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주의 열강을 풍자한 그림)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으로 이기고 조선까지 식민 지배를 하게 된 일본은 한일합병을 한지 불과 4년 만에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탈아입구를 시도하던 시기 유럽의 정세는 1871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룩하면서 점차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식민 지배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그가 물러나고 나서 독일을 통치하게 된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선두를 다투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자는 사자라 부르던 중국(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힘을 탕진했다. 그 결과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에게 쏜 권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연합군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다. 통일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 발칸반도에서 패권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즉 아프리카의 유리한 지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다툼과 1912~1913년의 발칸전쟁으로 초래된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예견하는 것만 같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츠 황제를 사살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된 것이다.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적진에 배치된 기관총을 향해 이런식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엄청난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거나 국제법상으로 금지한 무기들의 기본적 형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탱크, 전투기, 독가스, 지뢰, 기관총 등 과학 기술력을 통해 발전된 무기의 현대화는 전쟁 자체를 대학살극으로 바꿨다. 이 전쟁으로 최소 1,000만 명이 사망하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적잖은 이익을 본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유럽 전선의 지구 반대편에 있던 신흥강국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만화)
지난번 러일전쟁편에서 다뤘듯이,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유럽 전선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그해 8월 23일에 영일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 식민지에 있는 수비대를 제압하기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1915년 10월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 섬들은 전쟁이 끝나가던 1918년 일본의 위임통치령 하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25년 뒤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이 섬 쟁탈전을 하는 곳으로 바뀐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일본이 점령한 독일측 식민지)

(칭다오 지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 영토 칭다오를 공격했다. 대략 3,000명의 독일 제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던 칭다오는 어떤 공격군도 쉽게 넘기 어려운 대단한 군사적 장애물이었다. 요행을 바라지 않았던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칭다오에 상륙시켜 계획적인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일본이 칭다오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하자, 텐진에 조파하고 있던 영국군 사우스웨일즈 국경수비연대 2대대와 시크 연대 36대대가 일본군과 합류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 결국 일본은 10년 전 러일전쟁 당시 여순에서 러시아의 요새를 정복할 때처럼 11인치 곡사포로 포격을 개시했다. 11월 7일 아침 총독으로 근무하던 해군 장교 알프레트 마이어 발데크 대령이 부대를 포기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이났다. 비록 발데크의 해병대가 200명이 전사했던 반면 일본군은 1,455명이나 전사했지만 말이다.

(칭다오 시가지를 향해 포격 중인 45식 240mm 공성포, 러일전쟁 당시 화력을 무시하고 보병의 총검에만 의존하여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것을 경험삼아 개발하였다.)

(칭다오 주둔 독일 제3해군보병대대 소속의 병사들)
이처럼 영일동맹을 구실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기회를 얻었었다.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하여 만주와 몽고, 산동성에 대한 독점적 이권을 확보하고 중국 정부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려고 했다. 즉 일본은 이시기부터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슐리펜 작전으로 프랑스가 굴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비스마르크 통일전쟁시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의외로 잘 싸웠다. 그 바람에 슐리펜 작전에 차질이 생겨 양면전선을 치르게 된 독일은 전쟁 초기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교착상태에 놓인 참호전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블라디미르 레닌)
그러던 1917년 전 세계를 뒤흔들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어난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타도되었다. 그 이후 10월 혁명이 일어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에 등장했다.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건설한 혁명 러시아는 1918년 브레스크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그러나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가 무섭게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러시아에선 적백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을 감행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적백내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신흥부자 나라킨을 묘사한 그림,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지구반대편 전쟁을 통해 성장한 일본의 부유층들이다. 이 그림에선 나라킨이 자신의 신발을 찾으로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피는데, 당시 대졸 남성의 평균 월급이 50엔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나라킨,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이런식으로 묘사됐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 무역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고, 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이룩했다. 공장의 증설과 신설, 투자의 확대로 인한 호경기가 이어지면서 나라킨이라고 불리는 신흥부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1918년에는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여 아시아 1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갔다. 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계속되는 독일 U-보트의 상선 공격과 치머만 전보로 인해 분노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라는 최대의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 빠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전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게되기도 했었다. 독일은 병력의 대다수를 서부전선으로 모아 총공격에 나섰지만, 미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하면서 독일은 다시 패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18년 11월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강대국들은 전후문제를 논의했다.)
1919년 1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일본은 산동성에 대한 이권의 획득과 적도 이북 남양군도 영유를 요구했다. 즉 일본은 승전국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전쟁 중의 호경기로 산업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지만 1920년대에는 경기 침체로 노동쟁의가 크게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국가에선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3.1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