제시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는 사실상 계급 전쟁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레닌이 4월에 제시한 다른 구호인 , 토지, 평화에 담긴 혁명적 함의도 비슷했다. 레닌의 용법에서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수가 자본의 전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는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 스스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장악하는 형식과 매우 가까웠다. 한 비판자가 혁명적 민주주의 도중에 내전의 깃발을 꽂는다고 레닌을 비난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104

 

19177월 갈리시아 공세가 처참한 패배로 끝난 후 페트로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7월 봉기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렀던 군중은 크론슈타트 수병·병사·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노동자 조직으로 구성됐고,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7월 봉기 이후 임시정부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핀란드로 도피했다. 다음해 8월에는 전제주의자 코르닐로프가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고,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 선거에 도전하여 25%의 득표를 얻었지만 40%를 얻은 사회혁명당쪽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맛보았다. 물론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완벽히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퇴하지 않았고, 통치의 위임이라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집단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볼셰비키는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분명한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노동자계급의 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3. 적백내전과 신경제정책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쟁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18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져나왔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정권이 치러야 했던 전쟁처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게 바로 적백내전이다.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졌고, 볼셰비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방해 그리고 차르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9세기부터도 낙후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격을 받았던 러시아의 경제는 내전을 통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921년엔 기근이 일어나 수백만이 아사했으며, 비슷한 시기 크론슈타트에선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적백내전을 통해 볼셰비키가 얻은 또 다른 결론이 있었다. 군의 현대화와 공업화 중심의 경제 발전 모델의 추진이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27년 기준으로 볼셰비키 총 당원 중 33%1917~1920년에 가입한 반면, 1917년 이전에 가입한 당원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적백내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는 반증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그 외의 당시 볼셰비키들이 지휘했던 붉은 군대는 내전을 통해 그 규모가 늘어났다. 내전 중에 5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가 한때라도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내전 기간에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처음으로 징집됐고 내전 기간 내내 이들은 전투부대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전이 끝날 무렵에 붉은 군대는 주로 농민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의 거대 기구가 됐다. 비록 1/10만이 전투부대였고(붉은 군대든 백군이든 전선에 배치된 부대가 10만 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머지는 보급, 수송, 행정 일을 맡았지만, 군대의 성장은 놀라운 성과였다.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는 기존의 전시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신경제정책 이른바 네프(NEP)를 추진했다. 물론 네프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네프는 후퇴였다. 네프를 통해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시 복귀했기 때문이다. 네프에서도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한건 1926년에서 1927년 당시에는 상당한 부분의 경제 회복을 거쳤다. 최소 1926년에서 1927년 기준으로 소련의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프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의 지지층도 늘었다. 1927년에 이르면 공산당은 100만 명이 넘는 정규 당원과 후보 당원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중 39%는 현재 노동자였으며 56%는 당에 가입했을 때의 직업도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볼셰비키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 스탈린의 공업화와 대숙청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있어 네프가 영구적인 대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후퇴였을 뿐이다. 즉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고 볼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은 낙후된 러시아가 공업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만 공업화를 추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공업화는 소련을 매우 낙후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볼셰비키들이 추구한 대안이었다. 책에 따르면 옛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유리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개별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집단화를 극단적인 비율로 채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전 수준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가 내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계급의 적과 무장 투쟁을 하며 일했던 시기에 우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긴장을 지니고 일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다운 시기가 도래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47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서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즉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볼셰비키들이 추구했던 1차적 과제를 수행함을 의미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기존에 실행하던 네프를 포기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9년에 추진했다.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29년 말에 이르면 당은 농업을 집단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12월에 스탈린이 선언했듯이, 쿨라크의 착취 경향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쿨라크는 계급으로서 박멸돼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저항 및 일탈로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북부 카프카스 그리고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300~400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근은 엄청나게 혹독한 유산을 남겼고, 볼셰비키 또한 이들을 막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기근 자체가 어느 한 집단이나 민족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겠다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스탈린이 기근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비록 공업화 과정에서 기근과 같은 혹독한 사태가 있었고, 공업화 자체도 여러 문제점들이 있긴 했자만 공업화의 성과물은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다수 민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도시 노동자들(주로 모크스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의 대공장에서 모집된 그 유명한 이만오천인을 포함)이 콜호즈 조직자나 의장직을 맡기 위해 농촌에 긴급히 동원됐고, 1932년에 농가의 62%가 집단화됐으며, 그 수치는 1937년에 이르러 93%까지 상승했다. 집단화를 거치며 콜호즈 생산량에서 조달량은 곡물의 40%에 이르거나 예전에 농민들이 시장에 팔았던 비율의 두 배에서 세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의 지도부는 공업화와 집단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이 포함된 주장을 했다. 적 계급은 박멸됐고, 실업은 사라졌다. 초등교육은 보편적으로 의무가 됐고, 성인 문해율은 90%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15개년 계획 동안 도시는 맹렬하게 성장했다. 옛 산업 중심지는 광대하게 확장됐고, 조용하던 지방 도시에 거대한 공장이 출현했으며, 새로운 공업·광업 지대가 소련 전체에서 출몰했다. 대규모 금속 공장과 기계 제작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투르크시브 철도와 거대한 드니프로 수력발전 댐도 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이른바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물론 이 문화혁명은 1960년대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과는 비교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한 수의 노동자들이 산업 경영진으로 발탁됐고, 소비에트난 당의 관리가 되거나 중앙정부 및 노동조합 관료제에서 숙청당한 계급의 적자리에 임명됐으며, 1933년 말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1,000명 중에서 1/6이 넘는 14만 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1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 명으로 변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집중적인 운동도 개시했다. 이는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부르주아교수들은 분개하게 했고, 15개년 계획이 지속되는 동안 사무직 종사자 가정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은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됐다. 15개년 계획 동안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과 같이 미래의 소련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의 수혜자였다. 즉 문화혁명은 교육혁명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 혁명 기간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9년 초의 2,900만 명에서 1933년 초에는 거의 4,000만 명으로 4년 간 38%나 급상승했으며, 모스크바의 인구는 1926년 말 200만 명을 넘었는데 1933년 초에는 370만 명으로 뛰어 올랐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소련은 1936년 새 헌법을 만들어 내어 헌법상 동등한 권리를 1918년보다 일정부분 더 많이 부여했다. 이로써 모든 소련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자유를 보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자유란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36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분기인 세 번째 혁명을 진행하는 데, 그게 바로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이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테러와도 차이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단행했던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처럼, 이는 왕년의 혁명 지도자들을 주로 겨냥한 국가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로 본인 또한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예조프를 희생시켰다고 하지만, 그가 숙청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꼈다든지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든지 아니면 예조프를 단지 마키아벨리식 신중함 때문에 없애버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숙청의 또다른 사실은 1980년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드러났다. 바로 일각에서 알려진 숙청의 희생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지만,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책을 인용하자면 실제 대숙청과 굴라그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고위직에 있던 공산주의자만 숙청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인텔리겐치아(부르주아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 특히 문화혁명 활동가 모두)도 크게 당했다. 모든 러시아의 혁명적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1937년처럼 명확하게 용의자를 명시하지 않았을 때조차 유력한 용의자였던 계급의 적출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공식 살생부에 이름을 한 번이라도 올린 사람은 결국 희생자가 됐다.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위험했다. 스탈린은 상습범, 말 도둑, 종교적 분파주의자를 포함한 수만 명의 쿨라크 출신과 범죄자를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굴라그로 배내라는 특별 비밀 지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현재 굴라그에 수감 중인 상습범 1만 명도 총살당했다. 서양 학자들은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 그동안 어림짐작해온 대숙청의 전체 규모를 확인하게 됐다. NKVD 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굴라그 교정노동수용소의 수감사 수는 19371180만 명에서 19391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반혁명범죄로 기소됐고, 22%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대숙청 희생자가 감옥에서 처형되어 굴라그까지 가지도 않았다. NKVD1937~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숙청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방에서 주장했던 수치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도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혁명인 대숙청을 1938년에 마무리 했고, 이로써 저자 쉴라 피츠패트릭이 주장한 러시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마무리 됐다.

 

5. 무엇이 서방의 다른 책들과 다른가?(장점과 한계)

 

서방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은 기존에 나온 러시아 혁명 자료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여 러시아 혁명을 해석한 책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8년 종결된 대숙청의 연결점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접근하여, 대숙청 또한 러시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 신선했다. 한국 사람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을 접근하년 방식은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대숙청이 일어난 시대사적 맥락이나 환경 그리고 배경을 판단하기 보단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의 강화라는 맥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단행한 대숙청을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단 극우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시중에 많이 출판된 토니 클리프류의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좌파들의 서적들 또한,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되어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런 토니클리프류 좌파들 또한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서방의 학자이기에, 레닌이나 스탈린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공산당 사람으로만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료 독재라는 점으로 해석한 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리고 소련 자체가 국제 혁명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코민테른이 입장이 기존 러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일보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서방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일정부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숙청의 과장된 기존의 반공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을 혁명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진일보한 견해를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당연히 필자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문화혁명 그리고 대숙청 파트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1794년 테르미도르 이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맥락과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와 같은 맥락에서 보는건 필자의 견해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관련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자료는 소련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책을 번역한 역자가 밝혔듯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은 쉴라 피츠패트릭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6. 결론

 

필자가 읽은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다. 호주인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 혁명 개설서다. 비록 서방의 학자가 쓴 책이라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진일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저자가 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자면 당시 볼셰비키가 추구했듯이, 공업화는 1차적으로 완수해야할 과제였다. 위에서 스탈린의 연설문을 인용했듯이, 1931년 스탈린은 10년 안에 그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쟁의 위협은 그만큼 공업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극동의 소련 안보를 위협했고,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스탈린의 연설은 예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불과 2년 뒤인 19416월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을 침공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예언적인 연설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생각해봤을 때, 공업화를 통한 군사력 증강과 군대개편 밑 현대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레닌 사후 소련에 등장한 스탈린 체제는 전쟁의 위협이라는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1918년에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의 경험은 전시의 위협과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과 경제적 타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거기다 러시아는 그런 경제적 타격을 받고, 공업화라는 달성해야만할 과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쥐고 있던 부담과 그 어려움은 상당했다. 저자 또한 스탈린이 러시아를 그 후진성에서 끌어낸다는 목표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웠는지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련사를 볼 때,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몇몇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점들이 있었고,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라는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성과물이다. 서방학계의 수정주의 학파가 어떤 성과를 학술적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시대사적 내지는 환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혁명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일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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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20-09-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두 권을 비교해보면 흥미롭겠어요

제1권력 2 -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제1권력 2
히로세 다카시 (지은이),김소연 (옮긴이)프로메테우스 2011-11-04
원제 : ロマノフ家の黃金 ― ロシア大財閥の復活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861797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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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 말기인 1978년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무조건 시청했던 만화영화 똘이장군은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상상하고 있던 북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나온 북한사람들의 삶은 말 그대로 자유와 개인이 전혀 없는 지옥과도 같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군림하는 이들은 붉은 돼지 김일성이며, 그 김일성에 충성하는 이들은 당간부 여우와 인민군 늑대 그리고 남파간첩요원 박쥐다. 쉽게 말해 만화에 등장하는 북한이란 존재는 사람이 아닌 동물인 것이다.

 

한국이 민주화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반공이라는 그 잔재의 파급력은 막강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이버 뉴스에 북한관련해서 달린 댓글들은 만화영화 똘이장군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넷상에서 반북주의를 표출하는 사람들의 경우 북한은 그저 사람이 살지 않고 지옥과도 같은 존재로만 인식되어야 하고, 비난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은 무너져야할 대상 즉 쓰러뜨려야할 적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만 보더라도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은 재앙적인 수준으로 바로잡기 힘든 단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북한은 어떤 사회이고 실제로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까? 평소에 북한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2017년과 2018년 당시 북한을 취재했던 대한민국 기자 진천규 작가의 책을 읽게 됐다.

 

책에서 나온 북한 사회는 세간에서 왈가왈부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고 공간이다. 물론 경제적인 격차에 있어 남한사회가 더 앞선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북측의 사회가 불안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불만과 공포로 얼룩진 사회라는 일각의 인식은 대다수는 허구와 상상이 가미된 거짓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북한을 생각하면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북민들이 늘어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책에 나온 북한 사회의 일상 사진들은 이것이 반공주의와 반북주의가 만들어낸 악의적 선전이 대다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북한을 취재하던 2017년 북한과 미국은 긴장관계에 돌입했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라는 소름끼치는 발언을 했었고, 이에 대응하여 북한에서도 반미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과 북한간의 긴장관계가 최고조에 달하자 국내에선 북한을 고립시키면 굴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북한을 취재했던 저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평양 사람들이 마음껏 여가생활과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즉 당시 북한의 사회는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으면서도 사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찍은 사진에 나온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했다. 이들 또한 우리처럼 연애를 하고, 가족끼리 여가도 즐기고, 휴일도 알차게 이용한다. 이들 또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고,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도 즐긴다. 맥주 또한 자주 즐긴다. 이들 또한 손전화기(스마트폰) 보급률도 늘어서 손전화기 500만 시대를 맞이했다. 패션또한 바뀌어 하이힐과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도 많아졌다. 경제제재로 기름이 부족하여 자동차를 많이 못굴릴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북한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차량들이 많이 달리는 편이다. 이처럼 북한도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고, 그런 변화를 거치면서도 사회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책에서 나온 2017년과 2018년의 북한은 과거 경제적으로 어렵던 고난의 행군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시설이나 장비가 한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북한 또한 쿠바처럼 무상의료를 전인민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교육또한 무상이라 대학에 진학하면 소련사회가 그랬듯이 학비가 없으며 국가가 많은 것을 무상으로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런 변화상에서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바로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문제다. 물론 책 저자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을 취재했고, 그 변화상과 북한의 진실을 사진을 통해 잘 보여줬지만, 북한의 시골이나 다른 곳의 정보를 균형있게 담지는 못했다. 한국도 서울과 지방도시에서 많은 것이 차이가 나듯이 북한도 마찬가지다. 또한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했고, 미국과 서방의 경제적 고립속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아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서방의 경제고립이 현재로서는 효과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써 북한에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립속에서 자력갱생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족하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자신들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 인민들이 무조건 고통스럽다느니, 전국민이 노예라느니 하는 일각의 주장은 지극히 제3자 입장에서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주장하는 편향된 생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를 많이 만들어냈고,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다. 올해 있었던 김정은 사망설이나, 현송월 총살 등 거짓말들이 재생산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북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만들어낸 그릇된 결과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분명하다. 북한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며, 우리와 같은 감정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즉 북한에 대한 악마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펜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진실을 추구했던 리영희 선생은 살아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분명히, 소위 애국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리영희 선생이 남긴 명언과 같이 우리 또한 진실이 눈으로 북한을 보아야 한다. 적어도 북한 사람에 대한 노골적인 악마화를 피해야 하며 반공주의가 양산해낸 거짓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아야 한다. 진찬규 작가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상당히 많은 측면에서 독자에게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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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2 7일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했던 이 기습 공격으로 24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했고소식은 미국 본토 전역으로 전파됐다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다음날인 12 8일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미 의회를 긴급 소집하여 일본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이 치르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이 뉴스를 들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이것으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일본도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고 하며 환호성을 외쳤고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도 자신의 일기에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소식을 들었던 이들 중에 기쁨을 표출했던 지도자가 연합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당시 유럽 정복에 착수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장제스나 처칠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에이들이 미국의 참전 소식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했다하지만 히틀러의 경우는 달랐다미국의 참전 소식은 엄밀히 말해 나치독일이 치르고 있던 양면전선에 부담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히틀러가 미국의 참전소식에 기뻐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당시 그가 했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 없다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여기서 히틀러가 얘기하는 파트너는 일본을 뜻하고, 3천 년이라는 숫자 단위는 일본의 역사를 뜻한다히틀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역사를 2600년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3000년이라는 얘기를 했었다일본에서 주장하는 2600년 내지는 3000년 역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했다고 나오고이것을 일본 역사의 시작이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자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된다.

(진무천황, 기원전 660년에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가 아니라 신화이기 때문에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선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 또한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이니다라고 주장했다가 공산주의자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아무튼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살이 있긴 하지만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후대가 연대를 올려 고쳤다는 설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즉 이 두 가지 설이 학계에선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기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진무천황이 즉위하던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보았을 때이른바 조몬 문화 시대였다매머드가 사실상 멸종하던 기원전 1만 년부터 야요이 문화 시대가 열리는 기원전 3세기까지를 조몬 문화시대라고 하는데이 시기에는 토기 발명과 밤나무나 도토리 채집 내지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으로 살던 시대였다따라서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2600년 내지는 3000년이라는 역사는 어떤면에선 과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일본 역사는 조몬 문화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는데이 야요이 시대는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벼농사의 시작과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등장하였다또한 당시 인접국이던 가야나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이것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선진 문물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규슈(九州)나 시코쿠 등 일본 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 점차적으로 관동지역 일대에 주거하고 있던 아이누 계통의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현재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야마토 시대, 일본 문명의 시작점이다.)

 

또한 3세기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합국 시대를 거쳐 4세기 초 긴키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의 성립되었다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은 5세기 무렵 왜 5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 세력들의 연대를 전제로 성립된 호족 연합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6~7세기 무렵 일본은 국가로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이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한반도를 거치지 않은 채 중국의 선진 문활르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이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이게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사용되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덴무(673~686)와 지토(690~697) 천황의 시대에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또한 일본 군주의 호칭인 천황이 처음 사용된 것도 목간을 비롯한 당시의 실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덴무 시대다따라서 일본의 천황제는 7세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일본은 7세기 이후 대륙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9~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달라졌다특히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본은 이 나라들과 대외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적인가치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10세기 이후에는 이른바 국풍화 현상이 나타났다즉 문학과 학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적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즉 유럽 중세로 치면 기사에 속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중세로 들어갔다중세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선 소위 무사라는 계급이 등장했고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 생겻으며, 11세기 중엽부터 이들은 군사 전문가인 동시에 토지 개간자 혹은 그 관리자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이 시대가 바로 헤이안 시대였다. 12세기 일본은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이 가마쿠라 시대는 150년간 존재했다가마쿠라 시대에는 소위 쇼군이라는 명칭이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따라서 쇼군은 막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이것은 천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몽골의 일본 침략, 1281년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침공했었다. 그러나 그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가마쿠라 시대인 1281년 일본은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게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었다. 13세기 몽골의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이들 또한 침략을 받은 것이다초반에 몽골 고려 연합군은 하카타 만에 침입하였지만거센 태풍이 오는 바람에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당시 일본을 침략했던 몽골-고려 연합군을 빗대어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은 경멸과 공포의 언어가 되었고몽골군을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바람은 신풍 즉 가미카제라는 말로 불리게 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항공모함에 자살돌격을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 영주세력들, 15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은 세력과 전쟁을 초래했다.)

 

몽골 침략을 기점으로 가마쿠라 시대는 점차 쇠퇴했고, 1333년 멸망했다가마쿠라 막부 이후인 1338년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이 되었지만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나타난 남북조 시대의 갈등과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보았다면 무조건 들어봤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전국시대는 일본의 여러 세력들이 나와바리 다툼에 참여했는데이 전쟁은 대략 150년간 지속되었다이 과정에서 고려 이후 새로 탄생한 나라 조선에게 대마도를 침공당하는 일도 벌어졌다그러던 1543년 전 세계적으로 무역로를 넓혀가던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획기적인 무기하나를 갖다 주었는데그게 바로 나는 새도 잡는 다는 조총이었다이 조총의 도입으로 오다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전국을 평정해 나갔다그러나 그는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고노부나가의 충실한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성분은 안좋았지만 일본 최고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인적 기대와는 달리 처참한 패배와 실패를 맛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전투를 가리킨 지도)

 

전국시대는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끝이났다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꿈이 매우 큰 사람이었고단순히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그는 과거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몽골처럼 일본을 대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그렇게 해서 명나라를 먹는 다는 이유를 들어 1592년 이른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 사람들의 거센 저항과 명나라의 지원 그리고 전멸에 가까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났고전쟁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일본군도 철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때 군대를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히데요시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의 쇄국정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며 일본은 에도 막부에 들어섰고, 이른바 쇄국정책에 들어섰다. 이 사진은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난 이후 일본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군대를 전혀 보내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틈타서 세력을 확장하나갔다.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는 에도막부가 시작됐다하지만 에도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해오던 서방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일본과 미국, 1776년 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일본의 쇄국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12년엔 가톨릭 금지령이 내려졌고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시작됐다즉 쇄국정책으로 들어간 것이다물론 나가사키 같은 곳은 네덜란드 상인들의 무역로를 열어놓기도 했지만딱 거기까지였다. 17세기 중반 일본은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고네덜란드에게는 나가사키에만 문을 열었으며중국과의 무역은 나가사키를 통해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를 통해류큐(오키나와)하고는 사쓰마를 통해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0년 뒤 일본의 이런 정책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한 서구 문명이 일본에 큰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일본의 쇄국정책에 엄청난 충격은 나라는 서구세력이었고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다바로 미국(Untied States)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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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반일 불매운동 로고, 한일관계가 파탄으로 치달았던 2019년 많은 사람들이 이 로고를 들고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일본 불매운동에 참가했다.)

 

2019년 7월 한국에서 반일 불매운동이 아주 거세게 일어났다클리앙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떤 유저가 만든 ‘NO, BOYCOTT JAPAN’이라는 로고가 유튜브나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었다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이 로고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아짐에 따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본 제품 불매 및 관광거부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특히나 일본군 위안부나 731 부대 그리고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 기업들에 대한 불매로 이어졌다.

(일본 불매운동 당시 아베 규탄 집회, 많은 사람들이 아베를 규탄하기 위해 이 집회에 참가했었다.)

 

민주노총한국진보연대 등 680여 곳의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아베 규탄 시민행동은 매주 토요일마다 아베 규탄 집회를 진행했고주한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부근에서도 진행되었다. 7월에 시작된 불매운동은 8월에도 계속되었고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국 시민사회는 강력한 불매운동을 벌이면서도 그것이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가 아닌 아베 정권과 부당한 경제보복그 조치의 기반을 이루는 군국주의와 일방주의가 타깃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하여 일본산 자동차의 경우 3개월 만에 판매량이 72%나 줄어드는 타격을 받았었다. 11월에 실시된 시사저널의 여론조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불매운동의 지지율은 78.9%로 매우 높았고불매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률도 75.8%에 달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소녀상, 이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제로 끌고갔던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시아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서도 일본의 정식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오늘날까지도 반일집회 할때 빠지지 않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필자 또한 4년전 서울 일본 대사관 근처에 있는 이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2019년 일본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데에는 바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문제가 있었다일본과 한국의 갈등에는 20세기의 피의역사가 있다식민지지배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731 부대 생체 실험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인 노무자 학살군함도 등 과거 일본이 한국에게 저지른 범죄와 악행의 역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이런 범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민족성을 말살시키며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이런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극우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 극우들은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런의미다. 필자는 이런 일본극우를 대마도에서 봤던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은 분노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의 경우자신들에게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을 공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단 문제 삼으려고 하고 있다심한 경우 해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일삼는 일본의 극우들의 경우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비하를 일삼으며 망발을 하기도 한다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망발을 일삼거나역사적인 차원에서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의 사상은 대체로 군국주의 내지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이들에게 있어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그들에게 문명화와 발전을 선물한 유산이고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인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즉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선택으로 기록되고 있다제국주의 침략의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미화돼서 기록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대해 망언을 하는 극우 파시스트 아베)

 

현재 일본의 아베 극우정권이나 이에 부역하는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에 있다따라서 양국 국민이 가지는 보편적인 관점이 매우 다른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도움과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복을 입었을 때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천황제를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전범들은 이른바 민주주의 정치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우고 확장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자민당이다여기에는 세계대전 이후 나치독일과는 달리 전범청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미국의 책임도 막중하다당시 청산되지 않고 이른바 민주정치에 입문한 이들이 현재 일본 극우세력의 뿌리라 보면 된다.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뉴라이트 출신 학자 이영훈은 이 책을 집필하여 많은이들로부터 지탄받았었다.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 과정과 태평양 전쟁에서 저지른 과오들과 악행들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지만우리가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기도 힘들다왜냐하면 해방 후 한국은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 출신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했고 그 잔재들 또한 대한민국 사회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현재 대한민국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고반일불매운동시기 이른바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출간되어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반일종족주의의 저자인 이영훈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반일을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일본군의 전쟁범죄는 과장되고 날조된 것이며친일을 비판하는 것은 친북이다.”라는 것이 그가 책에서 근본적으로 하고 있는 주장이다.

(신친일파, 양심적인 학자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하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우리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이 사회적 영역에서 청산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옹호는 냉전의 유산인 반공주의하고도 손쉽게 연결되기도 한다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반공이기 때문이다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반공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고유사점이 많다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한국의 반공주의와 현대 일본 제국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일본 제국 패망사, 이 책은 미국인 논픽션 작가 존 톨랜드가 쓴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잇는 책이다.)


(일본견문록, 이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제작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본성을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찾고 있다.)

 

필자가 이번에 일본 제국주의성장과 패망의 역사라는 시리즈를 준비한 이유는 개인적인 차원에선 언젠가는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고보다 큰 차원에선 SNS를 통해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원했기 때문이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역사와 범죄 그리고 성장과 패배를 보다 정확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사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들과 이들의 패배를 다룬 서적들은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출판됐다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분명히 밝히지만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기존의 학설에 무조건적으로 도전하는 글이 아닌말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과정과 패배 그리고 범죄를 기록한 글이다.

(일본 제국이 접수했던 최대 영토, 제2차 세계대전 중반기인 1942년 일본은 유럽을 대다수 점령했던 나치독일과 더불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을 접수했고, 미국령인 알래스카와 호주까지 위협했다.)

 

제목에서 나온바와 같이 이 글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몸담게 되는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라는 책과 넷플릭스에 있는 미국 국방부 제작 다큐 멘터리 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필자에게 이 글을 쓰는데 호기심을 불어넣어준 자극제였다그 한권의 책과 한편의 다큐멘터리는 일본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일본 제국 패망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고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비록 미국 국방부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그 나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잘 고찰했고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부터 근원을 찾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앞으로 연재하다보면 분명 부족한 글일 테지만이 글에 큰 기대를 해주시는 분들에게 한도 끝도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공부하고 학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야욕이 불러오는 결과와 피해 그리고 허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바로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패배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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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영화 리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1412일 소련의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기지에서 공군 중위 출신의 우주비행사가 탄 로켓트가 우주를 향해 발사됐다. 그 로켓트의 이름은 보스토크 1(Восток-1)였고, 보스토크 1호는 우주에 도달하여 1시간 30분간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우주비행을 마친 보스토크 1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왔고, 원래 목표했던 도착지 보다 400km 떨어진 곳에 착륙했지만 확실히 지구에 귀환했으며 조종사 또한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마친 조종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즉 유리 가가린이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강력하다. 소련이 해체 된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러시아인들 마음속에는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영웅으로써 기억되고 있다. 4년 전 공익근무를 시작하기 몇 주 전 러시아 여행을 갔던 필자는 러시아에서 레닌, 스탈린, 푸틴, 소련 상징물과 더불어 유리 가가린의 얼굴이 담긴 관광 상품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현재 러시아에서 유리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지 필자는 러시아 여행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COVID-19로 인해 사실상 밖에 나가기도 힘든 요즘 필자는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자 눈에 아주 강력히 들어온 영화 한 편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영화 유리 가가린(Gagarin First in Space)였다. 영화는 2013년 러시아에서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2시간 정도 된다. 영화는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과 그가 걸어온 인생사를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흐름은 우주비행전과 우주비행 과정 그리고 우주비행 후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중간 중간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가가린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유리 가가린의 인생회상 장면에선 어린 시절 그가 놀았던 기억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치하에 있는 마을에서 독일군의 음식을 훔치려다 동생을 잃을 뻔했던 기억,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농촌을 떠나 도시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던 시절, 전투기 조종사 시절, 아내와의 연애시절과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가가린의 모습 등의 장면이 회상신으로써 나온다. 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가가린이 동네에서 악단단원으로 연주를 하다가 도시로 가 학교에 입학하기를 결정하게 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가가린은 아버지에게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겠다고 밝히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가가린아버지 저는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학교가 교복을 준대요. 트렌치코트랑 부츠도 주고 기숙사에는 침상도 있대요.

 

아버지또 다른 건?

 

가가린식사도 주고 월급도 줘요.

 

아버지: 뭘 준다고?

 

가가린: 돈을 준다고요. 한 달에 7루블요.

 

아버지: 예전에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버지가 학비를 내줬어. 학비가 모자라서 송아지도 팔았어. 그랬었지.

 

가가린: 그건 옛날 얘기에요.

 

소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놓칠 것이다. 즉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일반인들이 다니기 힘든 학교는 소련을 거치며 무상교육으로 발전했고, 학생들이 필요한 학용품과 생필품 그리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사회가 바로 소련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에겐 영화상에서 언급되는 이 대사가 매우 반가웠고, 소련이라는 사회가 비록 미국보다는 경제적으로 밀릴지언정, 인민대중의 복지체계가 갖추어진 사회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제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당시 가가린의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선발된 우주비행사들 또한 외면하지 않았으며,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를 매우 비중 있게 등장시킨다. 영화에는 유리 가가린 다음으로 우주비행을 마친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도 나름 의미있게 다루는데, 첫번째 우주비행이 아닌 두 번째 우주비행사가 된 아쉬움이 남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사실 영화상에선 언급되지 않아서 그렇지 티토프는 인류 세 번째로 우주비행을 한 우주비행사였다. 그 이유는 가가린 우주비행 성공 1달 뒤 미국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우주비행을 마쳤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당시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들은 소련사람들이 이 사실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는 중에 알려진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 소련인민들은 우리가 인류 최초로 우주에 인간을 보냈어!”라고 하며 열광하고, 앞으로의 우주개척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었다. 코롤료프로부터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접한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은 혈압체크를 하던 중, “전 세계가 우리의 위상을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며 기뻐한다. 우주비행에서 소련인민들이 느꼈을 감정을 대변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외에도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 전 느꼈을 기쁨과 두려움 고된 훈련 및 그 외의 감정들까지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가가린이 타고 있던 로켓트가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의 그래픽과 연출 또한 상당히 현실적이고, 고증도 잘해놨기에 볼만했다. 러시아의 영화기술이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유리 가가린! 그는 1968년 단순한 비행사고로 34세의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가 전 세계적으로 준 영향은 상당했고, 수많은 러시아인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소련의 영웅 가가린과 인간 가가린을 동시에 보고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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