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합병과 무단통치

(1910년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19세기 근대화 성공 이후 일본의 산업은 발전했다일본의 산업화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고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군수 수요가 창출되었다또한 전쟁 승리의 대가로 청으로부터 받은 대규모 배상금을 산업자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특히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경제는 중공업 부문에 있어서 발전이 두드러졌다일본의 대표적인 제철소였던 야하타 제철소는 1906년 국내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했다. 1907년엔 민간 제철소인 니혼 제철소도 건설되었다그 외에도 조선업과 공작기계 생산도 증가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다른 나라를 합병하고자 했다그 나라가 바로 고종황제가 다스리는 조선이었다사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치렀던 일본이 이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인 이유는 명확했다바로 그들(청나라러시아일본사이에 있는 국가 조선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독점하기 위해서였다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독점권을 틀어쥐었다그들은 먼저 외무·내무 그리고 재무에 고문정치를 시도했다그리고 1905년 고종황제에게 어떠한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그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이다.

(일본의 가츠라와 미국의 테프트,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과 미국은 서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었다그 협약은 가츠라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보호권 확립을 찬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두 제국주의 국가끼리 양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합의를 본 것이다이렇게 합의를 본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인 이완용과 이지용 등의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고종황제를 협박했고반대하는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를 보도한 만국평화회의 담보)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를 서울에 두었다이것은 대한제국의 외교사무를 관리한다는 구실이었지만실제로는 그 안에 경무부·농상공부·총무부 등을 둠으로써조선의 내정 전체를 관장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비록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지만이러한 일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황실은 미국 등지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등에 밀사를 보냈다그러나 이것은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일단 미국부터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원조하는 처지였고평화화의 또한 이상설이준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원조하는 영국 등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거기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병약한 순종을 즉위시켰으며조선으로 하여금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1907년 당시 일본에 맞서 들고 일어난 조선의 의병들)


고종황제의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이 있자 한반도에서는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사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진압당한 이후에도 을미의병과 같은 의병전쟁이 강원도와 충청도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서도 있었지만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그러나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엔 해산당한 관군 중심의 병사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력이 한층 강화되었고여기에 유생이나 농민 중심의 의병군이 병사농민 중심의 의병으로 바뀌어가면서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의병전쟁은 대략 2년 동안 격렬하게 일어났다. 1908년 3월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0,000명의 전국 의병군은 서울 탈환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었다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고전하게 만들기도 했지만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당연히 밀리게 되었다.

 

조선반도 내에서 의병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1909년 일본은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들을 섬멸하고자 했다이 작전에서 일본은 전남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히 포위하여 의병을 몰살해나갔다그리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살했다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일본군의 이 작전으로 심남일 등을 포함한 의병장이 사살당하고박도경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등 이 지역 의병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다결국 의병운동은 일본에 의해 진압당했다의병전쟁은 참으로 큰 저항이었다. 1908년 후반기에만도 의병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횟수는 1900여회나 되었고전쟁에 참가했던 의병의 수도 83,000명이나 되었다나중에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잃은 뒤 간도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거 기록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일빈을 들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날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3발의 권총을 맞았다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통과했다이것이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였다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거사 이후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 미주지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고,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그 외에도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같은 독립운동 단체들도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경우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에 손을 뻣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점점 막강해졌다. 1910년 5월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신문사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강제 매각되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고, 1910년 8월 29일 공식적으로 한일합병이 선언되면서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었던 조선의 지식인 매천 황현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자결하기 전 그가 남겼던 말이 있다그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매천 황현, 그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강산이 궁지에 빠졌구나.

책을 덮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지 못한데다 겨우 순절할 뿐이요,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1910년 조선을 완벽히 식민지화한 일본은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말 그대로 이시기 일본은 조선의 행정권·입법권·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행사하는 전제군주와 같은 절대 권력자였던 것이다일제는 전국의 지방조직을 13도 12부 317군으로 편제하여도지사에 상당수 친일 조선인을 등용했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른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그러나 이것은 말이 좋아 토지조사사업이었지실제로는 한국농민들의 당을 강제로 빼앗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일 뿐이었다총독부는 신고되지 않은 농민들의 땅을 모조리 총독부 소속의 국유지로 만들었고그 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조선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쉽게 말해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35년간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95년에 최종적으로 철거되며 사라졌다.)

 

1911년 1월 일제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를 체포했다그리고 그해 9월 이른바 ‘105인 사건을 발생하여신민회 인사들을 대규모적으로 검거했다.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사건이었다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애국지사 600~700여 명을 검거했다. 1912년 6월 2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의 공식 재판이 진행되었는데검거한 700명 중에 123명을 기소했다그런데 이 사건의 재판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왜냐하면 첫 번째 피의자였던 신효범의 경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그는 신민회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경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105인 사건 관련한 다큐 영상 사진)

 

뒷날 105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당시 경찰이 사용한 고문 방법이 70여 가지가 넘었고하나같이 삶과 죽음을 오갈 정도로 혹독했다고 증언했다결국 105인 사건의 재판은 사건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사실 관계 어느 하나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혐의를 입증할 제대로 된 물증도 없었다쉽게 말해 형편없는 조작사건이었다말 그대로 105인 사건은 3류 소설만도 못하는 형편없는 조작 사건이었다.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1905년 일본은 조선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들을 착수했다을사조약 이후 조선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특히나 1908년에 번진 의병전쟁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투쟁이었다그러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그 결과 1910년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일합방을 성사시켰다그리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조선 농민들을 일본인 지주의 착취를 받도록 만들었다또한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지 4년 뒤 지구반대편에선 인류최초의 대학살극을 동반한 전쟁이 일어난다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어떤 길로 나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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