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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 1945~1954 베트남 독립전쟁 회고록
보응웬지압 지음, 강범두 옮김 / 길찾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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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프랑스를 패배시킨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킨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8년간 지속되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고,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은 20년 동안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에게는 영광적인 승리였다. 식민주의에 맞서 영광적인 승리를 거둔 이 전투를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필자는 이번에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게 됐다.

 

작년 12월 밀리터리 관련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는 그의 또 다른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이다. 책 디엔비엔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호치민(Ho Chi Minh)을 포함한 베트남 공산당 인사들과 민중들이 전개한 투쟁의 기록으로써, 당시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디엔비엔푸 전투가 종결시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책의 시작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중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던 동케 전투(Battle of Dong Khe)’부터 시작한다.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책은 홍강 삼각주 전역, 드라트르 장군의 반격, 호아빈 전투, 응이하로 점령,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의 전투들, 베트남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서의 투쟁과 마지막으로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포괄한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약 4년간 베트민군이 치렀던 수많은 전투들은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들의 사기를 저하했으며, 각 전투 마다 수백 명 내지는 천명 이상 단위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주로 북베트남 지역에서 치러줬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 중부와 중부고원지대 그리고 베트남 남부를 포괄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전투가 전개된 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의 주력은 베트남 북부에 있었지만, 다른 전선에 있던 베트민들 또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1950년 당시 베트남 남부에서 있었던 전과를 예시로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부에서는 제7구역에서 7번 국도와 14번 지방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투저우못(Thu Dau Mot)에서 벤깟(Ben Cat) 작전을 전개해 게릴라전 수행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메콩 삼각주 보급로를 소통시켰다. 작전사령부는 사령관 토끼(To Ky), 참모장 레득아인, 정치지도원 응우옌 주 아인(Nguyen Duy Anh)이 보직되었다. 그 작전은 남부 베트남의 동부지방에서 프랑스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최초의 작전이었다. 한 달 동안 지속된 작전 기간 중, 우리 군은 전술기지에 대한 38회의 공격, 증원군에 대한 2차례의 매복 공격 및 차량화 부대에 대한 43회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두 차례 소탕작전과 204회의 강습작전을 통해 사살 509, 부상 155, 생포 120, 10여 개소의 감시초소 및 검문소, 12개의 교량, 84대의 차량, 5대의 오토바이 및 7대의 모터보트를 파괴했으며, 총기류, 탄약, 장비 및 식량을 노획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98~99

 

194611월 프랑스의 하이퐁 폭격과 12월 하노이 전투를 시작으로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은 전쟁 초기 프랑스군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하이퐁에서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12월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를 점령했으며, 194710월에는 레아 작전(Operation Lea)’이라 하여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그 공세는 호치민과 베트민의 해방구인 비엣박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지만, 초반의 신속한 습격과는 달리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의 전선은 점차 베트민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1950년에는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맞선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1950년 당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 군대는 가을과 겨울에 걸쳐 수많은 프랑스군을 섬멸했는데 동케 전투에서만 최소 300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정예부대들이 축출되었고, 그 부대들 중에는 프랑스 해방 전쟁에서 라인강을 건넜던 최초의 부대이자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쳤던 타보르 부대도 있었다.

 

잡 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다보면 프랑스군이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들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축출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들어가 민간인들을 죽이고 학살했다. 아이와 노인들이 프랑스군의 총에 희생되기고 했고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마을에 있던 물소는 사살되고 식량은 약탈당했다. 반면 베트민들은 민중을 존중했고,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군을 타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책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우리 식량 보급을 고사시키고 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베트남의 인력과 식량의 주 근원인 메콩 삼각주와 홍강 삼각주를 점령하고, 임시 피점령지역에서 해방 구역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추수를 마친 농민들에게 벼를 특정한 장소로 집하하도록 하고, 가족의 수를 기준으로 필요 최소한의 양만 되돌려줬다. 그리고 평정작전을 수행할 때는 베트민군을 찾는 한편으로 농작물과 생산기구들을 파괴했다. 그들은 물소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을 게릴라 두명을 죽이는 것과 동일시했다. 벼나 다른 곡식을 발견하면 불태우거나 강에 쏟아버렸다. 프랑스인들은 항공기와 대포를 사용해 논을 파괴하고, 농부들이 논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상륙용 장갑차로 논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더 야만적인 것은 탁후옹(Thac Huong), 바이트엉(Bai Thuong), 퐁락(Phong Lac), 반타익(Ban Thach) 및 도르엉(Do Luong)의 댐에 대한 폭격으로, 이로 인해 200,000헥타르 이상의 논이 말라버렸다.”

 

출처 : 디엔비엔푸 p.197~198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베트민은 민중과 함께 혁명투쟁을 했다. 혁명투쟁을 하던 베트민들은 마을에 머물 경우 민간인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베트민은 절대로 민가에서 약탈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했다. 소수민족 마을의 경우 그들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베트민은 민중에게 혁명전쟁의 대의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려줬다. 즉 베트민은 민중에게 우리가 왜 프랑스에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전쟁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베트민이 민중과 공동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호치민 주석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농민계급은 국가의 토대입니다. 그들이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저항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으려면, 그리고 인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이 현실적으로 증진되고 경작지는 농민들에게 할당되어야 합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38~339

 

프랑스군은 무수히 많은 마을에서 베트남인들과 소수민족들을 괴뢰군대에 징집했고,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를 내세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로 포장하고자 했다. 이런 프랑스의 전략은 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었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에게 식민지 지배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 많은 분노를 느꼈다. 당시 미국은 반공의 논리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접근했다. 특히나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반공주의 전쟁으로 보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1,490억 프랑에서 1952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1월까지 항공기 178, 각종 함정 170, 다수의 전투차량, 탄약 및 통신장비룰 포함해 120,000t의 전쟁 물자를 인도차이나에 보급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의 전체 전비 가운데 40%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북부 베트남의 홍강 삼각주 지역을 장악했던 베트민이 1951년 초에 프랑스군을 향한 총 반격에 나섰을 때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랑스의 드 라트르 장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미국의 지원은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전쟁 말기 미국은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다.

 

잡 장군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전개하기 까지, 프랑스군을 상대로 치렀던 전투는 대부분 승리의 기록이었다. 비록 1951년 잡 장군이 주도했던 총 공격은 프랑스군이 미국에게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면서 일시적인 후퇴로 끝났지만, 1952년 호아빈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대략 6000여 명의 적군을 소멸(사살, 포로, 실종)시켰다. 이 전투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호아빈 전역에서 프랑스가 입은 병력과 무기의 손실은 국경 전역이나 이후 발생한 디엔비엔푸 전역의 피해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호아빈 전역을 시작으로 베트민군은 응이하로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1953년 춘하 기간 중 베트민군은 홍강 삼각주에서는 7,200명을, 연합구역에서는 5,970명을 소멸시키는 성과를 이룩했다. 1952년과 1953년 북베트남 지역에서 많은 승리를 이룩한 잡 장군의 베트민군은 라오스 지역에서도 수파누봉 왕자를 포함한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라오스 혁명군과 연합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룩했다. 특히나 삼네우아의 해방은 크나큰 승리였다. 수파누봉 왕자는 삼네우아 해방은 침략자들에 대한 라오스 모든 민족들의 수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입니다. 베트남-라오스 결속의 결과이며,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운 베트남 인민과 군의 무조건적인 지원의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1953517, 98연대는 제148연대와 협조해 무옹코아를 두 번째로 공격했다. 무옹코아는 남오우강 우안으로 디엔비엔푸에서 5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약 300명의 적을 소멸 또는 생포했다. 무옹코아 지휘관인 뙬리에(Teulier) 대위도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군은 북부 라오스 작전에서 약 2,800명의 적을 소멸시켰는데, 이는 라오스에 있던 적 병력의 1/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와 같이 4,000이상의 지역과 수십만 명의 주민들을 해방시켰다. 이 지역은 삼네우아 전역과 시엥쿠앙 및 퐁살리성의 일부를 포함했으며, 북부 라오스 지역의 1/5에 해당했다. 마강 및 추강 유역의 땅도 해방되었다. 라오스 저항군은 처음으로 광활한 혁명기지를 갖게 되었다. 라오스 혁명 후방은 우리의 북쪽 해방구역 및 제4구역과 인접했다. 그래서 중국과 인접한 북베트남 국경지역의 광대한 지역이 해방된 후, 이제 라오스와 인접한 서쪽 변경의 일부가 해방된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67~368

 

1953년 새로 임명된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는 그해 11월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게 되는데, 10,000명 이상의 군대를 투입했다. 그 이후에도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지원하여 디엔비엔푸 병력 규모가 16,200명까지 증가했다. 잡 장군이 책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디엔비엔푸는 완전히 무장된 방어체계로서 전반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미국과 프랑스는 베트민이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과는 달리 탁월한 전략가였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연공연진의 접근법으로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고자 했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5만 명 이상의 군대는 200문 이상의 대포를 산에다 배치했다. 트럭이 이동할 수 없는 곳으로는 대포를 인력으로 진지까지 끌고 갔다. 대포를 배치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은 대포가 굴러 떨어지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이를 막기도 했다. 절대로 포를 적 집단전술기지 근처까지 옮길 수 없다는 프랑스인들의 예상과 달리 베트민들은 수백 톤에 달하는 대포와 탄약을 가파른 경사와 깊은 계곡을 극복하며 전장으로 옮겼다. 심지어 옮겨진 대포는 프랑스군의 105mm, 155mm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포상이 구축된 곳에 배치됐다. 또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디엔비엔푸 전선에서 베트민군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민간인들은 식량과 물자를 인력이나 자전거 내지는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여 옮겼다.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낸 베트민군은 195431317:00시에 포격을 개시했고, 점진적으로 프랑스군의 진지와 거점을 무너뜨렸다. 초기 베트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비행장을 잃었고,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 받으며 점차 고립되어 갔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195457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잡 장군은 이 영광적인 승리를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5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 509번 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우리는 바로 그날 야간에 남부구역을 공격했다. 그곳에 있던 2,000여 명의 강력한 적들은 북부 라오스로 철수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군은 추격을 단행해 20:00시까지 따라잡았다. 우리는 자정까지 그들 모두를 생포했다. 55일간 지속된 전투 끝에, 디엔비엔푸에 있던 적 집단전술기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우리의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작전은 완전한 승리였다. 1953~1954 동춘 기간의 전략적 공세가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91~493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자서전 디엔비엔푸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베트민 투사들의 투쟁 과정과 디엔비엔푸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책에 기술되어 있듯이, 1950년부터 1954년까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기록은 베트민군이 쟁취한 승리의 연속이었고, 최종적인 전쟁 승리인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된 과정이었다. 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역은 베트민 군과 인민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들 그리고 베트남 민중이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총 16,0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집단전술기지의 최고사령부를 전부 포로로 잡았으며, 거기에는 장군 1, 대령과 중령 16, 장교와 부사관 1,749명이 포함되었었다. 또한 62대의 미군 폭격기, 전투기, 수송기를 격추시켰다. 다른 전선에서는 177대를 격추했다. 프랑스군 병력은 17개 정예 보병대대(7개 공정 대대)뿐만 아니라 3개 포병대대와 약 1개 공병대대가 있었는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이런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섬멸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엄청나게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앙리 나바르가 패배한 이유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베트민군의 의지를 간과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필자 또한 이와 같은 잡 장군의 주장에 동의한다. 잡 장군의 명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52~453

 

따라서 프랑스 최정예부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패배한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을 찾자면 프랑스 제국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남 민중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공산당 지도부와 베트민 병사들에겐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이를 지원하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식민주의에 협력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뼈저린 패배였다. 뼈저린 패배를 경험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은 제네바 협정 이후 남베트남에 정착했고, 이들이 남베트남 사회의 지배세력이 됐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들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투쟁이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이들이 치르게 될 ‘20년의 전쟁또한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디엔비엔푸 전투는 우리하고도 연관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19541월에 자청한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도 재검토 했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써 도와줬던 프랑스에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공정신 고취 및 강화하고자 파병하려 했었다. 물론 미국이 거절해서 실행되지 않았지만, 식민주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려 했던 이승만 정부의 행동은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명장 잡 장군의 입장 즉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인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디엔비엔푸 전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잡 장군의 두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를 만들어낸 일련의 전투 과정(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좋은 자료다. 무엇보다 2020년 기준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주제로 한 유일무이한 책이라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매우 높다. 특히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로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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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왔고, 전후 분단모순을 극대화했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말 그대로 휴전이란, 전쟁을 잠깐 쉬는 것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결은 1945년부터 시작된 분단 모순을 극대화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부터 반복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해오던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휴전회담 이후 자유당 독재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정복주의적 통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다르지 않게 북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정책을 따라왔다. 따라서 반공주의라는 시대사적인 트라우마 및 부작용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기는 민중에게 한국전쟁을 국가가 제시한 시각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미약하게나마 부여했다. 특히나 1980년대 극심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안티테제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실제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제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은 운동권에게 있어 한국전쟁을 정부가 제시한 관점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된 반공주의라는 망령은 민중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 전 빨치산 출신인 이태라는 인물이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남부군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지만, 보수세력들의 극심한 저항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고,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전쟁 또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주장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존 주류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재로 해석할 수 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우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은 북의 대중매체나 자료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에 비해 오히려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19506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현재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개입을 했던 미국과 중국 또한 명칭이 다르다. 1950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던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지금도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에 비해 잊혀졌다 하여 소위 잊혀진 전쟁(Forgotton War)’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의미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의미가 존재한다. 이런 미국의 인식은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의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2016년 임기 마지막에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오바마의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바마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이런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발현됐다. 이와같은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듣지 않게 만들었고, 1994년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20029.11 테러라는 충격과 공포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부시의 소위 악의 축(Axis of Evil)’발언과 북에 대한 경제재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간과한다면,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반공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런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 핵무장의 맥락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에서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분명 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해석했다. 후버 연구소 출신의 영국인 우파 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자신의 저서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라고 할 정도다. 로버트서비스가 자신의 책에다 쓴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그렇게 본다. 미국학자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시작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625일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학자 애덤 울람은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서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기원

 

위에 상술한 것처럼 미국과 서방 그리고 한국이 인식한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1950625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진격한 시점부터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과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단을 예시로 들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나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놓여있던 상황은 항상 생략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된 날인 1950625일부터 보지 않고,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이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이력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기부터 소규모 독립군대를 조직해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1933년 둥닝 전투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고,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하며 그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민생단 사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기 1달 전인 19376월 김일성 부대는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 치하의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여 유격전을 벌이다 후퇴했고, 이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했고, 김일성과 그의 부대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 그러던 1940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부대는 홍기하 지역에서 대략 100~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번지던 그해 말 쯤에 소련으로 넘어가 이후 소련군 제88여단에 소속된다. 그러나 남아있던 잔존 항일 유격대는 1942년까지 작전을 전개했고, 1945년 소련 연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동료들은 소련의 푸가초프 함을 타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반을 다졌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만주 빨치산 부대 동지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인 출신들로 만든 부대가 활동했었다. 이들이 바로 간도 특설대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명장 내지는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의 지휘관 백선엽도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군 장교 김석원도 있었다. 당시 그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군 대좌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섰던 이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군의 핵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군부를 장악한 이들은 한국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항일연군 출신의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가려진 진실이었다. 국내에서 주장된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처럼 숨어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어진 음모론일 뿐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기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마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또한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이 접수하게 된 한반도 이남은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해방 후 자신의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하여 새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미군정은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윈회와 그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과거 조선 총독부의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는 19458월 대일선전포고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 군대를 무찔렀던 소련군의 군정 통치하고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도왔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 결탁하여 사회의 더 나은 사회와 임금인상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바라던 민중을 상대로 빨갱이 척결에 나섰다. 심지어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도 이승만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벌이던 세력들은 결국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진압당했다. 194843일에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잔인함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제주4.3 봉기와 이에 반대하여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일으켰던 여순 민중항쟁은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 봉기를 진압한 이들은 채병덕과 같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게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해방 이후 민중들의 투쟁과 미군정의 폭압 통치로 인해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50년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승만 친일 친미 제국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민간인 학살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미국과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도 있다. 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제주 4.3 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초래했다. 4.3 항쟁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 명에서 45000명에 해당되는데, 이들 중 최소 80% 이상이 진압을 감행했던 친일 출신의 우익 경찰들과 이북의 친일 지주 출신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 저지른 짓이었다. 이들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노인 아이었고, 1살 내지는 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매우 많았다.

 

제주4.3 항쟁의 진압을 반대하여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여순민중항쟁 또한 최소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형성하여 지주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했던 좌익 성향의 게릴라들과는 달리, 봉기를 진압하러 온 토벌군인들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여순민중항쟁에서 진압군으로 나섰던 인물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투를 치렀던 김종원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체포한 민간인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민간인들의 목을 배는 것을 즐겼으며, 이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는 진압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런 잔인한 민간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살의 대명사가 됐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하자,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보도연맹원들 대다수가 그저 쌀이나 보리 조금 더 준다는 이유로 가입하거나, 가입하면 어떤 경제적인 혜택을 기대하고 어려운 삶을 자력으로 극복하고자 가입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엄연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승인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에서 50만 명이 학살당했고, 많게는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격하면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수복하고 난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을 토벌하면서도 일어났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이 또한 학살당한 이들 대다수가 여성, 노인, 아이라는 점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인민재판과 같은 형식이었고, 주로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들 그리고 남한 군경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쉽게 말해 인민군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도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 시기 좌익과 우익의 학살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인민군의 학살은 전체 사례에서 1/6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신속히 군사개입을 감행한 미국도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68316일 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선 30명의 미군이 504명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1950726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선 미군 제1 기병사단에 의해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익 군경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전혀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좌익 소탕한다는 것을 옹호하며 이를 전적으로 도왔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는 역시 무차별 폭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개입했을 때부터 제공권을 장악했는데, 폭격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이나 도쿄 폭격 같이 대규모의 융단 폭격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석기시대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 방식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에선 무수히 많은 남북한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역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50만 톤이고, 그 중 16~20만 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635000톤이었다. 이것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미군의 폭격은 비단 북한만을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북한의 피해가 가장 커서 수도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산은 달이 표면으로 변했다. 심지어 미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게도 행해졌다. 중국의 단동이나 심양같은 곳도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또한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미군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땅 전체를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다시 38선 부근에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미군은 남한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폭격 임무는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군은 북한과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선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5. 결론: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명칭, 인식하는 관점, 전쟁의 기원, 민간인 학살까지 살펴보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한국 현대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사실 남한 정부가 정부 수립 초기에 임정 독립운동가들과 남로당 출신이었다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초기 내각에 구성하긴 했지만, 사회에서의 큰 권력은 미군정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화계와 군,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했다.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였을지는 몰라도(이것도 매우 논란이 많지만), 그의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반민중적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이 일반 양민에서 민간인이 되가는 과정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반적인 민간인이 베트콩에 가입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가족은 잃은 이들이 베트콩에 가입했듯이, 한국전쟁 시기 양민에서 빨치산에서 활동하게 된 이들 대다수가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반민중세력에게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탄압을 받아,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군에 가입을 했던 이들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그 시기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던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776년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현재 미국에서도 정통성을 북베트남과 호치민 정권에게 대도록 주고 있고, 대체로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플 메탈 자켓, 74일생 등의 영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주제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전쟁으로 돌리면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점이 한몫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대한민국 우익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과 서방세계에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 빨치산에 두고 있었다. 굳이 당시 북한정권의 균형을 이루었던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까지 합치면, 만주항일 빨치산과, 일제시기 경성 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 중국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운동 세력 그리고 소련의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반파시즘 세력까지, 항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일본에서 신속히 투입한 스미스 부대가 맞닥뜨린 인민군 부대는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 조선족 사단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던 혁명 군대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수구세력들에 의해 미화되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주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심한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를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 또한 근거가 매우 타당하고,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뒤집고 남을 정도로 실증주의적 사관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반민중적 정권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현재 남과 북의 상황이 어떻든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서훈이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공개적으로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겠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했을 때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이 부정당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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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뉴라이트 세력을 포함한 친미 극우세력들이 찬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 3명을 뽑자면, 3명은 각각 대한민국과 미국 그리고 영국출신이다. 한명은 건국의 아버지로 미화시키는 최악의 학살자 이승만이고, 다른 한명은 1980년대 미국 사회를 반공주의화 시킨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며, 또 다른 한명은 조선일보를 포함한 어용매체들이 영국병을 고친 위대한 여인으로 평가하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2013년 당시 영국 총리었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은 마가렛 대처가 그냥 나라를 이끌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원했다라고 하며 찬양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에 놓여있던 한국의 극우언론들 또한 대처를 찬양해대기 시작했다. 특히나 박근혜를 숭배하던 한국의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영국병을 치유했다”, “영국을 구했다더나아가 노조를 파괴하고 운동을 탄압한 대처의 위대한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심지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근혜는 예전부터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라고 자처해 왔었다. 그러나 영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과 한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인물인 마가렛 대처는 참으로 사악하고도 잔인한 통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

 

대처는 집권 기간 동안 영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으로 매장되었던 자유시장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고, 임금을 낮추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공공지출을 줄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광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들을 고립시켜 이들의 투쟁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광산 마을 주민들은 1년 내내 고립된 싸움을 계속하다 패배했다. 대처는 아일랜드에서 더러운 전쟁을 계속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 수감자들이 양심수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양보는 전혀하지 않고 그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을 개척했다. 대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파업을 강력한 물리적 힘과 고립을 통해 탄압하려 했고, 소수의 부유층들을 위한 정책을 선호했으며, 그 혜택은 결국 극소수의 상류층들에게만 돌아갔다.

 

또한 대처는 전쟁이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1982년 식민지를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가지고, 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을 일으켜 영국군 수백명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인 수백 수천명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대처는 199011월 자신이 총리자리에서 쫓겨나게 됐을 때에도, 미국이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걸프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처럼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침략전쟁이 필요하다면 마음껏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대처가 추구한 신자유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불황을 동반했다. 대처는 1989~1990년 인두세를 도입하여 백만장자와 빈민에게 세금을 똑같이 부과하려 했고, 신자유주의 시대 최초의 금융 거품 호황을 부추겼으며, 그게 결국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대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이를 양극화시켰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을 자행했고, 미국 레이건 정부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걸프전쟁에서도 아주 큰 욕심을 부렸다.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미화하는 대처는 제국주의자였다.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를 기뻐했다. 앞으로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마가렛 대처는 리더십이 뛰어난 여인이 아닌 살인자이자 제국주의자로 기리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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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패스트푸드 회사 맥도날드에서 ‘1955 버거를 텔레비전과 유튜브 광고를 통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광고를 보면 백인 남성이 1950년대 스타일의 클래식 카를 타고 가다가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에 들려 1955년 버거를 주문한다. 남성이 주문을 하자 갑자기 정전현상이 일어나더니 강력한 전파에 맞아 2019년 대한민국 서울로 순간 이동하여 1955년 버거를 먹게 된다. 버거를 먹은 남성은 와우! 미래의 1955년 버거네라는 대사를 치며 광고는 햄버거 신메뉴를 홍보하며 끝난다.

 

참으로 흥미로운 광고였다. 햄버거 이름에 1955년이라는 연도가 붙은 것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1955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맥도날드의 역사하고 크게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학기 미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맥도날드가 홍보한 1955 버거에 1955라는 연도가 붙는지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해볼 수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의 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1955년은 미국이 가장 큰 호황을 누리던 1950년대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대호황을 누렸고, 1920년대 미국을 능가하는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영화 플레전트 빌(Pleasantville)’을 보면 당시의 풍요로움과 번영을 잘 알 수 있다.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움은 당시의 중산층 계급에서 나타났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서 살며 자동차를 최소 2~3대 이상이나 보유할 수 있었고,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겼으며,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음료수 콜라를 즐겼다. 또한 텔레비전의 보급도 늘어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고, 그러한 풍요로움은 텔레비전을 통해 홍보됐다. 당시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던 햄버거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풍요로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가 미국 부의 상징처럼 비쳐졌고, 특히나 한국전쟁 이후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이나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게는 이상적인 미국으로 비쳐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5버거는 과거 미국이 풍요로웠던 시기를 단편적으로 나마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만든 맥도날드 광고에선 미국 중산층들이 타는 클래식 자동차를 탄 백인 남성이 햄버거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왔고, 이를 통해 미국이 번영했을 시기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나마 보여줬다. 어떻게 보면 맥도날드의 광고는 그 시기의 풍요로움이 다시 한 번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대가 미국 보수층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사회로 비춰지는 시기이기에 이런 유추방법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 햄버거를 통해 시대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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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맥도날드(McDonald‘s)가 2019년에 출시한 이 ‘1955 버거‘를 통해 그 속에 숨은 미국의 1950년대 생활사를 탐구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겠네요!
 

알라딘 페친 여러분, 여러분이 보기에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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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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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5 16: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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