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열강을 풍자한 그림)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으로 이기고 조선까지 식민 지배를 하게 된 일본은 한일합병을 한지 불과 4년 만에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탈아입구를 시도하던 시기 유럽의 정세는 1871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룩하면서 점차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비스마르크는 식민 지배를 옹호하지도 않았고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그가 물러나고 나서 독일을 통치하게 된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되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선두를 다투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자는 사자라 부르던 중국(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힘을 탕진했다그 결과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에게 쏜 권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독일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연합군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다통일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 발칸반도에서 패권경쟁이 가속화되었다즉 아프리카의 유리한 지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다툼과 1912~1913년의 발칸전쟁으로 초래된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예견하는 것만 같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츠 황제를 사살하면서유럽 각국의 긴장감은 높아졌다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된 것이다.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적진에 배치된 기관총을 향해 이런식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엄청난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다이 전쟁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거나 국제법상으로 금지한 무기들의 기본적 형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탱크전투기독가스지뢰기관총 등 과학 기술력을 통해 발전된 무기의 현대화는 전쟁 자체를 대학살극으로 바꿨다이 전쟁으로 최소 1,000만 명이 사망하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그러나 이 전쟁에서 적잖은 이익을 본 나라가 있었다그 나라가 바로 유럽 전선의 지구 반대편에 있던 신흥강국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만화)

 

지난번 러일전쟁편에서 다뤘듯이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유럽 전선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그해 8월 23일에 영일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 식민지에 있는 수비대를 제압하기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1915년 10월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했다그리고 이 섬들은 전쟁이 끝나가던 1918년 일본의 위임통치령 하에 들어갔고그로부터 25년 뒤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이 섬 쟁탈전을 하는 곳으로 바뀐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일본이 점령한 독일측 식민지)


(칭다오 지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 영토 칭다오를 공격했다대략 3,000명의 독일 제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던 칭다오는 어떤 공격군도 쉽게 넘기 어려운 대단한 군사적 장애물이었다요행을 바라지 않았던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칭다오에 상륙시켜 계획적인 포위공격을 시작했다일본이 칭다오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하자텐진에 조파하고 있던 영국군 사우스웨일즈 국경수비연대 2대대와 시크 연대 36대대가 일본군과 합류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결국 일본은 10년 전 러일전쟁 당시 여순에서 러시아의 요새를 정복할 때처럼 11인치 곡사포로 포격을 개시했다. 11월 7일 아침 총독으로 근무하던 해군 장교 알프레트 마이어 발데크 대령이 부대를 포기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이났다비록 발데크의 해병대가 200명이 전사했던 반면 일본군은 1,455명이나 전사했지만 말이다.

(칭다오 시가지를 향해 포격 중인 45식 240mm 공성포, 러일전쟁 당시 화력을 무시하고 보병의 총검에만 의존하여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것을 경험삼아 개발하였다.)


(칭다오 주둔 독일 제3해군보병대대 소속의 병사들)

 

이처럼 영일동맹을 구실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기회를 얻었었다.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하여 만주와 몽고산동성에 대한 독점적 이권을 확보하고 중국 정부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려고 했다즉 일본은 이시기부터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슐리펜 작전으로 프랑스가 굴복할 것처럼 보였지만비스마르크 통일전쟁시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의외로 잘 싸웠다그 바람에 슐리펜 작전에 차질이 생겨 양면전선을 치르게 된 독일은 전쟁 초기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교착상태에 놓인 참호전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블라디미르 레닌)

 

그러던 1917년 전 세계를 뒤흔들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어난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타도되었다그 이후 10월 혁명이 일어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에 등장했다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건설한 혁명 러시아는 1918년 브레스크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그러나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가 무섭게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왔다그리하여 러시아에선 적백내전이 발발하게 된다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을 감행했다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적백내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신흥부자 나라킨을 묘사한 그림,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지구반대편 전쟁을 통해 성장한 일본의 부유층들이다. 이 그림에선 나라킨이 자신의 신발을 찾으로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피는데, 당시 대졸 남성의 평균 월급이 50엔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나라킨,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이런식으로 묘사됐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무역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고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이룩했다공장의 증설과 신설투자의 확대로 인한 호경기가 이어지면서 나라킨이라고 불리는 신흥부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또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1918년에는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여 아시아 1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갔다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계속되는 독일 U-보트의 상선 공격과 치머만 전보로 인해 분노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이렇게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라는 최대의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 빠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전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게되기도 했었다독일은 병력의 대다수를 서부전선으로 모아 총공격에 나섰지만미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하면서 독일은 다시 패배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해서 1918년 11월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강대국들은 전후문제를 논의했다.)

 

1919년 1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일본은 산동성에 대한 이권의 획득과 적도 이북 남양군도 영유를 요구했다즉 일본은 승전국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다전쟁 중의 호경기로 산업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지만 1920년대에는 경기 침체로 노동쟁의가 크게 증가했다뿐만 아니라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국가에선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마찬가지로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3.1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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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어난 카틴숲 학살은 독소 불가침 조약과 더불어 서방에서 소련과 나치즘을 동급 취급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보통의 경우 카틴숲 학살은 1940년 소련의 NKVD에 의해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소련의 NKVD가 수천 명이나 되는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고 암매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같은 폴란드 측과 서방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카틴숲 학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느 측이 맞는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반박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주장하는 카틴숲 학살에 대한 반론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1. 카틴숲(Katyn Forest)에서의 나치의 잔학행위

 

카틴은 스탈린주의 범죄와 대학살의 극히 일부를 보여준다.(아브지 신문, 200931)”

 

스몰렌스크(Smolensk) 지역에서 폴란드 전쟁포로 수천 명이 학살된 것에 관해, 벨로루시 공화국은 최근 반공산주의 선전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안드레이 바이다(A. Wajda)의 영화 카틴(Katyn)” 및 카틴과 관련하여 소련이 유죄인 것처럼 보이는 자료를 온라인에 게시한 것이다.

 

그리스 언론에서는 또한 소련에 대한 악명 높은 독일 히틀러 선전상인 괴벨스한테 받았던 지원 일체를 다시 받기 위해 이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많은 기회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 특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금의 모든 나치 변호론자들의 주장은 1943년 나치 조사의 발견에 근거를 두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적어도 1992년에 제출됐던 그 자료는 나치가 문서위조를 한 치명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2. 나치의 카틴에서의 집단 매장지 발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카틴은 벨로루시의 스몰렌스크 지역에 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은 폴란드 전쟁 포로를 수용소에 가둬 두었다. 그러나 19416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이후, 이들 영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다. 2년 뒤인 19434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가 패배 하고 두 달 뒤에 베를린에 있는 나치 라디오 방송국은 카틴에서 폴란드 장교 3천명의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1년 뒤에는 그 희생자들이 2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볼셰비즘은 이 범죄에 대한 범인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 매장지 발견 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괴벨스가 말하고자 했던 거처럼, “이 선전 재료들의 더 폭넓은 선전을 위한 그의 가르침에 따라 나치는 국제적인 차원의 조사기구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객관성을 더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그들은 한 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동맹국들에서 온 성원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제적십자사는 거부했던 반면 조사에는 폴란드 적십자사가 참가했다.

 

그 위원회는 폴란드에는 겨우 이틀 동안만 머물렀고 나치가 이미 골랐던 시신 9구만 조사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결론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었다. 나치의 거대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만이 사건에 대한 나치의 견해를 채택했다. 타임지는 그 위원회의 결론을 인정하는 모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조차 했다.

 

3. 괴벨스 선전기구의 교활함과 능수능란함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 제 덫에 자기가 걸린 이들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또한 반공주의 정서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윈스턴 처칠 또한 그 당시에 나치가 수행한 모든 조사가 조작으로 된 것이고 그 결론은 테러의 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국제 위원회 중 두 사람(불가리아인 엠 마르코프와 체코인 하젝)은 그 결과가 조작되었고 자신들은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서명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위원회 대표인 부취(G. Butch)는 독일에 의해 1944년 처형됐기 때문에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4. 진실이 드러났다

 

나치 주장에 대한 소련의 첫 번째 반응은 1943419일 프라우다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로 즉각 나왔다.

 

평화적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진보적 인류 전체의 분노를 의식한 독일은 지금 속이기 쉬운 인민들의 반유대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1만 명의 폴란드 장교 살해사건에 연루됐던 유대인위원회라는 전체 집단을 발명했다. 그렇게 노련한 날조자들이 레프 르이바크(Lev Rybak), 아브람 브로드닌스키(Avraam Brodinsky), 차임 피네베르그(Chaim Fineberg)와 같이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통합국가정치국(OGPU) 스몰렌스크부(Smolensk department)”나 내무인민위원회(NKVD, 범죄자를 기소하는 소련 국가기관)의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분석조차도 희생자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유대인이라고 확인함으로써 유대인 볼셰비즘에 대한 나치 주장의 결함을 인정했다.

 

적군에 의해 폴란드가 해방된 후 소련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부르덴코(N. Burdenko)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과학위원회를 설립했다. 조사는 19439월에 시작되어 19441월에 완료됐다. 위원회 조사결과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처형 책임이 전적으로 나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소련측 조사의 다음과 같은 핵심 사항을 거론한다.

 

법의학 조사는 나치가 주장했듯이 폴란드 장교들이 1940년에 매장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증명했다. 시신의 부패 정도에 따라 1941~1942년 초에 매장됐음이 틀림없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1년 가을 그 지역이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 폴란드인들이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십 명의 목격자들은 1940년 봄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위원회에 증언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한 농부는 19418~9월에 폴란드인들이 철로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한 교사는 1941년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한 폴란드인을 그녀의 집에 숨겼다고 증언했다. 만약 독일 보고서가 사실이라고 본다면 이 폴란드인은 1940년 봄 소련군에 의해 처형됐던 3,796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유령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사망자 수에 들어갔던 1,105명은 수년 동안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인들 중에는 독일 보고서의 목격자로 서명하라고 게슈타포가 강요했다고 증언한 사름들도 몇 명 있었다.

 

소련의 조사로 오늘날까지도 카틴 사건에 관해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선전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은 “1940년에 볼셰비키가 폴란드 전쟁포로들과 성직자들의 집단 처형에 관해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독일 경찰에게 내용을 제보하면 사례금을 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독일이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했던 시기라고 독일에서 말하는 1940년 봄과 독일 침공 시기 이후의 문서(편지, 증서)가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조사를 통해 나타났던 증거들이 미국 대표단에 의해 분명히 확인되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G. 로버트(G. Robert)는 이야기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의 딸이며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던 캐서린 해리먼의 기록을 보면, 나치 주장처럼 시신이 3년 전에 매장됐던 것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로버트에 따르면 해리먼 미국 대사는 미국 대표단의 결론을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체적 증거와 증언으로부터 캐서린과 대사관 직원은 어떤 경우라도 독일에 의해 학살이 진행되었다고 확신한다.”

 

5. 괴벨스에서 자유세계까지

 

1945년까지 카틴 사건은 미국 외교 문서에는 나치의 선전으로 언급됐고, 뉴욕타임즈와 같은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나치의 흉악한 사기로 묘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과거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이 소련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면서는 자신들의 반공주의 병기고에 카틴숲 학살을 추가하여 이 사건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첫 번째 조짐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 측이 재판에서 카틴 사건을 포함시켜 조사하자는 소련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심문절차는 6(소련 범죄에 대해서 3, 나치에 대해서 3건의 증언)으로 한정되었다.

 

1951~1952년 한국전쟁 시기에 매든위원회(Madden Committee)”가 미국 하원에 설립되었는데 위원회는 폴란드 장교들이 소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소련을 국제재판소에 출석시키자고 제안했다. 매든위원회에서 증원했던 신뢰할 수 있는증인들 중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를 맡은 오토 슈타머 박사도 있었다! 또한 19527월 미국 내무부 비밀 보고 문건에는 유엔에서의 공통 전략 수립에 관한 미국-영국 간의 회담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카틴 사건을 포함하여 반소선전을 위해 유엔을 활용할 필요성이 명시되어 있다.

 

종전 후 지금까지도 제국주의자들은 괴벨스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한 편,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 중에도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런던으로 추방되었던 차르 지지자 후선인 알렉산더 위스가 있는데, 그가 1964년에 출판했던 저서 전쟁기의 러시아: 1941-1945(Russia at War: 1941-1945)”에서는 카틴 사건이 소련의 책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대와 우려를 분명히 제기했다. 또한 그는 카틴에서의 대량학살 기법과 서유럽의 다른 나치 처형 사건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역사적인 진실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증언자는 동부전선(Eastern Front) 전투에 참여했던 독일인으로 그는 1971년 카틴 사건에 대해 타임(Times)지에서 시작된 논쟁에 편지로 참여했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요제프 괴벨스는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업무였고, 그것에 있어서 그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놀라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괴벨스의 기만술이) 타임지 지면에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볼 때, 전쟁 막판에 괴벨스가 카틴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많은 독일군 병사들을 속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속으로는 사형 집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독일 군인들은 폴란드 장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의해 몰살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6. 반혁명과 증거서류의 발견

 

반혁명이 승리하자 괴벨스(Gobbels)의 현대 추종자는 그들이 1943년 이래로 기다려 왔던 해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소련 유죄의 증거가 드디어 발견됐다”! 특히 1992년 소련 공산당이 위헌 기구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가 심판 과정에 있을 때 보리스 옐친의 법률팀은 카틴에서의 폴란드 장교 살해에 대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 그리고 당연히 스탈린의 책임이 입증된 일급 기밀문서들을 방금 공문서보관소(Archives)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소련 공산당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은 사본으로 제출됐던 그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처음부터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그 문서들은 원본의 형태로 제출되지 않았으며 헌법재판소는 판결에 그 문서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조작된 상황에서조차도 이들 문서들은 증거로 채택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의 문서 조작을 밝히는 다른 증거들이 나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2010년 러시아 정부는 디지털 사진의 형태로 이 악명 높은 문서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원본은 아직 제출하지 못했다.

 

7. 위조의 네트워크

 

이 범죄에 대해 소련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치 선전의 주장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아니면 잘해야 매든 보고서의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반대로 역사적 진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정보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한다.

 

2005년 포돌스크(Podolsk)에 있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를 연구하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카틴에서 폴란드인의 처형에 직접 참여했던 독일군 장교의 증언을 문서로 기록한 전체 파일의 존재를 발견했다. 20106, 러시아연방공산당 B 일류친(B, Ilyuchin) 하원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며칠 전 카틴 사건의 문서 위조자 한 명과 접촉했다는 발표를 했다. 특히, 그가 당시 폭로했던 바에 따르면, 1990년 초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의 안보국 비호 아래, 수많은 문서를 위조하기 위한 임무를 지난 특수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조직은 처음 반혁명 이전에는 나고르나야(Nagornaya)라는 농촌마을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속된 기관으로 일하였는데 나중에는 자레취(Zarechie) 지역으로 이전했다. 보안군과 대통령 기구의 인원들로 구성된 이 위조 조직은 문서를 새로 만들거나 위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부터 수십만 건에 달하는 위조문서가 러시아공문서보관소로 이식되었다.

 

[카틴 : 위조의 증거]

 

1992년 발표된 문서에서 이른바 소련의 범죄라고 입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194053일 날짜로 된 내무인민위원 베리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폴란드 포로 25,700명의 사형집행을 제안한 4장짜리 문서.

 

b. 같은 날인 194053일 베리야의 요청이 승인된 정치국 제13차 회의록 발췌문

 

c. 그리고 그 서류의 파기에 대해 195933일 날짜가 찍힌, KGB 국장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보낸 당시 편지.

 

그 문서의 진위에 대한 법학자들과 역사연구자들의 수많은 견해 중에서 다음의 것을 식별할 수 있다.

 

- 위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베리아의 사형집행 제안에서부터 정치국의 결정까지 전체 날짜가 동일한 것이었다. 소련 역사상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절대 없었다. 만일 그 토론이 최종 승인됐다면, 그 서류의 발송에서 정치국 토론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여기에 걸리는 기간은 적어도 5~6일이었다. 법학자인 즐로봇킨에 따르면, 이 과정의 상세한 기록은 공판 소송기록에서 베리아의 제안이 19403날짜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나중에 정정됐다. 그 문서는 이러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 그 문서들은 엄격한 관례와 특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특징들이 제출된 문서에서는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에게 보낸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서신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도장이나 등록번호, 혹은 그 문서들의 평상시 어떠한 표시(가령, 기밀의, 비공개의 등)도 없다.

 

- 마지막으로 200711월에 시작되어 2009331일에 끝난 독립적 법의학 분석은 베리아의 문서에 다른 타자기가 사용되었고, 위조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증인은 1940년대에 생산된 종이들, 중앙위원회의 다양한 문서들, 위조된 도장, 심지어 기밀문서 해제 대상이 아니라고 기밀 표시된 전체 파일과 같이, 자신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심지어 폴란드 전쟁포로를 처형하려는 베리아의 요청을 볼셰비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승인하는 결정을 위조하는 것에도 참여했다. 위조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구체적인 인물의 신원과 증거까지 동반된 이러한 중대한 주장은 여전히 카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더욱 더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왜 이러한 모든 것이 언론이나 역사책에 적어도 피상적으로나 객관성이라는 이유로든 언급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과학자들, 문화적 인물들이나 오로지 나치 선전을 위해 돈을 받은 사람들이든 역사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편리성이 드러났던 나치의 선전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신속하게 채택이 됐는데, 그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과학적인 개념인 두개의 극단주의라는 역사적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틴 사건은 파시즘-나치즘과 동급으로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역사 위조의 무기가 되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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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인 올해는 민족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했던 이 전쟁은 사실상 휴전으로 끝난 전쟁으로, 한반도의 분단정부가 그대로 유지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대중적인 인식이나 국가적인 인식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지원을 받아 무력남침을 개시한 전쟁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제원리가 가미된 논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는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버락 오바마와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자칭 민주당 계열 인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수 진보 할 거 없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이와 같은 버락 오바마의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반북반공적인 동시에 서구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다. 즉 냉전 시기 공산주의 러시아를 바라보던 미국의 편협한 시각과 인식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반공주의적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무시하여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초래했고, 1994년 전쟁 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콘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런 인식과 관점을 20019.11 테러 이후 이른바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발언을 통해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냈다. 비록 핵무기를 가지고 있던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 미국이 침공했던 이라크를 생각해보면 이런 편협한 관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관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다.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사실 한국전쟁 자체를 대한민국과 유엔의 승리 혹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스탈린은 나쁜 놈과 같은 그들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싶어 하는 인식과 관점은 역사적으로 그다지 정확한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의 민중적 구도를 본다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8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좌우연합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이것을 강제로 해산시켜 점령군을 자칭했던 집단은 바로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트루먼의 미국이었다. 여기서부터 남북분단의 구도가 명확해졌다. 미국은 친일경찰을 등용했고, 그 친일경찰과 친일인사들은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등에 엎고 분단정부 수립에 나섰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한 듯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여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따라서 트루먼 독트린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제국주의 합리화 수단이었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한반도에선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구의 남북협상 등이 실패로 끝났고, 대구와 제주 그리고 여순에서 미군정이 지휘하는 광란의 학살극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남북의 통일과 사회주의 그리고 항쟁들의 주체는 바로 남한 민중이었다. 그에 비해 반공을 내세우는 집단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을 지원하는 지배계층이었다. 즉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전부터 이런 내전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아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고위직을 차지했던 인물들 대다수를 보면 그 뿌리가 독립운동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일에 있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인 백선엽부터 해서 채병덕, 정일권 등 이들 대다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결국 한국군은 미제국주의에 지원을 받은 구일본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이 했던 일들을 보면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들의 학살로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했다. 많게는 100만 이상도 잡는다. 또한 9.28 서울 수복 이후 한국군이 저지른 일 또한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아래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은 38선 돌파 이후 북한지역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대표적으로 신천양민학살사건은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극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즉각적으로 군사개입하며 끌어들인 유엔군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제국주의 군대다. 이것은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끌어들인 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이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군대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유엔군의 핵심인 미군도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융단폭격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한 폭탄이 20만 톤 안팎이었는데, 한국전쟁 3년 동안 한반도에 투하한 폭탄의 량은 63만 톤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네이팜 폭탄을 추가하면 665000톤이 된다.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세력들의 광적인 학살극이었고, 민중은 이에 맞서 싸우는 구도였다. 물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사실관계일 뿐이다.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썸터 요새를 누가먼저 포격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한국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미제국주의에 맞선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듯이 이와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친일파 결집세력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던 것이다.

 

1112일은 서방에서 베테랑 데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에선 이날에 자국의 전쟁영웅들과 군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이러한 흐름에 입어 올해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유엔군들을 기억하는 영상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영상을 본 필자는 정말이지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 자체가 한국전쟁에 대한 총체적 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4.3을 항쟁으로 추모했던 대통령 문재인 또한 한국전쟁날이나 이런 베테랑 날이 되면 이승만과 우익 그리고 미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던 이들은 금방 잊은 채, 반동적 군대를 추모하고 치켜세우기 바쁘다. 물론 대한민국 현실정치라는 맥락에선 이해가 가능한 일일지라도, 상당히 이율배반적 행위라고 본다. 왜냐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한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한국군에 의해 생긴 것이었고, 그런 학살을 저지른 한국군을 다른날에 동시에 추모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볼 때 생기는 모순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진보와 보수 할 거 없이 그저 반공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행위는 베트남 전쟁 시기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던 남베트남을 추모하는 일부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행위와 크게 다를것이 없다. 이걸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입하자면 우리는 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을 자유의 용사로 내세우는 것이고, 미국이 내세운 괴뢰 앞잡이 고딘디엠(응오딘지엠)이 최고사령관으로 있는 괴뢰군대를 자유와 민주라는 수식어로 합리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전쟁에서 우리국군혹은 자유를 위해 희생한 유엔 참전용사따위의 소리는 이처럼 어이없고 몰역사적인 시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놓치거나 무시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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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29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전쟁에 민족해방적 성격과 미제와 이승만 정부에 맞서는 민중의 구도로만 보는 것 역시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관념화하고 단순화한 이해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으며, 그 수는 (물론 미군과 국군에 의한 수보다는 적지만) 결코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반공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한 명이기에, 다시금 유치한 ‘그래도 미군과 국군이 더 낫지‘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한과 좌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간과해서는 한국전쟁 기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을 읽으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간인 상호 간의 학살이 일어난 원인과 유형은 뚜렷하게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전쟁을 계기로 이전부터 서로에 가졌던 분노가 폭발했다 정도만 얘기할 수 있죠.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는 당연히 매우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박명림과 장병준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당한지 오래된 견해들이 많습니다. 한국전쟁의 성격 같은 경우가 그렇죠. 장병준의 <한국전쟁>이나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등을 읽으면, 민족해방적 성격의 전쟁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는 지점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 저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미군과 국군, 이승만 정부가 행한 그 모든 범죄를 미화할 마음 없습니다. 오히려 뼛속으로 증오합니다.

NamGiKim 2020-11-29 00:39   좋아요 1 | URL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자이기에 한국전쟁이라는 구도를 당연히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봅니다.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전쟁 시기 좌익에 의한 학살 분명히 있었죠. 그걸 전면부정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김민우님께서 글에서 잘 밝히고 있기에 민우님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좌익의 학살은 상대적으로 우익들과 한국전쟁을 논하는데 있어 국가적으로 많이 과장되어 왔고, 반공주의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쟁이라는게 특수한 상황이기에 일일이 학살의 주체를 따지는건 매우 힘든일입니다. 이건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도 그렇죠. 다만 한국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좌익세력의 경우 우익에 비해 숫자가 적었던 것도 있고 최소한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을 했었죠.

정병준 교수나 박명림 교수의 경우 냉전의 종식 이후 1990년대 학술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죠. 그러나 다른 측면에선 제가 본문에서 얘기한 부차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또한 그 자료들은 보리스 옐친시기에 공개된 자료들이라 자료 취사선택이라는 부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그리고 그 두분의 주장이 수정주의적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그 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와 같은 모순점) 자체에 대한 반박이라 보진 않습니다.

일단 전 분단 책임에 있어서 미국이 가장 크다고 보고, 사회주의적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합니다.

주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댓글이라 생각해서 긴 답변 남깁니다. 이런식의 답변도 좋습니다.ㅎㅎ 소개해준 두권의 책은 안읽어봤습니다. 조만간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dman 2020-11-29 09:37   좋아요 1 | URL
NamGiKim님의 견해 잘 정말 들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저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좋은 글이었습니다.

ps. 댓글에선 적는 걸 깜빡 했지만, 저도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와 인정 없는 추모는 이율배반적이라는 데에 적극 동감합니다.

NamGiKim 2020-11-29 09:40   좋아요 1 | URL
사회주의자가 다 이렇게 보는건 아니지만요. 저도 김민우님의 의견을 잘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뿐만 아니라 그 학살이 반복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도 반성해야겠죠.^^
 

조선의 합병과 무단통치

(1910년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19세기 근대화 성공 이후 일본의 산업은 발전했다일본의 산업화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고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군수 수요가 창출되었다또한 전쟁 승리의 대가로 청으로부터 받은 대규모 배상금을 산업자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특히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경제는 중공업 부문에 있어서 발전이 두드러졌다일본의 대표적인 제철소였던 야하타 제철소는 1906년 국내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했다. 1907년엔 민간 제철소인 니혼 제철소도 건설되었다그 외에도 조선업과 공작기계 생산도 증가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다른 나라를 합병하고자 했다그 나라가 바로 고종황제가 다스리는 조선이었다사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치렀던 일본이 이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인 이유는 명확했다바로 그들(청나라러시아일본사이에 있는 국가 조선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독점하기 위해서였다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독점권을 틀어쥐었다그들은 먼저 외무·내무 그리고 재무에 고문정치를 시도했다그리고 1905년 고종황제에게 어떠한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그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이다.

(일본의 가츠라와 미국의 테프트,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과 미국은 서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었다그 협약은 가츠라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보호권 확립을 찬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두 제국주의 국가끼리 양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합의를 본 것이다이렇게 합의를 본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인 이완용과 이지용 등의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고종황제를 협박했고반대하는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를 보도한 만국평화회의 담보)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를 서울에 두었다이것은 대한제국의 외교사무를 관리한다는 구실이었지만실제로는 그 안에 경무부·농상공부·총무부 등을 둠으로써조선의 내정 전체를 관장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비록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지만이러한 일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황실은 미국 등지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등에 밀사를 보냈다그러나 이것은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일단 미국부터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원조하는 처지였고평화화의 또한 이상설이준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원조하는 영국 등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거기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병약한 순종을 즉위시켰으며조선으로 하여금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1907년 당시 일본에 맞서 들고 일어난 조선의 의병들)


고종황제의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이 있자 한반도에서는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진압당한 이후에도 을미의병과 같은 의병전쟁이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서도 있었지만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그러나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엔 해산당한 관군 중심의 병사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력이 한층 강화되었고여기에 유생이나 농민 중심의 의병군이 병사농민 중심의 의병으로 바뀌어가면서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의병전쟁은 대략 2년 동안 격렬하게 일어났다. 1908년 3월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0,000명의 전국 의병군은 서울 탈환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었다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고전하게 만들기도 했지만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당연히 밀리게 되었다.

 

조선반도 내에서 의병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1909년 일본은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들을 섬멸하고자 했다이 작전에서 일본은 전남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히 포위하여 의병을 몰살해나갔다그리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살했다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일본군의 이 작전으로 심남일 등을 포함한 의병장이 사살당하고박도경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등 이 지역 의병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다결국 의병운동은 일본에 의해 진압당했다의병전쟁은 참으로 큰 저항이었다. 1908년 후반기에만도 의병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횟수는 1900여회나 되었고전쟁에 참가했던 의병의 수도 83,000명이나 되었다나중에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잃은 뒤 간도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거 기록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일빈을 들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날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3발의 권총을 맞았다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통과했다이것이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였다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거사 이후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미주지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고,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그 외에도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같은 독립운동 단체들도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경우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에 손을 뻣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점점 막강해졌다. 1910년 5월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신문사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강제 매각되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고, 1910년 8월 29일 공식적으로 한일합병이 선언되면서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었던 조선의 지식인 매천 황현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자결하기 전 그가 남겼던 말이 있다그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천 황현, 그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강산이 궁지에 빠졌구나.

책을 덮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지 못한데다 겨우 순절할 뿐이요,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1910년 조선을 완벽히 식민지화한 일본은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말 그대로 이시기 일본은 조선의 행정권·입법권·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행사하는 전제군주와 같은 절대 권력자였던 것이다일제는 전국의 지방조직을 13도 12부 317군으로 편제하여도지사에 상당수 친일 조선인을 등용했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른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그러나 이것은 말이 좋아 토지조사사업이었지실제로는 한국농민들의 당을 강제로 빼앗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일 뿐이었다총독부는 신고되지 않은 농민들의 땅을 모조리 총독부 소속의 국유지로 만들었고그 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조선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쉽게 말해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35년간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95년에 최종적으로 철거되며 사라졌다.)

 

1911년 1월 일제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를 체포했다그리고 그해 9월 이른바 ‘105인 사건을 발생하여신민회 인사들을 대규모적으로 검거했다.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사건이었다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애국지사 600~700여 명을 검거했다. 1912년 6월 2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의 공식 재판이 진행되었는데검거한 700명 중에 123명을 기소했다그런데 이 사건의 재판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왜냐하면 첫 번째 피의자였던 신효범의 경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그는 신민회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경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105인 사건 관련한 다큐 영상 사진)

 

뒷날 105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당시 경찰이 사용한 고문 방법이 70여 가지가 넘었고하나같이 삶과 죽음을 오갈 정도로 혹독했다고 증언했다결국 105인 사건의 재판은 사건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사실 관계 어느 하나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혐의를 입증할 제대로 된 물증도 없었다쉽게 말해 형편없는 조작사건이었다말 그대로 105인 사건은 3류 소설만도 못하는 형편없는 조작 사건이었다.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1905년 일본은 조선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들을 착수했다을사조약 이후 조선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특히나 1908년에 번진 의병전쟁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투쟁이었다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그 결과 1910년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일합방을 성사시켰다그리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조선 농민들을 일본인 지주의 착취를 받도록 만들었다또한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지 4년 뒤 지구반대편에선 인류최초의 대학살극을 동반한 전쟁이 일어난다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어떤 길로 나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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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의 역사적 특성은 혁명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절차로 구분되는 데 있다. 지금에 있어서 그 첫걸음은 벌써 일반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적인, 특수한 새 형태의 민주주의인 신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특성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1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에 와서 생긴 것인가? 중국과 세계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해본다면 이 역사적 특성은 결코 아편전쟁 때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와서,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및 러시아 10월혁명 후에 와서야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 형성과정을 연구해보기로 한다.


중국 현 사회의 성격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성격인 이상 그것이 중국혁명을 두 절차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규정짓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첫걸음은 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형태를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혁명을 더 발전시켜 사회주의 사회를 창립하는 것이다. 목하 중국의 혁명은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중이다.


이 첫걸음의 준비단계는 벌써 1840년의 아편전쟁 때부터, 즉 중국사회가 봉건사회로부터 반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운동, 중국-프랑스전쟁, 청일전쟁, 무술변법, 신해혁명, 5·4운동, 북벌전쟁, 토지혁명전쟁을 거쳐 오늘의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이나 걸린 이 많은 개별적 단계들은 어떤 점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이 첫걸음을 실천했던 것이며, 중국인민들이 각각의 이들 시기에서 봉건세력을 반대하고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한 것이며 첫걸음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보다 더 완전한 의미에서 이 혁명을 개시한 것이다. 이 혁명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본다면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다. 지금 이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계속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 혁명의 적이 아직도 매우 강대하기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1914년에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지구의 1/6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창건된 후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이었다. 그 이후부터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혁명의 진영으로 말하면 세계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맨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전반 세계의 역사적 방향을 개변시켰으며 전반 세계의 역사적 시대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 전선이 이미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 한 모퉁이는 전 세계의 1/6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붕괴되었고 그 나머지 모퉁이에서도 그 부패성이 충분히 발로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자본주의 부분들도 식민지, 반식민지에 더한층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시대에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가 이미 창건되었고 또 그가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원조하여 투쟁할 것을 선포한 시대에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이 나날이 사회제국주의적 사회민주당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고 있는 동시에 그들이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찬조할 것을 선포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든지 만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즉 국제 자산계급을 반대하며 국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는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주에 속하며 더는 낡은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적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의 일부분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식민지, 반식민지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 반혁명전선의 동맹군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벌써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전선의 동맹군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1단계, 즉 첫걸음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는 기본상 여전히 자산계급 민주주의적인 것이며 그 객관적 요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혁명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자본주의 사회 및 자산계급 독재 국가를 건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무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혁명으로써, 제1단계에 있어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 혁명적 계급들간의 연합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혁명은 또한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더욱 광활한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 진행과정에 있어서 적정 및 동맹군의 변화로 인하여 또 약간의 단계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혁명은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반대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을 용서하며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적 국제 무산계급은 그것을 원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라는 이 정확한 명제는 1924~1927년의 중국 제1차 대혁명 시기에 이미 제기된 것이다. 이 명제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으로서 당시 반제 반봉건적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찬동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이론의 의의가 아직 전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세계혁명’은 이미 낡은 세계혁명(낡은 자산계급 세계혁명은 이미 끝났다)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이며 사회주의적 세계혁명이다. 마찬가지로 이 ‘일부분’이라는 것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극히 큰 변화이며 세계적으로나 중국에서나 유사 이래 유례없는 큰 변화이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이 정확한 명제는 스탈린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1918년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쓴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월 혁명의 위대한 세계적 의의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첫째, 민족문제의 범위를 확장하여 이것을 유럽에서의 민족적 압박과의 투쟁이라는 부분적 문제로부터 피압박 민족과 식민지 및 반식민지를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일반적 문제로 전환시켰다. 둘째, 서방과 동방의 피압박 민족을 제국주의와 승리적 투쟁의 공동궤도로 끌어들여 그들의 해방을 위한 광범한 가능성과 현실적인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그들의 해방위업을 대단히 쉽게 해주었다. 셋째,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서방과 예속된 동방 간에 다리를 놓았고, 서방의 무산자들로부터 러시아 혁명을 거쳐 동방의 피압박 민족들에 이르는 세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혁명전선을 결성케 하였다.”


이 논문을 발표한 후에 스탈린은 또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이 낡은 범주를 벗어나서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된 것에 관한 이론을 여러 차례 거듭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해석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스탈린이 1925년 6월 30일에 발표한, 이 논문은 장중실이 번역한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제목은 <다시 한번 민족문제에 대하여>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쎄미치는 스탈린이 1912년 말에 쓴 소책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가운데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 책에는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의 민족적 투쟁은 자산계급들 상호간의 투쟁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는 이문구로써 현 역사적 조건하에서의 민족운동의 사회적 의의를 규정한 자기의 공식이 옳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문제가 아직 전 세계적 의의를 가진 문제로 생각되지 않던, 또 자결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 요구가 무산계급혁명의 일부분으로가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평가되던 대인 제국주의 전쟁 전에 쓴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 또 한편으로는 전쟁과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의 10월 혁명이 민족문제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부터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전환됐다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1916년 10월 레닌은 <자결에 관한 토론의 총결>이라는 자기 논문에서 말하기를, “자결권이라는 민족문제의 기본사항은 이제는 일반적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은 이미 일반적인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구성부분으로 변했다”고 하였다. 나는 레닌이나 또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타 대표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한 그 후의 저서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새삼스레 말하려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이 그렇다면 러시아에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쓴 스탈린의 소착재에서 주지하다시피 앞에서 소개한 것을 쎄미치가 인용했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 즉 무산계급혁명의 시대로 들어온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인용이 가질 수 있는 의의라는 것은 다만 쎄미치가 공간과 시간을 떠나서 산 역사적 환경과는 관련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함으로써 그는 변증법의 초보적인 요구도 지키기 않고 있는 것이며, 또한 역사적 환경에서의 옳았던 것이 다른 역사적 환경에 있어서는 옳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두 가지 종류의 세계혁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 종류는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 범주에 속하는 세계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혁명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것은 벌써 1914년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었을 때,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때 종결되었다. 그 후부터는 둘째 종류의 세계혁명,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을 그 주력군으로 하며, 식민지, 반식민지의 피압박 민족을 그 동맹군으로 한다. 피압박 민족 내부에 있어서 혁명에 참가하는 그 계급, 정당 또는 개인들이 어떠한 계급, 정당 또는 개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그들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못하고 있거나를 막론하고, 오직 그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며 그들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동맹군이 된다.


오늘에 와서 중국혁명은 그 의의가 한층 더 커졌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경제적 위기 및 정치적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가 나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때이며,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될 소련이 전 세계 무산계급 및 피압박 민족을 영도하고 원조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반항하며, 자본주의적 반동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때이며, 자본주의 국가들의 무산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때이며, 중국의 무산계급, 농민계급, 지식인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들이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이미 위대한 독립적인 정치적 역량이 형성되고 있는 때이다. 오늘날 이러한 시기에 처해있는 우리로서는 중국혁명의 세계적 의의가 더한층 커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연히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인 것이다.


중국혁명의 이 첫단계(그것은 또 많은 작은 단계로 구분된다)는 그 사회적 성격으로 말한다면 아직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새 형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이미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었고, 현재에 와서는 더욱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이 되었으며,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동맹군이 되었다. 이 혁명의 첫걸음, 즉 제1단계는 결코 중국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으며, 중국 무산계급을 그 영도자로 하는 중국의 각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의 신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것으로 제1단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려고 하며, 이를 다시 제2단계로 발전시켜 중국에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목하 진행되고 있는 중국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며, 20년 이래(1919년 5·4운동으로부터 계산해서)의 새로운 혁명과정이며, 목하 중국혁명의 생동하고도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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