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나라 소련은 70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라는 제1의 자본주의 경제대국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경쟁을 했던 나라로 냉전(Cold War)을 장식했던 국가였다. 미국하고 경쟁했던 소련이 미국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던 부분은 바로 체제에 있었다. 미국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소련은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과 소유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사회였다.

 

냉전시기 그 냉전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던 한국사회에선 공산주의는 절대로 긍정받을 수 없는 혹은 긍정해서는 절대로 안 될 악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대중들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좋게 볼 리 만무했고, 소위 서방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거나 과장한 내지는 왜곡해온 소련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1990년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 섬에 살던 한인 1세대 중 한명은 19913월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왔는데, 2일 뒤 기분이 매우 나쁜일을 겪었다. 수십년만에 고국에서 친척을 만났지만, 친척들이 인식하는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사할린 동포)을 마치 감자와 빵만 먹고 사는 즉 못먹고 사는 가난뱅이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 공산주의 국가는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소련 시절 일반 인민들의 삶은 절대 빈곤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굶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저 빵과 감자만 먹는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아주 불행한 국가 취급을 했다. 그리고 이런 편향된 우익적 편견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남아있다.

 

소련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은 비단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한국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서구 국가들 또한 소련과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대표적으로 서방세계가 소련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학살, 독재, 강제수용소, 비밀경찰, 언론탄압, 굶주림과 같은 단어들이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북한을 볼 때 막연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익적 편견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집단이 유럽에 있다. 그게 바로 그리스공산당(KKE)이다.

 

1918년 창당이래로 지금까지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항상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그리스공산당(KKE)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혁명적 업적과 대의를 이어받고자 고군분투하는 단체다. 지난 2013년 그리스공산당에선 소련에 대한 우익들의 왜곡에 맞서 3가지 파트로 나눈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다. 책의 구성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economy)’, 두 번째는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power)’, 세 번째는 역사왜곡에 대하여(On the falsification of history)’.

 

첫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계획경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요소인지, 그리고 그 계획경제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어떻게 달랐는지 또 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필요한지 거기서 인민들에게 부여되는 경제적 혜택이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자본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하면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다. 즉 이렇게 이상적이기에 사회가 발전할 수 없고 생산력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이 추진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은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서방의 기준으로도 연 최소 14%의 경제성장률과 생산력을 보였으며, 단기간의 발전을 통해 무상복지를 인민들에게 부여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이란 똑같이 분배한다는 개념이라기 보단 인민이 받아야할 하나의 권리로써 의료나 교육 공공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월급을 공평분배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선 노동한 만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사회였다. 즉 더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1930년대 소련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이 일어났다. 책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하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 사회주의 건설 첫 해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노동자들이 조직한 자발적 노동인 공산주의 토요노동(Communist Subbotniks)”이 있다. “공산주의 토요노동은 사회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인 공산주의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규율을 장려하고 노동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주목할 만한 사례로 1930년대 소련에서 발전한 스타하노프(Stakhanovite) 운동이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 생산에서의 혁신적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운동으로 새로운 기술의 응용에 기초하여 노동 생산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26~28

 

두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 서방과 우익들이 가장 많이 악의적으로 얘기해온 주제로써 거기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공산당의 독재라던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가 같다던지 하는 우익들과 서방세력들의 악의적인 주장들에 대한 반박 말이다.

 

소련 사회는 1924년 소련 첫 헌법에서 확립되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직접적임 참여가 대표적인 단체들에서 간접선거에 의해 수행됐다. 1936년까지 소련에선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공장, 생산단위, 마을에서 노동자권력의 중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대중 조직들의 기능을 통해 이루어졌고, 국가의 법률을 승인하기 위한 절차에선 노동자권력의 중핵 조직들의 회합이 개최되었으며 그 모임에서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기관들의 작동은 정치활동에서 대중들의 전례 없는 참여를 보여주었다. 1977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가권력의 지역기관(예를 들어, 대표자 소비에트)은 국가 전역에 5만개 이상이 존재했다. 이러한 소비에트에는 220만 이상의 선출된 대표자들, 즉 소련 전체 주민의 대략 1%가 있었다. 11936년 헌법부터 41년 만에 2,500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비스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는 인민의 통제기관 안에서는 노동자 회합에서 2년마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가 있었고 대략 9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들에 참여했을 정도다. 즉 소련이라는 사회에는 최소한 이러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의 중심은 노동자 권력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마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면에선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포옹한다는 논리로 간혹 나가기도 한다.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계급이 일반적으로 공산당들이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당들이 자신들을 전복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공산당들에 대해 더 가혹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그리스에서 그리스공산당(KKE)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로 점철돼 있다. 공산당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이다. 그리스에서 1929년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민주정부는 공산주의를 법률 위반으로 선언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법률로 금지했다. 그리스공산당은 27년 동안(1947-1974) 불법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 중 20년은 파시스트나 군사독재 기간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의 기간이었으며, 그 시절 테러, 고문, 추방, 처형 등이 자행됐다. 최근까지 민주주의의 정점으로서 위선적으로 유럽연합(EU)을 대표했던 의회민주주의와 다당제 체제의 옹호자들이 유럽연합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산당들과 청년조직, 공산당의 상징들을 법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체코 공화국에서 공산주의 청년조직은 최근까지 불법이었다. 부르주아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 내렸다. “공산주의 청년조직 강령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할 필요성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범죄이다! 폴란드와 어디에서든지 공산주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존재한다. 발트해 국가(Baltics)는 공산당을 금지하는 반면 나치 친위대(Nazi SS)를 찬양한다.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사상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게 만들어버렸고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를 자극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합법적인 경우조차도,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선전되는데 많은 장애를 두고 있으며 물론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하에서 부르주아는 공산당들에게 권한을 주는 것을 허용한다.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부르주아 국가에게 공산당들이 그들의 최고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법은 노동자들의 권리"이지만 역시 대중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들(파업, 부르주아 정책 등에 반대하여 저항하고 통제되지 않는 조직)은 합법의 경계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공산당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치사상을 압축한 당의 구호 때문에 공격을 당했던가?”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과 거짓 p.74~76

 

마지막으로 다루는 세 번째 파트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항상 악의적으로 왜곡해온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왜곡을 다루고 있다. 서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룰 때 항상 얘기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핀란드 침공, 카틴 대학살, 베를린 장벽, 헝가리 봉기 등에 대한 서방의 과장 혹은 왜곡을 반박한다. 사실 필자는 이 주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여기서 깊게 다루는 역사왜곡은 현재 서구 세력들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으며, 소련의 처지를 악마화 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동독과 베를린 장벽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에 관한 것은 지극히 서방과 서독 입장에서 서술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 구도는 대표적으로 동독은 못살고 자유가 없지만, 서독은 잘살고 자유가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이 동독을 떠난다인데,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실제로 냉전 초기 동독과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서독에서도 최소 60만 이상이 동독으로 이주를 갔는데, 설사 서방의 논리를 적용하여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 할지라도 분명한건 서독에서도 그 체제에 반대되는 사람들이 동독에서의 탈출자 못지않게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서방국가들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1952년 당시 포츠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게 독일의 재통일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한 것은 서구세력들이었다. 1955년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동독이 합류한 것은 1954년 서구 세력들이 제국주의적 목적에 따라 창설된 NATO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을 책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은 우리가 우익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근거 출처를 밝혀가며 입증하고 있다. 책을 통해 필자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르주아적 이익에 따라 의도적으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가치들을 책임지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회가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의도적으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가치를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타주의 보단 이기주의와 욕심을 강조하고, 그런 가치들을 폄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해체 원인에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작용이 있었지만,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추구했던 가치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구했던 가치보다 훨씬 아름답고 인간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련은 냉전시기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혁명의 편에 섰으며, 제국주의자들의 반혁명적 책동을 분쇄시키고자 했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에서 소련의 지원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소련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는 지금도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남아야 한다. 인민 모두가 무상으로 교육받을 권리,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역사를 공부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전 혁명 세대들의 가치 있는 모든 경험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당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전통을 끌어낸다. 앞으로의 투쟁과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투쟁에서 더욱 더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되도록. 우리는 조직된 인민들의 정당하고 억누를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깃발,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깃발 아래 우리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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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도모르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라는 것이다. 즉 1932년에서 1933년에 발생한 기근에는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겠다는 스탈린의 의도적인 목표가 있었고, 또 그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붉은 기근(Red Famine 1932~1933)‘의 저자 애플 봄도 자신의 책에서 홀로도모르를 볼셰비키 정권의 태생적 잔인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려 했다는 사료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지만, 기근이 일어났을때 곡물 징발은 됐어도 목표치를 보다 더 낮게 잡는 완화된 초치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홀로도모르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기후가 최악이 었다는 점이다. 그 시기의 기상기록을 보면 날씨가 좋지 않은 날들이 많았고, 지금보다 농업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두번째는 소위 우익들이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농민 학살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비판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소작농 입장에서 보면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소위 쿨락(Kulak)이라 불리는 부농은 땅을 일반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계급으로 볼셰비키에 저항하려 했다. 쉽게 말해 해방 후 월남한 서북청년단과 같은 부류라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이 소작농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싫어 소유하고 있던 농촌의 곡식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다. 결국 부농들의 비협조 또한 기근의 영향이 분명 있었다. 따라서 경작할 토지가 없는 소작농들 입장에선 이들에 맞선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남부러시아 그외의 스탄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가들에서도 기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기근의 심각도에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심각하긴 했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의 기근을 가지고 학살이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종합적인 결론은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무엇보다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혼내주기 위해 스탈린이 조장했다는 얘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다. 기근 도중에 곡물 징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볼셰비키가 정책을 잘못잡았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학살이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기근에서의 아사자 수치가 서방에 의해 지극히 과장되었다는 것도 무시해선 안된다. 대숙청을 지극히 과장했던 로버트 콘퀘스트는 1980년대 자신이 쓴 책에서 기근으로 1500만이 죽었다고 했는데, 이게 니얼 퍼거슨이나 다른 우익학자들 구미에 맞아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전원책이 쓴 ‘자유의 적‘들에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런 과장된 학설들은 1990년대 소련 문서가 개방되면서 수정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600만 아사라는 숫자단위의 제1차 출처가 1930년대 나치의 괴벨스 연설에서 사용됐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나치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던 집단이었고, 소련에 대한 악마화를 했었던 집단이다. 나치가 제시한 자료는 반소정책이 강하던 미국이나 영국의 구미에도 맞아 1930년대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사에서도 괴벨스 연설 자료가 그대로 인용됐다. 즉 충분히 아사자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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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 3판 노동자 교양문고 1
비만 아자드 지음, 채만수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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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25일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사건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국과 더불어 냉전 시대를 장식하던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연방이 15개의 국가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련이 내세운 사회주의가 끝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인식되었다. 네오콘적 사고를 가진 일본계 미국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다가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폭력성이 들어나는 망언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소련 연방의 해체는 사회주의가 실패 혹은 패배하고, 자본주의 미국이 성공 혹은 승리한 사건 내지는 역사로 간주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386 운동권에게도 해당이 되는 얘기였고,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모습을 본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방향으로 수정하는 쪽을 택했었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사회주의에서 반공주의로 복귀하는 반동의 길을 걷는 이들도 분명 적잖게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트로츠키주의를 일부 수정한 영국의 토니 클리프식 이데올로기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소련의 해체는 많은 이들에게 사상적 변화를 주었고, 그런 변화는 아주 나쁜 의미에선 반동주의나 수정주의로 회귀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는 소련의 해체를 직접 보지 못하거나, 해체 과정을 겪던 당시에는 그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을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저 막연히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의 역사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미제국주의의 교만한 정치사회 공작의 영향도 분명히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선전을 통해 주장하고 세뇌시키는 것과는 달리 소련은 쉽게 해체될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냉전시기의 소련은 미국 다음으로 강한 군사력을 유지했고,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바만 아자드가 집필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Heroic Struggle! Bitter Defeat)’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서방측 자료와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증명한다.

 

소련의 흥망과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소련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천재적인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과 볼셰비키당의 지도아래 1917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했다. 이 혁명은 러시아 제국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일어났고,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는 각종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레닌의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는 191814개의 제국주의 연합군과 차르 체제를 복원하려는 반혁명 군대의 군사적 공격으로 내전에 직면하게 됐고,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혁명 지도부는 신경제정책으로 경기를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 상황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당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게 된다. 스탈린은 기존의 신경제정책을 포기하고, 급진적 공업화 노선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공업화 노선으로 소련은 경제 규모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군현대화를 통해 군사강국이 되었으며, 1941년 나치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투쟁을 통해 파시즘을 무찌르고 전 세계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치른 피해를 전후복구를 통해 회복하고 1950년대에는 미제국주의와 견줄 수 있는 힘을 길렀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정권을 잡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하며, 일종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했지만, 스탈린에 대한 감성적인 비판에만 치중했던 나머지 중공업 정책에서 지나치게 경공업과 소비를 중시하는 노선으로 갔다. 정치와 경제적으로 수정하는 방향인 수정주의를 택한 흐루쇼프의 노선은 결과적으로 소련 내의 빈부격차와 낮은 경제 성장률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그래도 흐루쇼프의 시대는 전후복구의 혜택을 받아서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탄생시켰고,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키는 고무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었다.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적 노선은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해오던 군사경쟁의 문제점을 해결치 못했다. 그리고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 지도부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포하고,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포기하거나 유보하려는 쪽으로 노선을 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가지고 있던 내부의 문제점은 사라지지 않았고, 외부적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그 시기 소련은 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구조에 필요한 변화를 가하고 그 객관적 조건에 조응하는 사회경제적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그 성장과 발전에 의해서 야기되는 주기적인 위기를 또한 어떻게든 극복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의 소련은 아니었다. 1980년대 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가 소련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소위 인간의 얼굴을 했다고 알려진 고르바초프는 그런 내부 문제 해결을 얘기하며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행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이 추구해오던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한 포기를 뜻했다. 이것은 결국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정과 일탈이 결과적으로는 보리스 옐친이라는 반혁명적 반동주의로 이어졌고, 1991년에 이르러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해체를 불러온 것이다.

 

소련 해체 원인에는 분명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런 내부적인 해체원인은 흐루쇼프 때부터 점차 생기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지도부에서도 생겨났으며, 1980년대 고르바초프에 와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는 결국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옐친의 반동주의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책 저자 바만 아자드는 이러한 내부적인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며, 이것은 소련 지도부가 정책의 방향만 잘 잡았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자드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그는 소련 사회주의의 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회주의의 위기는 성장의 위기였지 실패의 위기가 아니었다. 그 발전의 각 단계에서 사회주의는 계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사회적·경제적 생산관계를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성장의 위기를 사회적·정치적인 위기의 객관적인 장으로 바꾼 것은 쏘련공산당의 주체적인 오류와, 사회주의 내부에서 새롭게 발전한 생산력에 맞추어 생산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행동의 결여였다.”

 

출처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73

 

소련 해체 원인은 비단 내부적인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문제도 분명히 작용했다. 저자 바만 아자드는 냉전시기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해체시키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냉전 기간 중에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스파이를 고용하여 스파이 활동과 기타 대소련 파괴활동을 벌이는 데에 연간 150억 달러나 사용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은 소련의 경제성장의 감속을 틈타 제국주의의 반사회주의 선전 공세 및 파괴공작과 더불어, 위기를 심화시키고 그 위기를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부상시키는 물질적인 기초를 창출했다.

 

소련은 분명히 내부적인 문제와 내부적인 문제의 충돌로 인하여 해체됐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사회주의의 실패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항상 무시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 인민이 소련 해체를 바라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19913월 소련 연방 존속에 관한 국민 투표를 전국적으로 실시했었다. 물론 아르메니아와 발트3(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몰도바는 참여를 거부했기에 그곳에선 투표가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소련에서 있던 이 전국적인 투표의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득표율 80%를 보였던 이 투표에서 77.4%가 소련 연방의 유지를 찬성했다. 그리고 연방 해체 이후인 현 러시아에서도 70% 이상의 러시아 인민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소련 연방의 해체를 아쉬워 한다는 점은 소련 연방 해체가 결코 민중의 염원에 의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이 책을 통해 소련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바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제시한 복지와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소련이라는 나라 자체가 아래서 부터의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소련 체제는 민중에게 높은 복지 제도를 제공했다. 이러한 복지 제도는 스탈린이 서방의 기준으로 연 12~14%의 성장을 보일시기 부터 제공된 것이었다.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여 1928년의 770%나 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국민총생산은 연률 15% 이상이나 성장했고, 문맹은 일소되었으며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또한 파괴적인 파시스트와의 전쟁 이후에도 소련은 소비재의 생산을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연 5.8%의 비율로 소비재 생산이 확대되었으며, 1947년엔 전시에 실행하던 배급제를 폐지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에서 소위 수정주의로 불리던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도 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이것은 미국의 연 경제 성장률 보다 두 배나 높은 수치였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났던 독소전쟁에서 소련은 4년간의 투쟁 끝에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때 소련이 치른 과정은 참으로 끔찍했다. 2700만이나 되는 소련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고, 소련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의 1710개 도시와 7만 곳 이상의 농촌마을이 나치 독일군에게 약탈당하고 불탔다. 32천 곳의 공업설비와 65천 킬로미터와 철도가 파괴되고, 98천 개의 협동조합과 5천 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나 농업기계 창고가 약탈당했으며, 수만 개의 병원, 학교, 예술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즉 이런 상태에서 소련은 위에 상술했듯이 전후복구를 했고, 1972년까지 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으며,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필수품을 공급한다고 하는 중대한 책임 즉 자본주의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임을 소련은 항상 책임지고 있었다. 즉 이러한 상황에서도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책임을 수행하며 군비확산을 통해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해나갔다. 이것만 보더라도 소련이라는 국가가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날 정도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만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통해 필자는 소련이라는 국가의 강력함과 그들이 추구하고 또는 실천했던 너무나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1991년의 소련 해체를 보고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한 사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지금도 너무나 많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로 보는 사람들 중엔 오로지 반공주의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틀에 갇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수준 낮은 반공주의자들이 분명 많지만, 소위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 중에도 적잖게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는 실패하지도 않았고, 분명히 존재했으며, 소련 사회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많이 실현했다라고 말이다.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자유주의자 및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 분자를 포함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는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좋지만, 현실에서 실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이러한 주장은 ‘80년간의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로부터 겨우 한 걸음 논리적으로 전진하는 것인데, 그것도 이 명제의 제안자들은 결코 내딛으려 하지 않을지 모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패배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내딛으려고 하는 그러한 한 걸음이다. 이야말로 그러한 주장의 뒤에 잠복해 있는 궁극적인 위험인 것이다.

 

그러나 ‘80년간의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를 열렬히 신봉하는 계급적 적들은 결코 공상가들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현실을 아주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환멸에 빠진 새로운 공상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과거에 사회주의가 존재했음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주의가 미래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저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과게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근로인민이 믿고, 그리고 다름 아니라 현실에서의 그 존재 자체가 사회주의의 피할 수 없는 고유한 결함즉 자본주의 자체보다 훨씬 더 나쁘고, 그리하여 어떠한 미래도 없는 결함을 증명해왔다고 믿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출처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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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독일군대가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153개 사단과 3700대의 탱크 그리고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독일군은 1500km에 이르는 전선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크게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소련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격 당일 1200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루프트바페(Luftwaffe)의 공격을 받았다. 개전 초기의 독일군은 경미한 저항만 받으며 진격했고, 그들이 전개한 ‘전격전(Blitz Krieg)’은 붉은 군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브레스트 요새만 7월 12일까지 전선을 사수했을 뿐이다.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독일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지만, 1930년대부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전쟁을 준비해 온 소련은 즉시 전 국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속하게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정치 경제의 중심인 모스크바에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력을 집중시켰는데, 이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올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 7월 말이 되었을 때, 독일군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진격했고, 8월에는 독일군의 중앙 부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몰렌스크라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소련군은 총력을 다해 독일군에 맞섰다. 소련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을 패배시켰다. 그래도 소련군은 9월까지 독일군의 발목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모스크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1941년 9월 30일 독일군은 ‘태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모스크바를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10일 안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하고 붉은 광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는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위해 독일군 최정예 부대를 모아 180만 병력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게 했다. ‘태풍 작전’에 따라 독일군 장갑차 제2부대가 브랸스크(Bryansk)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가을비로 인하여 진흙탕이 되었음에도 독일군은 10월 2일에 중앙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브랸스크를 점령했다. 그 후 2주 동안 독일군 중앙부대는 브랸스크 부근에 두 개, 비야즈마 서쪽에 한 개씩 모두 세 개의 포위망을 구축했고, 이 세 곳에서의 전투로 소련군 66만 3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놓은 소련군은 모스크바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 전진을 막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지휘 체계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이오시프 스탈린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주코프 장군은 10월 중순에 모스크바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10월 19일 소련의 지도부는 모스크바에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모스크바를 사수할 것을 호소했다. 그로부터 몇일 후 모스크바 시에는 25개 노동자 부대와 12만 자원병이 모여들었고, 45만 명이 도시 방어를 위해 나섰다. 소련군과 일반 지원병들은 11월 초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라마강과 루자강 등 지역에서 독일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런 저항을 통해 소련은 “10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직접 보였고, 그런 스탈린의 호소를 들은 소련의 시민들과 군인들은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단결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15일 독일군은 군대를 재정비한 후 모스크바를 향한 공격을 다시 퍼부었다. 11월 27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불과 24km 떨어진 이스트라(Istra)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곽까지 접근했다. 1941년 12월 초 겨울을 맞은 모스크바에는 매서운 추위가 왔다. 기온이 영하 20에서 30도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1941년 12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주코프는 소련군을 이끌고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가했다. 주코프 장군은 소련의 주력 부대를 모두 중앙으로 집중시켰고, 12월 6일에 시작된 모스크바를 향한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물리쳤다. 이를 기회로 소련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군에 맞선 반격을 개시했고,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 8일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1941년 12월 16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빼앗겼던 남쪽 도시 툴라와 모스크바 북쪽의 칼리닌을 되찾았고, 1월 초에는 소련군의 서쪽 부대가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군은 250km 밖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3개월간 지속되었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은 총 58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소련군은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독소전쟁 개전 초기 독일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개과천선하여 효과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참모로 두고 그와 협력하여 모스크바 공방전을 준비했고,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소련 인민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입했을 시기 포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을 떠나지 않았으며, 소련의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작전을 지휘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군에 맞서 열심히 싸운 병사들과 인민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큰 동기부여를 해준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의 지도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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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13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소련은 공간(스몰렌스크)을 내주고 시간
을 벌면서 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몰아 닥치기 전에 보급선을
늘어 뜨리지 말고 신속하게 모스크바로 주공
을 해야 한다는 구데리안의 판단을 OKW와
히틀러가 무시한 점도 독일군 패착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몰렌스크는 전쟁과 평화에도 나오는 전쟁시 중요도시던데요. 잘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0-02-18 2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리하르트 조르게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1895년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바쿠에서 유전 기술자인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친구사이였다.

최고의 보수를 받던 아버지는 유전 회사와의 고용 계약 해지로 직장을 잃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승진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킬,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열망과 혁명운동에 이바지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남달랐던 조르게는 이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주목을 받았고, 코민테른의 추천으로 그는 모스크바의 공산당 고위교육과정에 입교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조르게는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독일어와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1924년 조르게는 소련 공산당원이 됐으며, 이듬해에는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1927년 조르게에게 부여된 첫 임무는 미국 영화산업계(할리우드)에 침투해 공산주의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1929년 귀국한 조르게는 이내 소련군 총참모부 산하 제4국(정보국, GRU)을 만든 얀 베르친 장군의 눈에 띄어 GRU 소속 정보원으로 발탁됐다. 베르친은 조르게를 1년 동안 치밀하게 훈육했다. 조르게는 잠시 영국에 파견돼 정보 수집 활동을 한 뒤, 다시 독일로 옮겨 히틀러가 이끄는 신생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서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조직 인선을 끝낸 조르게는 독일로 돌아가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변신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조르게는 무엇보다 나치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장관과 친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베르리너 뵈르세 차이퉁 등 두 언론사의 일본 특파원으로 자리를 얻었다. 혹시나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걱정에 조르게는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괴벨스는 조르게의 환송 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조르게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누가 보더라도 조르게는 골수 나치당원이었다. 베르니너 뵈르세 차이퉁 신문의 편집국장은 전도유망한 한 독일군 고위장교에게 조르게를 잘 부탁한다는 소개 편지까지 써주었다. 고위장교는 바로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의 무관인 오이겐 오트 대령이었다.

완벽한 신분세탁을 거친 후 그는 1933년 9월 일본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골수 나치당원에다 특파원 신분을 가진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오이겐 오트 대령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그의 부인과는 내연 관계까지 맺었다. 5년 뒤 일본 주재 대사로 영전한 오트 대령은 오자키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 됐다.

1936년 일본에서 2.2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나치 당원 신분으로 중요한 정보를 빼내어 소련에 정보를 타전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비록 스탈린이 이를 간과하여 초반에 독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본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스탈린에게 극동에 있던 붉은 군대를 개전 초기 빠르게 이송시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게 기여했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일본은 소련에서 잡힌 일본 간첩과 조르게를 교환하려 했지만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1961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1964년 니키다 흐루쇼프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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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완 2020-02-15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본드 실제 버전이라고 할 만큼 전설의 스파이였죠

NamGiKim 2020-02-15 13:46   좋아요 0 | URL
이때 시베리아에서 동부전선으로 군대를 뺄 수 있었던건 조르게의 활약 덕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