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아마 소련과 중국일 것이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냉전 말기인 1989년 존 키건이 쓴 <2차 세계대전사>에서는 대략 1,300~1,500만 명의 소련인이 전쟁으로 죽었다고 추산했는데, 이 책을 번역한 류한수 교수는 최근의 연구는 2,600만에서 2,700만 명 이상의 소련 사람이 죽은 것으로 최근 학계가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중 1,000만 명은 군인이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3배 정도 많은 소련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셈이다. 거기다 학살당한 유대인 대다수는 소련 쪽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인명피해에 못지않게 소련은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간 셈이다. 대략 98,000개의 협동조합과 5,000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에게 약탈당했다. 수만 개의 병원과 학교, 예술학교, 고등 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됐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루도 마르텐스에 따르면, 독일군은 후퇴하는 동안에도 고의로 소련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됐다. 독일군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됐으며, 몇몇 사람들은 소련이 나치에 의해 받은 상처를 모두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하기까지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처칠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년 트루먼 톡트린(Truman Doctrine)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는데, 한때 파시즘에 맞서 같이 싸웠던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전후 재건을 돕지 않았으며 오히려 늦추려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전후 재건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보기 좋게 서방에게 한 방 먹였다. 스탈린 집권 말기에 시작된 전후 재건으로 소련은 발 빠르게 전후복구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이후 냉전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선 국가들의 모범적 모델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소련의 전후 재건 발전상은 당시 소련을 방문한 문학가 이태준이나 역사학자나 북한의 정치인인 백남운이 쓴 책에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태준은 1946년에 소련을 방문한 이후 3년 뒤 다시 소련을 방문했는데, 수도 모스크바를 둘러보며 “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 차는 어쩌다가 한 대씩 볼 수 있는 정도,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라며 극찬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은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으며,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을 정도였다. 자본재의 경우 5년 동안 80%의 성장을 보였으며,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최소 2배 이상이나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6년 당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했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비록 스탈린 시기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후복구 과정에서의 소비재 생산도 많이 발전했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이른바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를 시행했던 영국보다 6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미군정하의 일본보다도 2년이나 앞섰다. 전후복구 과정 초기 성과로 소비재 생산은 23% 증가했다. 심지어 반북성향을 가진 국민대학교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또한 스탈린 시기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소련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했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1970년대 중후반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과연 육류 소비를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소련의 소비재 현황이 그렇게 나빴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소비재 생산과 의식주 문제 해결이 된 1960년대 초 소련 사회의 기본적인 토대는 스탈린의 전후재건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에서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련 사회는 밥을 굶는 사회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받은 상처를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보이며 회복했다. 전후재건으로 소련은 자본주의 최강대국인 미국과 겨루는 나라로 거듭났고,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충돌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후재건을 통해 소련을 미국과는 다른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재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있다. 스탈린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점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방 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 그리고 거짓말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레닌 사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온갖 비방과 악선전들은 조금 과장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굴라그 수용소, 독-소 불가침 조약, 핀란드 침공, 발트 삼국 합병, 트로츠키 죽음, 카틴 대학살, 소련군의 인명 경시 전략 전술, 소련군의 약탈과 아녀자 강간, 동유럽의 위성국화, 한국전쟁 책임자 등등등, 말 그대로 서방이 스탈린에게 하는 악선전은 끝이 없는 수준이다. 그 중에서 이 글에선 스탈린 시절 굴라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의 존재가 서방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 극우 망명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에 의해서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수용소 군도> 시리즈로 유명한 솔제니친은 자신의 소설에서 말 그래도 소련에 대한 거짓된 소설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냈다.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친서방적이며 친식민지주의적인에 대해 서방 사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나자, 전적으로 미국을 옹호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포르투갈에 맞서 앙골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솔제니친의 반동적이고 악의적인 이데올로기 따위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시기 굴라그에 수감된 인원이 도합 5,000만 명이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했다. 영미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우겨댔다. 솔제니친과 더불어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인물이 있다면 아마도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 시기 수백만 명의 소련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에서 1938년 콘퀘스트는 700만에서 900만 명이 체포되었고, 1934년 당시 500만 명이 굴라그에 억류되었으며, 대략 합쳐서 1,20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 통계를 바탕으로 콘퀘스트는 1939년부터 1953년까지 1,260만 명이 굴라그에서 죽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거짓말들을 총합해서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2~3천만 명을 학살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이런 거짓말들을 바탕으로 극우 네오콘 정치학자인 루돌프 럼멜은 한술 더 떠서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4,500만에서 6,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인 양 통계화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통계는 루돌프 럼멜의 자의적인 덧셈 뺄셈이지만 말이다. 럼멜의 주장은 워낙 말이 안되는 소리라 언급할 가치마저 못 느낄 정도이다. 심지어 1990년대 문서고 혁명으로 거짓말이 다 들어난 이후 콘퀘스트가 200만 명이 대숙청으로 희생되었다고 했을 때, 비슷한 시기 럼멜은 430만 명이 희생됐다고 뻥쳤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4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6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하는 소리의 원출처가 극우 네오콘인 루돌프 럼멜의 헛소리인 셈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연평균 사망률이 대략 10%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34년 당시 정치범이 500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무서를 보면 실제 정치범의 숫자는 12만 7,000명에서 17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에 억류된 모든 이들의 정확한 수치는 대략 51만 307명이었다. 이 중 정치범의 비율은 25~35%였다. 즉 콘퀘스트는 15만 명의 억류자라는 현실적인 수치에 485만 명이라는 엄청난 부풀림을 한 것이다. 독소전쟁이 진행중이던 1941년에서 1942년 굴라그 수감자의 숫자는 50만 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무튼 콘퀘스트나 솔제니친 그리고 럼멜 등은 실제 숫자보다 수십 배는 부풀려 소련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대숙청 시기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희생된 사람은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에 따르면, 11만 5,922명이라고 한다. 즉 마르텐스에 따르면 실제 죽음 11만 6,000명에 콘퀘스트는 188만 4,000명을 추가하는 악의적인 반공 시체놀이를 한 셈이다. 거기다 굴라그 수감자도 가장 많던 1951년만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195만 명에서 250만 명 내외였다. 이 중에서 정치범은 57만 명 정도다. 또한 이 정치범 57만 명 중 33만 명은 주로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이러한 맥락과 사실따위는 콘퀘스트나 럼멜 같은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외면당했다.


전쟁 당시 굴라그 수용소의 석방자가 늘어났다가, 전쟁 이후 수감자가 증가한 것은 나치 협력자들 및 여러 잡범들을 수용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굴라그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슨 철조망 처진 곳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수용소의 인원들은 인근 마을과 수용소를 이동할 수 있었으며, 숙식이 제공됐다. 물론 강도 높은 노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소련은 8시간 노동제를 고수했다. 굴라그 최대 수용 인원은 200~250만 명 정도인데, 사실 1990년대 미국의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 300만 명이나 적은 수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숙청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측면이 존재했으며, 숙청 또한 지극히 과장됐다. 서방세계에서 수정주의 학자로 유명한 아치게티(Arch Getty)가 <대숙청의 기원(Origins of the Great Purges)>에서 쓴 글을 보자.


“이런 증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숙청의 시기로 인식하는 예조프 시기가 다시 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주의가 반대파를 짓밟고, 고참 급진 혁명주의자들을 절멸시킨 결과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였을 것이다. 예조프 시기는 관료제에 대항하는 다소 과격하고, 심지어 히스테릭한 대응이었다는 주장은 증거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할 줄 모르는 관료들은 주의주의와 혁명적인 청교도주의로 요동치는 혼란스언 정국 속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수감자 숫자를 얘기하겠다. 스웨덴의 사회주의 활동가인 마리오 소사(Mario Sausa)는 <진실이 밝혀지다>에서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스탈린의 소련과 미국을 비교했다. 이 숫자는 당사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의 수감자 인권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숫자일 것이다. 2005년 ‘시사저널’에 실렸던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을 보자.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의 감옥인권 문제는 굴라그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의 이런 인권유린은 보지 못하며,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난하기 바쁜 것일까. 마찬가지로 실체조차 불분명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얘기는 거짓말하는 태영호류 탈북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감옥 인권은 전혀 보지 않을까?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방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반공세뇌 시스템이라고 본다. 그러한 세뇌 시스템에 서방의 대다수 민중들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반북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대다수 일반인들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솔제니친, 콘퀘스트, 럼멜이 한 거짓선전을 믿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 그런 세뇌된 반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여론조작과 언론검열의 추악한 민낯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1. 나찌 점령하의 우끄라이나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점령했고 쏘련의 국경을 따라서 주둔했다. 히틀러는 1933년에 권력을 잡았다.

 

1928년에서 1933년에 쏘련이 착수했던 공업과 농업의 재조직화 계획은 시의 적절했다. 모든 힘을 총동원하는 희생을 치르며, 오직 그들의 성공만이 나찌에 대한 저항과 승리를 허락했다.

 

역사적인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나찌가 우끄라이나인 대학살과 쏘비에뜨 체제의 허약함에 대해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사가인 하인츠 호네(Heinz Hohne)는 이렇게 썼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러시아에서 2년간 치러졌던 피의 전쟁47)(히틀러가 러시아인들을 비하하는 용어인 역자) 인간 이하 존재(sub-humans)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잔인하게 증명했다. 일찍이 19428독일제국의 보고들에서 경찰보안대(SD, Sicherheit Dienst), 독일 인민들 사이에서 우리가 그동안 망상의 희생자들이라는 지각이 증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엄청난 양의 쏘련의 무기, 그들의 기술적 우수성, 그리고 공업화에 대한 쏘련의 거인과 같은 노력 등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인상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쏘련에 대한 예전의 모습과는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인민들은, 어떻게 볼셰비즘이 이 모든 것을 생산하게 했는지 자문하고 있다.” ’48)

 

1985, 미국의 교수인 윌리엄 만델(William Mandel)은 이렇게 적었다:

 

‘20년 동안 쏘련에 충성하던, 우끄라이나의 가장 넓은 동부 지역은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50만의 쏘비에뜨 게릴라군이 있었다. .... 그리고 450만 명의 우끄라이나 민족은 쏘비에뜨 군대에서 복무했다. 만약 그 큰 집단 내에 근본적인 불만이 존재했다면, 명백하게 그 군대는 바탕에서부터 무력해졌을 것이다.’49)

 

역사가인 로만 스즈포룩(Roman Szporluk)조직화된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의 활동 지역이 이전의 폴란드 영토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즉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폴란드의 점령 하에, 우끄라이나인 파시스트 운동은 1939년까지 자신들의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50)

 

우끄라이나인 대학살이라는 거짓말은, 히틀러주의자들이 우끄라이나 영토의 정복을 준비하는 일환으로서, 그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끄라이나 영토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나찌 해방자들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알렉세이 표도로프(Alexei Fyodorov)는 전시에 25000명의 나찌를 물리친 한 빨치산 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책, 행동하는 지하 위원회(The Underground Committee Carries On)는 나찌에 대한 우끄라이나인들의 태토를 훌륭히 보여준다. ‘스딸린주의자의 우끄라이나인 대학살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해독제로서 이 도서를 읽을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51) (5부 끝) <노사과연>

 

번역 : 편집부

 

1) Douglas Tottle, 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p. 5-6.

 

2) The Nation 140 (36), 13 March 1935, quoted in Tottle, op. cit. , p. 8.

 

3) 역자 주 : 원문에는 월터(Walter)라고 되어 있으나, 워커(Walker)의 오타로 보인다.

 

4) 워커의 원문에 하르호프(Kharhov)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끄라이나 도시인 하르코프(Kharkov)를 워커가 잘못 쓴 것을 피셔가 그대로 원문대로 표기했다는 뜻이다.

 

5) Tottle, op. cit. , p. 9.

 

6) James Casey, Daily Worker, 21 February 1935, quoted in Tottle, op. cit. , p. 9.

 

7) Tottle, op. cit. , pp. 13, 15.

 

8) Ibid. , pp. 19-21.

 

9) Ibid. , pp. 23-24.

 

10) Ibid. , p. 25.

 

11) Ibid. , pp. 4-31.

 

12) 역주: 원문에는 `communist barbary'로 되어 있으나,`communist barbarism'의 오기로 보고 번역했다.

 

13) Ibid. , pp. 38-44.

 

14) Ibid. , p. 41.

 

15) New York Times, quoted in Tottle, op. cit. , p. 50.

 

16) Tottle, op. cit. , p. 51.

 

17) Ibid. , p. 61.

 

18) Ibid.

 

19) Ibid. , pp. 69-71.

 

20) Ibid. , p. 71.

 

21) Ibid. , p. 74.

 

22) Ibid. , p. 79.

 

23) Ibid. , p. 86.

 

24) Conquest, The Harvest of Sorrow, op. cit. , p. 334.

 

25) Tottle, op. cit. , pp. 111-112.

 

26) Ibid. , p. 112.

 

27) Ibid. , p. 113.

 

28) Ibid.

 

29) Ibid. , p. 115.

 

30) Ibid. , p. 118.

 

31) 역자 주: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은 서부 우끄라이나에서 1929년 건설된 정치조직이다. 이 조직 산하에 무장조직인 UPA가 있다. 이후 OUN1940년 멜닉(Melnyk) 그룹과 반데라 그룹으로 분열된다. 주도권은 보다 전투적인 반데라 그룹이 쥐게 된다.

 

32) Ibid.

 

33) Ibid. , pp. 121-122.

 

34) Ibid. , p. 122.

 

35) Ibid. , p. 128.

 

36) Ibid. , p. 129.

 

37) Ibid. , pp. 58-59.

 

38)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5.

 

39) Tottle, op. cit. , pp. 93-94.

 

40) Ibid. , p. 94.

 

41) Ibid. , p. 91.

 

42) Ibid. , p. 92.

 

43) Ibid. , p. 96.

 

44) Ibid. , p. 97.

 

45) Ibid.

 

46) Ibid. , p. 100

 

47) 역자 주 : 1941622일 발발한 독-쏘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8) Ibid. , p. 99.

 

49) Ibid. , p. 101.

 

50) Ibid.

 

51) Alexei Fyodorov, The Underground Committee Carries On (Moscow: Progress Publisher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 우끄라이나 기근의 원인들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하는, 우끄라이나 극우파가 이끄는 비참한 종말에 이른 투쟁에 의해 주요하게 유발된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히틀러주의자들과 연계된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인민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야기된 기근이라는 흑색선전의 주제를 이미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러한 흑색선전은 독일과 우끄라이나 나찌가 자행한 야만적인 범죄를 은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보정되었는데, 이것은 파시즘을 보호하고 공산주의에 맞서 서방 세력의 힘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1950년대 초 이래로 600만 유대인이 전멸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 세계적인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세계의 우익 세력은 공산주의 테러에 의해 야기된더 많은 수의 사망자 숫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맥카시즘이 활개친 해인 1953, 20년 전 의 우끄라이나에서의 사망자 숫자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과학적, 계획적 그리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우끄라이나 인민의 몰살또한 냉혹하게 자행된 대학살의 형태를 띠어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격렬하게 부인하는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대학살을 조작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한 꿀락들과 짜리즘을 그리워하던 반동 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내전으로 촉발되었다.

 

프레드릭 슈만(Frederick Shuman)은 기근 동안 여행객으로서 우끄라이나를 여행했다. 그는 윌리엄 대학의 교수가 되자, 1957년에 쏘련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19321933년의 우끄라이나 기근은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반대파(꿀락)는 그들의 소와 말들을 집단소유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하는 방식을 초기에 취했다. 그 결과 쏘비에뜨 농업은 통탄할 만한 타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와 말들을 꿀락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쏘련에서 말의 수가 거의 3,000만 두에서 1,500만 두 이하로, 뿔 달린 소의 숫자는 7,000만 두(젖소 3,100만 두 포함)에서 3,800만 두(젖소 2,000만 두 포함); 양과 염소는 14,700만 두에서 5,000만 두로, 돼지는 2,000만 두에서 1,200만 두로 감소했다. 쏘비에트의 농촌 경제는 1941년 무렵까지 이러한 치명적인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 몇몇은[꿀락들은] 관리를 살해했고, 집단농장의 재산에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수확물과 종자까지 불태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파종과 수확을 거부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국이 양보를 하거나 어차피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행동을 하였다.’

그 여파로 1932-193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이 닥쳤다.... 독일에서는 나찌 출판물에 그리고 미국에서는 허스트 출판물에 등장한, 대부분 허구인 무시무시한 서술에는, 1921년 볼가 지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밝혀진 사진이 종종 예시된다. .... 일본에서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명백하게 야기된, 1932년 봄의 특별 징발로 인해 종자와 수확물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그 후반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농장에 파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수확물을 불태운 꿀락들이었다.’39)

 

이러한 목격자의 진술이,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1918년 뻬뜨리우라(Petliura)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이삭 마제파(Issac Mazepa)가 쓴 1934년 기사에서 증명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우익이 1930-1932년 동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처음에는, 꼴호즈들에 대한 방해공작이 자행되었고 공산당 관리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살해당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끼의 파종과 수확 계획을 조직적으로 좌절시키는 데 목표를 두는 소극적인 저항 방식이 선호되었다.... 1932년의 대재앙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가 1921-1922년의 기근 이래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재난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전체 농지에 파종이 안 되었고, 게다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 ...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지방에서 20%, 40%, 심지어 50%가 토지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리고 전혀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탈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40)

 

두 번째 기근의 이유는, 1930, 1931, 1932년에 우끄라이나 특정 지방에 닥친 가뭄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끄라이나의 우익 노선을 옹호하는 제임스 E. 메이스 교수에게는 그것은 쏘련 정권이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 스스로가 우끄라이나의 선구적인 역사가로서 묘사한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 그의 책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1932년 상황을 서술하면서, ‘혼란스러운 농업 상황에 또 다시 가뭄까지 겹쳤다.’라고 말했다.41) 하버드의 러시아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니콜라스 리아스노프스키(Nicholas Riasnovsky) 교수는 1931년과 1932년에 가뭄이 있었다고 썼다. 내전기간 동안 볼셰비끼에 대항해 싸웠던 미카엘 플로린스키(Michael Florinsky)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301931년의,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심각한 가뭄은 농업상태를 악화시켰고 기근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었다.’42)

 

기근의 세 번째 요인은, 우끄라이나와 북 코카서스를 황폐화시킨 장티푸스 전염병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도시 계획가이자 캐나다 훈장을 받은 한스 블루멘펠드 박사(Dr. Hans Blumenfeld)는 기근 시기에 우끄라이나 마카예프카(Makayevka)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는 그들의 숫자를 추정할 방법은 없다.... 아마도 1933년의 대부분의 죽음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마카예프카에서 수인성 질병은 흔한 것이었다: 나는 티푸스 열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43)

 

기근 동안 1500만 명의 말도 안 되는 수치 19322,500만 명의 우끄라이나인구 중 60% 를 제시했던 인물인 호슬리 그랜트(Horsley Grant)는 그와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발진티푸스 전염병의 절정은 기근과 일치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죽음을 야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4)

 

네 번째 기근의 원인은, 농업의 재편성 과정과,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근본적인 대격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질서였다: 빈곤한 농민들과 일부 관리들의 경험부족, 즉흥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시들, 준비부족, 좌익 급진주의.

 

기근으로 인한 100만에서 200만의 사망자 수치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은 주로, 사회주의 기초 위에서 농업의 재조직과 현대화에 대한, 착취계급의 지독한 저항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계급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딸린과 사회주의에 지우려고 한다. 100만에서 200만이라는 수치는, 여덟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간섭과, 그들이 반동 무장 단체에 제공한 지원 때문에 본질적으로 초래된, 19211922년 기근에서 발생한 900만의 죽음과 또한 비교해 보아야 한다.

 

기근은 1933년 수확 이전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해 수확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쏘비에뜨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봄에 3,500백만 푸드(pood 러시아 무게 단위)의 종자, 식량 그리고 사료가 우끄라이나로 운송되었다. 꼴호즈의 조직화와 경영은 향상되었고 수 천 대의 추가적 트랙터, 복식수확기, 트럭이 수송되었다.

한스 블루멘펠드(Hans Blumenfeld), 그의 자서전에 우끄라이나 기근 동안의 그의 경험을 요약해서 적었다: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기근은 일어났다). 먼저, 내가 북 비야트카(Vyatka)에서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던, 덥고 건조한 1932년의 여름으로 인해 남쪽에 있는 반()건조 기후지역에서 수확이 실패했다. 둘째로, 집산화를 향한 투쟁이 농업을 혼란케 했다. 집산화는 관료의 지배를 따르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빈농의 활동으로 이루지고 당에 의해 고무되었다. 빈농들은 꿀락들재산의 몰수는 열망했으나, 협동적인 경제조직을 구성하는 데에는 열의가 덜 했다. 1930년 무렵에 당은 이미 과도함을 저지하고 교정하기 위해 당 간부들을 파견했다.... 1930년 한 번 저항을 경험한 후 당은 1932년에 다시 돌진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그 해에 쿨락 경제는 생산을 멈췄지만, 새로운 집단 경제는 아직 완전한 생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불충분한 생산품은 가장 먼저 도시 공업과 군대로 보내졌다; 왜냐하면 농민들을 포함해서 연방 전체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거의 불가능했다....’

 

‘1933년에는 강수량이 적절했다. 당은 가장 우수한 간부들을 파견하여 협동농장의 조직화 업무를 도왔다. 그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수확 이후, 상황은 철저하게,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호전되었다. 나는 성공할지 여부가 불확실한, 무거운 수레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1933년 가을에, 우리는 정상에 올랐고 그때부터 우리는 가속을 붙여 전진할 수 있었다.’45)

 

한스 블루멘펠드는 기근이 또한 러시아의 볼가 하류지역과 북 코카서스 지방에 피해를 줬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반우끄라이나 대학살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대학살과 같은 종류라는 사실의 그릇됨을 증명한다. 그 당시 쏘련의 절망적인 인적자원 부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쏘련의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부족한 자원을 감소시키려 했다는 개념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 콘퀘스트가 이용한 파시스트 자료

 

비탄의 수확에서 결정적인 부분인 12장의 제목은 기근이 창궐하다이다. 이 부분에는 인상적인 237개의 목록을 이루는 참고자료를 포함한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참고자료의 반 이상이 극우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끄라이나 파시스트 도서인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은 쉰다섯 번이나 인용되었다! 콘퀘스트가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과 미국 비밀 정보국에서 제공한 역사서를 이용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같은 장에서 콘퀘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파시스트 조직의 청년운동에 의해 1953년 출판된, 올랙사 우로페이(Olexa Woropay)가 쓴 아홉 번째 원(The Ninth Circle)의 내용을 열여덟 번이나 인용한다. 저자는 1930년대 동안의 자신의 구체적인 일대기를 보여주나, 그가 나찌 점령 기간 동안 뭘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나찌에 참여한 과거가 가까스로 덮였다. 1948년에, 그는 많은 우끄라이나인 파시스트가 도피처로 삼은 뮌스터(Muenster)에서 다시 자신의 전기를 썼다. 그가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대학살에 대해 우크라이나인들과 대담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어떠한 목격자(그 실체가 역자) 확인되지 않았기에,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책은 가치가 없다. 그가 전쟁 동안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보아, ‘스딸린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이들은 아마도 도망간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이었을 것이다.37)

 

허스트의 1930년대 친나찌 출판물을 위해 글을 썼고, 후에 반아메리카 활동에 대한 냉전 맥카시주의 의회 위원회에 협력했던 빌(Beal)은 다섯 번 인용되었다.

 

반공주의 망명자인 크라브첸코(Kravchenko)는 출처 제공자로 열 번 나왔다. 또 다른 러시아 망명자인 레프 코펠레프(Lev Kopelev)는 다섯 번 나왔다.

 

포함된 과학적참고자료 중에는 바실리 그로스맨(Vasily Grossman)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는데, 콘퀘스트는 그것을 열다섯 번이나 참고문헌으로 이용했다!

 

그 다음에, 콘퀘스트는 하버드의 망명자 대담 사업(Refugee Interview Project)에 있는 회견 내용을 인용했는데, 그 사업은 CIA가 재정 지원을 하였다. 그는 이왈드 아멘데가 쓴 1935년의 나찌 서적뿐만 아니라 맥카시 시대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국회 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했다. 콘퀘스트는 또한 유진 라이온과 윌리엄 챔벌린의 주장도 다섯 번 언급했데, 이 두 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CIA의 중앙 유럽 라디오 네트워크 조직인, 자유 라디오 이사회의 임원들이었다.

 

244쪽에서 콘퀘스트는 이렇게 썼다.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한 미국인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너절한 무엇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1933228일자 New York Evening Journal이 라고 되어 있다. 사실 그것은, 1935년에 발행된 허스트 신문에 발표한, 토마스 워커의 기사였다! 콘퀘스트는 이 기사를 1933년의 기근과 맞물리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문의 날짜를 앞당겼다. 콘퀘스트는 미국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누군가가, 토마스 워커가 한번도 우끄라이나에 들어간 적 없는 사기꾼이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낼까봐 염려했다. 콘퀘스트는 위조자였다.

 

거짓 풍문을 기록한 망명자들이 쓴 서적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콘퀘스트는 그래서 진실은 오직 소문에서 걸러질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절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좋은 출처는 기본적으로 풍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38) 이 진술은 파시스트 비방, 잘못된 정보와 거짓에 학문적인 신뢰성을 부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