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10일 당시 일리노이 주 출신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한 사람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구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신속한 종결, 에너지 자립 수준 확대, 국민건강 보험제 마련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8년 8월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됨에 따라 대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다.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당선은 전 세계적으로도 쟁점이 되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현재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1년 NBC와의 인터뷰에서 “케냐에 있는 오바마의 할머니가 오바마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자기가 직접 봤다고 한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이런 트럼프의 막말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바마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1961년 8월 4일 출생하였다. 오바마가 2살이던 1964년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 던햄은 하와이에서 대학에 다니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토로’와 재혼하여 아들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갔다. 버락 오바마는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자카르타의 기독교계열 학교에 다녔다. 그가 10살이 되던 1971년 다시 하와이 홀놀루루로 돌아왔고, 1979년에는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10대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오바마는 10대 시절 알콜, 마리화나, 코카인을 복용했던 적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1977년에 인류학 현지 조사차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마약에 손댄 일에 대해 ‘최대 도덕적 과오’였다고 2008년 대통령 후보 공개 토론에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1979년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교에 입학했고, 2년 뒤인 1981년에는 뉴욕시의 콜롬비아대학교에 편입하여 국제관계를 주 전공으로 정치과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뉴욕에서 4년을 보낸 뒤 오바마는 시카고로 가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1985년 6월부터 1988년 5월까지 대략 3년간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1988년 말 오바마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991년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뒤 그는 시카고로 돌아갔다. 1992년 4월부터 10월까지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의 투표 프로젝트를 감독하여 ‘크레인스 시카고 비즈니스’에서는 오바마를 1993년 지도자가 될 “40세 이하 4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하였다. 12년 동안 오바마는 시카고 법학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대략 8년간 일리노이주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일리노이 제13구에서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윤리 및 의료 입법에서 민주 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1998년 총선과 2002년 총선에서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3년 1월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 의료 및 인간서비스 위원회 의장의 되었다. 2004년 11월에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상원선거에 도전했으며 2005년 1월 4일 상원의원 취임선서를 하게되었다. 미국의 내셔널 저널지는 2007년의 선별된 득표를 평가한 자료를 근거로 그를 ‘가장 자유주의적인’ 상원의원으로 등재하였으며 2005년에 16위 2006년에는 10위에 등재되었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명성을 쌓아가던 오바마는 2007년 2월 10일 미국 대통령 선거출마를 발표하였고, 2008년 11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9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임 부시 대통령이 남겨놓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건강 보험 개혁안 통과와 이라크 전쟁에서의 철수 그리고 멕시코 만 원유 유출 사고 등이 그러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을 고수한 나라다 보니 건강 보험 개혁안은 통과는 되었으나 실질적인 국민의료보험 같은 보편적인 의료보험제를 동원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자유주의적 모순일 것이다. 즉 이런 보편적 복지 부분에서만큼은 미국은 그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 말까지 철수하긴 했지만,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의 철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이라크에선 이라크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그는 공화당 보다 더 강경적인 대북강경정책으로 나갔고, 북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그의 집권기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파키스탄에서 전개되었던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tune Spear)일 것이다. 그 작전을 통하여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대통령 오바마는 빈라덴 사살 소식을 알리는 연설을 했고, 이는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큰 결집력과 호소력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특히나 오사마 빈라덴이 죽었을 당시 미국 사람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이를 환영했다. 아무튼 2012년 대선에도 출마를 하게된 오바마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시 한번 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4년간 더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보냈다. 제2차 집권 시기 그는 2016년 한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방문하여 쌀국수를 먹어서 인증하기도 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트럼프에게 넘겨주면서, 버락 오바마는 정치 인생을 마쳤다.
미국의 반트럼프 측 사람들에게 있어서 버락 오바마는 한국으로 치자면 대략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 스텐스일 것이다. 소위 미국사회에서 보수라고 여겨지는 공화당하고 대척점에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위치와 대략 비슷하다. 그리고 의료문제와 인종 문제를 공화당 측 인물들보다 더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반공화당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매력 포인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 건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특히나 그의 외교정책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미국 공화당 인사들보다 더 반북적인 스텐스를 취했고, 북조선을 더 고립시키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했다. 대북경제제를 더욱 강화하여 북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즉 오바마라는 인물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한의 친일지배계급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위에서 상술한 넵튠 스피어 작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았던 제국주의적인 처사였다. 또한 그들이 일방적으로 무력침공하여 일으켰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2014년까지 미군 철수를 하기로 했으면서 궁극적으로 철수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성공시키진 못했으나 미국의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스텐스를 가진 인물이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선 사회주의적 가치를 좀 우호적으로 보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의료보험 제도를 얘기했을 때, 복지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공화당 극우파 세력들은 그 정책을 강력히 부정했던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본 그는 비록 미국 내에서 의료 보험을 생각했던 사람일지는 몰라도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제국주의적이고 대북강경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북한을 이명박 정부와 같이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면서 그들의 붕괴를 꽤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진보주의자가 아닌 아들 부시나 트럼프와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