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전쟁 전개 지도, 1868년 1월에 시작한 이 전쟁은 1869년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마지막 정부군이 항복하며 끝났다.) 


1868년에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길로 접어들었다에도 막부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그러나 반막부세력이 주도한 신정부가 탄생하였지만그래도 여전히 일본엔 도쿠가와 세력의 존속을 주장하는 친막부세력은 이에 저항했다따라서 막부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이들 간의 갈등은 있었던 것이다이런 갈등은 당연히 양측의 전쟁으로 이어졌고이것이 바로 보신전쟁이었다.

 

보신전쟁은 1868년 1월 26일 막부의 군함이 효고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번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보신전쟁 시작 1주일 만인 2월 2일 메이지 정부는 오사카 성을 장악함으로써 막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친막부세력은 3월 29일 고슈가쓰누마[甲州勝沼전투에서도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였으며, 4월 5일엔 영국 공사인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요청에 따라 교섭을 추진했다그 결과 신정부군은 5월 3일 에도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에도 성이 신정부군에게 장악당한 이후에도 친막부 세력들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물론 이 저항은 신정부군에게 진압 당했고, 1869년 6월 27일 이들이 항복하면서 보신전쟁은 메이지측의 승리고 끝이 났다.

 

보신전쟁 이후 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869년 1월 정권의 핵심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의 번주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누려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정부에 반환하는 판적봉환을 단행했고다른 번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신분제도를 개혁하여 다이묘와 상층 귀족은 화족일반 무사는 사족농공상민은 평민으로 정했다또한 사민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평민의 성씨 사용신분 간의 결혼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허용했고, 1871년에는 번들을 통폐합하여 현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를 파견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통해 변한 일본의 수도 도쿄)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중앙에 상투를 튼),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진은 1872년 런던 체류 중 촬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조선 후기 개화파 유길준에게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라 10,000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18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근대화가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특히나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서방에 파견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경험을 통해 한층 확고해졌다이와쿠라 사절단은 원래 서양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되었고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정부의 실권자들이 포함되었다. 1872년 신정부는 학제를 제정하여 전국을 여덟 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소학교·중학교·대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제도를 설치했고, 1871년에는 단발령도 공포했다서양 문물은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다서양식 단발머리에 양복모자구두를 갖춰 입고 소고기와 같은 육류를 먹는 것이 유행했다요코하마 같은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양식 건물이 축조되었고의자와 테이블 같은 가구도 수입되었다이 당시 돼지고기를 밀가루에 묻힌 후 소량의 기름으로 프라이팬에 지져내는 요리가 일본에서 유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カツ,pork cutlet)의 시초였다.

(돈까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음식이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반 국민을 기초로 한 근대적 군사제도를 탄생시켰다메이지 정부는 육군은 프랑스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이른바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로 했고이에따라 1871년 사쓰마·조슈·도사·히젠 등에서 번병을 차출해 중앙군인 어천병을 만드는 한편지방의 치안 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한 뒤 도쿄오사카진제이도호쿠의 4개 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징병제가 시행됨에 따라 1873년에는 4월부터 징병된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각 진대에 입대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874년에는 육군의 기간이 된느 보병연대 9개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1871년 일본의 군사력은 육군 병력 1만 4,800함정 14척에 불과했지만, 1877년을 거쳐 점차 증강되었고, 1868년부터 1877년까지 약 10년간 메이지 정부는 국가예산의 15.9%를 군사비에 투입했다보병연대도 1875년에는 14, 1878년에는 15개로 증강되었다. 1870년대 전반 메이지유신 정부는 근대국가’, 즉 서구형 국가 건설을 위해 폐번치현학제징병령지조개정과 같은 일련의 제도개혁에 착수했고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동시에 대외팽창과 탈아입구의 기점이기도 했다즉 메이지 정부는 이 시점부터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들이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하나는 1874년 일본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대만 출병이고다른 하나는 1873년쯤에 나온 이론인 정한론(征韓論)이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이다. 그는 조선 말기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다.)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일거에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주장으로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대두된 이론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 섬 즉 대마도에 개입하여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며 국교 교섭을 시도했었다하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은 외교문서가 종전과 달리 고종을 격하하는 등 당시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사신의 접견을 거부했었다이를 시작으로 일본 내에선 이른바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87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다 하쿠보가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1872년에는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조선 측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으며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 1873년 8월에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이와쿠라 도모미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사진, 1875년 일본은 시험삼아 강화도를 공격했었다.)

 

이후 정한론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고정한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때부터 유지해온 대외팽창적 전략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몰락과 때를 맞춰 일본은 1875년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 앞바다를 공격했다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인천 근해의 영종도를 불법 포격하고 방화와 살인·약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이러한 일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은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강화도 조약, 1876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76년 정월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를 지휘관으로 한 6척의 함선(군함 3수송선 3)을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을 이번엔 일본이 조선에게 한 것이다이로써 1876년 2월 3일 연무당(현재 서대문 옆)에서 12개 조항으로 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당연히 강화도조약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불평등조약이었다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를 개방했고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치외법권 지역도 인정해야 했다이처럼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대외팽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 시점부터 점차 팽창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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