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인상 -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총서 8
백남운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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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 반공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확장했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 힘입어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소련의 위협을 더 많이 강조했고, 그런 역사적 내지는 정치적 관점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사례보다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사례를 세계사 시간에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서방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그러한 전제들은 과연 정확한 판단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과 서방 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 중심이 판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고 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사실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이라는 책 이전에도 소련 방문기를 다룬 책으로는 월북한 문학작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도 있지만, 지도부를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처럼 분명히 개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집필된 이들 방문기와는 그 성격과 간행 취지가 다르다. 쏘련인상은 북한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북한 내각의 최초의 공식 소련 방문 일정과 성과를 정부 각료의 입장에서 정리하였기에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문 보고서다. 그리고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가 처음 방문하여 썼던 쏘련기행하고도 시대적인 차이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태준 작가가 소련을 처음 방문할 당시는 냉전이 점차 시작하려던 시기였고,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이었던 반면에, 백남운의 쏘련인상은 냉전초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노골화 되고, 한반도 분단 정부가 남북한에 수립된 상태였다.

 

여기서 국제적인 동향을 얘기하자면, 백남운이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홍명희와 더불어 북한 정치 지도부로써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개입과 폭력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던 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19473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시점으로 그리스 내전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노골화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과 같은 자주통일을 위한 시도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더 나아가 제주4.3항쟁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도 잔혹한 학살극이 미국의 지원세력들에 의해 일어났다. 또한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물자를 장제스 세력에게 지원하여 반공의 보루를 강화했다.

 

이처럼 백남운이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 초의 미국은 제국주의적 개입과 간섭을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수법은 정말로 간악하고 사악했다. 그들은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인권, 민주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개입을 합리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과 학살도 자연스럽게 합리화됐다. 쏘련인상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악한지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자 내지는 역사학자답게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매우 잘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왜 거짓과 위선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국가의 소위 원조정책은 미제의 마샬안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샬식 원조의 특징은 상대국가의 식민지화와 미제의 반공파쇼제 확립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달러를 구세주로 광신하는 채귀인 셈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05

 

쏘베트정부의 평화정책은 미영 반동도당들의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전쟁준비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 전시기에 비하여 군사비 지출을 현저하게 증가시켰습니다. 미제예산에 있어서 1948~1949년도 군사비 지출은 1939~1939년도에 비하여 거의 15배로 증가되었습니다. 1949~1950년도에는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교서에 지적된 바와 같이 군사비 지출은 예산총액의 38%에 달하며,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다른 항목의 지출을 총계하면 1949~1950년도의 미국군사비는 국가예산의 반액 이상에 달하는 것입니다. 1949년도의 영국군사비는 1939년도에 비하여 3배로 증가되였습니다. 이상의 숫자들은 북미합중국과 영국의 현재의 지도자들의 침략적 정책을 여실히 증시하는 것입니다.”

 

출처 : 쏘련인상 p.149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완전히 처단하기도 전에 그 처단을 약속한 미제가 오늘은 전쟁방화를 일삼고 있다. 세계평화 옹호의 세력이 나날이 장성되여 가는 오늘에 있어서 반쏘전쟁뿔럭인 북대서양동맹(NATO)을 체결한 미제는 소위 세계제패의 야망을 방공선결성에 빙자하여 엄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파쇼 두목이였던 히틀러 강도배의 수법을 되푸리라는 신파쇼 두목인 미제의 전략태세인 것이다. 미제의 제2 ‘방공선즉 동양침략선은 그 거점인 하와이로부터 인도양과 호주 비율빈(필리핀) 등을 거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중거점과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조선 동해안을 거쳐 화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지대를 행동의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쏘련인상 p.210

 

따라서 저자 백남운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세우는 개념은 일종에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행위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소위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방어를 위해 개입했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에 반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계는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제국주의적으로 어떠한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나 서방에선 마치 소련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실제로 소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휘두른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정도였으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동유럽을 중심으로만 사회주의 라인을 형성했을 뿐이다. 즉 트루먼 독트린처럼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구실로 타국의 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소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되는 학습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반소 반북주의가 퍼져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 한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했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쏘련인상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보고 느낀 백남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그 회담이 조소(북한과 소련)관계에 있어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고 얘기하며, 동등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무조건적으로 친미만 외치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하고는 분명히 다르며 매우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저자 백남운은 회담에서 자신의 받은 인상을 요약했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담은 오후 8시로부터 920분까지 계속되엇던 것이다. 나는 이 회담 중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조쏘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구체적 계획성이 일층 강화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결코 외교적으로 빠게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적인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쏘련정부의 최고지도자의 성의있는 태도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 대원수의 차관에 관하여 직접 말한 민주적 원조의 원칙이 타민족의 자주 독립권을 존중하고 보장하여 주는 쏘련정부의 대외정책이 기본이 되는 것을 절실히 나는 체감한 바 있었다.

 

둘째로 위대한 쓰딸린의 말하는 모습은 토막 토막 그치는데 그것이 붉은 실로 짼 구실처럼 원칙으로 일관된 것이다. 인류의 신사회를 창조하는 최고의 기사인 만큼 세계 노동인민의 태양으로서 숭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니와 사물에 정통하는 태양이 그 두뇌 속에 서리고 있는 듯이 세계 정치사정을 꿰뚫으고 있는 천재적 정치가인 인상을 받게 되였다. 회담하는 중에 두 번이나 쓰딸린이 입을 빙그레 하고 눈우슴을 보냈다. 조선사정에도 정통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미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인 듯하였다. 쓰딸린의 일언일소는 실로 세계 민주정치의 역사적 발전방향의 지표인 인상을 직각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협조에 대한 기본적 원칙으로서 해명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대표단의 방쏘 목적이 달성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 조국의 통일발전을 위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한 바 있었다.

 

세째로 회담하는 분위기가 마치 친숙한 동지들이 공사를 상의할 때 정색하는 정도로 그렇게 막이 없는 분위기이였다. 그것은 쏘련정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일호의 야심이 없는 까닭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 대표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까닭이였다. 그러므로 조쏘 양국간의 영구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독립을 보장하는 유일의 정치노선이라는 원칙이 이 회담으로써 다시금 재확인될 뿐 아니라 전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쏘련인상 p.86~87

 

그 외에도 쏘련인상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처럼 레닌박물관을 포함한 소련의 여러 박물관들을 포함한 관광지들을 본 것과 학교 및 공장시설을 방문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백남운이 보게 된 소련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리고 인민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는 사회였다. 쏘련인상에서 가장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소련의 농업관련 분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소련의 농업분야는 발전적이지 못하고 풍족하지 못하다는 편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 백남운이 접하게 된 소련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후재건을 마친 소련의 농업생산은 예전에 공업화를 추진하던 시기와 전쟁 이전의 시기보다도 훨씬 더 풍족한 상황이었다. 즉 전후재건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소련의 농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꼴호즈 조직의 창조자인 쓰딸린의 창안에 의하여 1927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의 방침이 결정되였던 것이며 1929년부터는 꼴호즈 조직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전인 1940년도의 쏘련농업은 벌써 7천여 개소의 농기지정소와 53만대의 뜨락또르와 182천대의 꼼바인 228천대의 화물자동차가 작업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계화의 수준이 미국을 훨씬 능가하였던 것이다.

 

1940년도에 쏘련 꼴호즈에서는 쏘련 토지경작의 4분지 3과 모든 파종면적의 절반 이상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고 곡물면적의 절반을 꼼바인으로 추수하였다. 1940년도에 미국에서는 대지주의 자본주의적 농업체제로서 토지경작의 절반과 파종면적의 3분지 1만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업기계의 능률에 있어서 미국 뜨락또르의 1마력이 5.8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한다면 쏘련 뜨락또르의 1마력은 32.6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노동의 기계화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시킨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1~112

 

쏘베트정부는 대독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승리한 이후 새로운 전후 5개년계획에 있어서 꼴호즈와 쏘호즈의 생산조직을 재건할 뿐 아니라 전전의 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이 전후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동안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1940년도에 대비하여 1950년도의 말기에는 토지경작의 기계화가 70%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며 기계화된 춘기 및 추기 파종은 59%로부터 70%로 곡물에 대한 꼼바인의 추수는 43%로부터 50%로 휴간지의 재경과 전지의 추경은 71%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어 있다. 1949년도의 농업부문에서는 15만대의 뜨락또르와 29천대의 꼼바인과 160만대 이상의 견인기계 기타 농업기계를 받았다. 농기 농구의 거대한 기술적 발전은 그 품질의 개진과 새로운 구조형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도의 농촌경제는 전전인 1940년도보다도 4배 이상의 뜨락또르 기타 농기를 받았던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2

 

이처럼 백남운과 북한 정치인들이 비춰진 소련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실현된 사회였다.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으며, 파시즘적임 침략을 무찌르고 급속도로 전후재건에 성공한 소련이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정치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비추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북한 정치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였고, 실질적인 목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 북한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아직도 실행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저자 백남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남운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개척자로서, 1930년대 초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역사상을 창도하여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조선에 뿌리심어 놓은 책이었다. 그 또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신민당에서 활동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협력했으며 1947년 그가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여운형 암살과 좌우합작운동 실패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그 또한 월북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주도한 남북협상에도 참가했고,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초기 북한의 교육을 담당했다. 1961년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그리고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를 관장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역임했고, 1979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처럼 백남운은 북한 정권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서방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마르스크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고, 북한 정권 초기 인사들의 소련 방문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문학가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더불어 같이 읽어야할 책이다. 그 책과 같이 읽으면 반소주의와 반북주의의 편협한 제국주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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