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어난 카틴숲 학살은 독소 불가침 조약과 더불어 서방에서 소련과 나치즘을 동급 취급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보통의 경우 카틴숲 학살은 1940년 소련의 NKVD에 의해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소련의 NKVD가 수천 명이나 되는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고 암매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같은 폴란드 측과 서방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카틴숲 학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느 측이 맞는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반박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주장하는 카틴숲 학살에 대한 반론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1. 카틴숲(Katyn Forest)에서의 나치의 잔학행위
“카틴은 스탈린주의 범죄와 대학살의 극히 일부를 보여준다.(아브지 신문, 2009년 3월 1일)”
스몰렌스크(Smolensk) 지역에서 폴란드 전쟁포로 수천 명이 학살된 것에 관해, 벨로루시 공화국은 최근 반공산주의 선전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안드레이 바이다(A. Wajda)의 영화 “카틴(Katyn)” 및 카틴과 관련하여 소련이 유죄인 것처럼 보이는 자료를 온라인에 게시한 것이다.
그리스 언론에서는 또한 소련에 대한 악명 높은 독일 히틀러 선전상인 괴벨스한테 받았던 지원 일체를 다시 받기 위해 이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많은 기회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 특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금의 모든 나치 변호론자들의 주장은 1943년 나치 “조사”의 발견에 근거를 두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적어도 1992년에 제출됐던 그 자료는 나치가 문서위조를 한 치명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2. 나치의 카틴에서의 집단 매장지 “발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카틴은 벨로루시의 스몰렌스크 지역에 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은 폴란드 전쟁 포로를 수용소에 가둬 두었다. 그러나 1941년 6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이후, 이들 영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다. 2년 뒤인 1943년 4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가 패배 하고 두 달 뒤에 베를린에 있는 나치 라디오 방송국은 카틴에서 폴란드 장교 3천명의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1년 뒤에는 그 희생자들이 2만 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볼셰비즘”은 이 범죄에 대한 범인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 매장지 발견 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괴벨스가 말하고자 했던 거처럼, “이 선전 재료들의 더 폭넓은 선전”을 위한 그의 가르침에 따라 나치는 국제적인 차원의 조사기구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객관성을 더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그들은 한 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동맹국들에서 온 성원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제적십자사는 거부했던 반면 조사에는 폴란드 적십자사가 참가했다.
그 위원회는 폴란드에는 겨우 이틀 동안만 머물렀고 나치가 이미 골랐던 시신 9구만 조사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결론”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었다. 나치의 거대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만이 사건에 대한 나치의 견해를 채택했다. 타임지는 그 위원회의 결론을 인정하는 모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조차 했다.
3. 괴벨스 선전기구의 교활함과 능수능란함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 제 덫에 자기가 걸린 이들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또한 반공주의 정서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윈스턴 처칠 또한 그 당시에 나치가 수행한 모든 조사가 “조작으로 된 것이고 그 결론은 테러의 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국제 위원회 중 두 사람(불가리아인 엠 마르코프와 체코인 하젝)은 그 결과가 조작되었고 자신들은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서명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위원회 대표인 부취(G. Butch)는 독일에 의해 1944년 처형됐기 때문에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4. 진실이 드러났다
나치 주장에 대한 소련의 첫 번째 반응은 1943년 4월 19일 프라우다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로 즉각 나왔다.
평화적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진보적 인류 전체의 분노를 의식한 독일은 지금 속이기 쉬운 인민들의 반유대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1만 명의 폴란드 장교 살해사건에 연루됐던 “유대인위원회”라는 전체 집단을 발명했다. 그렇게 노련한 날조자들이 레프 르이바크(Lev Rybak), 아브람 브로드닌스키(Avraam Brodinsky), 차임 피네베르그(Chaim Fineberg)와 같이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통합국가정치국(OGPU) 스몰렌스크부(Smolensk department)”나 내무인민위원회(NKVD, 범죄자를 기소하는 소련 국가기관)의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분석조차도 희생자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유대인이라고 확인함으로써 “유대인 볼셰비즘”에 대한 나치 주장의 결함을 인정했다.
적군에 의해 폴란드가 해방된 후 소련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부르덴코(N. Burdenko)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과학위원회를 설립했다. 조사는 1943년 9월에 시작되어 1944년 1월에 완료됐다. 위원회 조사결과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처형 책임이 전적으로 나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소련측 조사의 다음과 같은 핵심 사항을 거론한다.
법의학 조사는 나치가 주장했듯이 폴란드 장교들이 1940년에 매장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증명했다. 시신의 부패 정도에 따라 1941~1942년 초에 매장됐음이 틀림없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1년 가을 그 지역이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 폴란드인들이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십 명의 목격자들은 1940년 봄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위원회에 증언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한 농부는 1941년 8~9월에 폴란드인들이 철로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한 교사는 1941년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한 폴란드인을 그녀의 집에 숨겼다고 증언했다. 만약 독일 보고서가 사실이라고 본다면 이 폴란드인은 1940년 봄 소련군에 의해 처형됐던 3,796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유령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사망자 수에 들어갔던 1,105명은 수년 동안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인들 중에는 독일 보고서의 목격자로 서명하라고 게슈타포가 강요했다고 증언한 사름들도 몇 명 있었다.
소련의 조사로 오늘날까지도 카틴 사건에 관해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선전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은 “1940년에 볼셰비키가 폴란드 전쟁포로들과 성직자들의 집단 처형”에 관해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독일 경찰에게 내용을 제보하면 사례금을 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독일이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했던 시기라고 독일에서 말하는 1940년 봄과 독일 침공 시기 이후의 문서(편지, 증서)가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조사를 통해 나타났던 증거들이 미국 대표단에 의해 분명히 확인되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G. 로버트(G. Robert)는 이야기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의 딸이며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던 캐서린 해리먼의 기록을 보면, 나치 주장처럼 시신이 3년 전에 매장됐던 것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로버트에 따르면 해리먼 미국 대사는 미국 대표단의 결론을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체적 증거와 증언으로부터 캐서린과 대사관 직원은 어떤 경우라도 독일에 의해 학살이 진행되었다고 확신한다.”
5. 괴벨스에서 “자유세계”까지
1945년까지 카틴 사건은 미국 외교 문서에는 “나치의 선전”으로 언급됐고, 뉴욕타임즈와 같은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나치의 “흉악한 사기”로 묘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과거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이 소련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면서는 자신들의 반공주의 병기고에 카틴숲 학살을 추가하여 이 사건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첫 번째 조짐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 측이 재판에서 카틴 사건을 포함시켜 조사하자는 소련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심문절차는 6건(소련 범죄에 대해서 3건, 나치에 대해서 3건의 증언)으로 한정되었다.
1951~1952년 한국전쟁 시기에 “매든위원회(Madden Committee)”가 미국 하원에 설립되었는데 위원회는 폴란드 장교들이 소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소련을 국제재판소에 출석시키자고 제안했다. 매든위원회에서 증원했던 “신뢰할 수 있는” 증인들 중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를 맡은 오토 슈타머 박사도 있었다! 또한 1952년 7월 미국 내무부 비밀 보고 문건에는 유엔에서의 공통 전략 수립에 관한 미국-영국 간의 회담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카틴 사건을 포함하여 반소선전을 위해 유엔을 활용할 필요성이 명시되어 있다.
종전 후 지금까지도 제국주의자들은 괴벨스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한 편,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 중에도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런던으로 추방되었던 차르 지지자 후선인 알렉산더 위스가 있는데, 그가 1964년에 출판했던 저서 “전쟁기의 러시아: 1941-1945(Russia at War: 1941-1945)”에서는 카틴 사건이 소련의 책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대와 우려를 분명히 제기했다. 또한 그는 카틴에서의 대량학살 기법과 서유럽의 다른 나치 처형 사건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역사적인 진실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증언자는 동부전선(Eastern Front) 전투에 참여했던 독일인으로 그는 1971년 카틴 사건에 대해 타임(Times)지에서 시작된 논쟁에 편지로 참여했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요제프 괴벨스는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업무였고, 그것에 있어서 그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놀라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괴벨스의 기만술이) 타임지 지면에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볼 때, 전쟁 막판에 괴벨스가 카틴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많은 독일군 병사들을 속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속으로는 사형 집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독일 군인들은 폴란드 장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의해 몰살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6. 반혁명과 “증거서류”의 발견
반혁명이 승리하자 괴벨스(Gobbels)의 현대 추종자는 그들이 1943년 이래로 기다려 왔던 해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소련 유죄의 증거가 드디어 “발견됐다”! 특히 1992년 소련 공산당이 위헌 기구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가 심판 과정에 있을 때 보리스 옐친의 법률팀은 카틴에서의 폴란드 장교 살해에 대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 그리고 당연히 스탈린의 책임이 입증된 “일급 기밀”문서들을 방금 공문서보관소(Archives)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소련 공산당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은 사본으로 제출됐던 그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처음부터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그 문서들은 원본의 형태로 제출되지 않았으며 헌법재판소는 판결에 그 문서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조작된 상황에서조차도 이들 문서들은 증거로 채택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의 문서 조작을 밝히는 다른 증거들이 나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2010년 러시아 정부는 디지털 사진의 형태로 이 악명 높은 문서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원본은 아직 제출하지 못했다.
7. 위조의 네트워크
이 범죄에 대해 소련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치 선전의 주장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아니면 잘해야 매든 보고서의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반대로 역사적 진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정보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한다.
2005년 포돌스크(Podolsk)에 있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를 연구하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카틴에서 폴란드인의 처형에 직접 참여했던 독일군 장교의 증언을 문서로 기록한 전체 파일의 존재를 발견했다. 2010년 6월, 러시아연방공산당 B 일류친(B, Ilyuchin) 하원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며칠 전 카틴 사건의 문서 위조자 한 명과 접촉했다는 발표를 했다. 특히, 그가 당시 폭로했던 바에 따르면, 1990년 초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의 안보국 비호 아래, 수많은 문서를 위조하기 위한 임무를 지난 특수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조직은 처음 반혁명 이전에는 나고르나야(Nagornaya)라는 농촌마을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속된 기관으로 일하였는데 나중에는 자레취(Zarechie) 지역으로 이전했다. 보안군과 대통령 기구의 인원들로 구성된 이 위조 조직은 문서를 새로 만들거나 위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부터 수십만 건에 달하는 위조문서가 러시아공문서보관소로 이식되었다.
[카틴 : 위조의 증거]
1992년 발표된 문서에서 이른바 소련의 범죄라고 입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1940년 5월 3일 날짜로 된 내무인민위원 베리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폴란드 포로 2만 5,700명의 사형집행을 제안한 4장짜리 문서.
b. 같은 날인 1940년 5월 3일 베리야의 요청이 승인된 정치국 제13차 회의록 발췌문
c. 그리고 그 서류의 파기에 대해 1959년 3월 3일 날짜가 찍힌, KGB 국장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보낸 당시 편지.
그 문서의 진위에 대한 법학자들과 역사연구자들의 수많은 견해 중에서 다음의 것을 식별할 수 있다.
- 위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베리아의 사형집행 제안에서부터 정치국의 결정까지 전체 날짜가 동일한 것이었다. 소련 역사상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절대 없었다. 만일 그 토론이 최종 승인됐다면, 그 서류의 발송에서 정치국 토론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여기에 걸리는 기간은 적어도 5~6일이었다. 법학자인 즐로봇킨에 따르면, 이 과정의 “상세한 기록”은 공판 소송기록에서 베리아의 제안이 《1940년 3월》 날짜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나중에 정정됐다. 그 문서는 이러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 그 문서들은 엄격한 관례와 특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특징들이 제출된 문서에서는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에게 보낸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서신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도장이나 등록번호, 혹은 그 문서들의 평상시 어떠한 표시(가령, 기밀의, 비공개의 등)도 없다.
- 마지막으로 2007년 11월에 시작되어 2009년 3월 31일에 끝난 독립적 법의학 분석은 베리아의 문서에 다른 타자기가 사용되었고, 위조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증인은 1940년대에 생산된 종이들, 중앙위원회의 다양한 문서들, 위조된 도장, 심지어 “기밀문서 해제 대상이 아니”라고 기밀 표시된 전체 파일과 같이, 자신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심지어 폴란드 전쟁포로를 처형하려는 베리아의 요청을 볼셰비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승인하는 결정을 위조하는 것에도 참여했다. 위조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구체적인 인물의 신원과 증거까지 동반된 이러한 중대한 주장은 여전히 카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더욱 더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왜 이러한 모든 것이 언론이나 역사책에 적어도 피상적으로나 객관성이라는 이유로든 언급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과학자들, 문화적 인물들이나 오로지 나치 선전을 위해 돈을 받은 사람들이든 역사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편리성이 드러났던 나치의 선전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신속하게 채택이 됐는데, 그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과학적인 개념인 “두개의 극단주의”라는 역사적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틴 사건은 파시즘-나치즘과 동급으로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역사 위조의 무기가 되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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