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라는 것이다. 즉 1932년에서 1933년에 발생한 기근에는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겠다는 스탈린의 의도적인 목표가 있었고, 또 그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붉은 기근(Red Famine 1932~1933)‘의 저자 애플 봄도 자신의 책에서 홀로도모르를 볼셰비키 정권의 태생적 잔인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려 했다는 사료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지만, 기근이 일어났을때 곡물 징발은 됐어도 목표치를 보다 더 낮게 잡는 완화된 초치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홀로도모르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기후가 최악이 었다는 점이다. 그 시기의 기상기록을 보면 날씨가 좋지 않은 날들이 많았고, 지금보다 농업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두번째는 소위 우익들이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농민 학살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비판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소작농 입장에서 보면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소위 쿨락(Kulak)이라 불리는 부농은 땅을 일반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계급으로 볼셰비키에 저항하려 했다. 쉽게 말해 해방 후 월남한 서북청년단과 같은 부류라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이 소작농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싫어 소유하고 있던 농촌의 곡식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다. 결국 부농들의 비협조 또한 기근의 영향이 분명 있었다. 따라서 경작할 토지가 없는 소작농들 입장에선 이들에 맞선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남부러시아 그외의 스탄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가들에서도 기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기근의 심각도에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심각하긴 했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의 기근을 가지고 학살이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종합적인 결론은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무엇보다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혼내주기 위해 스탈린이 조장했다는 얘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다. 기근 도중에 곡물 징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볼셰비키가 정책을 잘못잡았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학살이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기근에서의 아사자 수치가 서방에 의해 지극히 과장되었다는 것도 무시해선 안된다. 대숙청을 지극히 과장했던 로버트 콘퀘스트는 1980년대 자신이 쓴 책에서 기근으로 1500만이 죽었다고 했는데, 이게 니얼 퍼거슨이나 다른 우익학자들 구미에 맞아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전원책이 쓴 ‘자유의 적‘들에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런 과장된 학설들은 1990년대 소련 문서가 개방되면서 수정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600만 아사라는 숫자단위의 제1차 출처가 1930년대 나치의 괴벨스 연설에서 사용됐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나치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던 집단이었고, 소련에 대한 악마화를 했었던 집단이다. 나치가 제시한 자료는 반소정책이 강하던 미국이나 영국의 구미에도 맞아 1930년대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사에서도 괴벨스 연설 자료가 그대로 인용됐다. 즉 충분히 아사자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