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밝혀지다 -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3판 노동자 교양문고 3
마리오 소사 지음, 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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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운동권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Mario Sausa)의 책인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서적은 대체로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다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필자로선 이 책의 부제목이 끌려 읽고 싶었었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목차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편은 수용소 군도의 저자인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같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에 대해 비판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략 600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반박과 대략 12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진 소련의 굴라그(Gulag) 수감자 수치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스탈린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수치에 대한 반박이 담겼다. 이 책의 마지막인 3편은 영국 보수주의자이자 군사 전문가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대한 비평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2편의 경우는 필자의 주관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즉 책에서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얘기하듯이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치과 서방에 의해 과장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3편에서 다른 스탈린그라드 비평은 필자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앤토니 비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감안했을 때, 서구식 반동주의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군인이자 보수주의자이기에 당연히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파트와 가장 많이 호감을 표했던 파트는 제1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홀로도모르는 절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고,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소련의 농업 조건도 한몫했다. 거기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는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내전을 치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방 학자들이 출처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상자 수치는 사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반공성향이 강했던 영미권 언론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마치 1990년대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대다수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미제와 서방 언론들이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날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아사자 수치는 과장됐고,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소련의 까다로운 농업 조건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편에서 지적한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수치도 마찬가지다. 솔제니친과 로버트 콘퀘스트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굴라그 수감자가 대략 900만에서 1200만 명 혹은 많게는 2000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스탈린시기 가장 많은 수감자 숫자는 최대 250만 명이었다. 이는 순수히 굴라그 사용자만 포함된 것이 아닌, 감옥 및 교도소 그 외의 잡범들이 수용된 수치를 얘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의 30%가 굴라그에 수용됐다느니 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고 날조라는 것이다. 굴라그를 언급하며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 및 감옥 수감자의 수치를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한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 55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소련에서의 최대 굴라그 및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도 30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치였다. 책에선 언급 안 했지만, 필자는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하는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KKK같은 인종 혐오 단체들이 미국을 돌아다니며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으며 산사람을 산채로 태워 그 유골을 기념품으로 갖는 린치 따위 행위를 20세기까지 남부에서 하도록 방조한 미국 정부가 과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말이다??

 

물론 필자는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 중에는 분명 무고한 사람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악마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기 8시간 노동제를 1930년대 초중반까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스탈린은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이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나는 행보다. 당연히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탈린이 대다수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1930년대 소련의 대학진학률과 극적인 문맹률 감소 그리고 노동자 연금 제도가 입증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소련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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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1941년과 1942년까지는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1년 10월에서 1942년 1월까지 전개된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과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더 이상 소련 영토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전황을 다시 한번 바꾸기 위해서 또 다른 공격 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쿠르스크에서의 대반격이었다.

 

2. 양측의 전투 준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평원에 있는 전차들)

 

그리하여 독일군 총사령부는 1943년 4월부터 대대적으로 전투를 준비하며 작전명 ‘성채’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1943년 7월 독일군은 쿠르스크 지역의 북쪽과 서쪽 양 방향에서 중앙부대와 남쪽 부대를 중심으로 대략 43만이나 되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독일군의 준비가 길어지면서 소련군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시 소련군 진지의 중핵은 대전차 방어에 있었고, 독일군과 대치하는 소련의 모든 전방 중대는 적어도 3문의 야포와 9문의 대전차포 및 1대의 전차 혹은 자주포가 할당되었으며, 방어 구역 내에 전투 공병 소대가 배속되었다.

 

소련군의 자료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 이전에 소련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에는 대략 100만 이상의 병력과 13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200대 이상의 탱크와 자주포가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43만 명의 병력과 996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탱크와 돌격포 3155문을 전선에 배치해 놓았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추가적으로 44만 명의 병력과 6500문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15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배치했고, 그 결과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병력에서는 3 대 1, 주요 장비 면에서는 1.5 대 1의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는 앞으로 치르게 될 전차전에서 또 다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88밀리미터의 포를 장착한 신형 전차 포르셰 티거가 투입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3. 쿠르스크 전투의 전개

 

1943년 7월 초, 쿠르스크의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이미 정찰 보고서를 통해 몇 시 몇 분에 공격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군은 독일군이 공격하는 시간보다 30분 앞서서 독일군의 모든 집결 예정지를 향해 선제 포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었던 티거 전차. 당시 티거 전차는 소련군의 주력 전차인 T-34를 혼자서 10대를 격파하는 일도 있었다.)

 

선제 포격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잠시나마 지연시키긴 했지만, 7월 6일 저녁이 되자 독일군이 북쪽과 남쪽 양 방향에서 소련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5일 뒤인 7월 12일 소련군 병력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쿠르스크 전투가 진행되던 1943년 7월 10일 영미 연합국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에겐 또 다른 부담이 생겼고, 소련도 7월 13일 쯤에는 영미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한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성채 작전’을 중지시켰고,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보냈다.

(보병과 함께 진격하는 소련의 T-34 전차)

 

1943년 7월 12일 소련군은 세심하게 준비해 왔던 전략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쿠투조프>라는 작전명으로, 우선 쿠르스크 돌출부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오룔 돌출부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최종적으로 중부 전선군까지 동원된 이 공세로 인해 독일군은 균형을 잃고 말았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7월 14일부터는 실질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에 공세를 게시한 소련군은 결국 오룔에 들어갔고, 오룔에 들어간 제3 근위 전차군은 8월 5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은 8월 5일까지 자신들의 이름에 해당하는 도시로 접근해서 독일군 방어 병력을 일소했다.

(포화속에서 진격해나가는 소련군)

 

돈바스 지역을 목표로 진군하는 소련군에 위협을 느낀 독일군은 오룔에서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돈바스 지역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꺾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군은 예전의 소련군이 아니었다. 투입된 독일군이 8월 6~7일 사이에 한 것은 소련 제40군이 가한 주공 방향 서쪽의 제2차 공격을 저지한 것 정도였다. 1943년 8월 11일에는 소련군 전차 군단이 독일 SS 기갑 사단과 보고두호프 일대에서 격돌했다. 여기서 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진 것이다.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43년 8월 23일 소련군이 하리코프 지역을 되찾으면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4. 결과 및 의의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처음으로 소련군의 돌파 부대를 격파하지 못했던 전투이자, 독일이 동부 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전투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그런 기회를 제공했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등의 지휘관들이 더 체계적으로 군사 전략을 만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일군의 마지막 반격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전투다.

(쿠르스크 전투를 묘사한 그림)

 

물론 소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독일군의 탱크 손실이 1000대 이상이었던 데에 비해 소련군은 7000대 이상이나 되는 탱크를 전투에서 잃었다. 그 이유는 포르셰 티거(혹은 6호 전차)와 같은 독일의 신형 전차가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의 티거는 혼자서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10대 이상 격파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상술했듯이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쿠르스크 전투가 있었기에 소련군은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1944년 6월에서 8월에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동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그리고 수많은 소련의 병사와 인민들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였다.

 

5. 참고 문헌


독소전쟁사, 데비이드 글랜츠 저, 권도승 역, 2007

러시아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저, 느낌이있는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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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그 V. 흘레브뉴크 지음, 유나영 옮김, 류한수 감수 / 삼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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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의 박정희 처럼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는 1920,30년대 공업화 시절의 경제개발과 2차대전에서의 승리 기여 대한 호평과 1930년대 그가 단행한 대숙청과 공업화 도중 생긴 우크라이나 대기근 혹은 홀로도모르에 대한 혹평으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그가 당내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거창하게 단행한 경제개발 5개년은 눈부신 성장 및 소련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물론 그와중에 무자비하게 실행한 강제집단 농장으로 인하여 홀로도모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최소 300만 이상이나 되는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을 시작으로 전개된 대숙청으로 인하여 1936년 부터 1938년(혹은 1939년)까지 대략 75만명이 3년 동안 처형당했다. 또한 연해주에 살고 있던 수십만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오직 대숙청과 홀로도모르 그리고 개인 독재만 가지고 스탈린은 평가하면 그는 히틀러 못지 않은 독재자이자 폭군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스탈린 집권 시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기 소련이 미국과 견줄 수 있는 강대국의 위치로 올랐고 1938년 시점에는 경제 규모로만 보면 2위까지 성장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그 이전의 러시아 현대사를 안다면 실로 경이로운 성장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백군 반혁명 세력이 일으킨 적백내전을 겪은 사회주의 러시아는 매우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렸었다. 그 시기 러시아에선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였다. 즉 그러했던 소련이 스탈린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한 것이다. 거기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이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휘청거릴 시기였음에도 스탈린의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대략 90%를 넘던 문맹률은 1%까지 줄어들었으며, 중공업 위주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련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스탈린은 일반 노동자들에게 주거와 의료, 교육을 보장해주었다. 그 당시 스탈린이 만든소련의 복지제도가 매우 훌륭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1970년대 자본가와 대기업 위주로 성장을 주도하며, 일반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인 복지마져 제공치 않던 박정희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어 소련에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월경휴가가 제공되었지만, 박정희 정권 시기 노동자들에겐 아니었다. 따라서 스탈린 소련의 복지 정책은 매우 훌륭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소련은 엄청난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인권탄압과 억압 그리고 착취가 있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위에서 상술한 대숙청 시기 있었던 무자비한 숙청이나, 정적탄압은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보았을때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 더불어 시대적인 상황도 감안하고 봐야할 필요도 있다. 스탈린이 경제개발 5개년을 실행하던 1931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1938년에는 노몬한과 하산호에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유럽 정복에 대한 야욕을 들어냈다. 이처럼 소련의 안보는 위태로웠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런 상황에선 그의 공업화 정책은 불가피 했던 측면이 있고, 그 공업화 정책은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는데 이바지 했다. 여기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다. 1950년대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하등 다를게 없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혹은 홀로도모르는 농업 조건이 매우 열악한 소련 상황에서 일어났고,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고립속에서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세력들을 탄압하면서 일어났다.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력이 매우 열악한 소련이 공업화를 추진하여 생존하려고 하다보니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경신 대기근을 가지고 효종을 대학살자로 몰 수는 없듯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바람직한 평가라 할 순 없다.

필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평가할때 업적과 과오를 보려고 하는 쪽이다. 필자 또한 과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매우 싫어했지만, 최근들어 다시 공부하면서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읽은 전기가 올레그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다. 책은 제작년 12월에 읽었다. 우선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냉전이후 공개된 동구권 기밀자료들을 많이 참고했고 주로 새로 나온 자료들을 참고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나름 높게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 러시아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스탈린과 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평가에 대해 비판적으로만 보려했다. 따라서 저자는 스탈린 신화를 비판하기에만 급급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공업화와 2차대전 승리 기여에 대한 최소한의 긍정적인 평가를 단 1% 조차 하지 않았다. 차라리 영국의 반공적인 보수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집필한 스탈린 강철 권력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 처럼 보일 정도로 이 책은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을 읽을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할 부분이다. 예를 들면 반공학자인 서비스도 그의 공업화가 소련 생존에 필요했고, 나름의 업적이라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이 평전은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의깊게 읽은 부분은 1930년대 소련이 2차대전으로 가는 상황과 독소전쟁 (특히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공방전 과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파트였다. 물론 이 책에선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의 행적을 비판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기에,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필자로선 읽기 불편했던 점이 적지 않다. 분명한 것은 스탈린에겐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확실히 있다.

이 책은 과거 소련시기 만들어진 스탈린의 신화와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주의해서 읽을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동지들 중엔 필자의 의견과 맞지 않는 동지들도 분명 적잖게 있을 것이다.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든 비판하든 간에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라면 필자는 얼마든지 환영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최대 업적인 공업화와 반파시즘 전쟁 승리기여를 무조건 부정만 하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특히 2차대전 공로를 부정하려는 자)에 1도 동의 할 수 없으며, 이를 뼈속부터 친일 앞잡이이자 천하의 간신배인 박정희 따위하고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려는 입장 또한 동의할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을 당연히 부정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고, 다른 책을 추천해줄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스탈린 전기로는 추천해줄 것이 없다. 따라서 필자가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다.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2차대전 당시 스탈린과 주코프 같은 명장들 그리고 소련의 공로가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고, 소련군이 히틀러 파쇼무리들의 침략에 맞서 어떻게 영웅적으로 투쟁했는지 알 수 있는 명저다. 물론 글랜츠 또한 미국인이기에 아주 약간은 서방식 논리가 책에서 보이긴 하지만, 소련군의 공로를 재조명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명저다. 스탈린을 알고 싶으면 먼저 독소전쟁사를 읽은 다음에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전기를 읽고 그 다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앞으로는 스탈린에 대해 좀 더 균형 있는 책이 출판되길 기대하며 다시쓰는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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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네im 2019-07-10 0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놈아 이를 뼈속부터 친일 앞잡이이자 천하의 간신배인<<< 일제시절 일본군지원??
나라를 빼앗긴 원인 군사력의부재를 몸으로 익혀 민족의자산이 되었으면 되었지
훗날 여기서 배운 군사학으로 북한군동향 확인해 남침한다는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애국자였어

재임시절로 따지면 더더욱 일본이 싫어하는 결과를 만들었어
65년에 일본에 받은 5개국(월남.인도네시아.미얀마.필리핀.한국)중에서
가장 최고로 잘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대외경제연구원 연구결과)
선진 일본기업들의 기술-자본을 들어오는데
일본인 기술자들 초빙해 지도를하고 수출공업화에 촉진하게해
오늘날 포스코-삼성 등이 50년전에 전수해준 일본기업들 추월한 극일을 이룩한
초일류 애국자였어

국가경영능력과 리더쉽의 결과가 낳았으며 너놈이 3만달러시대에 키보드질하는것이야

오히려 되도않는 위안부타령해 도가지나친 반일을 고취시켜 경제제재나 받으며
적국인 북-중과 맞서야하는 구도인데 지나친 반일로 미국은 미일안보조약 없애고
자국의 부담을 덜수있을정도로 중국에 맞서는 군사강국으로 리미터해제를 하게 만들었어
오버지면은 핵무장까지 허용 할 수 잇어
이건 중국탓이 근본적이지만 문재앙이가 부채질한거야
폐허에서 40년만에 미국과 동등한 선진국에 진입하게 한
김성주와 함께 최악의 뼛속까지 친일간신배 아니던가

세계대전에서 이길수있는 기반을마련한 공업화긍정을 넘어가도
국가전복가담자에 타살당한 22세 고액연봉자 어쩌고 지랄터더니
최소한 수백만명 아사하고 수많은 농촌인들을 제정러시아를 오래도록
좀 먹은 농노제를 부활해 무수한이들 빈곤으로 몰고간 새키를
자칭 사회주의자로서 더욱 높이 평가하는것은 앞뒤가 안맞는 모순아닌감

국내 토착좌빨들의 끊임없는 국가전복시도검거 간첩검거에
적장이 파견한 자객에 부인을 잃고 남북간 총격전이 매일 벌어지던 비상전시상황에서도 국회의원선거가 지속되어 야당이 40%이상 차지해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한 개발도상국으로선 의회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지켰어 72년 유신개헌때 그는 장제스나 중국처럼 완벽하게 국회를 장악하는 일당제를 하였는데도 국민의사를 존중하였다는 것이지

이런 악조건속에서 연평균 10%경제성장으로 물가반영된 실질소득이 4배증가해
사회가 완전한 뒤바뀐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 가히 이런조건에서 성공한 리더는 없었어

붉은까마귀 2021-08-13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탈린 시기 공업화의 부정적인 부분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이라는 책을 읽으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Welfare system of Soviet Union)

1. 소련의 교육체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소련에서는 공부를 하는 동안 학생들간의 경쟁이 없다. 왜냐면 자기 능력에 따라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되니깐. 교육시스템은 10년간 무상이고, 대학교를 가더라도 대학 교육도 무상이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 일종의 수당같은 것을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데 한 달에 40루블씩 지원받는다. 이 금액이 얼마냐면 대학 기숙사 비용이 1년에 24루블이다. 24루블만 내면 모두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데, 그만큼 많은 돈을 수당으로 지급받았다. 대학이나 직업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무조건 모두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졸업 후 3년 동안은 같은 직장에서 일해야 하고 3년 지나면 자유롭게 원하는 직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2. 소련의 노동과 복지

노동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냐면 노동은 의무이자 권리였다. 누구나 일을 해야 하고 또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연금 수급 연령은 여성 55세 남성 60세, 주5일 주40시간이었고. 모성보호도 있어서 임신 여성은 야간 노동이 안되고.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유급이었다. 광산노동 등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퇴직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다.

출산휴가도 보장되어 있는데 유급으로 18개월 보장돼 있다. 출산휴가 끝나면 당연히 원래 하던 일로 복귀가 가능했다. 임금도 노동자, 관리직, 기술직의 구별 없이 비슷하게 지급받았다. 야간, 휴일노동은 강제로 하는 경우가 없고, 하겠냐고 요청 받고 동의해야만 하고, 할 경우에는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된다. 야간은 50%, 휴일노동은 2배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노동조합도 있었다. 근데 자본주의 사회의 노조랑 차이가 있는데. 노조의 기능이나 역할이 뭐였나고 하면, 현장에서 노동조건을 감시하거나 아니면 의료공제라는 걸 자체적으로 하거나 아이들을 모아서 여름캠프 보내거나 상조조합을 운영하거나 하는 형태였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적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떤 공장에 관리자나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존중 받고, 똑같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형태였다. 큰 회사의 경우 사택 같은 걸 지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의 3~4%를 지불하고 모든 것들을 공짜로 이용했다. 중요한 건 회사에 일하는 동안 거주를 할 수 있는 곳이지 주택을 팔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회사 안에는 스포츠시설도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서 구내식당 식재료로 공급했다.

일이 끝나면 노동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엔지니어가 관리자가 되고 싶다면 그룹을 지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걸 발명하도록 장려 받았는데 카피라이트 시스템과 다르게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새 기술을 발명하면 각 공장끼리 교류하고 공유하면서 더 발전해 가는 시스템이었다.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쌌고, 약국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급됐는데. 아이들 의복에 대한 보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도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린아이 의복비가 어른들 만큼 나가는 거 보고 매우 놀랐다.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58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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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자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러시아 제국은 1890년대에 이르러 세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 추세와 연관하여 큰 변화가 일면서 자본주의적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면서 농업 국가 러시아에선 새로운 사회계급이 대두되었는데, 그게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도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업환경 속에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파업과 투쟁을 이어나갔지만, 차르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부터 러시아에서는 차르 체제에 맞선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05년 1월 9일 대략 2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차르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차르 정부는 총으로 무장한 근위병들과 코사크 기병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게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러시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노동자 파업 및 투쟁은 더 격해졌다. 그해 10월과 12월까지 대략 50일에 걸쳐 20만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러시아 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모스크바에서는 12월 무장봉기로 경찰국가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확실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며 노동자들이 지침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자 차르 정권은 이를 진압하여 수많은 노동자를 살해했다. 따라서 1905년에 일어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1905년 혁명은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차르 정권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다시 한번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투르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의 허황된 꿈인 ‘슐리펜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장기전에 돌입했고, 점차 참호를 중심으로 한 장기전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에 맞서 전쟁을 치렀는데, 독일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측의 경제난은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의 지주와 자본가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17년에 일어난 2월 혁명이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시위를 시작으로 수많은 민중이 혁명에 동참했다. 물론 차르 정부가 발포를 명령했기에 그 과정에서 대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민들을 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거리로 나와 총과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했고, 시위 시작 5일째 되던 날 니콜라이 황제는 자진사퇴 하게 되었다. 이로써 차르 체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는 케렌스키와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새로운 임시정부는 분명 부르주아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농촌 혁명을 부르짖던 사회혁명당 계열의 일부 인사들과 멘셰비키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민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러시아 민중이 간절히 원했던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에서 무모한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수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1917년 4월 3일 볼셰비키당을 이끌던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레닌은 전차 위에서 열 번을 토했고, 다음날인 4월 4일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4월 테제다. 레닌의 ‘4월 테제’에서 “즉각적인 전쟁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국제혁명조직 창설” 등을 주장했다. 돌아온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을 준비하던 중 레닌의 예상보다 빨리 민중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그게 바로 7월 봉기다. 그러나 그해 일어난 7월 봉기는 임시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이 때문에 레닌 또한 러시아를 잠시 떠나야 했다.

당시 핀란드로 도망간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는데, 그해 8월 러시아에선 반혁명의 시도가 일어났었다. 그게 바로 코르닐로프의 반란이다.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일어나자,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병사들이 코르닐로프의 반란 진압에 동참하면서 반혁명은 무마되었다.

이런 가운데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민중들 사이에 혁명의 기운이 치솟음을 깨닫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다시 내걸며 혁명을 준비했다. 10월 초 레닌은 핀란드 은신처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무장봉기의 준비를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준비를 마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중심 지역에서 전함 오로라호의 발포와 동시에 반혁명파들을 분쇄했고, 10월 26일 겨울 궁전까지 접수하면서 수도에서의 봉기를 완료했다. 10월 26일 레닌은 즉각 ‘평화에 대한 포고’,를 시작으로 ‘토지에 관한 포고’와 그 외의 포고령을 발포했다.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은 단기간 동안 맞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초창기 볼셰비키 러시아에선 지주의 모든 토지가 몰수되어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악법은 폐지되었고 혁명 이후로 인종차별이 웬만큼 사라졌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심지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또한, 여성의 보육을 담당해주기 위한 탁아소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빠졌다. 이렇듯 레닌과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은 많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통해서 성취해낸 결과물이었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진보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실행시킨 위대한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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