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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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도 공부나 독서 혹은 해야할 일을 할때 게을러지고 싶을 때가 많다. 이건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회가치나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상시적으로 원하는 게으를 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 <빠빠라기>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남태평양에 사는 추장은 쉴틈없이 일을하며 사는 문명인들을 '빠빠라기'라고 하며, 여유없는 현대문명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빠빠라기>에서 신랄하게 지적하듯이, 칼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층들에게 게으를 권리를 호소한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라파르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활성화된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타파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하고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단결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추구했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 시간 단축과 자본가로부터의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할권리를 부정한다. 이런 점에선 확실히 마르크스하고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에서 하는 주장들이 고찰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게으를 권리를 더 강조해서 주장하는 건 반대하는 입장이다. 물론 착취를 막아야 하고 노동을 줄이는 쪽으로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나 또한 게으름을 피울때가 있고, 거기에 대해 크게 여념하지 않는 편이지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라파르그가 무조건적으로 노동을 사라지게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해도 충분하고 나머지는 한가로움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걸까?


라파르그가 보기에 노동은 강요된 것으로 길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윤리와 사회정치적 경제논리와 자유사상가들의 논리에 그런 '길들임'의 기이한 윤리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편견을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게으름은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박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자유사상가들과 사회정치적 경제논리가 추구하는 길들임에 익숙해지는 순간 평생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라파르그의 생각인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자나'라는 자기 강박적 생각은 자칫 길들여지는 첫걸음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라파르그의 주장이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에서 기계의 생산력과 가내수공업이나 인간의 생산력에 대해 지적한다. 그는 자본가들이 이윤축적을 위해 노동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에게 기계 못지 않은 생산력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라파르그는 기계가 생산하는 양이 인간이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빠르게 생산한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자본가들에겐 인간 노동자 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더 중요시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와같은 그의 주장은 상당히 소름끼친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 원리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라파르그는 자본가들이 기계가 더 효율적이면 노동자들이 죽든 살든 혹은 해고당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점에서 그는 현재 느리지 않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폐해를 예견한 측면도 없진 않다.


이 책은 단순히 라파르그가 쓴 게으를 권리만 다루는 책이 아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남긴 여러 글들을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이 책에서 게으를 권리 외에 흥미롭게 읽은 파트는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사회주의와 지식인' 그리고 '여성문제'다. 마르크스를 회상하는 파트에선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을 담은 그의 회상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마르크스가 단기간에 러시아어를 마스터하여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그의 회상이다. 그외에도 마르크스의 천재성을 아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지식인 파트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변화와 흐름 그리고 라파르그 나름의 대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여성문제는 그의 본업인 의사답게 그 시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자본가와 지배계급 그리고 자칭 잘난 자유철학자들의 인종주의적 망언과 뇌피셜들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한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그런 문제가 성별 즉 생물학의 문제가 아닌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의 강요한 사회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게으를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본능적 혹은 이성적으로 공감되는 부분도 분명히 많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본능적으로 게으르고 싶을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얘기를 마치자면 그 당시 사회주의자 중에 마르크스와 가까우면서도 방법론에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인물의 주장을 알 수 있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게으름을 자주 부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게으름을 잠시 접어두라 얘기한 뒤,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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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11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네요. 몇번을 읽어도 그 예리한 통찰에 놀라게 됩니다 ˝모든 것에 게을러지자. 사랑하는 것과 게으름 피우는 것 빼고.˝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ㅋㅋ

NamGiKim 2020-11-11 00:35   좋아요 0 | URL
정말 재밌게 읽은 책입니다. 특히나 여성문제는 통찰력이 예리하죠. 거기다 현재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자주하는 실수도 반복하지 않고요. 게으름이라는게 나쁜게 아니라 사람의 생물학적 본능일 수 있다는 걸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ㅎㅎㅎ
 

(보신전쟁 전개 지도, 1868년 1월에 시작한 이 전쟁은 1869년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마지막 정부군이 항복하며 끝났다.) 


1868년에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길로 접어들었다에도 막부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그러나 반막부세력이 주도한 신정부가 탄생하였지만그래도 여전히 일본엔 도쿠가와 세력의 존속을 주장하는 친막부세력은 이에 저항했다따라서 막부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이들 간의 갈등은 있었던 것이다이런 갈등은 당연히 양측의 전쟁으로 이어졌고이것이 바로 보신전쟁이었다.

 

보신전쟁은 1868년 1월 26일 막부의 군함이 효고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번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보신전쟁 시작 1주일 만인 2월 2일 메이지 정부는 오사카 성을 장악함으로써 막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친막부세력은 3월 29일 고슈가쓰누마[甲州勝沼전투에서도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였으며, 4월 5일엔 영국 공사인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요청에 따라 교섭을 추진했다그 결과 신정부군은 5월 3일 에도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에도 성이 신정부군에게 장악당한 이후에도 친막부 세력들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물론 이 저항은 신정부군에게 진압 당했고, 1869년 6월 27일 이들이 항복하면서 보신전쟁은 메이지측의 승리고 끝이 났다.

 

보신전쟁 이후 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869년 1월 정권의 핵심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의 번주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누려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정부에 반환하는 판적봉환을 단행했고다른 번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신분제도를 개혁하여 다이묘와 상층 귀족은 화족일반 무사는 사족농공상민은 평민으로 정했다또한 사민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평민의 성씨 사용신분 간의 결혼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허용했고, 1871년에는 번들을 통폐합하여 현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를 파견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통해 변한 일본의 수도 도쿄)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중앙에 상투를 튼),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진은 1872년 런던 체류 중 촬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조선 후기 개화파 유길준에게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라 10,000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18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근대화가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특히나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서방에 파견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경험을 통해 한층 확고해졌다이와쿠라 사절단은 원래 서양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되었고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정부의 실권자들이 포함되었다. 1872년 신정부는 학제를 제정하여 전국을 여덟 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소학교·중학교·대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제도를 설치했고, 1871년에는 단발령도 공포했다서양 문물은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다서양식 단발머리에 양복모자구두를 갖춰 입고 소고기와 같은 육류를 먹는 것이 유행했다요코하마 같은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양식 건물이 축조되었고의자와 테이블 같은 가구도 수입되었다이 당시 돼지고기를 밀가루에 묻힌 후 소량의 기름으로 프라이팬에 지져내는 요리가 일본에서 유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カツ,pork cutlet)의 시초였다.

(돈까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음식이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반 국민을 기초로 한 근대적 군사제도를 탄생시켰다메이지 정부는 육군은 프랑스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이른바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로 했고이에따라 1871년 사쓰마·조슈·도사·히젠 등에서 번병을 차출해 중앙군인 어천병을 만드는 한편지방의 치안 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한 뒤 도쿄오사카진제이도호쿠의 4개 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징병제가 시행됨에 따라 1873년에는 4월부터 징병된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각 진대에 입대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874년에는 육군의 기간이 된느 보병연대 9개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1871년 일본의 군사력은 육군 병력 1만 4,800함정 14척에 불과했지만, 1877년을 거쳐 점차 증강되었고, 1868년부터 1877년까지 약 10년간 메이지 정부는 국가예산의 15.9%를 군사비에 투입했다보병연대도 1875년에는 14, 1878년에는 15개로 증강되었다. 1870년대 전반 메이지유신 정부는 근대국가’, 즉 서구형 국가 건설을 위해 폐번치현학제징병령지조개정과 같은 일련의 제도개혁에 착수했고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동시에 대외팽창과 탈아입구의 기점이기도 했다즉 메이지 정부는 이 시점부터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들이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하나는 1874년 일본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대만 출병이고다른 하나는 1873년쯤에 나온 이론인 정한론(征韓論)이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이다. 그는 조선 말기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다.)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일거에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주장으로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대두된 이론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 섬 즉 대마도에 개입하여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며 국교 교섭을 시도했었다하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은 외교문서가 종전과 달리 고종을 격하하는 등 당시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사신의 접견을 거부했었다이를 시작으로 일본 내에선 이른바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87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다 하쿠보가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1872년에는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조선 측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으며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 1873년 8월에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이와쿠라 도모미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사진, 1875년 일본은 시험삼아 강화도를 공격했었다.)

 

이후 정한론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고정한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때부터 유지해온 대외팽창적 전략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몰락과 때를 맞춰 일본은 1875년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 앞바다를 공격했다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인천 근해의 영종도를 불법 포격하고 방화와 살인·약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이러한 일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은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강화도 조약, 1876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76년 정월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를 지휘관으로 한 6척의 함선(군함 3수송선 3)을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을 이번엔 일본이 조선에게 한 것이다이로써 1876년 2월 3일 연무당(현재 서대문 옆)에서 12개 조항으로 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당연히 강화도조약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불평등조약이었다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를 개방했고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치외법권 지역도 인정해야 했다이처럼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대외팽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 시점부터 점차 팽창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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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미국 역사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가?

 

1776년 독립선언을 통해 탄생하게 된 나라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정치체제를 소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까지 승리를 장식한 미국은 현재 엄연히 전 세계의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패권국가로 남아있다. 이러한 패권국가의 위치에 있는 미국의 입지를 잘 반영해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배워온 미국의 역사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에 따라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고 전 세계에 전파한 자랑스러운 역사 즉 위대한 역사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 널리 대중화되고 다소 신화화된 미국사는 책 저자의 말대로 미국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책의 저자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진실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 역사일 뿐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EH카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역사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다. 따라서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미국의 흑역사인 제국주의의 역사, 인종차별의 역사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빈부격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만 배워왔고, 현재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네오콘과 같은 세력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우파적 역사 수정주의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 패권주의에 충실히 이행하는 대한민국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국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미국은 단 한 번도 제국주의 국가인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내기 까지 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광화문에 나와 태극기 성조기를 같이 흔들며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고, 북폭(北爆)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이런 현상에 대해 엄밀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총제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와 현재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미국의 이면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읽게 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이자 저서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지금껏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던 미국의 이면을 가르쳐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과연 무엇일까?

 

2. 21세기 헬게이트 이라크 전쟁과 오바마 제국

 

21세기는 시작부터 충격과 공포를 미국인들에게 맛보게 해주었다.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감행한 9.11 테러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2001911일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추구했던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미국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가했다. 특히나 비행기 자폭테러로 인해 당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고, 최소 3,000명 이상이 테러공격으로 희생됐다.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이에 분노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했고, 9.11테러로부터 한 달 뒤, 알카에다가 있다는 심증만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전쟁 초기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도시와 군사거점들을 접수했다. 물론 여기에는 최신식 무기가 동원되었고, 미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한 반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뉴햄프셔대학 마크 해롤드 교수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4,000명 가까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9.11테러로 인한 미국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상회했다. 전쟁 발발기간 몇 개월 후까지 기간을 늘려 잡으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는 2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물론 시작만 좋았을 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미국은 또 다른 희생양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이라크였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포악한 독재정권이라는 비판과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런 조작극을 아주 치밀하게 계획했고, 결국 20033월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수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규탄했고, 전쟁 전후로 해서 전 세계 800여 개 도시에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소 수백만 명의 세계인이 이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동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국가 이스라엘마저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이라크 전쟁도 초기에는 미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개전 3주 만에 수도 바그다드에 진입했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 마치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보여줬던 것처럼 미국은 육··공군에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미군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이 전쟁은 전 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또한 미국이 독재자라고 규탄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도 생중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라크 전쟁을 계획한 미국이 심리전팀을 동원하여 연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현장에 나와 있다가 무너진 동상을 짓밟으며 환호하는 이라크 주민들은 사전에 동원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전쟁 초기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 두 전쟁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킨 부시 정권이 끝나고 나서 등장한 오바마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미국 역사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진보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자본가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더 극대화시켰다. 당시 미국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는 2011년 당시 독일 민간 비영리 기구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가 201110월 독일 최대의 민간 비영리기구 베르텔스만재단(Bertelsmann Stiftung)’이 발표한 보고서 “OECD 회원국의 사회정의 수준 비교(Social Justice in the OECD-How Do the Member States Compare)”에서 드러났다. 보고서는 미국을 31OECD 회원국 중 27위로 평가했다. 미국의 뒤를 잇는 나라는 그리스, 칠레, 터키 정도였다. 보고서는 빈곤 방지, 아동과 노인 빈곤율 소득 불평등, 영유아에 대한 교육비 지출,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여러 요인을 비교 고찰했다. 미국은 전반적인 빈곤율에서 29, 아동 빈곤과 소득 불평등 항목에서 28위를 기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아동빈곤연구센터는 아동의 42%가 저소득 가구에서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중 절반은 빈곤선 이하였다 AP통신은 201112월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 상태이거나 저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계청은 20104,620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선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는 52년 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로 최고치였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69~370

 

그뿐만 아니라 오바마는 전쟁을 지속했다. 이라크에서는 철수하려는 모습을 보인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역대 최대치인 10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드론 공격의 횟수를 늘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거기다 오바마 정권 시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른바 킬팀(kill team) 사건이라 해서 젊은 미군 병사들이 민간인을 죽인 뒤 정당방위처럼 조작한 사건도 있었고, 특히나 드론 공격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오바마가 보낸 NATO군의 공습으로 죽어나간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속출했을 정도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아주 굳건히 유지했고, 심지어 네오콘들한테 아낌없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어떤 네오콘 학자는 오바마의 대외정책이 네오콘 정권 때하고 달라진 게 없다며 소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게 부시였다면, 그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은 오바마였던 것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철수하고자 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 4,500명이 사망하고,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이 사망했다. 20115월 오바마는 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파키스탄 정부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였다. 이처럼 오바마 정부 또한 미국을 제국주의의 길로써 이끌었고 욕심 많은 자본가들과 결탁하는 길을 걸었으며, 결국 대외정책에서도 네오콘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따라서 오바마는 제국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3. 냉전사의 재인식

 

냉전(Cold War)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90년 소련이 붕괴직전까지 대략 45년간 지속되었던 시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형성했던 반파시즘 동맹에서 벗어나 서로가 모든 면에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고, 이것은 자칫하면 양측의 핵전쟁 위기로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이 데프콘 2까지 발동하였고,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쇼프가 합의를 볼 때까지 전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시대에 대해 배울 때 보통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미국보다 더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배웠고, 또 그렇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연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 것은 올리버 스톤의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절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정도로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 19467월에는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나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를 발표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그리스에서 전 나치 협력자와 우익들에게 무기와 장비 그리고 고문단을 지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전 무솔리니 정권 협력자들을 동원하여 정권 전복에 착수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인기가 없고 부정부패가 극심한 중국 국민당 정권을 지원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위해 CIA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일제로부터 35년 만에 독립한 한반도 이남에 분단정부를 수립했고, 민중에게 인기 없는 늙은 지도자 이승만을 지원했다.

 

소련의 경우 미국에 비하면 그런 노골적인 개입은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고, 오히려 미국이 소련을 위협했으며 실제로 커티스 르메이는 소련에 대한 핵폭격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으로 갈 뻔했던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의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미군의 반인륜적 범죄는 매우 잊혀졌다. 특히나 미국이 남북한을 가릴 거 없이 투하한 폭탄과 네이팜탄은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다.

 

특히나 냉전에서 미국의 개입이 노골적이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에는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반공주의자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민중의 80%가 항일 항불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무차별 융단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고엽제 투하를 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로버트 맥나마라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죽인 베트남인은 380만 명이나 됐다. 즉 이들 대다수가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죽은 것이다. 심지어 1968년 미라이 마을에선 미군 30명이 504명이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퍼부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을 성공시키자 피그스만 침공을 개시했었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쿠바 정권 전복 훈련을 개시했으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미국이 이런 시도를 해서 피델 카스트로가 소련의 흐루쇼프와 협력하여 핵미사일을 배치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맥락이다. 또한 미국은 과테말라에 등장한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권을 CIA를 통해 전복시켰고, 1954년 아르벤스 정부가 사퇴하면서 성공했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고, 민주주의적 법칙마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1970년대 칠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1970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칠레에 적용했다. 그러자 미국은 경제제재를 하는 것은 물론, 사보타주를 통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이 인기가 떨어지지 않자,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사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수천수만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즉 미국의 지원으로 칠레는 피바다가 되었다.

 

미국에서 진보의 이상이라고 불리는 존F.케네디 대통령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었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데 열정적이었고, 쿠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또한 당시의 미국 흑인인권은 여전히 차별적이었으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책에서는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케네디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상황이 심각해진 카스트로의 쿠바에 대해서도 노선 선회를 고려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철군을 추진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쿠바 문제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CIA 주도의 사보타주 공작을 다시금 재가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케네디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라틴아메리카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계속 지원했다. 심지어 19633월에는 과테말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6

 

4. 로널드 레이건의 실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했던 나라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경제 사정이 점차 나빠졌다. 특히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선 1947년에 폐지했던 배급제를 다시 실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고전하며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시기 미국에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미국이나 한국 사람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로널드 레이건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영웅적 전사였을까?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널드 레이건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전 정권인 지미 카터정부가 닉슨 정부에서 형성된 데탕트를 추구하며, 대외적인 지원을 제국주의적으로 했던 것에 반에 로널드 레이건은 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특히나 그의 극우 반공주의적 도그마는 중남미에서 잘 드러났다.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43년간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통치를 해온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건설했다. 당연히 미국의 카터는 반공주의자들을 지원했고, 이런 지원은 로널드 레이건에 와서 더 심화되었다. 레이건이 이들을 타도하려 했던 이유는 산디니스타 정권은 토지, 교육, 의료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지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은 잔인무도한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레이건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까지 촉발했다. 즉 이란에 인질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빌미로 무기 거래를 하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했던 것이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학살로 최소 3만 명이 희생됐다. 그 외에도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 극우세력들을 지원하여 이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 당시 레이건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을 이른바 자유투사로 칭찬했는데 그들의 실체는 민주주의와 정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실체는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CIA의 정보 사이드가 완전히 찌그러든 상황에서 공작 사이드는 물을 만난 고기였다. 엘살바도르 미국 군사고문단 책임자 존 왜겔스타인 대령은 진짜배기 게릴라 소탕작전 기술은 야만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받은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과테말라 정부군, 그리고 미국이 주도한 니카라과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딱 들어맞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은 강간, 고문, 거세, 사지 절단, 참수, 시신 절단 같은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과테말라 정부군의 경우 1981~83년 마야문명의 후예인 아메리카 원주민 농민 약 10만 명을 살해했는데, 그런 잔학성을 키워주기 위해 훈련 단계부터 신병들을 구타하고 모욕하고 하수구에 처박는가 하면 똥통에 장시간 처넣기도 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당한 정부군 병사들은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4~165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8~169

 

얼마 후 놀라운 학살행위가 또 벌어졌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살바도르 정부군이 1981년 말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군은 13세 미만 어린이 358명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을 난사해 죽였다.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73

 

로널드 레이건은 반공주의자로 베트남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타국 침략에 나서기도 했었다. 바로 그레나다 침공이었다. 대략 7,000명의 미군이 그레나다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명분은 쿠바의 지원을 받는 그레나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침공 작전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미군 29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으며 헬기 9대를 잃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작전 성공 후 바로 철수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이건은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굴욕을 극복하고자 했고, 그 승리에 심취했었다.

 

또한 레이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맞서 싸우던 이른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당시 레이건은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온갖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고, 이런 지원을 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9.11 테러를 일으키게 되는 오사마 빈라덴도 포함됐다. 미국은 과거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소련 또한 겪기를 바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다. 레이건은 냉전 말기 반공주의 정신을 강화하며 국방비 예산을 늘렸던 반면, 민중의 빈부격차와 복지를 위해선 예산을 삭감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에따라 미국의 빈부격차는 더 극대화됐다. 왜냐하면 그가 독점기업들을 위해 세금을 삭감해주고, 민중의 복지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책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과연 레이건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무엇일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지시도 내리지 않는 행정부 수반이었지만 부활한 강경 반공 우파 인사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군사화하면서 냉전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레이건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대주었다. 또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국지적, 지역적 분쟁을 냉전의 싸움터로 확대시키는 한편 공포정치가 민중의 운동을 억압하도록 방조했다. 그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군사 부문에 투입한 반면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삭감했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대폭 삭감했고, 국가채무를 3배로 늘려놓았으며,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취임한 첫해인 1981)에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85)으로 바꿔놓았다. 198710월에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주식시장 붕괴를 맞아야 했다. 레이건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격용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날려버렸다. SDI라는 유치한 환상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 종식에서 레이건이 한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217~218

 

5.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나라?

 

미국인들에게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민주주의를 전파한 역사다. 미국인들의 이런 관점을 반영이라도 한 듯 서방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밴드 오브 브라더스’, ‘씬 레드 라인’, ‘아버지의 깃발’, ‘핵소고지’, ‘퓨리등 미국과 서방 연합군의 중심이 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주체는 미국과 서방연합군이 아니라, 바로 독일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은 단기간에 유럽전역을 점령했고, 1941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받았고, 수도 모스크바 외각까지 독일군이 진격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나치 독일과 기업분야에서 협력했던 미국은 공식적인 차원에선 나치독일에 대해 비판을 했었다. 따라서 1941년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후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소련에 대한 물자지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에선 소련을 칭찬하는 선전과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이오. 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 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1942년에는 미국의 영화사 헐리우드도 소련 찬양에 열을 올렸다. 1942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고,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

 

미국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지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행보가 이어졌지만, 1941년부터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토록 원했던 제2전선을 형성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전선은 1944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형성됐다. 즉 이 말은 제2전선을 형성하기 거의 3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소련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는 얘기가 된다. 책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4466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2전선이 마침내 열렸다. 원래 약속보다 1년 반이나 늦었지만 10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과 각종 차량 3만 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것이다. 상륙 과정에서 9,000명이 전사했다. 그 시점에 소련은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유럽 상당 부분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독일로 밀고 들어가게 된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 시점까지 소련은 거의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워왔다. 노르망디상륙작전 개시까지 소련군은 대개 200개 사단 이상의 적과 전투를 한 반면 미군과 영국군은 둘 다 합쳐도 10개 사단 이상과 교전한 경우가 드물었다. 처칠은 독일 군사력의 내장을 뽑아낸 것은 러시아군이라고 인정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600만 이상, 서부전선과 지중해 일대에서는 100만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209

 

1945년 나치독일이 패망하는 시점까지 2,600만 명 이상의 소련사람이 사망했다. 그 중 1,000만 명이 소련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나치독일군의 무차별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다. 소련군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아우슈비츠(Auschwitz)나 트레블링카(Treblinka)같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수용소도 같이 해방시켰다. 즉 나치 독일의 광적인 유대인 학살을 끝낸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고, 그런 나치독일을 무찌른 것도 소련이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가 바로 소련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이유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원자폭탄 자체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보단 소련군의 만주 진격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이 원자폭탄 1,2발을 도시에 사용하는 것과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한 융단폭격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의 상륙에 맞선 결전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58월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러한 일본 지도부의 계획은 무산 됐다. 거기다 4년간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인 관동군을 붕괴시켰다. 그 붕괴속도도 빨라서 소련군의 작전은 불과 1주일 만에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을 정도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은 몽골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와 사할린까지 진격했다. 소련군의 진격에 일본이 절망에 빠졌던 것은 바로 일본의 산업기반이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더라도 식민지 조선과 만주로부터 지원받음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희망을 소련군이 말 그대로 붕괴시켰다. 따라서 일본은 항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련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외면하고자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이다.

 

6. 미국 민중사와 차이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출판된 비슷한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1980년대 출판되어 100만 권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베스트셀러다. 그 책은 국내에도 198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고, 2000년대 개정판이 다시 번역되기도 했었다. 필자 또한 그 책을 몇 년 전에 읽었고,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나 억압받던 계급이나 피지배계층의 시각에서 서술한 아래로부터 역사쓰기는 참으로 훌륭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미국 민중사>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역사부터 2003년 이라크 전쟁 이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고, 국내에 번역된 개정판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를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따라서 현대관련 부분은 좀 미약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첫 판은 1980년대에 나온 것이고 개정판도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이라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콜럼버스 시대부터 시작한 미국의 추악한 범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미국 민중사>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미국 민중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특히나 <미국 민중사>에서 짧게 언급하는 9.11 테러 이후의 역사를 이 책은 아주 깊이 다루고 있다. 적어도 오바마 재선 이전까지 말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 좀 더 추천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미국 민중사>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한계가 있고, 또 소련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는 반면, 이 책은 소련에 대해 비판은 하더라도 적어도 소련의 업적에 대해 나름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미국 민중사>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미국 민중사>를 읽지 않았다면, <미국 민중사>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또 다른 이면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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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10일 당시 일리노이 주 출신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한 사람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구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신속한 종결, 에너지 자립 수준 확대, 국민건강 보험제 마련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88월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됨에 따라 대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당선은 전 세계적으로도 쟁점이 되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현재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1NBC와의 인터뷰에서 케냐에 있는 오바마의 할머니가 오바마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자기가 직접 봤다고 한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이런 트럼프의 막말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바마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196184일 출생하였다. 오바마가 2살이던 1964년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 던햄은 하와이에서 대학에 다니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토로와 재혼하여 아들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갔다. 버락 오바마는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자카르타의 기독교계열 학교에 다녔다. 그가 10살이 되던 1971년 다시 하와이 홀놀루루로 돌아왔고, 1979년에는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10대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오바마는 10대 시절 알콜, 마리화나, 코카인을 복용했던 적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1977년에 인류학 현지 조사차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마약에 손댄 일에 대해 최대 도덕적 과오였다고 2008년 대통령 후보 공개 토론에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1979년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교에 입학했고, 2년 뒤인 1981년에는 뉴욕시의 콜롬비아대학교에 편입하여 국제관계를 주 전공으로 정치과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뉴욕에서 4년을 보낸 뒤 오바마는 시카고로 가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19856월부터 19885월까지 대략 3년간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1988년 말 오바마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991년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뒤 그는 시카고로 돌아갔다. 19924월부터 10월까지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의 투표 프로젝트를 감독하여 크레인스 시카고 비즈니스에서는 오바마를 1993년 지도자가 될 “40세 이하 40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하였다. 12년 동안 오바마는 시카고 법학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대략 8년간 일리노이주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일리노이 제13구에서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윤리 및 의료 입법에서 민주 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1998년 총선과 2002년 총선에서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31월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 의료 및 인간서비스 위원회 의장의 되었다. 200411월에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상원선거에 도전했으며 200514일 상원의원 취임선서를 하게되었다. 미국의 내셔널 저널지는 2007년의 선별된 득표를 평가한 자료를 근거로 그를 가장 자유주의적인상원의원으로 등재하였으며 2005년에 162006년에는 10위에 등재되었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명성을 쌓아가던 오바마는 2007210일 미국 대통령 선거출마를 발표하였고, 200811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9120일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임 부시 대통령이 남겨놓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건강 보험 개혁안 통과와 이라크 전쟁에서의 철수 그리고 멕시코 만 원유 유출 사고 등이 그러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을 고수한 나라다 보니 건강 보험 개혁안은 통과는 되었으나 실질적인 국민의료보험 같은 보편적인 의료보험제를 동원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자유주의적 모순일 것이다. 즉 이런 보편적 복지 부분에서만큼은 미국은 그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 말까지 철수하긴 했지만,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의 철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이라크에선 이라크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그는 공화당 보다 더 강경적인 대북강경정책으로 나갔고, 북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그의 집권기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파키스탄에서 전개되었던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tune Spear)일 것이다. 그 작전을 통하여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대통령 오바마는 빈라덴 사살 소식을 알리는 연설을 했고, 이는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큰 결집력과 호소력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특히나 오사마 빈라덴이 죽었을 당시 미국 사람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이를 환영했다. 아무튼 2012년 대선에도 출마를 하게된 오바마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시 한번 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4년간 더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보냈다. 2차 집권 시기 그는 2016년 한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방문하여 쌀국수를 먹어서 인증하기도 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트럼프에게 넘겨주면서, 버락 오바마는 정치 인생을 마쳤다.

 

미국의 반트럼프 측 사람들에게 있어서 버락 오바마는 한국으로 치자면 대략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 스텐스일 것이다. 소위 미국사회에서 보수라고 여겨지는 공화당하고 대척점에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위치와 대략 비슷하다. 그리고 의료문제와 인종 문제를 공화당 측 인물들보다 더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반공화당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매력 포인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 건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특히나 그의 외교정책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미국 공화당 인사들보다 더 반북적인 스텐스를 취했고, 북조선을 더 고립시키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했다. 대북경제제를 더욱 강화하여 북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즉 오바마라는 인물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한의 친일지배계급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위에서 상술한 넵튠 스피어 작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았던 제국주의적인 처사였다. 또한 그들이 일방적으로 무력침공하여 일으켰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2014년까지 미군 철수를 하기로 했으면서 궁극적으로 철수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성공시키진 못했으나 미국의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스텐스를 가진 인물이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선 사회주의적 가치를 좀 우호적으로 보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의료보험 제도를 얘기했을 때, 복지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공화당 극우파 세력들은 그 정책을 강력히 부정했던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본 그는 비록 미국 내에서 의료 보험을 생각했던 사람일지는 몰라도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제국주의적이고 대북강경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북한을 이명박 정부와 같이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면서 그들의 붕괴를 꽤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진보주의자가 아닌 아들 부시나 트럼프와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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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0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바마가 젠틀하게 나가서 그렇지,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강경 노선의 시작도 오바마 때부터였죠. 부드러운 이미지 속에 가려졌지만, 말씀하신대로 미국 패권주의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NamGiKim 2020-11-07 22:43   좋아요 0 | URL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보면 어떤 네오콘 성향의 교수는 우익칼럼에 오바마시대에도 우리 미국의 정책은 변함이 없다 주장했다죠.
 
인천상륙작전 : 익스텐디드 에디션 일반판 (2disc)
이재한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리뷰는 유튜버 거의없다님의 영상 리뷰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또한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어차피 영화가 SSibal 등급이라 스포당해도 상관없겠지만, 안본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미리 밝힙니다.)


1.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인기도


박근혜 정권 시기 소위 보수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감을 받은 영화나 대중매체들이 등장했다. 한국 역사 최초로 가장 많은 관람객(무려 1,761만 명)을 기록했던 명량이나 국제시장 등은 대한민국 인구 최소 1/5은 관람했다. 그리고 2015년엔 남북한의 해상교전을 다룬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하여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 인사들이 단체관람을 하며 이른바 좌파 비난에 열을 올렸고, 총 604만 명이 관람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던 2016년 미남 배우 송중기와 송혜교가 등장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대통령 박근혜의 칭찬을 받아가며 최고 시청률 38.8%를 기록했다. 물론 이 영화는 지나치게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점에서 “과거 베트남을 침략하여 민간인 학살을 했던 군대를 미화했다”는 베트남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되고 나서 3개월 뒤, 굉장한 인기를 끌게 될 영화가 개봉했다. 그 영화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세를 역전시켰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를 배경으로 했고,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바로 이재한 감독의 영화 인천상륙작전((Film)Operation Chromite 2016)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나오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이정재와 진세연, 박철민 등과 같이 한국에서 잘나가는 배우들을 모조리 끌어모았고, 쉰들러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와 나니아연대기에서 아슬란 목소리를 연기했던 배우 리암니슨을 맥아더로 얼굴 간판을 내세웠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홍보된 인천상륙작전은 어버이 연합, 엄마부대와 같은 극우단체들의 단체관람이 이어졌고, 새누리당 의원들의 단체관람 그리고 영화 감상문 쓰기 대회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여름철 휴가를 타고 개봉한 이 영화는 대략 705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돌파했고, 8월 20일에 영화를 본 대통령 박근혜도 극찬에 나섰다.

(영화에 등장하는 맥아더)


그러나 공중파 방송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와 대통령의 칭찬, 그리고 일베와 디시인사이드 극우파들의 대대적인 홍보와 댓글 칭찬, 영화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많은 평론가들에게 시대역행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도 일베와 극우들의 10점 테러가 이어지고 있는 네이버 영화 평에 있는 기자·평론가 평점은 10점 만점에 3.41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보편적인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매우 많은 작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2016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던 나는 영화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참인 요즘 무삭제 판으로 이 영화를 끝까지 관람했다. 2016년에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영화가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얘기해보고자 한다.


2. 영화 연출의 엉성함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총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 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것을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의 첩보전을 소재로 했다. 따라서 인민군 치하의 인천에 침투한 스파이들이 긴장감 있는 첩보전을 치러 맥아더가 인천상륙에 성공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의 영화 내용의 핵심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집단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엔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인천에 침투한 장학수(이정재)를 포함한 스파이들, 인천지구 방어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림계진(이범수 역)과 인민군, 인천에서 몰래 유엔군과 한국군을 돕는 켈로(KLO)부대,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와 유엔군 사령부다. 영화는 인민군이 인천 해안에 깔아놓은 기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파이들의 첩보전에 절반의 상영시간을 할애한다. 즉 기뢰를 찾으려는 장학수와 그가 스파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림계진의 심리전이 계속되고, 결국 정체가 탄로 나면서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총격전 부분에서 정말 말 그대로 너무 대충 만들었다. 좋은 영화 기술을 가지고 1인칭 FPS 게임이나 메탈슬러그를 만들었다. 주인공 장학수가 긴장감 있는 대치 끝에 림계진과 총격전에 돌입하는데 PPSH-41 기관단총을 들고 인민군들을 거의 몰살시키는 수준으로 사살한다. 마치 내가 콜오브듀티 캠페인 모드에서 대량으로 몰려오는 적군들을 기관단총으로 몰살시키듯이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1%의 과장이 없는 주장이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플래시 게임 메탈슬러그(Metal Slug)에서 권총이나 기관총들고 모덴군을 살해하는 수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영화상에선 권총이나 기관단총으로 탱크나 장갑차 그리고 항공기를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치하고 있는 장학수와 림계진)


쉽게 말해 여기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들은 엄청 잘 죽는다. 유튜버 거의없다의 말처럼 총에 맞기도 전에 알아서 죽기도 하고, 허리 몇 번 돌리다 죽기도 하며, 권총으로 무장까지한 사랑이 아빠(추성훈)는 굳이 칼로 죽이려다 도리어 장학수에게 맞짱뜨다 발려서 죽기까지 한다. 사후경직으로 죽어가는 주인공이 방아쇠를 당겨 쏘면 한 2~3명 정도는 죽기가지 한다. 심지어 주인공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치 콜오브듀티를 하듯이 장갑차에 올라타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 군함도 파괴하지 못한 함포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이처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주인공 혼자서 인천을 점령하는 수준으로 연출과 전개라는 점에서 매우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들을 셀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다.


3. 반공주의와 역사왜곡


인천상륙작전에서 필수적으로 비판할 지점이라면 역사왜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는 “빨갱이는 패륜아다!”, “빨갱이는 이념만 알아서 부모 형제도 모른다.”, “이들은 침략을 일으킨 사악한 무리다”와 같은 어버이 연합류의 반공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다. 반공주의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영화는 사실관계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즉 역사왜곡까지 저지른 것이다. 영화는 스파이로 위장하기 위해 장학수는 인천방어지구를 감시하러 가는 한 인민군 장교롤 살해하면시작한다. 거기서 장학수가 살해하게 되는 한 인민군 장교는 러시아어로 된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은 바로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다. 


이 작품은 과거 소련시절 영화로도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소설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즉 소련의 대조국전쟁 시절 당시 전쟁이 인간과 전 인류 사회에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잘 묘사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른바 “빨갱이는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영웅적으로 왜곡한다”라는 이상한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그 작품이 시사하는 부분과 맥락은 전혀 얘기하지 않고, “그 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로만 묘사한다. 즉 영화는 어떻게든 빨갱이는 나쁘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서 온갖 무리수를 다 던진다. 

(기관단총을 쏘기전의 장학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항상 잘죽는 빨갱이를 많이 언급했으니, 빨갱이 대장인 림계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영화상에서 나오는 림계진은 말 그대로 악의화신이다. 그는 그 어떤 면에서도 무자비하고 잔인해야할 대상이다. 똘이장군에 나오는 붉은돼지와 조커의 DNA를 추가한 빨갱이 대장 림계진은 악당으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다. 유튜버 거의없다가 정리한 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악당처럼 웃기

2. 악당처럼 분노하기

3. 악당처럼 자기편 죽이기

4. 악당스럽게 죄없는 사람 방패로 이용하기

5. 주인공 놓치고 악당처럼 째려보기

6. 악당느낌나게 주인공과 서로 총겨누기

7. 악당스러운 안면부상

8. 악당답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하기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 빨갱이 대장 림계진은 정말 이런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들은 천하의 악당이고 쌍놈들이어서 죄없는 사람들 막 죽인다. 진세연처럼 예쁜여자도 반동의 조카라고 막 주먹으로 때리며, 얼굴에 걸쭉한 침을 뱉어 모욕을 주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빨갱이들은 이러한 존재들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빨갱이들은 말 그대로 패륜아들이다. 부모나 가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념을 위해선 죽이는 놈들 말이다. 

(인민재판 장면)


영화의 주인공인 장학수도 설정상 한때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해방 후 자신의 아버지가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려 체포되었는데, 본인이 쏘지 못하고 자신의 친구가 쏘아 죽였다. 거기에 열받은 장학수는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들을 다 몰살시키고 혼자 월남했다는 게 영화의 설정이다.(근데 재밌는 건 장학수 엄마는 인천에서 국수집을 한다????) 즉 영화는 빨갱이들을 욕하기 위해 박정희 시절 반공영화에 등장하는 레파토리를 그대로 이용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민재판도 정말 수준낮은 반공영화의 모습 그대로다. 사실 이런 레파토리에 더 가까운 대상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빨갱이라면 부모 형제든 할거 없이 무조건 죽여야 한다 얘기한 적이 있고, 실제로 국민보도연맹의 희생자만 보더라도 대다수가 죄없는 민간인이었으며, 오히려 한국전쟁 초기 조선인민군은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또한 인민재판도 지주와 자본가, 친일파 그리고 한국정부의 군경과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영화 상에선 일반적인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반동으로 몰려 처형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런 행위를 한 것은 인민군이 아닌 국군과 우익 청년단이었다. 쉽게 말해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사실관계도 맥락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드라마 서울 1945나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 인민재판의 경우 어쨌든 인민의 직접 재판에 참여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재판인 반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선 림계진이 자기가 화가나면 죽이고 싶은 놈 죽일 수 있는 장치가 바로 인민재판이다. 형식적인 재판절차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죄목을 붙이는 것도 너무 단순해서 영화가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정도다. 영화의 수준낮은 반공주의는 주인공 장학수가 이끄는 부대 대장 중 한사람인 남기성(박철민이 연기했고, 영화 설정상 대원들의 이름을 죽고난 뒤에 밝혀서 알기 힘든 수준이다. 근데 이거 고인드립 아닌가?)의 농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민군들의 군기를 잡을 때, “우리의 거X기는 우쪽에 있으면 안 되고, 무조건 좌쪽에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남조선 반동이다.”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반공의식 고취라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장면이기에 당연히 비판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나온 트럭 추격씬)


영화는 제목을 인천상륙작전으로 다뤘지만 인천상륙작전 장면은 아주 잠깐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약간 오마쥬한 장면으로 대체해준다. 영화상에선 미군의 B-29 폭격기가 인천 앞바다 월미도를 포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월미도 포격은 인천상륙작전에 있어 엄청난 흑역사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이 월미도를 폭격했을 때, 그 폭격으로 죽은 이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상에선 단순히 군사적인 시설만 폭격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상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보이는 미화는 아마도 제국주의자 더글라스 맥아더에 대한 미화일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더글라스 맥아더는 만주에 핵공격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고, 말 그대로 한반도 이북과 만주에 핵공격이라는 전쟁범죄를 범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하는 맥아더는 이성주의와 휴머니즘 그리고 낭만적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꼰대로 묘사된다. 하지만 맥아더는 절대로 그렇게 이상화할 인물이 아니다. 그는 미군정을 실시하여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고, 무엇보다 731부대의 대장 이시이 시로를 살려준 장본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산주의 소탕을 위해선 핵무기까지 사용하려 했던 전쟁광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필리핀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범죄자다. 쉽게 말해 그는 미화할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투철한 반공의식을 보여주며 한국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러 온 박근혜)


마지막으로 이 파트에서 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을 얘기하고자 한다. 영화상에서 악마로 묘사되는 림계진은 무삭제판에 따르면 엄청난 이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그는 소련 프룬제 대학에서 군사훈련 및 사상교육을 받았고,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있었던 88특별여단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즉 이말을 돌려말하면 그는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설정을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극중에서의 설정이지만, 만약 이걸 상세히 들어다보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독립운동가를 악마로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4. 범죄조직 서북청년단 미화


지금까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반공주의와 역사왜곡을 생각보다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역사왜곡을 저지른 것을 넘어서 일반적인 왜곡보다 더 심각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북청년단을 아주 심각하게 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는 켈로(KLO)부대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애국자로 등장하는 켈로부대는 사실 해방 후 월남하여 온갖 테러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서북청년단이 모여 만든 부대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팔미도 등대 점령 장면도 실제 있었던 작전으로 서북청년단 출신인 부대원들이 했던 작전이다.

(서북청년회)


우선 서북청년단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겠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북한에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처벌받게 된 친일파들이나 친일지주들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반소 반공이라는 기치아래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테러와 범죄행위를 일삼았고, 특히나 이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아래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서북청년단들이 벌인 학살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고,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군과 경찰에 편입되어 빨갱이 소탕이라는 이름하에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서북청년단을 미화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미국사를 전공한 뉴라이트 교수 이주영이 쓴 서북청년회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으로 한반도가 38도선으로 갈라질 당시 도쿄의 미극동사령부 정보담당 G-2는 서울에서 북한의 소련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월남한 서북청년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orea Liasion Office, KLO)가 설치되었는데, 겉으로는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정의사로 불렀다.”


출처 : 서북청년회 p.138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1950년 9월 15일에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그 중요한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미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도쿄 미극동사령부 G-2에 근무하던 정보통인 계인주 육군대령과 연정 해군 소령을 끌어들였다. 작전에는 미군장교 3명도 가담했다. KLO 부대에 속한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했다. 계인주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주재 만주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서울에 와서 미군정 경찰에 들어가 동대문경찰서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그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그는 도쿄 미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 HID대장을 지낸 전력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 9월 15일 전날 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기 위해 계인주 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대위와 3명의 미군장교가 팔미도에 올랐다. 1950년 9월 15일 0시 등대에 불이 켜지는 것을 신호로 먼 바다에서 대기 중인 261척의 대선단이 인천 항구로 들어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계인주는 미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


출처 : 서북청년회 p.139~140


팔미도 등대 점령은 극중에서 인천에 침투했던 장학수 부대원들과 KLO부대가 같이 하는 걸로 나온다. 즉 이주영의 책에 나온 것처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범죄조직 서북청년단을 이른바 애국자로 묘사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천상륙작전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이런 영화를 공중파 방송에서 홍보했다는 것이 참으로 기가막힐 지경이다.


5. 인천상륙작전은 범죄집단을 미화한 영화다!

(역사왜곡 규탄집회)


지금까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내가 이 영화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이유는 이 영화가 너무나 심각한 수준으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고, 절대로 미화해선 안 될 범죄조직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화가 서북청년단을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문제가 매우 많다. 나는 특히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을 미화한 것을 더 강력히 지적하는 이유는 영화가 흥행했을 당시 반공주의와 시대역행적이라는 비판은 있었지만, 정작 서북청년단을 미화했다는 비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점을 더 강력히 비판하고 싶다.


서북청년단을 미화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관객수 700만을 만들었다는 건 한국 영화역사에서 엄청난 흑역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악한 반공영화의 실체를 알고 비판의식을 기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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